마리아와 마르타는 자매로 예수님을 자신들의 집에 모셨다.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도 필요하겠지만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좋은 몫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율법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의 행위는 어제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오늘의 복음의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에서 드러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르타의 봉사 활동이 의미 없는 것이라기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봉사는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에 쫓기다 보면 기도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뒷전으로 미루어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길을 가고 있는데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이 특별히 유념해야 할 점입니다.
참되게 하느님을 섬기는 길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홍수처럼 쏟아지는 차량 속에서, 날만 새면 생겨나는 빌딩 속에서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육체가 성장하면 영혼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몸의 요구는 채우면서 영의 목마름을 외면한다면
영적 갈증은 당연합니다.
불안과 초조가 그것입니다.
때로는 허무감이요
때로는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갈증을 채우려 본능에 탐닉하고 재물에 젖어 듭니다.
세상이 폭력과 환락으로 얼룩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갈증은 여전히 남습니다.
몸의 갈증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끔은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조용히 있을 줄만 알아도 ‘갈증의 늪’은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해도 ‘영적 목마름’은 멀리 느껴집니다.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귀한 삶을 받았습니다.
조용히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때때로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 주님의 은총을 묵상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10,42)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리고 목마른 우리에게
육신의 음식도 소중하지만
풍성한 말씀의 식탁을
차려주시는 분의
영적인 음식은 더 소중하다네.
놀랍게도 마리아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식탁으로 나아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진리의 빵을
받아먹고 있지 않은가.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