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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게시판 스크랩 고대 중국북방 민족의 역사를 빼고는 중국의 역사는 반도 안된다(3), 거란의 요제국..
나비우스 추천 0 조회 716 18.07.09 09: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대 중국의 북방민족 이야기 거란(契丹)

 

거란(契丹)의 한자 표기는 보통은맺을 계(), 붉은 단()”으로 읽고 쓰는 한자이지만, 민족 명칭으로서는契丹-계단이 아니고 거란이라고 읽고 써야 한다. 왕조로는 요(, )나라이다. 이 요() 자는 멀다는 뜻인데, ‘ 아니라이고, 중국의 현대 간체자로는라고 쓴다.

 

거란과 요()나라는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으로는 북방 오랑캐의 한 부족이고 고려 때 거란의 침입과 강감찬 장군과 서희의 빛나는 전공만을 얼핏 기억할 뿐 꽤나 낯선 역사이다.

거란은 요()나라라는 왕조 명으로 한 글자로 압축되는 동아시아 최초의 정복왕조(征服王朝) 이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라는 맥락에서 보면 최초의 성공적인 정복왕조였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거란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생각해 보려면 흉노와 선비를 되새겨봐야 한다.

 

흉노는 한나라와 사생결단의 전면전을 벌인 끝에 양측 모두 쇠락하면서 끝내 멸망했다. 다음 북방의 대표자 선비족은 북중국에 대한 정치군사적인 통합을 기반으로 혈연적 문화적으로까지 융합시켜 결국 융합(북위 -> 수나라)에 의해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국가 당나라를 일궈냈다.

 

북방의 세 번째 대표자는 거란이다. 그들은 흉노의 약탈과 진. 한나라와의 전면전과 선비의 호한융합(胡漢融合)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개척했다. 바로 중원정복과 경영(征服經營)”이었다. 북방을 통일한 다음 남방(漢族)을 정복해서 남방(漢族)과 북방을 동시에 경영한다는 정복국가 계획을 세웠다, ‘거란왕조의 역사만 따져서 915년부터 1125년까지 211년 동안 북중국의 패권을 휘둘렀다. 결코 한낱 오랑캐 수준이 아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하지만, 우리(高麗)의 역사나 당시 중국()의 역사는 그들을 일게 북방 오랑캐정도만 생각해 왔다.

 

그들이 거친 북방에서 강력한 국가로 발흥한 과정에서도 그들이 세운 왕조가 급작스럽게 망한 과정을 보면 21세기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생각해야 할 말없는 교훈이 담겨있다.

 

우선, 거란이라는 족명(族名)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거란은 契丹이라고 쓴다. 분명히 한자로서는 새길 [] +  붉은 []인데 거란이라고 읽는다.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는 “qidan”이고, 이 중국 발음을 우리말 표기로 하면 치단이다. 이 말속에는 고대 북방언어의 한자 표기와 중국어의 변천 우리말과 중국한자 사이의 음독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당시에 거란이란 족명(族名)을 표기하면서 자신들의 한자 가운데 가장 유사한 발음의 한자를 가져다가 契丹으로 기록했다.(우리나라로 말하면 이두법 정도)

 

그럼 契丹 당시의 중국()의 발음은 어떻해을까?

 

송나라 때에 편찬된 중국어 발음 자전인 (집운(集韻)에 의하면 발음은 기흘절(欺訖切)이며, ‘ 다한절(多寒切)’이라고 돼 있어있다. 기흘절(欺訖切)이란, (=qi=)의 앞부분 발음과 (=qi=)의 뒷부분 발음을 합친 것이니 곧 (qi=)라는 말이고, 다한절(多寒切) 역시 (=duo=)(=han=)의 발음을 반반 합친 것이니 (dan=)이란 설명다.

 

그런데 이 집운의 발음 해설을 우리말의 한자 독음으로 읽으면 다른 발음이 된다. ‘ 기흘(欺訖) 반절이니 (=) + (=) = []이며, () 다한(多寒) 반절이니 “(=) + (=) = 이다. 고로 契丹( + = 글안 또는 글단)인 것이다. 이 발음이 글단 또는 글안거란으로 음운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결국 한자라는 문자의 표기는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契丹) 그대로이지만, 그 발음은 중국에서는 큰 변화 없이 “qidan=치단이고 우리말에서는 음운변화를 거쳐 (거란)이 된 것이다. 한자를 공용으로 쓰면서 각기 다른 발음으로 읽어서 생기는 복잡함이 일어 킨 결과물이다. 

 

한편 이 (契丹=치단)이라는 발음은 러시아어에서 키탄또는 키타이등으로 전사되어 서양에 전해지고, 그것이 오늘날 케세이(Cathay)”란 말로 남아서 중국을 칭하는 말의 하나로 사용한다. 홍콩의 항공사에 케세이 퍼시픽이있는데 케세이가 바로 치단-거란에서 나온 바로 그 말이다.

 

중국이 아닌 외국에서 중국을 칭하는 말이 몇 개 있다. 차이나(China)는 진시황의 진(=qin=)이 인도를 거쳐 서양에 전해지면서 오늘날의 china로 이어졌고, 당나라 시대에 유럽에서 중국을 부르는 말이 (타브가치)는 선비족 탁발(拓跋)=tuoba”씨에 나온 말이다. ‘케세이거란에서 기원한 말이다.

 

중원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도 중원에서 보면 서쪽 오랑캐의 일원인 서웅(西戎: 현재 중국산시성 일대)”쪽이었다. , 크게 보면 중원의 서쪽의 부족들도 북방민족들에서 파생된 족속(族屬)들 중 하나였다. 그 다음 탁발선비(. -. )와 거란()이란 말이 그대로 중국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를 종합해봐도 동아시아 역사가 한족이라고 말하는 지금의 중국인들 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가?

 

거란(契丹요나라)916년 건국을 하여 1125년 멸망까지 210년의 존속하였다. 초대황제 야울아보기(耶律阿保機)에서 송과 금나라의 협공으로 요나라가 멸망하는 9대 마지막 황제 야유연희(耶律延禧)까지 송나라와 더불어 중국 땅을 이분하였다.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지역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었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그들은 일찍이 고구려의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되었다. 이후 거란은 각각 중국()과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에 복속되었다.

 

AD 907야율아보기는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고 발해(渤海)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그들은 거란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요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이때 요나라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 이후 서요는 징기즈칸에 의해 멸망한다.

 

 (中華人)들이 말하는 중국 본토의 주인은?

 

중국에 최초의 역사적 왕조는 ()나라 즉, ()나라. (BC 1600년경~BC 1046) – 동이족(북방계)

()나라. (BC 1046~BC 256) 중 북쪽 견융(犬戎)이 침략하여 기원전 771년 주나라 유왕(幽王)이 살해되고, 제후에 의해 옹립된 평왕(平王)이 호경(鎬京, 현재의 시안-서안 시 부근)에서 부도(副都) 낙읍(洛邑, 현재의 뤄양-낙양 시)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기원전 771),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 ~ 기원전 256)  한족

춘추시대(春秋時期: 기원전 770~ 403) 주인이 없음 (주나라는 유명무실)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  주인이 없음   (주나라는 유명무실)

진나라(, 기원전 221 ~ 기원전 206)서융계역 (서방민족계열)

한나라 (, 기원전 206 ~ 220) 한족

삼국시대 (三國時代: 220 ~ 280)주인이 없음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420~589)시대:

<중국 남쪽을 남조(南朝)라고 함 -> 동진(東, 265 ~ 420)– 송(宋)- 제(齊)- 양(梁)- 진(陳)- 한족)>

<중국 북쪽을 북조(北)라고 함 -> 북조(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북방) >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 - 주인 없음

(, 581 ~ 618)선비족(북방계)

(唐, 618 ~ 907)선비족(북방계)

오대십국시대 (五代十國時代, 907~960)주인 없음

(, 916 ~ 1125) - 거란족(북방계열)

(, 960~ 1279)(북송: (北宋, 960 ~ 1126), 남송: 남송(南宋 : 1127-1279)- 한족

(, 1115~1234)여진족(북방계)

(; 1271~1368, 유목국가로는 1271~1635) – 몽고족(북방계)

(, 1368 ~ 1644) – 한족

(, 1616 ~ 1912) – 여진족(북방계)

  

 

북방 정복국가인 요제국(거란)의 중심은 어디일까?

 

1. 나라 이름을 대요(大遼)로 하게 된 이유

 

야율아보기는 거란이라는 집단  부족에서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거란제국의 이름은 대요(大遼)라 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많은 대신들 앞에서 일어서 자신이 허리에 차고있는 칼을 빼어들고 크게 외쳤다.

"이 칼은 매우 예리하여 머리가락 한올도 아무런 힘을 주지않아도 그냥 베어버린다. 그리고 전쟁시 이 칼로 수 많은 적을 물리치면서 그들과 대응을 하였지만 견고하기가 이르 때가 없다. 흠집이 있어 칼을 갈거나 숫돌을 챙긴적이 없다.

이 칼은 저 멀리 토번국(티벳)에서 나는 빈철(镔鐵:철의 한 종류로써 토번등에서 생산 되는데, 당시 쇠 중에서 가장 단단하다.)로 만들었다. 이 칼을 보면서 나는 우리 용맹하고 날쌘 대거란의 젋은이들를 보았다. 우리의 미래는 이 칼과 우리 용맹한 군사들에게 있다.

빈철로 만든 칼의 견고함은 우리가 사는 이곳 요택과 같다. 강과 늪이 많아 인위적으로 쌓은 성보다 훨씬 견고하고, 이곳을 터전으로 사는 거란인들은 견고한 성에서 사는 것과 같다. 

"요택(澤)"은 빈철로 만든 칼과 같다. 그래서 짐은 우리가 사는 이곳을 나라 이름으로 하겠으니 널리 우리 나라 이름을 알리도록하여라.  나라 이름은 '대요(大遼)'이다."   

 

즉, '요()'라는 나라 이름의 뜻은 "빈철() 만든 견고한 칼과 험한(견고한) 요택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더 큰 미래를 보며 함께 하자는 뜻에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곳을 나라이름으로 하였다.

 

2. 요나라의 수도

거란족과 거란이 세운 나라 요()나라의 중심은 현재 중국 내몽고 자치주의 적봉시(赤峰市)이다.

당시 중국 본토와 북방민족의 경계를 보면 (거란의 요나라 + 북송), (여진의 금나라 + 남송) 각각의 쌍을 동시대로 보면 정리가 쉽다.

여진(女眞)의 금()나라가 거란(거란)을 멸망시키고, 북송(北宋)을 압살시켰다. 북송이 멸망하면서 남송(南宋)이라는 망명도피 정권이 금나라를 섬기는 구조로 가다가, 네 번째 북방의 대표자인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을 하게 되었다..

거란의 강역은 상당히 광활하다. 오늘날 중국의 내몽고는 물론 산서성, 섬서성의 북부,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 북부와 동북3(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모두를 포괄하는 북중국의 패권국가였다.

 

이 당시에 중국 남쪽 운남성은 대리(大理)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리국은 훗날 몽골제국의 쿠빌라이에 의해 멸망 당한다. 티베트 지역에는 토번제부(吐蕃諸部)라 불렀다. 티베트 사람들은 스스로 부를 때 뵈 또는 보라고 했는데 중원에서 이를 을 투보(tubo 吐蕃)”라고 불렀고, 이 말이 서양으로 전해지면서 로마자로 “Tibet”이라 쓰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티베트라는 쓰이게 된 것이다.

 

요제국의 강역은 동경도(東京道), 상경도(上京道), 서경도(西京道), 중경도(中京道)의 네 구역으로 구분돼 있다.

 

요제국에는 수도가 5개가 있다. “상경, 동경, 서경, 남경, 중경의 다섯 수도 오경(五京) 있다. 그 가운데 상경과 중경의 유지(遺地)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 연경(燕京)이라고도 한다. 현재 베이징 시.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 : 내몽골 자치구 닝청 현 근처.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 : 내몽골 자치구 바린 좌기 근처.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 : 현재 랴오양 시.

서경 대동부(西京大同府) : 현재 산서성 다퉁(大同).

 

요나라는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 본격적인 왕조(王朝)로서 시작됐는데, ‘야율아보기는 이미 북중국으로 밀려들어온 한족들을 포용해서 자신의 부족과 한족, 두 인구구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수도에 한성이라는 한족들의 집단 거주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중원에서는 전란이 심했던 탓에 북쪽으로 피난 와서 눌러앉아버린 한족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 ‘야율아보기는 바로 이들 한족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민으로 조직화 해냄으로써 거란의 다른 부족장들보다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것이다.

피난으로 밀려오는 이민족을 받아들인 야율아보기는 당시 '한낱 오랑캐'가 아니었다. 곤궁에 처한 이민족을 받아들이는 개방성이야말로 북방민족들이 힘을 키우고 업적을 세울 때 예외 없이 등장하는 덕목인 것이다.

 

 

3. 거란의 민족신화(民族神話).

 

거란에는 민족기원에 관한 청우배마(靑牛白馬)" 신화가 있다.

저 넓고 넓은 북방초원에 두 줄기의 강이 흐르는데 하나는 시라무룬허(西拉木伦河)’라고 한다. ‘시라무룬이란 ‘노랗다는 뜻이어서 이 강을 황수(黄水)’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강이 황하(黃河)와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이라고 생각해서 ()에 삼수 변을 붙인 황자를 써서 황하(潢河)라 쓰기도 한다.

또 하나의 강은 라오하허(老哈河)’인데 라오하()’이란 뜻이라 토하(土河)’라고도 한다. 이 두 갈래의 강은 한데 합쳐져서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이것이 서요하(西遼河)’이다.

서요하와 동요하와 합쳐져서 요하(遼河)”가 되어 심양을 지나 발해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전설에 의하면 하늘의 선녀가 청우(靑牛)가 끄는 수레를 타고 시라무룬허를 따라 내려왔는데 그리고 또 다른 선인(仙人) 하나가 백마(白馬)를 타고 라오하허를 따라 내려와서는 이 선녀와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둘이 부부가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부는 모두 여덟 아들은 낳았는데 이 여덟 아들의 자손들이 각각 거란의 여덟 부족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역사학자들은 거란족의 기원과 관련해서, 청우(靑牛)와 백마()를 각각 토템으로 하는 북방의 두 부족이 합쳐져서, 세월이 지나면서 거란족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덟 명 아들은 거란의 8부족을 상징하는 것이다. .

 

역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탁발선비북위가 기원 389군대를 일으켜 동호(東胡)’의 후예인 선비족가운데 유연부(柔然部)’를 정벌한다. 이 강력한 북위의 군대에 패한유연의 일파는 북유연으로서 흑룡강성 북쪽으로 밀려났다. 그들은 훗날몽골의 선조가 되는 스웨이(실위:室韋 -Shiwei)가 됐었다. (‘스웨이란 말은 오늘날의시베리아(Siberia)’의 어원이 되었다.)

 

또 다른 일파는 남유연으로서 시라무룬허라오하허사이의 지역에 정착하여 유목과 수렵으로 생활하면서 8개 부락을 구성하여 살았는데 이들이 바로 훗날의거란족이 된 것이다. 따라서 거란선비족의 일파였고 몽골역시선비족의 일파였으니 선비-거란-몽골은 모두 넓게 보아 한 핏줄 - 북방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4. 북방민족 유연(柔然)

 

란의 이야기 중에 잠시 다른 북방민족 유연(柔然)에 대하여 알아보자.

북흉노 제국(155 A.D)을 멸망시키는데 있어 한()나라와 함께 일조를 담당했던 몽골계 선비족(鮮卑族)은 몽골리아 지역에서 흉노의 대체 세력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며 흉노 이후에 몽골리아는 약 2세기 반 동안 권력의 진공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A.D.400년경이 되어서야 강력한 새로운 유목 민족 제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연(柔然-꿈틀거리는 벌레들), 연연(蠕蠕), 여여(茹茹), 예예(芮芮)이였다. 그들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그것은 자료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중국 사료들에서 나타난 유연에 관련된 내용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유연(柔然)은 시조는 ‘’구두벌가한 욱구려 사륜(丘豆伐可汗 郁久閭 社崙)’으로 불렸고 유연의 왕족의 성씨는 욱구려씨(郁久閭氏)’. 3세기경에는 선비에게 종속되었지만, 선비가 중국으로 이주한 후의 몽골 고원에서 세력을 확대해, 5세기 초 사륜(社崙)’의 시대에 고차(高車: ‘쿠차또는 쿠처라고도 한다. 고대 불교 왕국 구자국(龜玆國)’의 현지명으로 비단길에 위치하며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 무자트 강의 남쪽에 위치한다.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아커쑤 지구에 속하며 쿠처 현의 중심이다.)를 복속시켜 타림분지 일대를 지배하면서, 북위와 대립했다.

 

유연은 타브카치(Tabgach) , 북위(386-534)2)의 창립자인 탁발규(拓跋珪 386-409)의 치세 기간 동안 역사 무대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유연의 가한 사륜(社崙)”은 한북(漢北 Karashar) 지방에서 소왕국을 건설하고 있던 고차(高車)를 멸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하여 동쪽으로 고구려에까지 세력을 떨쳤다. 

<오늘날 중국에 이웃한 이 새 강력한 제국의 기원에 대한 고찰은 활발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그들에 관한 진부한 계통학은 서로 일치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유연은 흉노족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왕조의 연대기에 의하면 연연은 277년에 위 왕조 자신들의 상에 의해 포로로 잡힌 노예들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정치적 목적의 과장이 다분히 첨가되어 있다고 보여 진다.  유연이라는 이름은 다소 경멸적인 별명인 것 같다.  최소한 철자법만 보더라도 그 글자들의 특성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연의 생활양식은 다른 유목민족들의 양식과 흡사했다.  "그들은 물과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텐트에서 거주 한다."는 것 등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유연이 변발(辯髮)을 했었다는 것도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또 사륜은 사상 최초로가한’(可汗, 이후 원나라의’)의 칭호를 사용했다. ‘사륜북위 명원제(明元帝)’의 군대에 패주하던 도중에 사망했다.

 

북위와의 대립이 깊어진 유연은 남송, 하나라, 북량, 북연, 고구려, 토욕혼와 묶어 북위 포위망을 형성했다. 서하, 북량, 북연은 곧 북위에 의해 멸망 당하지만, 유연은 세력을 계속 유지해 토욕혼과 송과 연계를 취하였다.

이것을 불쾌하게 여긴북위의 태무제 429, 449년 두 차례에 걸쳐 친정을 하여 유연의 본거지를 함락시켰으며가한 사륜은 도주 중에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은 강세를 계속 유지해 북위도 남조와의 관계 때문에 북쪽에만 관심을 가질 수는 없었다.

 

유연과 당시 북중국의 통치 국가 북위(北魏)와의 관계는 중국의 변방에 자리 잡은 유목 민족들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공격과 이에 대한 보복 공격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과 침략 관계로 일관해 왔다. 

 

여러 차례 북위는 공격의 주도권을 쥐고 유연의 영토 깊숙이 침입했었다. 북위의 천자 세조(世祖) 태무(太武 423-452)의 통치 기간 때인 438년과 443년에 북위 즉, 타브가치 군대는 유연의 군대와 싸우려고 고비 사막을 가로 질러 갔으나 전투를 시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연연의 군대는 도주했으며 많은 북위 군사들이 황량한 사막의 불모지에서 사멸했기 때문이다. 

 

북위는 429년 이후에 오손(烏孫), 고차(高車) 등 소왕국들과 동맹 관계를 맺어 유연과 싸웠다.  448년 열반(悅般)과의 동맹은 유연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북위와 열반 동맹군의 공격으로 유연의 통치자 달단(Ta-tan 414-429)이 사망하게 되나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유연을 패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북위 왕조는 수동적으로 유연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 성벽을 건설하게 되었다. 북위는 유연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534년 유연에 앞서 패망하고 말았다.

 

유연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된 것은 485, 486년에 지배하에 있던, ‘고차가 독립한 이후이다. ‘고차의 반란은 수습하였지만, 돌궐이 강성해져서 552년 돌궐의 이리가한(伊利可汗)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유얀의 12대 가한인 아나괴(阿那壞)가 전사하고 만다. 유연의 잔당은 북위에 원조를 요청하였지만, 그들은 철저히 거절당하고 돌궐의 요청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12대 아나괴가한 사망 후 2년 만에 16암나진 가한때 유연은 멸망한다.

 

유연을 멸망케 한 돌궐은 원래 유연에 복속되어 있는 족속들이었다.  주로 철공업에 종사하여 철공품을 유연에 공납하였다.  6세기 초에 유연으로부터 독립을 기도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초기에는 북위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돌궐의 세력이 점증되자 돌궐의 부족장이었던토문(土門)’이라고도 불리는부민(Bumin)’유연에게 공주와 혼인하기를 요청했는데 '대장장이' 출신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에 가슴에 한이 맺진 부민은 유연과의 독립운동으로 발전 시켰다. 552부민은 북위의 계승자 서위(西魏 535-554)의 도움을 받아 유연에 공격을 감행해서 그들을 퇴패시켰다. 유연의 통치자암나진는 자살하게 되고 곧이어 유연은 내부분열로 패망하게 되었다.

 

555년 돌궐은 유연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3000명을 참수형에 처했다. 이로서 유연이라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유연(柔然)의 가한(可汗) 계도

 

1.구두벌가한 욱구려 사륜(丘豆伐可汗 郁久閭 社崙) 재위 402 ~ 410

2.애고개가한 욱구려 곡률(藹苦蓋可汗 郁久閭 斛律) 재위 410 ~414

3.가한 욱구려 보록진(可汗 郁久閭 步鹿眞) 414

4.모한흘승개가한 욱구려 대단(牟汗紇升蓋可汗 郁久閭 大檀) 재위 414 ~ 429

5.칙련가한 욱구려 오제(敕連可汗 郁久閭 吳提) 재위 429 ~ 444

6.처라가한 욱구려 토하진(處羅可汗 郁久閭 吐賀眞) 재위 444 ~ 450

7.수라부진가한 욱구려 여성(受羅部眞可汗 郁久閭 予成) 재위 450 ~ 485

8.복고도가한 욱구려 두륜(伏古敦可汗 郁久閭 豆崙) 재위 485 ~ 492

9.후기복대고자가한 욱구려 나개(候其伏代庫者可汗 郁久閭 那蓋) 재위 492 ~ 506

10.타한가한 욱구려 복도(他汗可汗 郁久閭 伏圖) 재위 506 ~ 508

11.두라복발두벌가한 욱구려 추노(豆羅伏跋豆伐可汗 郁久閭 醜奴) 재위 508 ~ 520

12.칙련두병두벌가한 욱구려 아나괴(敕連頭兵豆伐可汗 郁久閭 阿那) 재위 520 ~ 552

미우가사구가한 욱구려 파라문(彌偶可社句可汗 郁久閭 波羅門) 재위 521 ~ 524

13.가한 욱구려 철벌(可汗 郁久閭 鐵伐) 재위 552 ~ 553

   가한 욱구려 등숙자(可汗 郁久閭 鄧叔子) 재위 552 ~ 555

14.가한 욱구려 등주(可汗 郁久閭 登注) 재위 553

15.가한 욱구려 고제(可汗 郁久閭 庫提) 재위 553

16.가한 욱구려 암나진(可汗 郁久閭 菴羅辰) 재위 553 ~ 554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황제(皇帝)를 칭()하여 거란을 건국한 916년 까지

 

거란이 부족이든 민족이든 부족연맹이든 전제국가든 간에 역사의 주체로 감지될 만한 움직임으로 포착되어 사서와 사료에 본격적인 기록이 남기 시작한 것은 북위(北魏)가 중원을 제패해가는 4세기 말부터이다. 북위 도무제(北魏 道武帝: 탁발규- 拓拔珪)의 강력한 군대가 북방을 정벌할 때 거란 부족이 크게 패배했다고 기록돼 있다.

거란은 북위 태무제(太武帝: AD 440~450)시대 이후 북위의 황제에게 매년 좋은 말(名馬)을 보냈고, 북위 헌문제((獻文帝: 황제-태상황제 재위기간 465~476) 시절에는 북위와 교류하는 북방 제국의 하나로 자리 잡아, 좋은 말과 모피(名馬文皮)를 공물로 보내고 호시(互市:국경에 설치된 무역시장)까지 열었으니, 이 시기에 이미 부족국가 내지 부족연맹 형태를 갖춘 것 같다.

 

AD 479년에는 고구려(장수왕)’가 서쪽으로 진출하여 지두간(地豆干 거란이 아닌 다른 부족)’을 공격하자 거란고구려의 기세를 피하기 위해 북중국의 패권자인 북위(北魏)’에 복속하게 된다. ‘북위군사력의 우산 밑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약소국가 시절에 불가피하게 발생하곤 하는 비애지만 현실적인 대처인 것 같다.

 

북위왕조가 단절되고 북제(北齊)’ 시대인 AD 553년에는 거란의 세력도 상당히 커져 북제국경을 넘나들곤 했었다. 그러자 북제거란을 추격하여 정벌에 나섰고 거란은 크게 패하고 만다. 이로 인해 포로만 10만여 명이 잡혀가 북제의 여러 곳에 분산됐고 다시 돌궐의 핍박이 거세지자 이번에는 고구려경내로 들어가 고구려에 복속하게 된다.

거란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에 중원은 수나라로 통일된다. 중원이 수나라로 통일할 때 어수선한 시기에 힘을 기른 거란은 다시 강성해져서 수나라와 왕래도 된다. 그러다가 거란내부에 반란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고구려에서 넘어온 부족과 돌궐쪽에서 넘어온 부족들과 함께 요서 지방 10부로 나눠 살았다.

 

당나라 시대에는 좀더 성장해서 동으로 고구려, 서는 해()에 접하고, 남으로 영주(營州), 북으로는 말갈과 실위(室韋 오늘날의 내몽고자치주 동북쪽 후룬베이얼 지역)에 이르는 지역을 영역으로 했다.

이 시기에는 대하(大賀)’씨에서 군장이 배출되었는데, 4만 명의 군대를 거느렸고, 8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수렵과 유목이 주된 생업으로 했었다. 수렵이나 전쟁이 있으면 한데 모이고 그렇지 않을 대에는 각자의 방목지에서 유목을 하는 전형적인 유목지역의 부족연맹 형태였다.

 

이때에는 외교관계에서는 돌궐과 손을 잡았다. 옛말로 하면 "돌궐(突厥)에 신사(臣事:신하국)한다"고 하는데, 근 현대의 제국주의-식민지 관계와는 다른 느슨한 국제관계이다. 서로 예물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에게 적의가 없다는 걸 표시하며, 상대방이 다른 쪽과 전쟁을 할 때에는 군대를 파견하기도 하는 관계 정도였다. 이런 관계는 쉽게 번복되기도 한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아직 나라 이름도 없는 거란이 조금씩 역사의 굴레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돌궐과 신사(臣事) 관계가 있는 상태에서 당나라를 침입하기도 하고, 당나라에 공물을 보내기도 하고, 그렇게 크지 않게 자기들의 모습을 대국 당나라에 알리지 시작 한다. 당나라가 강성해지는 당 태종 시절부터는 당나라와의 친교관계로 바뀐다. 그래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출병했을 때에는 거란도 군대를 파견해 전쟁에 참가 한다.

 

당나라 무측천(武則天) 시대에는 거란족이 반기를 들고 기주(冀州)와 영(瀛州)까지 함락시켰으나, 당나라 20만 군대의 반격을 받아 패주하면서 다시 돌궐의 손을 잡는다. 훗날 당 예종 시절인 714년에는 당나라로 친교관계를 다시 바꾸니 당의 황제는 종실의 공주 하나를 거란의 수장에게 시집 보낸다.

 

당시의 관계는 당나라가 정벌했다고 해서 쉽게 통치하지 못했을뿐더러, 그 정벌이 근대의 식민지 점령과는 사뭇 다르다. 당나라가 북방 출신의 탁발선비가 끌어가는 왕조였지만, 그들이 비우고 온 자리를 채운 북방의 신흥 북방세력이 외교관계를 좋게 하면서 당나라 황실에서는 종실 중에 공주를 시집 보내곤 하여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고구려-당나라 전쟁 때 당나라 편에서 출전한 거란이 고구려전 승리로 연안16주 반환으로 당나라와 묘한 신경전을 펴고 있을 때 결국 당나라와 다툼이 생겼다. 722년에 당나라 공주와 혼인으로 친교관계를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또 이런저런 속 시끄러운 일들로 거란은 돌궐과 다시 손을 잡았다. 737년에는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해서 거란 정벌에 나서자, 다시 당나라에 복속하고, 또 틀어져서 범양(範陽) 절도사인 안록산안사의 난(安史之亂, An Shi Rebellion) 755 12 16일부터 763 2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과 그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에 의해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록산의 난〉 또는 〈천보의 란〉(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연()이라고 하여 칭제를 했으며, 9년간 지속했다.: 아버지는 이란계 소그드인이고 어머니가 돌궐족 출신이다. ()이라는 성은소그디아나의 부카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를 가리키는 중국식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녹산()’이라는 이름은 빛을 의미하는이란어 로우샨(rowshan)’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의 부족의 지도자인 카파간 카간이 716년에 죽게 되자, 일족들은 혼란을 피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아들 경서의 손에 죽는다)이 나선다.

 

<안록산의 란(安祿山): 755 12 16일부터 763 2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安祿山)과 그 부하인 사사명((史思明)과 그 자녀들에 의해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이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안록산의 난〉 또는 〈천보의 란〉(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연()이라고 하여 칭제(稱帝)를 했으며, 난은 9년간 지속했다.

 

개원의 치(開元之治) 를 이끌었던 당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서 정치를고력사등의 환관들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양국충 (楊國忠: 양귀비의 사촌 오빠) 등의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정치가 시작되었다.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된다.

 

부패한 관리와 환관정치로 인해, 수탈을 당할 대로 당한 농민의 소외로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된 것도 원인이다. 해체된 자립 소농민층은 유민화되었다. 당나라는 이때 지배체제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측천무후 때 억압된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했다. 구 집권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에 안록산이 무능한 군주를 벌하고자 난을 일으켰다.

 

755년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756 1월 안녹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이라 칭한다.

756 5월 양귀비의 자살.

756 6월 반군 장안(長安) 점령.

757 1월 맏아들인 안경서에게 안녹산 살해당한다.

759년 안녹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안경서가 살해당한다.

761년 사사명의 맏아들 사조의에게 사사명이 살해당한다.

762년 당 현종 사망

763년 사조의 자살로 난이 평정됨.

 

안사의 난으로 8년 간의 전란에 시달려 많은 농민들이 죽고,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 전란으로 인해 전국의 인구는 293만 호로 13년 전의 890만 호에 비해 70%의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753 52,880,488명의 인구가 764년에는 16,900,000명으로 기록되었다.

역사상 최초, 최악의 킬링필드였던 셈이다. (597만 호가 이 전쟁으로 사라짐으로써 한 호당 5인 기준을 삼아도 3600만 명이 넘게 죽었던 것이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뀌었다.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875년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안록산이 10여만 군대로 양국충과 환관을 토벌에 나서지만 초반에는 크게 실패하였다. 그러나 안록산의 군대가 계속 밀어붙이자 결국 정부군은 반군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고, 안록산의 난에서는 그들이 안록산 반군의 주요세력이 되어버린다.

9세기 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 일명 <안사의 난(755-763)> <황소의 난(875-884)>이 이어지면서 온 나라가 피폐해지고, 중원은 중원대로 북방은 북방대로 반란과 도적과 무능과 비리가 잡탕 비빔밥을 이루는 통에 북방에서 호시탐탐 중원을 노렸든 거란이 슬금슬금 지금의 북경 인근지방()으로 남하하였다.

유주(幽州)절도사인 유인공(劉仁恭)’과 거란과의 본격적인 쟁투가 벌어진다. 이때가 885~887년 일이다. 9세기 말, 거란이 부족(部族)에서 한 나라로 건국 직전의 상황이다. (4세기말 북방민족 가운데 가지 세력의 하나로 등장했든 거란이 약 500년간 강대국 사이에서 처참하게 지내오다가 9세기 말에 천하대세의 변화와 함께 발흥의 기회를 맞는다.)

 

거란의 군주들..

 

대하돌라(大賀 咄囉) -> 대하마회(大賀 摩會)-> 대하굴가(大賀 窟哥) -> 대하아복고(大賀 兒伏皐) -> 이굴가(李窟哥, 590년대 ~ 669) -> 이진충(李盡忠) -> 손만영 (孫萬榮: 이진충의 처남) ->이해고(李楷固: 재위 696~698이진충의 양자. 이진충과 그 처남 손만영이 주나라(측천무후가 황위에 있을 당시 국호)의 폭압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해고는 이 당시 이진충의 수하 장수였다. 697년에 이진충이 사망하고 손만영이 피살되었다. 그러자 이해고와 수하 장수 낙무정(駱務整)은 측천무후에게 항복하였다. 처음에 주나라에서는 이해고와 낙무정을 죽이려 했으나 재상 적인걸이 측천무후를 설득해 그들을 장수로 삼았다. 698년에 이해고는 영주를 탈출한 고구려 유민들을 쫓아 백산말갈 족장 걸사비우를 죽였으나 천문령 전투에서 대조영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이해고는 여전히 주나라에 저항하고 있던 거란 백성들을 진압하고 연공의 위에 올라 무씨 성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705년에 당 중종이 복위되어 다시 국호가 당나라로 회복되자 이해고는 무씨 성을 버렸다. 이해고가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실활((李失活: 재위 698~718년 이진충의 사촌동생) -> 이사고(李娑固)  -> 이욱간 ->이돌간(李突干) -> 엄화군왕 이소고(李邵固) -> 와가한 요련굴렬 -> 북평군왕 이과절 -> 조오가한 적련조리(辇组里,이부수:怀秀 -> 호랄가한 요련해락(遙輦楷落: 이회수(李懷秀)) -> 소가한 -> 선질가한 요습련지 -> 소고가한 -> 야란가한 요련굴술(遼燕屈戌) -> 파랄가한 -> 흔덕근가한 요련흠덕(遙輦 欽德) -> 야율아보기는 耶律阿保機

 

()나라의 황제들..

요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추숭

요 숙조
(
遼肅祖)
(요 태조 추숭)

소열황제
(
昭烈皇帝)

야율누리
(
耶律耨里思)

-

-

추숭

요 의조
(
遼懿祖)
(요 태조 추숭)

장경황제
(
莊敬皇帝)

야율살랄덕
(
耶律薩剌德)

-

-

추숭

요 현조
(
遼玄祖)
(요 태조 추숭)

간헌황제
(
簡獻皇帝)

야율균덕식
(
耶律勻德寔)

-

-

추숭

요 덕조
(
遼德祖)
(요 태조 추숭)

선간황제
(
宣簡皇帝)

야율적노
(
耶律的魯)

-

-

1

요 태조
(
遼太祖)

대성대명신열천황제
(
大聖大明神烈天皇帝)

야율아보기
(耶律阿保機)

신책(神冊) 916 ~ 922
천찬(天贊) 922 ~ 926
천현(天顯) 926

916 ~ 926

2

요 태종
(
遼太宗)

효무혜문황제
(
孝武惠文皇帝)

야율덕광(耶律德光)

천현(天顯) 927 ~ 938
회동(會同) 938 ~ 947
대동(大同) 947

926 ~ 947

-

요 의종
(
遼義宗)
(요 세종 추숭)

문헌흠의황제
(
文獻欽義皇帝)

야율배(耶律倍)

-

-

-

-

장숙황제
(
章肅皇帝)
(요 목종 추숭)

야율이호(耶律李胡)

-

-

3

요 세종
(
遼世宗)

효화장헌황제
(
孝和莊憲皇帝)

야율원(耶律阮)

천록(天祿) 947 ~ 951

947 ~ 951

임시

-

익무황제
(
翼武皇帝)

야율찰할(耶律察割)

-

951

4

요 목종
(
遼穆宗)

효안경정황제
(
孝安敬正皇帝)

야율경(耶律璟)

응력(應曆) 951 ~ 969

951 ~ 969

5

요 경종
(
遼景宗)

효성강정황제
(
孝成康靖皇帝)

야율현(耶律賢)

보녕(保寧) 969 ~ 979
건형(乾亨) 979 ~ 982

969 ~ 982

6

요 성종
(
遼聖宗)

문무대효선황제
(
文武大孝宣皇帝)

야율융서(耶律隆緖)

통화(統和) 983 ~ 1012
개태(開泰) 1012 ~ 1021
태평(太平) 1021 ~ 1031

982 ~ 1031

7

요 흥종
(
遼興宗)

신성효장황제
(
神聖孝章皇帝)

야율종진(耶律宗眞)

경복(景福) 1031 ~ 1032
중희(重熙) 1032 ~ 1055

1031 ~ 1055

8

요 도종
(
遼道宗)

인성대효문황제
(
仁聖大孝文皇帝)

야율홍기(耶律洪基)

청녕(淸寧) 1055 ~ 1064
함옹(咸雍) 1065 ~ 1074
대강(大康) 1075 ~ 1084
대안(大安) 1085 ~ 1094
수창(壽昌) 1095 ~ 1101

1055 ~ 1101

-

요 순종
(
遼順宗)
(요 천조제 추숭)

대효순성황제
(
大孝順聖皇帝)

야율준(耶律濬)

-

-

9

-

천조황제
(
天祚皇帝)

야율연희(耶律延禧)

건통(乾統) 1101 ~ 1110
천경(天慶) 1111 ~ 1120
보대(保大) 1121 ~ 1125

1101 ~ 1125

 

 

거란의 건국영웅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탄생과 성장..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중국어 발음으로는 예뤼 아바오지(yelv abaoji)’이다.

거란의 신화 청우백마(靑牛白馬)’ 신화에서도 여덟 아들이 태어나 그 후손들이 8개의 부족을 이뤘다고 하는 것처럼, 거란은 상당 기간 동안 8개 부족이 연합한 형태로 지내왔었다. 이들 각 부족의 장은 대인(大人)이라고 불렸다. 이들 여덟 명의 대인이 모여 거란의 최고 직위인 군장(軍長)을 윤대(輪代). , 순번제로 선출하는데 3년 임기로 돌아가는 이 군장을 팔부대인(八部大人)’이라고 하였다. 전형적인 유목사회의 분산된 권력구조 시스템이다.

 

야율아보기 AD 872년 거란의 8부족 중 질라부(迭剌部)’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날 때 그의 가문은 상당히 위태로 왔다. 아버지는 철라적(撤剌的)’이었고, 어머니는 ()였는데, 할아버지는 부족간의 갈등 속에 피살됐고, 아버지와 삼촌 등은 같은 사건으로 인해 외지로 도주한 상태였었다. 야율아보기는 태어나자마자 할머니에 의해 숨겨진 채로 성장했다.

 

스스로 자각하지야 못했겠지만 출생부터 고난으로 시작했다. 훗날 기록된 요사(遼史)에 의하면 야울아보기의 모친은 "해가 가슴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야울아보기를 낳았는데, 출생하니 신기한 빛과 이상한 향기가 감돌았고, 초생아가 마치 세 살 배기 정도로 몸짓이 컸다"고 하였다.  -전형적인 북방 천손(天孫)족들의 건국 신화와 동일함.

 

할머니는 야울아보기가 비범한 존재인 것을 알고 별당(別堂)에 감추어 키우면서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야율아보기는 생후 삼 개월이 지나자 걷기 시작했고, 돌이 되자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성장해서는 상체가 잘 발달했고 눈빛이 날카로웠으며, 지혜롭고 용기가 넘쳤으며,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잘했다고 한다.

 

야울아보기 901년 즉 나이 스물아홉에 질라부대인의 자리에 오른다. 서른 다섯 살인 AD 907년에는 거란 최고의 자리인 팔부대인으로 추대된다.  요사(遼史)에 따르면, ‘야율아보기의 전임 팔부대인이었던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 요련흠덕(遙輦 欽德)’이 죽으면서 야울아보기를 후임으로 지목했다고 한다. -이 대목은 오대사기(五代史記)의 내용과는 약간 다르다.

 

전임자의 추천으로 되었는지, 각 부족장들이 순수하게 추대했는지, 중요한 것은 야율아보기가 지략과 용맹으로서 거란족 안에서는 이미 강력한 힘을 구축해놓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예를 들면, ‘팔부대인으로 추대(907)되기 전인 905년 안사의 난 이후 각 지역의 절도사들이 제각기 군웅할거(群雄割據)하면서 당나라의 멸망이 거의 끊어져가던 때에 하동(河東: 지금의 산서성 지역) 절도사인 이극용(李克用)’이 거란에게 동맹을 요청하자, 기병 7만을 끌고 운중으로 가서 이극용과 동맹을 체결한다. 이것은 당시 하북 절도사인 유인공(劉仁恭)’을 견제하고 협공하기 위한 동맹이었다. 이런 일들은 야율아보기질라부의 부족장이면서 팔부대인바로 다음으로 2인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역할이었다.

 

이극용과의 동맹을 통해 하북지역을 공격하여 여러 주를 빼앗으면서 적지 않은 한인(漢人) 포로를 잡았다. 그 다음해인 906년에도 다시 하북을 공격했고, 돌아가는 길에는 산북(山北)()까지 격파함으로써 그 지략과 용맹을 떨친 덕에 팔부대인에 추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야율아보기팔부대인이 되면서 최고 자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곧장 주변의 군소부족들을 통합해내기 시작한다. ‘팔부족야율아보기에게 호의호식하며 놀라고 준 자리가 아니었고, ‘야율아보기역시 즐기려고 그 자리에 올라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게 북방민족에서 군장이 되는 영웅들이 감내해야 할 운명이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에 걸 맞는 업적을 내야 한다. 그게 충분치 않으면 내려와야 한다는 아주 단순 명쾌한 논리이자 무능한 자에겐 족쇄이고, 떠메고자 하는 자에겐 운명인 것이다.

 

야율아보기의 취임 5년간의 숨쉴 틈 없는 전적을 요약하자면..

 

907 1차년도: 야율아보기 35세되는 해, 취임 직후 2월에 흑차자 실위(黑車子 지역의 室韋)’부족을 정벌하여 8부 전체의 항복을 받아내다

 

908 2차년도: 5월에 동생인 철라(撤剌)’를 시켜 오환흑차자 실위(烏丸黑車子)’를 격파하고, 10월에는 반란했다가 실위로 도망간 자들을 잡아 돌아오다.

 

909 3차년도: 10월에 흑차자 실위(黑車子 室韋)’를 다시 정벌하다.

 

910 4차년도: ‘오마산(烏馬山)의 해()등 반란이 일어나자 다시 정벌하다.

 

911 5차년도: ‘()’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수 차례 설득하고 이에 응하지 않자 정벌에 나서서, 우선 서부의 ()’를 정복하고, 다시 동부의 ()’까지 평정하여 ()’의 다섯 부족을 모두 거란에 복속시키다.

 

이렇게 매년 성공적인 전공을 쌓아 올리면서 거란의 강역을 넓혀나갔고, 주변의 군소 제국의 잔여세력을 모두 평정해 통합했었다. 외형적으로는 요서(遼西) 일대가 통일된 셈이다. 일반적으로 팔부대인 3년에 한번씩 돌아가는 교대제였지만, 야율아보기의 전공이 뛰어나서인지 3년을 넘어 5년이 채워졌다.

 

 

야율아보기의 시련과 도전..

 

911년 야율아보기가 팔부대인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해 야율아보기는 그간의 수직상승에 제동이 걸리고 두 가지 시련과 도전이 동시에 시작된다. 첫 번째 시련은 친동생인 라갈(剌葛), 질라(迭剌), 인저석(寅底石), 안서(安瑞)’ 등이 모반을 꾀한 것이다. 밖으로 전공을 쌓아가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집안에서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에는 안서(安瑞)’의 처가 야율아보기에게 모반을 사전에 알려준 덕분에 큰 사태로 번지기 전에 덮을 수 있었다.

야율아보기는 군장으로서 얼마든지 동생들을 죽일 수 있었지만, 이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동물로 희생시켜 제물을 바치고 하늘에 맹세하면서 용서해줬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모반은 쉽게 종결되지 않았다. 912 10라갈(剌葛)’ 평주에서 전쟁을 이기고 돌아와서는, 다시 모반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자기 군영이 아닌 외부에 나가있었던 야율아보기는 동생의 군대가 막고 있는 길을 우회하여 통과하자, 동생들이 각각 사자를 보내 사죄를 하였고, 야율아보기는 또다시 동생을 용서한다.

 

913년 초에도 문제가 좀 있었고, 3월에도 동생인 질라가 문제를 일으키자 야율아보기가 화를 내면서 그 휘하의 사병들을 전부 해산해 각 부족에 배속시켜 버린다. 그러자 라갈이 다시 황제를 칭하려고 모의하다가 야율아보기의 모친인 ()가 먼저 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큰 화를 면했다. 913 4월에 야율아보기에게 반기를 들은 반군과 동생 라갈을 비롯해 전부 잡아들였다. 동생에게 크게 화가 나긴 했지만, 야율아보기는 또다시 산에 올라가 청우백마를 잡아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내고 동생들을 용서한다.

 

914년에도 동생이 낀 모반사건이 있어 수백 명의 관련자를 모두 교살에 처했지만, 동생들은 또 사면 받았고, 이사건으로 인해 동생들의 계속되는 모반은 종결된다.

 

동생들로 인하여 심한 몸살을 앓았든 야율아보기에게는 외부에서 도전적 상황이 벌어진다. 남쪽에서 들어오는 한족(漢族)들이다. 당시 하북 절도사였던 유인공(劉仁恭)’의 아들 유수광(劉守光)’이 아버지를 가두고 그 직위를 계승했는데, 한마디로 폭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형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정치적 박해를 피해 형들이 북으로 도망갔고, 폭정으로 인해 한족 지식인 일부와 백성들이 상당수 북으로 피난을 가게 된 것이다. , 이들이 아무런 대화도 없이 거란의 강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거란과 야율아보기에게는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이들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 인가!”

 

애당초 한족들이 거란을 정벌하러 온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인구가 유입되는 것은 분명히 새로운 도전적 상황이 되는 것이다. 야율아보기는 이런 한족들을 전부 흡수한다. 많은 숫자의 인원이 거란으로 야율아보기의 품으로 안긴 것이다.

 

기록에 남은 것만 해도, 902년에 하동 지방을 공략했을 때 95천명을 포로로 잡아왔고, 907년에 유수광의 친형이 투항해 올 떼 수천 명이 함께 들어왔고, 또 다른 한인 관리가 투항해 올 때에 남녀 3천명이 왔다고 돼 있다.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이었고, 기록에 남지 않은 소수 집단들의 잦은 이주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거란 문화와 동 떨어진 새로운 문화인들과 결합은 야울아보기와 거란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었든 것이다.

 

야율아보기는 이들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세력의 중요한 요소로 소화한다. (그들은 권력운용에 관한 한, 자신들과 다른 지식과 경험이 있었고 생산활동에서도 자신들과 다른 농경문화의 기술과 경험을 갖고 있었다.) 거란의 주된 영역에는 농경과 유목의 교차지역 때문에 중대한 의미가 될 수 있었다.

 

야율아보기는 처음부터 이질적인 요소. , 거란과 한족을 융합해서 하나의 세력으로 이끌었다는 대단히 중요한 변신을 한 것이다. 야율아보기 개인의 변신이 아니라 거란족의 변신이란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에너지는 핵의 분열과 융합 과정에서 나온다. 가만히 정지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결과를 찾아 볼 수는 없다. 거란족이 한 걸음을 더 나가게 하는 에너지 융합을 시작한 것이고 그게 바로 야율아보기의 진취적인 힘에 의해 가속화했던 것이다.

 

이들 한족 가운데 몇몇은 야율아보기의 중요한 참모가 된다. 그 중 한연휘(韓延徽)’유목민이 해본 적이 없는 성곽을 세우게 하고, 도시를 구역으로 나눠 한인을 집단 거주하게 하고 농업기술을 전수하게 하여 한족들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연휘는 포로 출신이라 할 수 있었으나 그 능력을 보고 발탁해낸 것이다. ‘강묵기(康默記)’는 하북의 관리였다가 야율아보기가 이 지역을 공격하면서 잡아간 인물이다. ‘강묵기는 거란과 한족을 아우르는 사법행정에 종사하였다. 북방의 법률과 한족의 관습을 잘 절충해냈다고 한다. ‘한지고(韓知古)’ 역시 야율아보기의 권력에 참여해서 거란의 풍속과 한족의 예법을 참작하여 새로운 예법을 만들어 거란과 한족이 공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 한족 출신들이 야율아보기 휘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야율아보기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얻은 게 된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이 대목에서 한족이 야율아보기를 교화해서 뭔가를 이룬 뉘앙스로 기술하고 있다.

피지배자가 지배자를 교화 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국인들이 바라보는 역사에는 그렇게 나열되어 있다.  

 

이들을 포용한 거란족과 그 수장인 야율아보기의 뛰어난 리더쉽, 또 피난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나간 한족이 모두 온당하게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거란의 거대한 에너지가 곧 밖으로 뛰어 나오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가문 내부의 반란과, 강역 외부에서 밀려들어오는 외부의 변수를 모두 소화해낸 야율아보기에게는 순탄한 중원 본토 정벌의 길이 열렸을까? 아직은 아니었다.

 

 

거란의 보수세력 대인(大人)들의 반격과 신진세력 야율아보기의 재반격(再反擊)

 

야율아보기는 집안에서 동생들이 돌아가면서 연달아 일으킨 반란을 수습하고, 밖으로는 새로운 인구구성으로서 한족을 받아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융합해 나갔다. 그러나 팔부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가지로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야율아보기가 팔부대인에 오르고 5년차까지는 그래도 주변 군소 부족들에 대한 지속적인 정복과 통합에 상당한 성과를 냈으나 5차년도부터 발생한 동생들의 반란은 8차년도까지 매년 빠짐없이 이어졌고, 이를 수습하고 다니느라 사실상 외부적 성과도 없었다. 부족의 군장(君長)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 백성들로부터 견제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게다가 성과가 없는 주된 이유가 다름 아닌 자신의 친동생들의 반란이었으니 더욱더 그러하다. 이와는 별개로서 근원적으로 각 부의 대인들이 윤대(輪代)하여 3년씩 돌아가던 팔부대인의 자리를 야율아보기가 9년째 독점한다는 것과 거란의 씨족 민주주의적 관습법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도 야율아보기와 각 부족의 장들과 불만이 심각한 요소가 되고 있었다.

 

오대사기(五代史記: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의 오대(五代 : 907~960)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 )’에 이런 문제가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압축해서 서술되어 있다.

 

 "야율아보기가 각 부족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윤대를 하지 않고, ‘팔부대인자리를 9년간이나 자리를 지켰다. 각 부족이 야율아보기에 대해 윤대를 하지 않음을 꾸짖자, 야율아보기는 부득이하게 기고(旗鼓, 팔부대인의 지위를 표시하는 징표로서의 기와 북)를 넘겼다." 이 대목에서 이설(異說)이 있는 부분만 거론하겠다.

 

우선 야율아보기가 속한 일라부(또는 질라부 迭剌部)’ 8부족의 하나인가 아니면 8부족 이외의 부족인가다. “야율아보기가 팔부대인에 오르기 전의 팔부대인이었던 습이(習爾)’일라부 대인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부족 출신이었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이 있다. 사료의 기록들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이미 야율아보기가 9년간이나 팔부대인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9년의 후반에는 성과도 별다르게 내지 못했자 그로 인해 나머지 부족 대인들의 이의제기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그로 인해 야율아보기가 기고(旗鼓:깃발과 북)를 내놓았다는 것.

 

거란족 전체의 큰 흐름으로 보면 군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씨족적 민주주의 경향> <독점권력으로 통합하려는 야율아보기 측의 전제화 경향>이 대립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하다못해 동호회조차도 일정한 정도 양적으로 성장하면 질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움트게 되는 법이다.  거란이 이제 그런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고 보면 된다. 아이가 성장하면 어느 단계에서 더 이상 아이로 키울 수 없는 것과 같다.

 

도시국가 보다 규모가 커진 광역국가의 형태를 갖출 정도로 성장하면 도시국가와는 또 다른 국가권력 체제와 사회구성 시스템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란족에게 그런 변화의 바람이 생겼습니다. 이럴 때 어느 쪽으로 변화의 물꼬가 터져나가느냐 하는 것은 그 세력들간의 경쟁과 다툼의 결과로 결정된다.

 

거란은 씨족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팔부대인교대를 전통적으로 고수하려는 각 부족들의 보수 세력과, 자신의 권력을 더 키우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드러낸 질라부중심에 전제 권력형으로 전환하려는 야율아보기 세력간의 다툼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경쟁과 다툼은 한번의 사건으로 결판이 나버린다.

 

각 부의 압력을 심각하게 받은 야율아보기는 일단, 그들의 관습법적 요구에 따라 팔부대인의 기고(旗鼓)를 그들에게 돌려준다. 그러면서, 한족을 받아들여 이미 인구구성이 달라진 질라부의 대인의 자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소금호수(鹽池)에서 연회를 열어 각부의 대인들을 모두 초청한다. (당시 소금의 생산과 교역은 필수불가결한 경제의 핵심 축의 하나였다.) 이 당시 야율아보기 세력은 소금호수를 장악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소금의 교역권 내지 교역통로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야율아보기는 염지(鹽池)에서의 연회를 열었고, 각 부의 대인들이 이 연회에 참석했고, 대인들이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야밤에 복병을 동원해서 이들 대인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일종의 친위 쿠데타이다. 음모와 유인으로 복병을 동원해서 씨족적 민주주의를 고수해 온 각 부족의 군장을 한자리에서 몽땅 제거한 것이다.  야율아보기는 각 부의 대인을 살해하고는 자신을 따르는 군사들을 앞세워 각 부족을 전부 눌러버린다. 그 다음엔 각 부의 부족인들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합쳐서 새로운 8부족으로 구성하고, 야율아보기의 일족 내지 수하심복들로 그 8부족의 대인을 새로 임명한다.

 

안으로는 동생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새로운 인구구성 요소로서 한족을 받아들여 융합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이자 보수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이제 거란은 야율아보기에 의해 부족적 민주주의에 의한 부족연맹에서 전제적 군주권을 확립한 거란국 건국이라는 단계로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사서(史書)에는 "백관(百官)의 청()을 들어 단()을 쌓고 제위(帝位)에 올라 대성대명황제(大聖大明皇帝)’라 칭하고 연호를 신책(神冊)’이라 하였다." 나라 이름은 족칭(族稱)을 그대로 사용해서 거란국(契丹國)이라고 했다.

 

야율아보기의 거란국 건국은 몇 가지가 어우러져 이루는 결과물이다. 중원에는 곧 당나라가 퇴조하여 북 중국과 북방초원에 권력의 진공이 발생한 시대적 요소와, 농업과 유목이 교차하는 지역에 농경이 유입되면서 세력이 강성해지는 지리적 요소, 유입되는 한족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들의 역량을 사회의 발전에 직접 기여하게 조정하여 결국 자신의 역량으로 창출해낸 인화 요소가 거란국 건국의 주요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세계사와 동아시아 역사의 한 주역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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