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자(소유단체): 칠***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仁穆王后御筆 七言詩)」는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이다. 종이바탕에 4행으로(각행 7자) 썼으며 근대에 족자로 장황되었다.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裵吉基)의 1966년 발문이 있다. 바탕은 보존이 양호한 편이며 다만 줄[行] 사이가 좀 더 밝다. 한편 어필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濟月堂)이란 스님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 있다. 칠장사는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한 1623년에 인목왕후가 친정아버지와 아들(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아 중창한 사찰로 이곳에는 인목대비가 썼다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사경>이 전래되었는데(현 동국대박물관 소장), ‘인목왕후 칠언시’와 서풍이 같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어필과 비슷하며 그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따라 썼다.
이 어필을 나무판에 모각한 것(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과 검은비단에 금니로 모사한 것이 전하는데(국립중앙박물관, 德 2053) 모두 이 어필과 자형이 같다. 다만 모본에서는 칠언절구 28자를 3행으로 배열하고(각행 10자) 글자 사이를 조절하였다. 조선시대 열성(列聖)의 어필이 많이 모각되었는데, 이처럼 모각된 어필의 원적(原蹟)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특히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s_kdcd=... 2020년 1월 2일 검색.
첫댓글 칠언시에 대한 서체...잘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늙은 소는 힘을 다한지 이미 오래네.
목이 상하고 가죽은 늘어져 졸기만 한다.
밭갈이도 끝나고 봄비도 촉촉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드는가.
아들(영창대군)도 죽고 아버지도 사사되고, 본인은 서궁에 유폐되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인목대비의 아픔이 잘 나타난 시인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남편(선조)에게 글씨를 배웠는지 선조 필체를 닮은 글씨도 훌륭하네요.
늘 한시를 유창히 해석해내시는분들을뵈면 존경스러운마음이듭니다
글 읽는것도 한글자읽고 건너띄어야하는 실력이라 얼마나 많이공부하셨는지 늘 저의 친정아버님도 한시를즐기셨습니다
잠시 배웠던 저희는 사용을않으니 그나마 조금 알던글자도 다 잊은지오래네요
좋은글씨체 잘 보고갑니다
구중궁궐 권력에 비화
요즘 정치세대 하고
비교 하자면 조선시대나
지금세대나 붕어빵~~
언젠 감빵갈지 모르니
위에 계신 분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정치 하세요
西宮門閉 彛倫斁, 北闕雲深 日月昏(서궁문폐 이윤두, 북궐운심 일월혼)
서궁 문이 닫히니 윤리가 무너졌다., 대궐 위엔 구름이 짙어지고 해와 달도 빛을 잃었구나.
위의 시는 저의 11대조께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마저 서궁에 유폐시키자 이를 탄식하며 지은 시입니다.
권좌에 있을 때 권력을 남용하면 반드시 후과를 치룹니다. 이는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은 듯 싶습니다.
옳으신말씀이십니다
인간은 늘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야한다고생각합니다
가슴아린 시구로 되어있군요
명필의 상궁들이 늘 대필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갈히 참 바른체로 쓰여져서 보는이도 마음이 정갈해지는듯합니다
귀한 칠언시 잘 보고갑니다
역사의 교훈을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 상호간의 평등과 정의보다는 남을 억누르러는 것이 돈이나 물질 혹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속성(시대상에 따라 혹은 개인적 성품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이기에 결국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규정도 과잉적 일반화가 아닌가 쉽다. 우리 모두 무지한 도덕과 윤리 판단을 함에도 자기 자신에게는 관용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인지하는지 모른다.
정말 공감할 말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