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10, 2024 연중 제32주일
by 김레오나르도 posted
-중시, 경시, 무시 가운데서 나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첫째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가난한 과부의 봉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와 비교되는 부자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부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주인공은 과부란 말인가요? 부자보다는 과부가 주인공인 것은 맞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나 한다하는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고 주님에게는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인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 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은 누가 더 많이 내나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내는 사람을 반기고 사랑하고 중시하는 눈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누가 더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지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최고 주인공은 보고 계시는 주님이시고, 과부를 중시하시고, 과부의 얼마 안 되지만 전부를 봉헌하는 그 봉헌을 높이 치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치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녀야 할 시각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여전히 비 복음적인 시각 곧 세속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주님의 공동체라고 하는 데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주류에 속한 사람과 비주류에 속한 사람이 있으며, 주류에 의해 비주류는 경시나 무시를 당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시각은 주류가 비주류를 경시하거나 무시합니다.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합니다. 제가 저를 봐도 일생 관구장이나 원장을 많이 하였으니 주류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의도하지 않았어도 주류적인 시각으로 비주류를 보고 판단하였으며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했지요. 그런데 연민의 눈은 경시와 무시보다는 낫지만 미천하고 비천한 이를 중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미천한 이들이 늘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에 세우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에 세우셨으며, 그들 가운데 계셨고 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계셨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미천한 이들을 늘 중시하고 높이 올리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찬미하는 대표적인 분이 마리아십니다. 마리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고 내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고 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셨습니다.” 미천한 이를 연민의 눈으로 굽어보실 뿐 아니라 들어 높이시는 주님임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부에게서도 배우고 주님께도 배워야 합니다. 과부에게서는 미소할지라도 온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는 미천한 이를 경시나 무시하지 않고 중시하는 것을 오늘 배워야겠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