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망했는데 家門이 무슨 소용" 全재산 팔아 독립운동
영국의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인 이튼 스쿨.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튼스쿨의 한 학급출신 전원이 전쟁터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튼 스쿨의 권위는 바로 졸업생들이 보여준 이런 사회적 책임에서
나온 것이다. 1980년대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 때도 그랬다. 아르헨티나가 보유한 엑소제 미사일은 전파교란이 되지않는 첨단무기라서 영국 군함에 치명적인 무기였다. 군함을 향해 날라 오는 엑소제 미사일의 방향을 교란시키기 위해서 헬기 조종사가 직접 미사일의 앞 방향에 쇳가루를 뿌려 미사일이 군함으로 가지않고 위로 솟구치도록 유인하는 방법뿐이었다. 이 위험한 일을 영국 왕실의 에드워드 왕자가 담당했다고 한다. 미사일이 헬기를 명중시킬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왕자가 직접 해군 헬기를 조종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영국이라는 사회이다. 오죽하면 영국 신문에서 근심이 가득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여왕도 어머니이다'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을까. 영국 귀족의 권위는 이런 데에서 나온다.
우리에게도 누란의 위기에 처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한 집안이
있다.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집안이 바로 그렇다. 이회영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11세 후손이다. 이회영 집안이 한국을 대표하는
경반(京班:서울에 거주하던 양반)으로 알려진 이유는 이항복부터 시작해서 8대동안 계속해서 판서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판서는 요즘으로
치면 장관급이다.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한 사례는 전국서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8명의 판서 가운데 6명은 영의정을 지냈고, 1명은
좌의정을 지냈다. 그래서 이 집안에는 '상신록'(相臣錄)이라는 이름이 붙은 특별한 문집이 있을 정도이다. 재상을 지낸 이들의 행장을 모아
놓은 문집이라는 뜻이다. 재상의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집안은 화려했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그 화려함은 치열함으로
바뀌었다.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그 많던 재산과 목숨을 바치면서 초개처럼 바쳤던 것이다. 백사의 10세 후손인 이유승(李裕承)은 고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그에게는 6명의 똑똑한 아들이 있었다. 첫째 건영(健榮·1853~1940), 둘째 석영(石榮·1855~1934), 셋째 철영(哲榮·1863~1925), 넷째 회영(會榮·1867~1932), 다섯째 시영(始榮·1869~1953), 여섯째 호영(頀榮·1875~1933)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명망가 집안에서 자란 이들 6형제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1910년 12월 혹한 속에서 만주 벌판으로 망명을 결행한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이는 조선왕조에서 8대동안 판서를 지낸 집안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방하면서도 자존심이 강했던 넷째 아들 이회영이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내린 결단이었다. 6형제에 딸린 가솔들을 전부 합하면 60명의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한 집안 60명 전체가 집단 망명을 한 셈이다. 60명 가운데에는 데리고 있던 노비들도 일부 포함됐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씨 형제들은 노비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하소'를
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망명하기 전에 노비들이 각자 길을 갈 수 있도록 신분해방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노비들은 행동을 같이 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시영은 일찍이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김홍집의 사위였던 그는 평안도 관찰사라는 고위 벼슬에 있었다. 그러나 형의 권유에 따라 기득권을 포기하고 풍찬노숙의 망명길에 따라 나섰다. 당시 이들이 살았던 집은 서울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일대였다.
현장 답사결과 현재의 YWCA 건물과 뒤편의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의 앞부분 일대가 바로 그 집터로 확인되었다. 명동성당 정면의 오른쪽 편에 서 있는 수령 150년 가량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이회영의 아버지인 이유승이 심어 놓은 나무라고 한다. 명동의 터줏대감이 바로 이회영 집안이었던 것이다. 만주로 망명할 때 이 집을 평소 친분이 있던 육당 최남선에게 싼값에 팔고 갔다. 집뿐만 아니라 전답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조상에게 제사지내기 위한 용도의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나라가 통째로 망했는데 조상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였다. 여기에 둘째였던 이석영의 재산까지 합해졌다. 그는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양자로 입양됐는데, 양아버지였던 이유원의 재산이 자그만치 2만석이었다. 2만석 재산을 상속받았던 이석영은 이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형제들과 함께 망명길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현금이 40만원이라는 거금이었다고 한다.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00억원 정도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6형제가 집안의 전 재산을 처분한 600억원을 가지고 만주로 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독립을 위해서는 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관 양성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11년에 만주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가 됐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10년 동안 약 3000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만주 일대에서 이 학교에 몰려든 학생들의 수업료와 생활비는 일체 무료였다.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려는 청년들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경비는 이회영 집안에서 가져간 돈에서 충당되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독립운동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서 핵심전투병력으로 참가했다.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흥무관학교에서 받은 정신무장과 훈련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해방후에 이시영이 설립한 신흥대학으로 계승되었다. 신흥대학은 현 경희대의 전신이다. 이회영을 포함한 이들 6형제는 만주는 물론이고, 베이징, 텐진, 상하이 일대를 오고가면서 수많은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고국에서 가져온 자금도 바닥나자 그들은 이역만리에서 비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27년 환갑이 넘은 나이로 텐진의 빈민가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던 이회영을 만난 한 친지는 이렇게 술회했다. "남개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딸 규숙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조선 제일의 명문가 후손이 딸의 옷까지 팔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6형제 가운데 시영만 제외하고 5형제는 모두 중국에서 죽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6형제의 자식들인 규(圭)자 항렬들 대부분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후손들에 따르면, 이회영 집안이 보여준 나라사랑의 정신은 중시조인 이항복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왜병의 추격을 피해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피난가려 했다. 당시 압록강변에서 임금의 옷자락을 붙들고 만류한 신하가 도승지였던 이항복이었다고 한다. 임금이 자기 백성과 영토를 버리고 떠나면 임금의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이항복의 신념은 후손들에게 깊이 각인됐던 것 같다. 한일합방 이후 이 집안이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나선 배경에는 이항복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항복의 유적 가운데 하나가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고 뒷편 암벽에 새겨져 있는 붉은색의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이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이다. 필운동이라는 명칭의 유래도 이항복의 호에서 유래했다. 배화여고 아래쪽에는 이항복이 거처한 생가 일부가 남아있다. 필운대는 이항복이 매일 아침 이 일대를 산책하면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장소라고 전해 진다.
14. 경북 영양의 조지훈 집안
"재물-문장-사람만은 안빌린다" 꼿꼿한 '三不借 지조'
300년 이어온 가훈…선비정신 지녀
'인걸은 곧 지령(地靈)이다'는 중세적 자연관을 아직까지도 신봉하는 '풍수매니아'들이 있다. 이들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태어난 경북 영양군 일월산 자락 주실(注谷) 마을을 필수 답사 코스로 여긴다. 이 집안에서 학자가 무더기로 배출된 원인이 풍수와 관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관들은 주실의 370년된 종택 앞에 위치한 삼각형 모양의 문필봉(文筆峯)이 바로 인물 배출의 진원지라고 주장한다. 집터나 묘터 앞에 문필봉이 자리잡고 있으면 그 후손들 가운데 문필을 다루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를 전적으로 수긍하기도 어렵고 부정하기도 어렵지만, 조지훈 집안에선 박사만 14명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저명한 대학교수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사실이다. 고려대 교수를 지낸 조지훈(趙芝薰ㆍ본명 동탁)을 비롯하여, 독립 운동사를 전공한 조동걸(趙東杰·국민대), 국문학 분야의 조동일(趙東一·서울대), 한국사의 조동원(趙東元·성대), 미생물학 분야의 조동택(趙東澤·경북대), 공학 분야의 조동성(趙東星·인하대), 경제학의 조성하(趙星河·고려대) 교수가 이 동네 출신이다. 조지훈의 아버지인 조헌영도 한의학 분야에 이름 있는 학자였다. 6·25 때 납북된 그는 1988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북에서 한의학자로 계속 활동하였다. 현재 북한의 이름 있는 한의학자들 상당수가 그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일본 중앙대 영문학과를 나온 조헌영이 엉뚱하게 한의학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유학시절 병에 걸린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친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독학으로 「동의보감」을 연구하다가 그만 전문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해방 후 조헌영이 저술한 「동양의학사」와「통속한의학원론」은 지금도 한의학계의 고전으로 일컬어진다. 주실의 조씨들이 식자층들로부터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집안의 독특한 가풍때문이다. '지조'를 중시하는 가풍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서머셋 몸이 그랬던가! "인간의 속성이란 일관성이 없다" (Man is inconsistent)고. 이해타산 따라서 '엎었다 뒤집었다' 하면서 사는 것이 범부의 속성이지만, 이 집안 사람들은 일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집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평판을 얻기까지는 현실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 전통은 10~20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 집안은 '검남'(劍南)으로 불리웠다. '칼 같은 남인 집안'이라는 뜻이다. 조선후기는 노론의 시대였으므로 야당이었던 남인은 대략 200년 동안 정권중심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소외된 집단이 취하는 행동은 2가지이다. 하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체제 밑으로 들어가 굴복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굶어 죽더라도 아쉬운 소리는 절대로 안하는 노선이다. 조씨들은 200년 넘게 후자의 길을 택하였다. 자존심을 지키면서 사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 기상이 칼과 같이 예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검남'이다. 하지만 삶이라고 하는게 칼만 가지고 살수는 없다. 칼을 감쌀수 있는 칼집이 없으면 이빨이 빠지는 법이다. 검남들은 칼집, 즉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품격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삼불차'(三不借)라고 하는 가훈을 수백년 동안 지켜왔다. '삼불차'는 '3가지를 빌리지 않겠다'는 정신으로서, '재불차'(財不借:재물을 빌리지 않는다), '문불차'(文不借: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인불차'(人不借:사람을 빌리지 않는다)이다. '재불차'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뒷받침이 뒤따라야 한다. 돈없이 품격을 유지하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렵다. 그 뒷받침 가운데 하나가 현재 종가집 앞에 있는 문전옥답 50마지기이다. 이 50마지기 논은 3백년 넘게 유지되어 오는 조씨 집안의 토지라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논은 임의로 팔수가 없는 집안의 성스러운 전답으로 여겨지고 있다. 근검절약하면서 재물의 관리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주실 여자들은 직접 길쌈을 하지 않고 옷감을 시장에서 사서 입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문불차'는 주실마을을 전국 최대의 박사동네로 만든 정신적 바탕이 된 가훈이다. 문필봉 앞에다가 동네터를 잡은데서도 조씨 집안이 학문을 중시한 것을 알 수있지만, 이들이 문필봉만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선비의 실력은 학문과 문장력에서 결정된다고 보고, 독서에 매진했다. 서너살때부터 책을 붙잡고 노는 습관이 이 집안의 가풍이었다. '인불차'는 양자를 들이지 않겠다는 각오이다. 양자를 들이지 않으려면 아들을 반드시 낳아야 한다. '재불차'나 '문불차'는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겠지만, 아들 문제 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인데, 어떻게 혈손으로만 계속해서 대를 이어올 수 있었을까. 그 비방이 궁금하였다. 하지만 필자도 인불차에 관한 비결은 입수하지 못하였다. 아마 외부인에게는 발설하지 않는 대외비인 모양이다. 이러한 '삼불차'의 정신은 수백년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주실 조씨들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에도 당당하게 인생을 살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보여주었던 인생행보도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하여야 이해가 간다. 그는 시인이라기 보다는 지사(志士)로서의 삶을 살았다. 필자도 시 보다는 「지조론」의 저자로 조지훈을 기억한다. 그만큼 「지조론」은 읽는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다. 몇 년전 모 월간지에서 설문 조사한 한국의 명문가운데에도 「지조론」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수 없기 때문이다"는 내용의 「지조론」은 힘이 있다. 문장의 힘은 결코 화려한 레토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지훈이라는 인간이 걸어갔던 인생행적에서 묻어 나오는 파워인 것이다. 그는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책 잡힐 행동을 하지 않고 살았던 소수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좌와 우가 격렬하게 부딪치는 한국 현대사에서 그가 품격을 지키면서 살 수있었던 배경에는 300년 넘게 집안에 내려오는 '삼불차'의 정신이 버팀목 역할을 하였으리라고 여겨진다.
◆조지훈 宗宅과 文筆峯
풍수에서는 집터 바로 앞에 자리잡은 산을 책상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안산(案山)이라고 부른다. 안산은 볼록렌즈와 같은 작용을 한다고 본다. 안산이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그 터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상모습처럼 평평한 형태의 산은 토체(土體)라고 해서 군왕이 나온다고 여긴다. 음양오행의 세계관에 의하면 토는 제왕이 지녀야할 필수덕목인 균형감각을 상징한다. 둥그런 모양의 산이 두 봉우리가 높낮이를 이루면서 연거푸 이어져 있으면 마체(馬體)라고 부른다. 마체는 말안장과 같다고 보고 여기에서는 말을 탈 수 있는 고관대작이 나온다고 믿는다. 조선시대 집 터에서 가장 선호하는 안산의 형태는 문필봉이었다. 마치 붓의 끝처럼 뾰쪽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는 학자와 문필가를 가장 우대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그 집안에 유명한 학자가 배출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명문가의 제1조건은 바로 학자 배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학자가 배출되기 위해서는 집 터 앞에 문필봉이 자리잡은 곳을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문필봉의 영향을 받아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는지, 아니면 원래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그런 집 터로 이사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가 배출된 집터는 문필봉과 상당한 함수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지훈 생가의 문필봉은 집터에서 아주 가깝다. 가까울수록 비례해서 발복(發福)이 빠르다고 믿었다.
15. 서울의 鹿川 李濡집안
조선 왕조의 로얄 패밀리들은 왕조시대가 끝난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태조 이성계의 혈통인 전주 이씨들을 세분하면 124개 파로 나뉘어진다. 조선시대 역대 왕의 왕후였던 비(妃)에서 출생한 왕자를 대군(大君)이라 하고, 왕후가 아닌 빈(嬪)이나 후궁사이에서 출생한 왕자를 군(君)이라고 부르는데, 이들 대군과 군은 각파의 시조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124개 파는 대군과 군의 숫자를 모두 합한 숫자이다. 전주 이씨 124개 파 가운데 가장 회자되는 집안이 세종의 다섯째 아들 후손인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이다. 인물이 제일 많이 배출되었다는게 세간의 중론이다. 조선시대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을 20명이나 배출했다는 사실이 좋은 예다. 연임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 기간까지 계산하면 총 40대에 걸쳐 한성판윤을 지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한성판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일 것이다. 다른 벼슬보다도 유달리 한성판윤이 많았던 배경에는 왕손집안이라는 책임감도 간접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왕궁과 종묘사직이 자리잡은 수도 한양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은 국가 일이기도 했지만, 자기 집안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집안에서 손꼽는 인물이 광평대군의 10대 후손인 녹천(鹿川) 이유(李濡:1645~1721)이다. 숙종때 한성판윤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서울을 방어하는 북한산성 축조였다. 국가 사업에 그냥 이름만 내건 게 아니라, 조정의 온갖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몸을 던져 이뤄낸 역사(役事)였다. 수도 방위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임진왜란 때 증명됐다. 왜군이 쳐들어올 때 왕실에서는 전투다운 전투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수도를 넘겨줘야만 하였다. 서울 함락은 두고두고 시비 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남한산성 축조였다. 평지보다는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산성에다 거점을 두고 서울을 방어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쌓은 남한산성도 안전하지 못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게 포위 된지 45일만에 항복하고 말았으니까. 병자호란의 치욕을 맛본 조정에서는 서울 북쪽을 방어할 수 있는 산성 구축을 생각했다. 북한산성 축조는 숙종 이전인 효종 때부터 북벌론이 등장하면서 얘기가 나왔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반대가 그만큼 심했다. 반대파의 요점은 3가지였다. 동대문과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기존 도성(都城)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북쪽에 산성을 쌓으면, 청나라에서 자신들을 겨냥한 것으로 여기고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그 의심을 어떻게 피해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난공사라서 노동력과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도 강력한 반대이유였다. 녹천은 기존 도성을 고수해야한다는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도성 가운데 무너진 부분을 개축하였다. 그때 개축된 부분이 현재 동대문 북측벽의 돌에 새겨져 있는 '절충 김수선'(折衝 金守善), '사과 유제한'(司果 劉濟漢)과 같은 글씨들이다. 후일에 발생할지 모를 부실공사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당시 공사책임자 이름들을 돌에다 새겨놓았던 증표이다. 청나라의 의심을 피해가기 위한 묘안으로 녹천은 "있는 성을 보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준비했다. 녹천이 이 묘안을 생각해 내자 그동안 청나라의 문책을 두려워하던 조정 대신들은 비로소 북한산성 축조에 동의했다. 녹천은 북한산성 축조에 솔선수범을 보였다. 산성 축조가 국가의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당연히 국가예산을 사용해서 공사를 진행했지만, 산성의 필요성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을 뿐 아니라 당시 영의정으로서 공사의 총책임자였던 만큼 자신이 뭔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을 느꼈을 법하다. 백성들에게 북한산 암벽 봉우리까지 무거운 돌을 나르게 하면서 자신은 입만 가지고 명령만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과거 평양감사를 지낼 때에도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는 상황에 이르자 '내가 어찌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몇 달 동안 죽만 먹었던 인물이다. 현재 지하철 1호선 '녹천역'은 녹천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녹천은 북한산성 축조 당시 이곳에 살다시피하면서 공사를 독려했다. 녹천의 가족과 노비를 비롯한 친인척들도 공사 인부들의 밥을 해주고 생필품을 측면에서 지원하느라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 '녹천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다.
녹천의 11대 종손인 이병무(李丙武·58)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들어간 이 집안의 사재가 대략 쌀 300석 규모라고 한다. 이런 솔선수범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여론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사재를 털면서까지 북한산성 축조를 고집한 배경에는 왕가로서의 긍지와 사명감, 도덕적 책무가 상당부분 작용하였다고 여겨진다. 지하철 '창동역'도 북한산성 공사때 소요된 기자재 창고가 있던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평창동'이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산성과 서울 도성 사이의 중간 지점이 현재의 평창동인데, 이곳에는 유사시 북한산성에서 사용할 군량미를 저장하던 창고인 '평창(平倉)'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녹천은 당시 서울 인구의 1년치 군량미를 약 70만석 정도로 예상하고, 이 가운데 45만석은 평창에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도방위에 철저하게 대비한 것이었다. 녹천 손자로서 경기도 광주 부윤을 지낸 이명중(李明中·1712~1789)도 선대의 유지를 이어받아 남한산성 보수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녹천을 포함, 서울시장을 20명이나 배출한 이 집안의 가풍은 '수도방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산리 전투의 이범석(李範奭) 장군, 대한제국의 러시아 초대 공사로서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자결한 이범진(李範晉), 그의 아들이자 이상설, 이준을 도와 헤이그 밀사사건의 3대 인물이었던 이위종(李瑋鍾)도 선대의 가풍을 이어받은 후손들이다.
현재 녹천의 종택은 서울 강남의 수서에 있다. 서울 인근의 전주이씨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종택이기도 하다. 금체(金體:둥그런 봉우리) 형국으로 둘러싸인 광수산(光秀山) 산자락의 13만평에 광평대군 이하 700여기의 묘소와 함께 보존돼있는 종택은 조선 시대의 장제(葬制)를 잘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재이기도 하다.
전주 이씨는…125개파중 104개파 남아
왕자는 파시조(派始祖)가 될 수 있지만,조선왕조의 역대 왕은 '군왕불감기조'(君王不敢其祖: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특정 종파의 조상이 될 수 없다)의 정신에 따라 종조가 될 수 없다. 조선왕조 역대 왕자의 숫자는 총 125명이었으나 이 가운데 후손이 끊어진 왕자는 21명이다.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는 파는 104개 파이다. 전주 이씨는 현재 남한에만 280만명, 북한에는 14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후손이 가장 많은 곳은 효령대군파로 35만명 정도라고 한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펴낸 '전주이씨대관(全州李氏大觀)'을 살펴보면, 근래에 박사를 포함하여 학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파는 정종의 4남인 선성군파(宣城君派)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역대로 관리를 많이 배출한 곳은 세종의 5남인 밀성군파(密城君派)이다. '왕손'의식이 강했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파에 속했다. 전주이씨 종친회는 세부 조직이 잘되어 있기로 유명하다. 횡적으로는 104개파 종회가 각각 활동하고 있다. 종적으로는 전국에 시 ·도 지원이 설치되어 있고, 그 밑에 구 ·군 분원이 있고, 다시 면 ·동 단위로 세분화돼 움직이고 있다.
16. 전남 昌平 고경명 집안
솔선수범과 인재양성―전남 昌平의 高敬命 집안 '奇, 高, 朴'.
전남 광주 일대에서 500년 동안 명문으로 내려오는 기씨 집안, 고씨 집안, 박씨 집안을 일컫는 표현이다. 아직까지도 이 세 집안은 '혼인하고 싶은 3대 집안'으로 꼽힐 만큼 그 후광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자격요건은 대략 3 가지로 압축된다. 퇴계, 율곡과 같은 걸출한 학자를 배출했거나,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바쳤거나, 아니면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많이 나온 집안이다. 기, 고, 박은 각각 그 세가지 요건에 해당된다. 기씨 집안은 퇴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라는 걸출한 학자를 배출했다. 고씨 집안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아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을 비롯한 삼부자(三父子) 모두가 목숨을 바쳤다. 박씨 집안은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 이래로 많은 벼슬이 나온 집안이다. 고씨 집안은 '삼부자 불천위'(三父子 不遷位: 위패를 옮기지 않음) 집안으로 유명하다. 보통 제사는 4대까지, 즉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고조부까지만 지내도록 되어 있다. 5대조 위패는 옮겨서 묘소 앞에 묻는다. 하지만 대학자가 되거나 국가에 큰 공로를 이룬 인물은 4대가 지나도 위패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도록 국가에서 지정한다. '불천위'는 그래서 대단한 영광이다. 불천위가 한 명만 나와도 명문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씨 집안은 고경명과 그의 큰아들 준봉(▩峯) 종후(從厚)와 둘째 아들 학봉(鶴峯) 인후(因厚) 3명이 함께 불천위를 받았다. 조선조 500년간 한 집안에서 삼부자 불천위를 받은 것은 이 집안이 아마 유일할 것이다. 제봉이 전라도 의병장으로 금산 전투에 참가하던 시점은 그의 나이 60세였다. 존경받던 원로가 앞장서 전쟁터로 나가자 이에 감격한 6000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그의 뒤에 구름같이 모였다. 제봉이 말에 올라타고 전쟁터에 나가면서 작성한 격문이 오늘날까지도 식자층들에게 회자되는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 최치원의 '황소격문'(黃巢檄文),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와 함께 3대 격문에 들어갈 만큼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옷 소매를 떨치며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서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 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마상격문은 광주, 남원, 전주, 여산을 비롯한 전라도 선비들의 심금을 울렸다.
제봉의 동생이었던 경신(敬身)은 전투에 필요한 말을 구하러 제주도에 갔다 오다가 풍랑을 만나 익사했고, 또다른 동생인 경형(敬兄)은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다. 당시 32세였던 고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는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서 죽었고, 40세였던 큰아들 종후는 1년 뒤 진주성 싸움에서 숙부인 경형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사한 두 아들 모두 대과 급제를 한 수재들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당시 16세였던 막내 아들 청사(晴沙) 용후(用厚)다. 용후가 따라 나서려 하자 제봉은 '너는 나이도 어리고, 집안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타이른다. 임란이 끝난 후에 대과에 급제한 용후가 아버지와 형님들을 비롯한 집안의 모든 기록들을 정리하여 세상에 남겼다. 그러한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 청사를 가리켜 호남에서 떠도는 표현이 '無晴沙(무청사)면 無霽峯(무제봉)'이란 말이다. 막내아들 청사가 없었더라면 제봉 집안의 행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제봉의 아들 가운데 가장 후손이 번창한 아들은 둘째 학봉이다. 학봉의 후손들은 담양 옆의 창평(昌平)이라는 지역에 대대로 거주 했다. 학봉의 처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주한 것이다. 원래 이 집안의 본관은 장흥이지만, 학봉의 후손들이 창평에 많이 살았던 탓으로, 흔히 '창평 고씨'라고도 부른다.
갑오경장(1894)이후로 진행되던 일제의 침략이 이루어지자 학봉의 후손들은 강경파와 온건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 대응한 것 같다. 강경파의 방법은 의병활동이었다. 강경파를 대표하는 인물은 학봉의 11대 후손인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1848~1907)과 청봉(晴峰) 고광수(高光秀: 1875~1945)이다. 고광순은 학봉의 종손이면서 호남 의병장의 중심이었다. 선대의 명성을 당당히 계승한 것이다. 당시 60세의 나이였던 고광순은 1907년 10월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연곡사에서 같이 전사한 12명의 동지들도 대부분 고씨 집안 사람들 이었다고 전해진다. 구례 사람인 매천 황현은 고광순의 행적을 '매천야록'에 기록하면서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근래의 노산 이은상도 '섬진강'에서 고광순의 충절을 노래한바 있다. 의병장 고광순을 도와 일체의 경비를 댄 사람이 천석꾼 고광수이다. 고광수 역시 '창평 고씨'라는 자존심 때문에 의병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했을뿐만 아니라 의병활동에 소요되는 일체의 비용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천석의 재산을 모두 의병활동에 바쳤고, 그가 살던 남원 효기리 응령에 있던 고래등 같던 기와집은 일본군에 의하여 불타 버렸다. 해방되기까지 금강산 일대로 숨어다녀야만 했다. 온건파의 방법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었다. 이 사업을 주도한 인물은 학봉의 10대 후손인 고정주(高鼎柱:1863~1934)였다. 그는 구한말 규장각을 통솔하는 직각(直閣) 벼슬을 지냈다고 해서 보통 '고직각'으로 불리운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이 맺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창평에 돌아와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운다. 호남 최초의 근대 학교였다. 창흥의숙에서 개설한 과목은 한문, 국사, 영어, 일어, 산술 등 당시로서는 신학문들이었다. 교사들의 월급과 학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은 만석꾼이었던 고정주가 댔다. 창흥 의숙은 후일 창평 보통학교로 커졌고, 현재에는 창평초등학교로 변해 있다. 창흥의숙에서 배출된 인물이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가인 김병노 등이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高在旭)은 고직각의 손자로, 학봉의 12대 후손이다. 70년대에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고재필(高在珌), 대법관을 지낸 고재호(高在鎬)등이 모두 在(재) 字 항렬이다. 재자 항렬 다음에는 錫(석) 字 항렬이다. 서울대 부총장을 지낸 고윤석(高允錫), 헌법재판소 판사를 지낸 고중석(高重錫), '무등양말' 창업자 고일석(高馹錫)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일석은 선대의 인재양성 전통을 이어서 창평고등학교와 창평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광주시 褒忠祠는/ 고경명 등 순절한 선비 5명 모셔
포충사는 광주시 남구 원산동에 있는 사당이다. 임란때 금산전투와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5명의 선비를 모셔 놓았다. 고경명(高敬命)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이다. 이들 5명 외에도 특이한 이름을 새겨놓은 비석이 있다. 정문을 지나 30미터쯤 가다 보면 왼쪽 비탈길에 가로 1m50㎝, 세로 2m 크기의 검정색 쑥돌이 바로 그것이다. 이 돌이 바로 '충노비'(忠奴碑)라고 불리우는 비석이다.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이라는 두 노비의 충절을 잊지 않기 위하여 고씨 집안에서 별도로 세웠다. 봉이와 귀인은 금산전투에서 주인인 고경명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듬해의 진주성 싸움에서 장남인 고종후와 함께 전사했다. 두 사람은 노비 신분이었지만 그 충절이 양반과 다름없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돌에 새겨 후대에 남겨 놓은 것이다. 노비 이름을 돌에 새겨 남긴 사례는 흔치 않다.
17. 경북 慶州 '만석꾼' 崔부자 집
"권력과 富 동시에 가질순 없다”進士이상 벼슬 멀리해
경주 최부자집/ 후손들 광복후 私財털어 大邱대학 세워
"파장 기다려 물건 사지말고 흉년에 땅 사지 말라"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 것이 '성경' 말씀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부자가 존경받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경주의 최 부자집은 부자면서도 존경을 받은 집안으로 조선팔도에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집이었던 최 부자 집은 12대 동안 계속해서 만석군을 지낸 집안으로 유명하다. 만석군이라 하면 일년 수입이 쌀로 만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급의 부자이다. 12대는 대략 300년의 기간에 해당한다. 1600년대 초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부를 유지했다. 어떻게 관리를 했길래 자그만치 300년 동안이나 만석군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최 부자 집의 종손 최염(崔炎·68)씨 증언과 이런 저런 취재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이 집 특유의 경륜과 철학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최 부자 집의 철학 가운데 첫째는 '흉년에 땅을 사지 않는다' 였다. 흉년이 들면 수 천명씩 굶어 죽는 시대였다. 흉년이야말로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흰죽 논'까지 등장했다. 다급하니까 흰죽 한 그릇 얻어먹고 그 대가로 팔게된 논을 말한다. 그러나 최 부자 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런 금기는 또 있었다.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석양 무렵이 되면 장날 물건들은 값이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다른 부자집들은 오전에는 절대 물건을 사지 않고 파장 무렵까지 인내하면서 '떨이' 물건을 기다렸다. 최씨 집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항상 오전에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은 제일 질이 좋은 물건을 최 부자 집에 먼저 가지고 왔다. 이 집은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철학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였다. 돈이라는 것은 가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시점을 지나면 돈이 돈을 벌게된다. 멈추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최씨들은 만석에서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이상은 내 돈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은 소작료 할인이었다. 다른 부자집들이 소작료를 수확량의 70% 정도 받았다면, 최 부자는 40% 선에서 멈췄다. 소작료가 저렴하니까 경주 일대의 소작인들이 앞다퉈 최부자 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팠지만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쳤다.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나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였다. 최 부자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썼다. 그 다음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 대접에 사용했다. 최부자집 사랑채는 1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부자집이라고 소문나니까 과객들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독특한 쌀 뒤주가 있었다고 한다. 두손이 겨우 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든 뒤주였는데, 과객이면 누구든지 이 쌀 뒤주에 두 손을 넣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한 뒤주였다. 다음 목적지까지 갈 때 소요되는 여행경비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입구를 좁게 한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은 가져가지 말라는 암시였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던 과객들은 정보 전달자 역을 했다.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조선팔도에 최 부자집의 인심을 소문내고 다녔다. '적선지가 (積善之家)'란 평판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이 집을 무사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었다. 동학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부자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했다. 다른 부자집들은 대부분 털렸지만 최 부자집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집의 평판을 활빈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도 있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를 살펴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으로는 포항까지 아우른다. 주변이 굶어죽는데 나 혼자 만석군으로 잘먹고 잘사는 것은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를 보면 만석꾼 최 부자집은 경주만 의식한게 아니었다. 사방 백리의 범위를 의식하고 살았던 집안이었다. 1년동안 사용하는 3000석 가운데 나머지 1000석은 여기에 들어갔다. 최 부자집의 철학 가운데 특이한 것은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라'이다. 최 부자집은 9대 진사를 지냈다. 진사는 초시 합격자의 신분이다. 이를테면 양반신분증의 획득인 셈이다. 그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집안의 철칙이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돈 있으면 권력도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 집안은 돈만 잡고 권력은 포기했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깝다고 여겼던 탓이다. 벼슬이 높을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은 높아지고, 한번 휘말리면 집구석 절단 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벼슬의 끝, 그러니까 권력의 종착점이 어디인가를 꿰뚫어 본 데서 나온 통찰력의 산물이 '진사 이상 하지 말라'이다. 남자들은 그렇다치고 이 집의 여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 마님이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백동 숟가락의 태극 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 7대 조모는 삼베 치마를 하도 오래 기워입어 이곳저곳을 기워야 했는데, 3말의 물이 들어가는 '서말치 솥'에 이 치마 하나만 집어넣어도 솥이 꽉 찰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너무 많이 기워서 물에 옷을 집어넣으면 옷이 불어나 솥 단지가 꽉 찼다는 말이다. 이 집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모두가 영남의 일류 양반집이었다. 본인들은 진사급이었지만, 만석군이다 보니 사돈이 된 집안들은 명문 집안이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치마양반'이다. 로마 천년의 유지 비결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면, 신라 천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경주 최 부자집의 유지 비결도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1000년 문명을 지탱한 노하우였던 것이다.
경주 최부자집은 교동 69번지에 있다. 뒤로는 내물왕 무덤을 비롯한 왕릉들이 있고, 그 옆에는 계림이다. 집 바로 옆에는 경주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좀 더 왼쪽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살던 집터인 재매정이 있다. 원래 이 집터는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있던 터라고 전해진다. 설총이 태어난 집인 것이다. 현재 이 집의 소유자는 영남대학교 재단이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崔浚)이 해방 직후 모든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영남대학의 전신)을 설립할 때 이 집도 기부했기 때문이다. 최준의 손자이자 종손인 최염씨는 가끔 이 집을 들른다. 그는 사업을 하다가 은퇴하여 지금은 경기도 수지에 거주하고 있지만, 고택 관리는 아직도 종손이 하도록 되어 있다. 이 집터에서 풍수상 중요한 핵심은 안산(案山:집앞에 보이는 산)이다. '이중안산(二重案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말발굽형의 디귿자 형태의 도당산 뒤에 경주 남산의 세 봉우리가 겹쳐져서 보인다.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