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24
2월4일[연중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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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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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Zlf4Pf2i44-
[인천교구 정희채 안셀모(시흥안산지구 청년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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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이요,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치유뿐만 아니라 이미 숨이 끊어진 회당장 딸의 목숨까지 소생시키신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모습에 사람들은 너무 놀라 그야말로 넋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넋’은 다른 말로 ‘혼(魂)’, ‘혼백(魂魄)’,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넋이라는 것은 죽어야 사라지는 것이지만, 갑작스레 큰 충격을 받을 경우, 모든 생각이나 사고가 일시 정지되는데, 이런 상태를 넋이 나갔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치유나 구마, 소생은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놀라운 능력은 그분 안에 하느님께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은혜롭게도 잠시나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하느님 나라를 잠시나마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봅니다. 왜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치유와 구마, 소생 현상을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왜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방식이 좀 다르지만, 예수님 시대 그 역동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치유와 구마, 소생 현상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손가락을 통해 이루어지던 놀라운 일들이 지금 이 시대에는 또 다른 선인들과 의인들을 통해 지속되고 있음을 저는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잘 준비된 의료진들과 누군가의 피나는 연구 끝에 발명된 최첨단 의료기기들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시키고 살려내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싶은 선한 의지를 지닌 의료진들의 얼굴은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난민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그들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후원하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사람들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프고 견디기 힘들어서 겨우겨우 통증을 참아내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이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2천년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사랑의 기적을 각자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계속해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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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불가능한 일은 없다.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존재할 뿐이다.>
두 장애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은 축구, 레슬링, 권투 등 만능선수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79년 권투 시합에서 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치료를 받고 보조기를 쓰면 혼자서 걸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에게 산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정상에 다다르자, 그는 그를 산에 옮겨 준 친구들에게 잠깐만 자리를 피해 달라고 하고는 숨겨 가지고 온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습니다.
다른 한 청년은 어느 날 불량배들에게 칼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는 투지로 노력한 끝에 낙하산 점프의 묘기를 보였고, 특별 장비를 갖춘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며 혼자서 취사, 세탁, 청소 등을 하며 생활합니다.
그는 또한 휠체어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한 세 권의 사진첩을 출간하였습니다. 시련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시련은 어떤 식으로든 찾아옵니다. 그 시련을 대하는 자세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고 실패로도 이끕니다.
그 시련을 대하는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위에 그런 믿음을 줄 사람이 없다면 안 좋은 결말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믿음을 굳건히 지켜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혈병 여인과 회당장은 그러나 믿음을 방해하는 많은 장애들을 만납니다.
하혈병 여인은 처음에 돈이 좀 있었습니다. 돈과 의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전 재산을 다 날렸다면 의사들은 이제 포기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혈병 걸린 여인은 포기를 몰랐습니다. 믿음을 저해하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모시고 가다가 믿음이 약한 종을 만납니다. 종이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회당장은 주저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그런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믿음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혼자 강한 믿음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모든 사람들을 쳐내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먼저 그것을 끊어버릴 용기부터 있어야합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심지어 믿음을 비웃으면 내쫓아버리십시오. 불가능은 없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과 가까이하십시오.
미국의 마리온 라이스 하트 여사는 경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해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경비행기로 그것도 여자가, 84세의 나이로 대서양을 횡단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트 여사가 비행을 배우기 시작한지 겨우 2달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행을 시작한 이유도 ‘혼자 시간을 때우기에 아주 좋다’는 이유뿐이었습니다. 단순히 비행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많아지는 혼자 있는 시간을 규모 있게 보내려다보니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이후로 하트 여사는 ‘나는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세계의 여러 곳을 작은 경비행기로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사가 도착하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환영을 했고 그 때마다 여사는 ‘기진맥진하지만 매우 행복하다’는 소감과 함께 사람들의 환대에 감사했습니다. 하트 여사의 도전은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특별함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불가능하다고 믿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가능하다 믿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을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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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페루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이 왔습니다. 잠시 머물려고 했는데 어느덧 27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가정 방문을 하면서 어린 딸과 함께 사는 눈이 먼 엄마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후원자와 다시 방문했을 때입니다. 후원자는 수녀님께 엄마를 병원에 데려가 보라고 했습니다. 혹시 볼 수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수녀님은 엄마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는 검사한 후에 빛을 받아들이기에 수술하면 다시 볼 수 있을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수녀님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이 자매와 어떤 사이인데 이렇게 데려왔습니까? 수녀님은 선교사라고 했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수녀님의 말을 들은 의사는 수녀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그 엄마의 눈을 뜨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한쪽 눈을 뜨게 하는 비용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께 자기도 착한 일을 하였다고 말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수녀님이 엄마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눈을 떠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싶습니다. 수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한 일도 전염이 됩니다. 후원자의 따뜻한 마음이 의사의 마음을 움직였고, 눈이 먼 엄마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영어 시간에 배웠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동네 길가에 뾰족하게 나온 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지나다니면서 그 돌 때문에 넘어지곤 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입니다. 마을의 한 청년이 곡괭이를 가지고 와서 뾰족하게 나온 돌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빙산의 일각처럼 돌의 일부만 나온 것이지, 커다란 돌이 묻혀있었습니다. 청년이 돌을 캐내기 시작하니,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돌을 치웠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넘어지는 일 없이 길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45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읽었던 글이 생각나는 건, 제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길가에 떨어져 있던 타이어를 옮긴 적이 있습니다. 차들이 다니는 길이고, 자칫 타이어 때문에 사고 날 수 있기에 옮기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복음을 보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종을 위해서 예수님께 치유를 청했던 백인대장이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굳이 오시지 않고, 한 말씀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이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신앙을 갖는다는 건, 증인이 되는 겁니다. 교회가 2000년을 이어올 수 있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나태함에서 성실함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기적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기적이 따라오는 겁니다. 오늘은 중용 23장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하게 하고, 남을 감동하게 하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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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 다른 이야기가 들어가 엮인 전형적인 액자식 구성을 보입니다. 별개의 두 이야기이지만 믿음이라는 주제로 일관성 있게 짜여 있습니다. 그런데 두 이야기에서 믿음의 형태와 주님의 행동 방식은 사뭇 다르게 드러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직접 찾아와 용감하게 치유를 간청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예수님 앞에 감히 나타날 생각을 못한 채 군중 틈에 끼여 소심하게 뒤에서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댈 뿐입니다. 오직 믿음 하나로, 과연 여인은 예수님의 의지 없이도 바라던 바를 얻었습니다. 어떤 교부의 말대로 이 ‘거룩한 도둑질’은 도둑맞으신 분에게서 오히려 칭찬과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여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신 분께 얼핏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30)라는 질문은 어쩌면 그 믿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시려고 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편 야이로에게는 결국 딸이 죽고 말았다는 절망적 현실에서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도록 요구됩니다. “믿기만 하여라.”(5,36)라고 그에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직접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탈리타 쿰!”(5,41) 여인의 치유와는 반대 양상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열두 해 동안 계속된 고통 속에서 더욱 간절해진 여인의 믿음과 어린 딸의 죽음 앞에서 도약하는 아버지 야이로의 믿음 사이 어디쯤 자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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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21-43: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한다. 이것은 모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회당장이 이렇게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계셨다. 많은 군중 틈에서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의사들에게 병이 낫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그의 심신은 피폐해졌고, 죽음에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생명까지도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여인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옷을 만진 것은 믿는 마음의 부르짖음이었다. 육체로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여긴 여인은 마음으로 다가가 믿음으로 하느님께 손을 댄다. 여인은 그 순간 치유되었음을 느낀다. 아드님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숨은 믿음을 보시고, 눈에 보이는 치유를 선사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건강해져라.”(34절)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회당장은 믿었고, 딸은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집으로 가시어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말씀하시고 나서,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세 사도와 함께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소녀를 깨우실 수 있는 분에게는 소녀가 그저 자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41절) 뜻이다. 주님의 목소리에 소녀의 숨이 곧바로 돌아왔다. 소녀는 깨어났고 살아난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주셨다. 소녀는 되살아난 몸으로 일어났고,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었다.(43절) 우리 자신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기 부당한 하혈하는 여인과도 같을 수 있으며, 잠을 자는 소녀와도 같다.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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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마르 5,22-24)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5-36)
1)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여자를고치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믿음’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을 믿어서 불치병을 고친 이야기”로만 해석한다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해석하기도 편하고 강론하기도 편하게 되는데, 그런 해석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라는 오해로 이어집니다.
그 오해는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나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는 좌절과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또는 “믿음만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같은 말은, 사이비 종교에서 흔히 하는 말입니다.
2)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해서 불치병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분명히 있지만, 병이 치유되지 않고 그 병으로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누구는 고쳐 주시고, 누구는 고쳐 주시지 않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믿음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이 더 필요한 것인가?
<34절에 있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여자의 믿음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기적은 여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이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긴 한데, “이제부터는 믿음을 더욱 굳게 가지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병석에 누워 있는 병자에게 문병을 가서,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잃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격려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병은 주님의 뜻이다.”, 또는 “믿음만 있으면 이 병은 무조건 반드시 낫는다.” 같은 말은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심어 주는 말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무슨 병이든지 간에 그것을 잘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병이 낫지 않더라도...
3)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ㄴ-10) 바오로 사도는 어떤 병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고 전해집니다. <통증이 무척 심한 불치병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했던 바오로 사도였지만, 그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가 주님께 치유의 은총을 ‘세 번이나’ 간청했는데도, 주님께서는 그 청을 들어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의 병약한 몸이 오히려 주님의 힘을 증언하기 때문이라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체험합니다.
4) 회당장 야이로에게, 또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자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던 딸이 살아난 것으로 야이로의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졌을까?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까? 여자의 경우에도, 불치병이 완치된 것으로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 바랄 것 없는 상태에서 남은 인생이 행복하기만 했을까?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소녀도, 불치병이 완치된 여자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죽었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몸의 건강’은 하느님 나라에 가는 여행길에 필요한, 또는 중요한 것이긴 한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고,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몸만 건강하고 영혼은 건강하지 못해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면? <지옥은 몸만 건강한 사람들이 가는 곳, 하느님 나라는 몸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만 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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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마르코 복음 5장 21-43절)
<예수님 만나기>
사람들은 회당장의 딱한 사연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듣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놀라운 행적을 기대하며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 길에서 어느 여인과 예수님만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군중도 제자들도 여인의 존재를 몰랐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들과 군중은 마치 지우개로 지우듯 화면에서 사라져버립니다. 당신에게서 치유의 힘이 빠져나간 것을 인지하셨던 예수님과 자신의 몸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느꼈던 여인만이 남아 있습니다. 군중에 휩싸인 제자들의 시선과 군중 속에서 여인을 찾던 예수님의 시선은 분명 다릅니다. 이 장면에서 교회의 신앙과 개인의 신앙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군중과 같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가운데 모시고 있으나 그분의 시선을 모두 따라잡지는 못합니다. 교회의 시선이 따라잡지 못하는 개인의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과 그 사람만 아는 관계입니다. 군중이나 제자들의 호응은 직접 연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교회에 몸담고 있으나 한 개인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치유의 기적은 교회를 통해 주어지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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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우리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던 부인을 고쳐 주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액자처럼 구성된 두 이야기는 모두 믿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하며 소개되는 인물은 ‘야이로’라고 불리는 회당장입니다. 야이로는 히브리 말로 ‘빛을 주신다’ 또는 ‘빛을 밝혀 주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민수 32,41 참조). 그의 이름은 오늘 복음에서 매우 상징적인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으로 이미 죽은 회당장의 딸을 되살려 주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 말씀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죽음도 넘어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도 치유를 넘어 믿음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그에게 병이 낫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두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온갖 노력을 하였지만 병을 고치지 못하고 더 나빠졌습니다. 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던 회당장의 딸은 결국 죽습니다. 모두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아지지 않는 여인과 결국 죽음에 이른 회당장의 딸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절망의 모습들입니다. 이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치유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야이로의 이름처럼 예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굳건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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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우리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 주위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엄청난 군중 사이를 비집고 스승님을 외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자 모두 길을 내주었습니다. 그가 스승님 발 앞에 엎드렸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회당장이 아닌가? 저렇게 높은 사람이 여기 어인 일인가?’라고 말입니다.
그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스승님은 회당장이라는 사람의 집을 향해 걷고 계셨습니다.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듯 군중도 스승님을 호위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시던 스승님이 뒤를 돌아보시며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둘러보시는데 한 여인이 스승님 앞에 나와 울음을 터트립니다. 아주 왜소한 모습에, 남루한 옷차림이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녀가 울음과 말을 섞어 뱉어내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의 스승님을 저는 좋아합니다. 스승님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몸뿐이 아닌 마음의 병에서도 벗어나 건강해지거라.”
다시 길을 가려 돌아서는데 회당장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딸이 죽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에 도착해 딸이 죽어있는 방에 들어갔습니다. 스승님은 그녀 곁에서 손을 잡고 다정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녀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까 그 여인도 일어난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주위의 모든 사람도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넘어져 있던 믿음을 일으켜 세워주신 것입니다.
‘탈리타 쿰, 탈리타 쿰, 탈리타 쿰’ 여인처럼, 회당장처럼 주님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럼 기꺼이 우리의 집에 오시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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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마르코.5,41)
많은 가능성을 선물로 받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더 많이 믿습니다. 본성적인 인간의 한계 때문에 불가능한 것들은 있지만, 그래도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일들은 가능한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잠재력 안에 품고 있는 그 가능성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보게 하는 눈은 신앙의 눈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가능성을 보는 믿음의 눈은 어떤 고난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꿈을 실현하게 하는 힘은 이미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희망이요 모든 가능성이신 주님께서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능성보다 불가능성을 더 믿는 것은 우리가 겪은 좌절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희망을 일깨우기보다 절망을 주는 것은 제각기 가진 상처가 두려워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가능성을 말하지만 주님은 항상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절망을 품지만 주님은 희망을 심어주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희망은 우리 안에서 반짝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잠재우려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깨우십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소란을 떨지만 주님은 부드럽게 ‘탈리타 쿰!’을 명하십니다.
죽음보다 강한 주님의 사랑은 모든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탈리타 쿰’은 사랑하도록 되어 있는 우리의 본성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흐르게 되어 있는 사랑을 막는 것은 죽음입니다. ‘탈리타 쿰’은 우리의 막힌 사랑을 흐르게 하는 부활의 음성입니다.
사도바오로는 히브리인들에게 권유합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 때, 죽음을 이기고 사랑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주님의 말씀 “탈리타 쿰!”은 우리의 현실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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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가 된 지 몇 년 안 되었을 11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자동차 문을 닫다가 허리에 큰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냥 주저앉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근처에 사는 신부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청했고, 이 신부의 도움으로 바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신학생 때 테니스를 무리하게 쳐서 허리를 다쳤었는데, 그 자리였던 것입니다. 입원 후 치료받으면서 다시 일상생활을 할 정도가 되어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도 병원에 또 입원했습니다. 이번에도 11월이었고, 물건을 들다가 주저앉은 것입니다.
그다음 해에는 어떠했을까요? 맞습니다. 또 11월에 또 입원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떠했을까요? 다행히 그 뒤 허리 때문에 입원한 적은 없습니다. 허리 운동을 꾸준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합검진 때, 허리 검사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허리 근육이 잘 발달하여서 이제 허리 아플 일은 없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어서일까요? 더는 허리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11월이 되면 입원했을까요? 아마 ‘허리가 또 아플 거야.’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제한적 믿음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믿음이 중요합니다. 부정적 믿음을 갖게 되면, 여기에서 탈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줍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자기 믿음대로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았습니다. 회당장에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35)
이런 말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일을 비웃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논리를 앞세워서 부정적 믿음을 계속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을 향해 비웃음도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 가능한 것을 부정적인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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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운 손>
마르코 5,21-43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고운 손>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마르 5,24)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마르 5,41)
나
당신에게
손을 내밉니다
나
당신과
가까이하고 싶어서
나
당신에게
손을 얹습니다
나
당신에게
가고 싶어서
나
당신에게
손을 댑니다
나
당신을
품고 싶어서
나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나
당신에게
머물고 싶어서
나
당신을
손으로 쓰다듬습니다
나
당신을
느끼고 싶어서
나
당신에게
손을 흔듭니다
나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나
당신과
손을 잡습니다
나
당신과
하나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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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으로 무릎을 꿇자>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 뚜껑을 따듯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배를 차게 하면 탈이 나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회당장을 무릎 꿇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시련과 역경, 고통, 눈물을 거두어 주리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으로 승리하여라!
일반적으로 회당장처럼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 걱정거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그 고통을 통하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부러워할 것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근심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못 할 고민이나 근심 앞에서 회당장처럼 무릎을 꿇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인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3-5)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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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야이로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간청을 드립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이 애틋한 사랑과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 나섭니다. 비로소 딸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막 길을 돌아서는데, 사람들이 소식을 전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35)
참으로 모든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오로지 한 곳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는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가 싶더니 와르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하염없이 넘어지는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맞이하면, 우리는 어찌하는가?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릴 것인가? 사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응답해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그렇습니다. 바로 이 죽음의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길러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생명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예,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이 믿음의 시련이기도 했지만, 바로 기회의 순간이었습니다. ‘따님이 이미 죽었으니,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을 따를 것인가? 라는 결단의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야히로의 믿음을 끌어올리십니다. 딸의 병을 고쳐주실 분으로 믿었던 예수님을, 이제는 이미 죽은 딸을 살려내실 수 있는 분으로, 그 믿음을 끌어올리시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자라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신 까닭입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 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41)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일어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일어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진리 안을 걷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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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30)
주님!
군중 속에 있지만 말고, 당신 옷에 손을 대게 하소서!
쫓아다니지만 말고, 당신 옷을 꼭 붙들고 따르게 하소서!
간절함과 믿음으로 말씀의 옷깃을 꼭 붙들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옷을 입히시어 당신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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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과 치유의 여정>
-믿음의 영도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앞서 난 발자국을 따라 밟아본다. 먼저 간 사람이 길을 냈다면 나 또한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다산>
“안연은 이렇게 말했다. ‘순임금이 누구며 나는 누군가? 하려고만 하면 누구나 그와 같을 것이다.”<맹자>
바로 믿음의 여정이 그러합니다. 누구나 믿음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믿음과 치유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일과가 참 분주합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이 잘 드러나는 오늘 복음의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의 구마이적사화에이어 오늘 복음은 주님의 소생이적사화와 치유이적사화가 뒤따릅니다. 예수님의 이적에 앞서 수혜자의 믿음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믿음의 본보기가 야이로라는 회당장이요 그는 호숫가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아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간곡히 청합니다. 극진한 믿음이 표현이 이런 겸손한 모습입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야이로의 겸손하고 간절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은 즉시 그와 함께 나서십니다. 이어지는 또 한분 믿음의 모범이 하혈병을 앓던 여자였습니다. 무려 열두해 동안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진 여자였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이런 악조건속에서도 절망이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혈병을 앓던 여자는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살며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과연 그 여자는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알아 챈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댓는지 물으며 사방을 살피십니다. 그 여자는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얻드려 사실대로 다 아룁니다. 앞서의 회당장처럼 참 절박한 믿음에 지극히 겸손한 자세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치유선언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혈병의 치유의 구원에 병자의 믿음이 결정적이었음을 봅니다. 이어 계속되는 야이로 회당장 딸의 치유과정중 예수님의 말마디도 큰 위로가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에 대한 격려가 흡사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참 다정하게 들립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회당장 집에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순간에 꼭 대동했던 셋 애제자들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이르러 소란한 광경과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목격한 주님의 처신도 지극히 평온하고 침착합니다. 예수님의 큰 믿음을 엿볼수 있는 장면입니다.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에 들어가십니다. 살아 있는 장면을 보는 듯 오늘 복음의 장면 어느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살리시니 이 또한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탈리타 꿈!”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말인데 참 은혜롭습니다. “일어나라!” 바로 부활을 상징하는 말마디입니다. 그대로 미사중 우리를 격려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좌절하여 무기력중에 있을 때, “탈리타 쿰!” 하며 벌떡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평생 마음에 담고, 입에 달고 살아야 할 말마디가 “탈리타 쿰!” ‘일어나라!’요, 하나 더한다면 벙어리 입을 열게 하신 “에파타!” ‘열려라!’는 말마디입니다.
소녀는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니니,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 열두 해 하혈병 앓던 여자가 고생한 햇수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서 넋을 잃었다 합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믿음과 예수님의 치유의 구원 응답을 통해 크게 배우고 깨우쳤을 사람들입니다. 아마 회당장 딸의 소생과 더불어 이들의 영혼도 다시 살아나는 치유의 구원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만났을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한두번 치유가 아니라 평생 치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만날 때 치유의 구원이니, 치유의 여정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 믿음의 여정과 함께 감을 봅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역시 믿음의 선택, 믿음의 훈련, 믿음의 습관, 믿음의 성장입니다. 날마다 평생, 온마음. 온힘을 다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믿음의 훈련도 없습니다.
오늘 야이로 회당장과 하혈병 앓다가 주님을 만나 치유받은 무명의 여자는 믿음의 모범입니다. 회당장 딸의 소생이적을 통해, 하혈병 앓던 여자의 치유 구원을 통해 전화위복의 진리를 배웁니다. 회당장은 딸의 죽음을 믿음의 계기로 삼았고, 하혈병 앓던 여자는 그 불치의 병을 믿음의 계기로 삼아 주님을 만났고 둘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두분 다 결코 역경에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여 절망에 주저앉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찾았고 만났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온갖 역경을 믿음의 계기로, 전기로 삼는 것입니다. 정말 큰 죄는 절망입니다. 절망하여 모든 것을 놔버리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절망의 모든 순간들을 믿음의 전기로, 계기로, 즉 주님을 만나라는 신호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이 우리 믿음의 여정에 참 좋은 격려가 됩니다.
“이렇게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래서 모든 역경의 순간들을 전화위복, 바로 믿음의 전기(轉機), 믿음의 계기(契機)로, 영적성장의 계기로 삼아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온갖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예수님의 믿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믿음의 영도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 만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일치하여, 참으로 복된 믿음의 여정, 치유의 여정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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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성에로 이끄시는 믿음의 영도자>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오늘 히브리서는 주님을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믿음의 여인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며칠 전 믿음의 탄생과 완성에 대해 이미 얘기한 바 있지만 오늘도 믿음에 대해, 믿음의 길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주님이 바로 우리 믿음의 길잡이이시라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길이라고 하셨는데 보통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는 뜻에서 얘기하지만 오늘은 믿음의 길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것입니다. 믿음의 영도자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믿음의 완성자라고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주님께서 영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우리 믿음이 완성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여인을 예로 들어 한 번 보겠습니다. 오늘 여인은 믿음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믿음이 처음부터 훌륭했을까요? 아마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은 결과일 것입니다. 병을 앓기 전에는 믿음이 없었을 것이고, 병을 앓기 시작한 후에도 한동안은 믿지 않았을 겁니다. 믿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했을 것이고, 주님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믿음이 미약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중물이셨습니다. 우리말에 믿음을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야말로 믿음을 주시는 분이고 그래서 믿음의 마중물이셨습니다. 오늘도 그러셨지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고 주님은 늘 믿음을 북돋우시고, 겨자씨만한 믿음이어도 그것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며 믿음을 북돋우시잖아요?
물론 왜 이리 믿음이 없냐고 나무라실 때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언제나 제자들을 향한 나무람이고 제자라면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아무튼, 주님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어서 불신자를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인간을 믿는 사람에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심판자로 하느님을 믿던 사람을 구원자로 믿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주시는 주님은 힘 또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셨다고 하잖아요?
이처럼 주님은 힘주시는 분이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힘이 전달되지 않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만큼 그 힘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 힘으로 어떤 어려움을ㅜ겪고, 어떤 죄를 지어도 절망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주시는 힘을 받을 경우만 이겨낼 수 있고, 믿는 사람만이 그 힘을 받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듯 믿음은 개방이요, 믿는 사람이 주님께 자신을 개방할 것이고 힘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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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4.36)
<믿음은?>
오늘 복음(마르5,21-43)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기적사화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과 '혈우병을 앓고 있었던 여인의 믿음'을 만납니다. '크고 작은 기적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하고 간곡히 청합니다.
그리고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을 하는 여자, 숱한 고생을 하면서 이 병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상태만 더 나빠진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5,28) 하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그리고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회당장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5,36) 그리고 죽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믿음은?
믿음은 너무도 단순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의 마음이 향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문제는 지식과 앎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요 실행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을 믿고, 우리도 기적을 만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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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 34)
건강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병고(病苦)가
있기에
건강한 삶이
있습니다.
가까운
병고를
우리 삶에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삶들입니다.
볼품없는
우리를
사랑해야 할
사람도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건강한 삶이란
자신의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병은
건강을 되찾는
방식입니다.
나아질 수 없는
삶이 아니라
나아질 수 있는
삶입니다.
아픔은
우리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살리시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살아야 할
소중한
생명입니다.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것이
없습니다.
다시
건강해져야 할
소중한 삶입니다.
병고에서
벗어나
새롭게
써 내려갈
건강한 삶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창문을
새롭게
갈아 끼우는
새로운
마음입니다.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지고
새로워지는
믿음과 구원의
새로운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소녀의 아픔도
여인의 아픔도
모두 주님께
내어드리는
봉헌의
건강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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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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