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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 야고보서 1:1~11】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핵심 메시지】
한 마음으로(haplōs)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은, 흩어져 시험받는 당신의 백성이 시험과 기도와 처지를 세상의 자가 아니라 당신이 주시는 지혜로 다시 계산하여, 두 마음(dipsychos)에서 벗어나 온전한(teleios) 사람으로 자라가기를 원하신다.
【말씀 나눔】
성도 여러분, 방금 우리는 새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시험이 정말 기쁘십니까?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날, 자녀 일로 잠 못 드는 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형편 앞에서 누군가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가 바로 그런 말을 합니다.
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가 이 편지를 보내는 대상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입니다.
흩어져 있는데, 야고보는 그들을 여전히 '열두 지파'라고 부릅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가난과 시련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형편이 곧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어떻게 바라볼지부터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는지, 우리의 마음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먼저 '여기라'는 말은 무엇을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계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계부를 쓸 때 어떤 지출은 손해로 기록하고, 어떤 지출은 미래를 위한 투자로 기록하지 않습니까? 같은 돈이 나갔어도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시험이 즐겁다고 느끼라는 말이 아닙니다. 눈물이 나는데 웃으라는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지금 겪고 있는 시험을 눈앞의 고통만으로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가 말하는 시련은 믿음이 정련되는 과정입니다.
금이 용광로에 들어간다고 비로소 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금입니다.
그러나 불을 통과하면서 불순물이 드러나고 제거되며 금이 정련됩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시험은 우리가 정말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걸러 내시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원문의 표현을 조금 더 살리면 '인내가 온전한 일을 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일하는 주체가 인내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만나면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 합니다.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시련에 등을 돌리면, 기쁨도 따라서 등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이 '온전함'입니다.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조각나지 않고 하나로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삶에 끝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손을 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고통이 마지막 결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시험이 닥치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어서 말합니다.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4절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5절은 "지혜가 부족하거든"으로 시작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데로 가는 길은,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는 지금 내가 겪는 현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분별력입니다. 이 지혜를 누구에게 구하라고 합니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후히'라는 말에는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준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여러 번 물으면 눈치가 보입니다.
"그것도 모르십니까?"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핀잔을 주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어제도 물었고 오늘도 묻는다고 핀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두 마음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주실 때 계산하지 않으시고, 주신 뒤에 생색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6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7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관대하신 분입니까, 아니면 엄격하신 분입니까?
8절입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은 헬라어로 딥쉬코스(δίψυχος)'입니다. 직역하면 영혼이 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한 마음으로 주시는데, 우리는 두 마음으로 받으려 합니다.
우리도 때로 의심합니다. 기도하면서도 불안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결과가 두렵습니다.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귀신들렸던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외칩니다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이렇게 흔들리며 드린 기도를 주님은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야고보가 경고하는 것은 아주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기준은 다른 곳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정한 결론에 하나님이 동의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면서, 그 두레박의 줄은 다른 우물에 묶어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건강을 위해 기도하지만, 검사 결과가 나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제 문제를 놓고 기도하지만, 통장 숫자가 줄면 하나님의 신실하심까지 의심합니다.
불안한 마음이 두 마음은 아닙니다. 두려운 것도 두 마음은 아닙니다.
검사 결과와 통장 숫자가 하나님보다 더 정확한 기준이 되어 버린 것, 그것이 두 마음입니다.
야고보는 그런 사람을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유합니다. 물결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물결이 아니라 바람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곧바로 돈 이야기를 꺼냅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기도할 때 갈라지는 마음과 돈 앞에서 갈라지는 마음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문제입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보통은 높아져야 자랑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랑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높게 여기느냐입니다.
먼저 야고보는 낮은 사람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형편이 어렵고 지위가 낮아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가 자랑할 높음입니다.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일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존귀함은 그렇게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한 자에게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여기서 눈여겨보십시오.
9절에서는 "낮은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10절에서는 그냥 "부한 자"입니다.
야고보는 '형제'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재물이 주인이 되면, 그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이름 대신, 가진 것이 그 사람의 이름이 되어 버립니다.
11절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놀라운 것은 시드는 대상입니다. 재산이 아니라 부한 자 자신이 쇠잔합니다.
그것도 '그 행하는 일에', 한창 바쁘게 계획을 세우고 일할 때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은 어리석은 부자처럼(눅 12:20), 자신이 준비한 것으로 생명의 내일까지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노후를 준비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삶의 마지막 보증으로 믿는 것입니다.
통장에 얼마가 있어야 안심하고, 자녀가 어느 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건강검진 수치가 어느 정도 나와야 평안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다른 곳에서 안전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야고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보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야고보는 우리 삶의 세 자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시험 앞에서, 기도할 때, 형편 앞에서 우리는 두 마음으로 삽니다.
그래서 흔들리고, 그래서 시듭니다. 그렇다고 더 굳게 다짐하면 될까요?
그 다짐도 바람 한 번에 흔들립니다.
1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사람의 눈으로 보면 조각난 백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열두 지파라고 부르십니다. 흩어진 형편보다 하나님이 붙여 주신 이름이 먼저입니다.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보다 "내 형제들아"라는 부름이 먼저입니다.
그 이름은 어디서 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온전하게 하시는 이'는 야고보가 4절에서 말한 '온전함'과 같은 뿌리의 말입니다.
야고보는 온전하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한 마음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결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는 조금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성문 밖은 쫓겨난 사람들, 흩어진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친히 그 자리로 나가셨습니다. 그 가장 낮고 부끄러운 자리에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보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더 크게 여기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흩어진 우리가 이제 이렇게 불립니다. "내 형제들아."
흩어져 있어도 버려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새벽 이 자리에 나온 우리도 어쩌면 흩어진 자리에 서 있습니다.
자녀들이 다 떠나고 혼자 차리는 저녁 밥상,
예전 같지 않은 몸으로 한 계단씩 오르는 새벽 교회 계단,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견디는 하루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미 그 성 밖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 마음은 다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의 것인지를 아는 데서 나옵니다.
시험이 끝나지 않았어도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시험이 나를 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은 이미 성 밖의 십자가에서 '형제'라고 불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두 마음이 없으십니다. 그 증거가 성 밖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 앞에서도 한 마음으로, 기쁨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흩어진 자리에서도 그 이름을 붙들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지금 내 삶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시험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시험을 무엇으로 셈하고 있습니까?
② 이번 시험이 드러낸 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걸러 내고 계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③ 고난 앞에서 내가 등을 돌리고 싶어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④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도,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까?
⑤ 내 두레박의 줄은 지금 어느 우물에 묶여 있습니까? 검사 결과, 통장, 자녀의 자리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믿고 있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⑥ 나는 나를 무엇으로 소개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불러 주신"형제"입니까, 아니면 내가 가진 것입니까?
⑦ 성 밖처럼 느껴지는 오늘 나의 자리에서, 이미 그곳에 계신 주님께 올려드리고 싶은 나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추천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393장 오 신실하신 주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은혜의 찬양】
주 품에: https://youtu.be/-VHCGZg_HqQ?si=Qp05FejixjXmU5Rf
나 무엇과 도 주님을 : https://youtu.be/Wx-VZdYblxM?si=j7nrfYDtplJtPeLa
【새벽예배영상】
https://youtube.com/live/SC76s149kw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