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지빠귀
잠깐 살다 가는 건데
무슨 말 그리 많아
딱 한 줄, 이게 다야
밑줄 그어 이것들아
휘이익,
외마디 소리
움찔하는 새벽하늘
고요에 눕다
고요의 칼을 갈아 비늘을 건드리면
소리는 움츠리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단숨에 소리를 잡는
고요의 놀라운 힘
풀죽은 낮달처럼 스러지는 소리에는
부끄러운 지난 날의 변명이 묻어있다
꽃으로 피지 못해서
꽃을 감은 덩굴 같은
철옹의 넘사벽을 꼭 한 번 넘으려고
따가운 채찍으로 나를 키운 소리들아
보아라,
범종소리도
고요 아래 눕는다
카르페디엠*
책갈피 넘기다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발치에 맴돌아도 번번이 놓친 그 말
떠나간 열차가 남긴
바람의 허기 같은
깊은 밤 홀로 깨어 뜨락에 내려서면
때늦은 고백처럼 날숨으로 뱉던 그 말
방짜징 맥놀이보다
파장이 더 길었다
내 안의 굴렁쇠를 돌리는 이 누구인가
주연을 또 놓치고 객석을 맴돌아도
순이야,
나의 문장을
너는 크게 읽어주렴
* carpe diem : '현재를 잡아라'는 뜻의 라틴어
입적入寂
날숨이 멈춘 뒤에 향기가 증발했다
애초의 다짐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군말도 없이
바람에 실려갔다
새들도 울지 않고 슬퍼하지 않았다
떠나간 자리에는 낯설은 은빛 고요
남겨둔 약속은 없다
메모지 당부 몇 자
소멸은 통과의례, 목숨의 일상이다
제 깜냥 제 빛깔로 반짝이다 사라질 뿐
내 누이 먼저 간 것을
민들레는 모른다
- 시집 『슬픔은 별보다 많지』 작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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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철 시인 시집 『슬픔은 별보다 많지』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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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7
24.01.1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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