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처음 듣는 말일지 모르지만 일제 하 가장 막강했던 보천교 연혁사와 조선 총독부 연감 통계상 650만의 민족종교 보천교가 가장 힘있는 독립운동 자금원이 되고 있는 것을 아는 일제에 의해 강력한 한국어 말살과 민족종교 말살정책을 기조로 한 악질적 문화 정책으로 인해 몰락한 사이 1919년 3.1 운동 당시 30만에 불과했던 기독교는 미국의 지원과 이 승만의 정책에 의해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제하 한국의 종교 중에서 가장 혹독하게 탄압을 받은 것이 바로 민족종교 보천교였다는 사실과 친일지로서 일제의 문화식민지 정책에 동조한 조선, 동아 등 당시 언론의 유사 종교 내지 사이비 종교로의 일방적 매도는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이 큰 상처로 남아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종교단체로써 독립운동 자금원으로 의혹 받은 보천교의 막후 영향력이 그만큼 컸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관한 자료는 비교적 정리가 잘 된 안 후상의 논문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을 보라)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한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1920∼1940->에 나타난 항일기사 건수의 통계를 통해 당시 일간지와 월간지에 나타난 보천교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면, 적어도 1925년 이전의 보천교의 활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항일기사 건수 총계가 23 건, 천주교 2 건, 불교 18 건, 유교 15 건, 천도교 32 건 인데 반해 증산 계열 보천교 83 건, 태을교 9건, 훔치교 55 건으로 총 147 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보천교 하나만 해도 불교나 기독교 항일운동의 4배에 맞먹으며 훔치교만 해도 불교의 3배, 기독교의 2배가 넘고 있는 항일운동 사건을 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인 방 한암 스님이 산천중원(山川重遠)으로, 송광사 주지 임 석진이 임원길(林原吉)로 각기 창씨개명하고 , 월정사 주지 이 종욱이 광전종욱(廣田鍾郁)으로, 용주사 주지 강 대련이 위원형(謂原馨)으로 창씨 개명한 것에서 보다시피 불교는 종단전체 차원에서 친일하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이자 분위기였고,
가톨릭과 기독교 역시 경성기독교 연합회와 교계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와 친일로 돌아선 것이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임원길은 조선총독 미나미의 향응을 받고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엄숙하게 의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신불교」라는 친일지를 발행해 총후보국의 논조를 유지했으며, 강 대련은 「불교총보」에 '불교옹호회와 법려(法侶)의 각오'란 친일성향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일본승을 왕실 및 양반집 여인과의 결혼을 주장하는 '조선불교기관 확장의견서'를 1919년 11월 사이토(齊藤實) 총독에게 제출하기도 한 친일 분자였다.
37년 7월 26일 YMCA에서는 종교단체 연합 친일 시국강연회가 열렸는데, 불교의 권 상로, 유교의 안 인식, 천도교의 이 돈화, 이 종린, 감리교의 양 주삼, 장로교의 전 필순 등이 친일을 위한 사자후를 토했으며, 38년 5월 18일 서울 부민관에서는 <경성기독교 연합회>가 창립되어 "40만 십자군병들아, 다같이 일어나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보조를 맞추자"는 슬로건 아래 내선일체, 신앙보국을 맹서한 바 있다.
1938년 7월 29일, 구세군 최고사령관 윌슨도 전선각처의 소대장에게 국민의례, 황거요배, 국경일 경축행사 실행을 지시하는 통첩을 내렸으며 이에 의해 황 종률 구세군 전장 서기관은 구세군 1만 8천 신도가 앞으로는 단체적으로 신사참배를 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10-15일의 평양 서문 밖 예배당에서 열린 제 27회 총회에서 첫날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다음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우리들은 신사가 기독교시에 위반되지 않는 본지(本旨)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대국적으로 보아 국가의 의식인 것을 자각하고, 이에 신사참배를 선서함.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이행하며, 더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에 참가하여, 시국하의 총후 황국신민으로서의 적성(赤誠)을 다하기를 기함'
이 결의에 의해 동년 12월 12일 감리교의 양 주삼, 김 종우, 성결교의 이 명식, 장로교의 홍 택기, 김 길창 등 조선을 대표한 기독교계 지도급 교역자 5명의 신궁참배단이 결성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伊勢)신궁, 가시와라(檀原) 신궁, 메이지(明治) 신궁, 야스쿠니(靖國) 신궁 및 모모야마 황릉(桃山宗陵) 등을 참배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때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을 돕기 위하여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를 도왔다. 1960년 2월 18일 반도호텔에서 열린 교계 지도자 초청모임에서 목사들은 이승만 장로를 대대적으로 지지하였다.
이승만은 1925년 독직사건으로 상해 임정에서 탄핵이 되었고 미국에서도 독립자금 운영에 대해서 규탄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잘못은 생각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이 자기의 잘못을 폭로할까봐 천대했으며, 민족의 골수까지 사무친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함은 물론 그들을 친위부대로 내세워 반공주의자로 변신 애국자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이승만은 장로, 최 인규는 장로교 집사, 이 기붕은 감리교 권사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해서 기독교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기에 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면서 종교는 가장 무서운 사회악으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박해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북의 김 일성이 일제 잔재청산을 철저히 한 것은 그와 반대인 남한에 비해 실로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실로 이 사회에 있어서는 안될 암적 존재들이다. 기독교는 해방이 후에도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한 무리들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민족의 반역자들이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세계 기독교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기독교였다.
정리해서 말하면 이 같은 종교계의 전반적인 친일 분위기 인해 불교, 기독교, 유교 등이 일제 하에 강력한 항일운동을 벌인다는 것 자체는 이미 자기모순이었다.일제시대에는 특히 '공인종교(公認宗敎)'라 하여 일본의 전통적 신교(神道), 교단적인 차원에서 창씨개명과 친일노선을 공식화 한 불교, 기독교만을 공식적 종교라고 인정했었다.
그러므로 이외의 새로운 종교들은 비슷한 종교 즉 유사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고 당시 가장 막강한 반일 민족종교 보천교는 유례없는 "보천교 신법"까지 만들어 탄압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앞에서 본 통계와 같이 보천교의 가장 활발한 147 건 항일기사는(기독교 23 건, 불교 18 건, 천주교 2건, 유교 15건) 친일로 돌아선 여늬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보천교가 그만큼 가장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은 유일하게 친일적이지 않은 민족 자생종교 보천교를 조선의 종교단체를 마음대로 억압하고 요리하는 하나의 샘플로 삼았는데, 이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특히 통감부령 제 45호 '종교의 포교에 관한 부칙'은 일본 내지(內地) 신도(神道)와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 민족종교는 근본 속성을 정치적 결사체로 보아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당시 650만 신도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교단체가 공개단체도 아닌 비밀단체인데다 여타의 종교처럼 친일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가장 큰 독립운동 자금원인 것을 알고 있는 일제로서는 이 비밀 단체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내심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제는 종교단체와 사상단체 관리를 위한 방편 상,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의해 비밀교단의 모습을 공개하도록 유도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간부 이 상호에 의해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계기로 민족종교 탄압책의 일환으로 당시 친일 언론이었던 조선, 동아를 무기 삼아 보천교의 어두운 면 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유사종교화 내지 사이비 종교화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그의 연구성과를 잠시 인용하면,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한일합방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 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간부 수십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참고로 그 당시 경부선 철도공사비가 20만원)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쨎든 조직으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다. 일경에 의해 보천교 조직원이 사살된 사건이 전남 고흥에서 발생하였다. 교 집회에 일경이 나타나 이를 해산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 교인 한 명이 죽고 나머지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집단으로 항의를 하는 교인들을 일제는 보안법으로 구속해버렸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사회 문제화되었다. 문제는 언론의 보도 태도였다.
사건 초기에는 경찰의 집회 해산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도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미신, 사교 집단의 우매한 종교 행위가 더 큰 문제라고, 논조의 흐름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리력을 동원하여 조직을 파괴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일제는 보천교 조직을 미신·사교 집단으로 매도하여 민심 이반을 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일제하 『보천교』는 마치 구한말 불교계 내 일제에 대한 구국운동의 중심이었던 임제종 이상으로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식민지 지배 초기과정인 구한말에 승려입성해금을 기화로 조선불교를 친일 불교 종단 원종(圓宗:1908)에 종속시키려 하자 불교계에서 구국운동의 차원에서 송광사에 임제종을 설립해 불교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강력한 탄압을 가해 폐쇄한 바 있다.
오늘날 국사책은 해방이후 친일의 대표격이었던 이병도후예들의 작품들입니다. 단군조선의 실제역사가 거세당했죠. 어제인가? 오늘에서야 단재신채호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의 국적을 회복한것을 보면 말다한것이죠. 독립이후에 60년이 지나서야 자기나라에 한줄 역사에 이름을 대한민국국적에 올라온 것 참 어떻게 이야기 해야하나 부끄럽죠. 주인없이 살아온 세상이죠. 쇠고기 검역주권과 같은 문제도 이제 시작에 불과한 현상들입니다.
한복입고 하는 곳은 대순진리회란 곳이죠. 한민족의 신교정신을 통해 증산도는 정통도맥을 이어온 곳이며, 대순진리회는 교주가 진리를 사제교리화하여 혹세무민해온 대표적인곳,그 동안 사회문란을 일으켜온 곳이죠. 그 동안 PD수첩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고발된 단체이고 지금은 대순의 교주가 죽어 사분오열된 곳입니다. 특히 절대 현혹되어선 안되는 것은 그들이 "증산도"에서 나왔다고 거짓으로 활동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증산도는 가장 건전한 대한민국의 민족종교입니다. STB방송까지 나오고 있고,1천만이 시청중이며, 그것은 현재 케이블을 통해서 방송중입니다.
첫댓글 일제시대 최대 독립운동 조직은 홈암 나철선생이 만드신 대종교로 알고있습니다 만 뭐 보천교역시 굉장히 열심히 했다고 듣기 들었습니다
일반상식은 그렇죠. 하지만 역사적으로 사문화가 된 보천교의 역사는 규모적으로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최대 독립운동조직이란 말을 썼는데,...지금은 잊혀질 수 밖에 없는 친일적인 국가인사와 그러한 사회적요소가 있었고, 정보제약에 의해 망각된 셈이죠.
그런데 왜 국사책에서는 보천교는 단어도 안 나오는지...
오늘날 국사책은 해방이후 친일의 대표격이었던 이병도후예들의 작품들입니다. 단군조선의 실제역사가 거세당했죠. 어제인가? 오늘에서야 단재신채호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의 국적을 회복한것을 보면 말다한것이죠. 독립이후에 60년이 지나서야 자기나라에 한줄 역사에 이름을 대한민국국적에 올라온 것 참 어떻게 이야기 해야하나 부끄럽죠. 주인없이 살아온 세상이죠. 쇠고기 검역주권과 같은 문제도 이제 시작에 불과한 현상들입니다.
엉터리 역사만 달달 외워서 시험을 치르고 있다...예나 지금이나..ㅉㅉㅉㅉㅉㅉ 친일파 개종자덜...
저기요...과거는 그렇다치더라도 증산도는 현재 사이비종교 아닌가요? 제 여동생이 전북익산에서 증산도에 이끌려 대학교 그만두고 한복입고 뻘짓하던 걸...부모님 익산까지 달려가셔서 울고불고 해서 겨우 빼내온 기억이...
한복입고 하는 곳은 대순진리회란 곳이죠. 한민족의 신교정신을 통해 증산도는 정통도맥을 이어온 곳이며, 대순진리회는 교주가 진리를 사제교리화하여 혹세무민해온 대표적인곳,그 동안 사회문란을 일으켜온 곳이죠. 그 동안 PD수첩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고발된 단체이고 지금은 대순의 교주가 죽어 사분오열된 곳입니다. 특히 절대 현혹되어선 안되는 것은 그들이 "증산도"에서 나왔다고 거짓으로 활동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증산도는 가장 건전한 대한민국의 민족종교입니다. STB방송까지 나오고 있고,1천만이 시청중이며, 그것은 현재 케이블을 통해서 방송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