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과 산을 훔치다
최 재 우
몇몇 지인들과 초서를 공부하다가 한시 한편을 보았다. 문인의 친필 편지나 시를 모아서 엮은 필첩(筆帖) 속에서 보았는데, 보는 순간 시로부터 전해오는 절절한 울림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입에 별로 오르내리지 않았던 보기 드문 명작이다. 단 한 번의 먹물로 끝까지 써내려간 자유분방한 필력이 돋보인다. 아니 그보다도, 시에 담긴 그윽한 시상이 가슴으로 아련하게 전해온다.
蕭 寺 殘 燈 曉 쓸쓸한 절에 밤새 등불은 깜빡이고
寒 山 細 雨 秋 추운 가을 산에 가랑비 내리는 구나
懷 人 意 不 盡 님 향한 그리운 생각은 끝도 없는데
千 里 大 江 流 천리로 큰 강은 길게 흘러만 가누나
風月亭
세상천지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어둠 저편으로 쓸쓸한 절의 희미한 등불만이 어둠을 버티면서 곧 다가올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가랑비는 냉랭한 가을 산에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밤새 잠 못 이루며 님을 그리는데, 저 멀리 천리로 흘러온 강도 내 그리움처럼 길게 길게 흘러가고 있다.
이 절창의 한시를 지은 이는 뛰어난 문장가요, 시인이었던 월산대군 이정(李婷)이었다. 마땅히 왕이 될 왕의 큰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권신들의 술수에 휘말리어 동생에게 왕의 자리를 내주고는 한강 가에서 시와 술로 풍류를 즐긴 자유인이었다. 바람과 달을 좋아하여 호가 풍월정(風月亭)이었다. 이시는 친척인 이수(李穟,)에게 준 오언절구 ‘기군실(寄君實)’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뛰어난 인물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숨겨지고, 빼어난 글이 묻히는 수가 있게 마련이다. 월산대군의 이 시는 서울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역대 명인들의 옛 편지나 시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은 첩(帖)속에서 빛바랜 채 오래 숨겨져 왔다. 옛 서화와 글씨에 독보적인 감식안을 갖고 있었던 위창 오세창 선생이 월산대군 이정의 친필 한시로 고증하면서 비로소 정체(正體)를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다.
그런데 월산대군의 이 시와 매우 흡사한 한시가 또 있다. 상촌 신흠(申欽)의 ‘여등(旅燈)’ 이라는 시이다. 신흠은 월사 이정구, 계곡 장유, 택당 이식과 함께 조선시대 한문학의 4대가로 칭송되는 이다.
旅 館 殘 燈 夜
孤 城 細 雨 秋
思 君 意 不 盡
千 里 大 江 流
표절 (剽竊)이라는 말이 있다. 글이나 음악을 지을 때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몰래 따다가 쓰는 것이다.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여등’이라는 한시는 월산대군의 ‘기군별’을 표절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잠간 하여본다. 쓸쓸한 절이 여관으로 바뀌고 추운 산이 외로운 성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다. 월산대군 시에 감명 받은 상촌의 모작(模作)으로 보아야한다는 생각도 든다.
찬 이슬이 맺히고 날씨가 서늘해진다는 한로가 지났다. 인적이 뜸한 오래된 산성에도 가을이 들고 있다. 가을이 추운 산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기를 재촉하는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상당산성 저 아래로 보이는 청주 시가는 가물가물하다. 천년도 더 이어져온 오래된 산성 마루에서 유유히 흐르는 무심천을 굽어본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저녁 종소리가 저 아래로부터 물결처럼 은은히 들려온다. 아뿔사! 한시에 문외한인 주제도 모르고 월산대군의 시에서 절과 강을 훔쳐 시 한 수를 엮는다. 밤새 그리워할 님도 없는 무미하고 허전한 마음을 쓸어본다.
蕭 寺 暮 鍾 夜 쓸쓸한 절에 저녁 종소리로 밤이 들고
古 城 細 雨 秋 오래된 성에 가을 가랑비 내리는 구나
懷 人 意 不 盡 님 향한 그리운 생각은 끝도 없는데
無 心 大 江 流 무심천(한) 긴 강(내)은 흘러만 가누나
첫댓글 가을엔 역시 "한시"죠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 외로움.고독 모두 자신의 몫인 것을~~
형언할 수 없는 가을의 아름다움 살랑이는 바람에도 가슴 한켠이 시려워 떠나는 가을, 하고픈 말 대신 시 한 구절로 대신 하셨네요...
역시 샘~~👍👍👍
가을 단풍이 지쳐 낙엽이 되지 않기를요...
훌륭한 글에 잠시 취하고 감상 잘 하고갑니다.
건강 하옵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