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4.19
죽음의 문턱에서도 무서울 것 없었다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05호(2020. 4.15)
이정근 (국어교육60-64, 78세) 전 LA 유니온교회 목사
따스한 봄기운과 새 학기의 설렘도 잠시,
아직 오지 않은 민주주의의 봄을 위해 도서관과 강의실을 박차고 결연히 거리로 나섰다.
어느덧 팔순을 전후하는 나이지만 ‘4.19세대’의 기억 속엔 그날이 늘 생생하다.
미주 동창회보 2020년
4월호에 미주 동문이 게재한 글을 일부 발췌해 싣는다.
4월이 오면 한국의 꽃들은 선혈을 토한다. 학생들의 눈은 유난스레 영롱해지고 그들의 입은 비장을 머금으며 그들의 가슴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은 시민을 향하여 그리고 임금들을 향하여, 아니 어쩌면 하늘을 향하여 목에 핏줄이 서도록 트럼펫을 불어댄다. 그것은 참혹한 시신이 되어버린 정의와 자유를 부활시키려는 4·19의 몸부림이요 함성이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서울대 학생회 4·19 선언문).
1960년 4월 19일, 만원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나의 귀에 고대 시위대가 정치깡패들에게 잔학스럽게 짓밟혔다는 뉴스가 확성기처럼 왕왕 울려왔다. ‘에이, 못된 놈들.’ 그런 말이 내 입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학교에 도착하여 첫 시간 강의를 듣는 중이었다. 밖에서 무슨 함성이 들려왔다. 우리는 사전약속이라도 한 듯이 책가방을 교실에 남긴 채 우르르 몰려나가 정문 앞으로 대열을 지었다. 모두 이심전심이었다.
돌진하는 도상에는 곤봉세례도 기다렸고, 눈물가스도 매복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만은 그런 것이 별로 위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신입생인 우리들이 대오에 앞장섰는데도 아무 무서운 것이 없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오직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하게 죽은 김주열 고교생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바로 내 얼굴처럼 생각되었다.
우리는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며 청량리에서 종로를 거쳐 국회의사당으로 돌진했다. 벌써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다시 중앙청을 돌아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다. 그런데 경복궁 담을 끼고 효자동으로 들어서면서 저 멀리 경무대 경호원들이 집총자세로 서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데모대가 그때 국민대학 건물을 지나 더 전진하게 되자 그 경호원들은 총을 어깨에 밀착시키고 하늘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공포탄의 위협이었다. “저놈들 봐라. 하나님부터 쏘아 죽인 뒤에 우리를 죽이려는 것 아냐.” 나는 옆 친구들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총부리는 이윽고 우리를 향하여 불을 뿜었다. 고막을 찢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는 즉각 경복궁 담벼락으로 뛰어가서 납작 몸을 붙였다. 한참을 콩 볶듯 하는 소리가 나더니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는 학생들과 꼼짝 않거나 도로에서 뒹구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때에 우리 사범대 학생 가운데 두 명이 살해되었다. 손중근 선배(국어과)와 유재식 선배(체육과)였다. 나는 부상당하지도 않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4·19혁명을 겪은 뒤부터는 처절한 죽음을 또 한 번 체험했었다고 자주 되새긴다. 하지만 우리 모국인 한국을 살려내기 위하여 목숨을 던졌다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