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에 대한 관계와
이웃에 대한 관계로 요약될 수 있다(복음).
토머스 그린 신부가 기도에 대해 쓴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라는 책을 근래에 읽었습니다.
두껍지도 않으면서도 읽기에도 쉬운 책입니다.
이 책은 기도 생활의 단계와 영적 성장의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는 하느님께 우리를 통째로 맡겨
하느님의 이끄심에 유연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상태를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바다에 나를 맡겨 파도를 타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토머스 그린 신부는 기도의 단계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기를 들어 설명합니다.
청춘 남녀의 “당신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주니까 당신과 결혼할래요.”
라는 말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는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니 나도 정말 행복해.
여보, 당신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야.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지.” 하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사람도 하느님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숙한 기도로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하느님의 뜻을 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의무적으로 행하는 것은
하느님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기에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하느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만큼 위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서슬 시퍼런 율법의 시대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했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율법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과 대화함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요?
아이들은 그냥 ‘엄마, 아빠’를 부릅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왜 부르는지 압니다.
어린이의 대화는 이렇듯 부모님을 부르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몇 마디 하지 않아도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애정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 앞의 어린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기도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말만 되풀이해도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다만 미운 감정을 ‘없앤 뒤’에 기도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이 말씀이 암시하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미움을 체험합니다.
심한 경우 ‘이를 갈고’ 보복을 맹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감정을 딛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무슨 유혹이겠습니까?
미움을 합리화하고 용서에 ‘핑계’를 대는 유혹입니다.
“저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4)
기도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들이
일생동안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삶으로 보여드리는
몸짓이라네.
하느님나라가 오는
그 날까지
일용할 양식과
용서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세상의 온갖 유혹과 악에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저항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라네.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