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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사과꽃길 사이로, 문인의 향기와 열사의 의기가 그윽하구나
2025년 4월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번의 특강 ➁영양고을>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2013년 10월에 개교하여 지난 2월, 11년 4개월 만에 116개 고을 답사의 긴 여정을 마치고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알려드린 대로, 회원님들 중에 이대론 아쉬움이 있어 그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고을들을 중심으로, 한번 더 답사하자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숙고 끝에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하여, 2025년 3월부터 2026년 2월까지 <12번의 앙코르 답사>를 진행하기로 하셨습니다. 교장선생님께 감사드리며 회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번의 특강>을 준비 중인 교장선생님은 얘기합니다.
<12번의 앙코르 답사>는 기존의 읍치구역 중심의 통치 시설들을 둘러보는 것을 지양하고 경관이 수려하고, 걷기가 펀하며, 오랜 전통이 켜켜이 쌓인 유적들을 중심으로 둘러보려 합니다. 또 한 고을을 3, 4개 주제로 나누어 둘러봅니다. 아울러 둘러볼 고을을 미리 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참가자 여러분 의견을 모아 진행하려고 합니다. <12번의 앙코르 답사>가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지는 행복하고 보람 있는 답사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2025년 3월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번의 특강 ①성주고을> 성산가야와 양강(兩岡) 세상에 푸욱, 한개마을과 무흘구곡 정취에 취하다
☛2025년 4월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번의 특강 ➁영양고을> 화사한 사과꽃길 사이로, 문인의 향기와 열사의 의기가 그윽하구나
▲화사하게 핀 사과꽃들 사이로 노란 민들레꽃이 봄의 정취를 더한다.Ⓒ따세기농장
활짝 핀 봄, 4월의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번의 특강> 그 두 번째는 화사한 사과꽃길 따라, 문인의 향기와 열사의 의기가 그윽한 경북 <영양고을>로 향합니다.
이번 영양고을 답사는 세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첫째는 조선 중기부터 이곳에 정착해온 집성촌 전통마을과 그 마을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 둘째는 영양이 배출한 항일의병장과 항일무장투쟁 독립지사들의 유적들, 셋째는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모전석탑들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번의 특강 ➁영양고을>은 2025년 4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 앞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산해리(산해리오층모전석탑)-연당리(선바위/남이포/서석지)-상청리(벽산생가/검산성)-주곡리(주실마을/호은고택/지훈문학관과시비공원/옥천종택)-삼지리(삼지동모전삼층석탑)-영양읍(점심식사겸뒤풀이)-현2리(현이동모전오층석탑)-감천리(감천마을/오일도생가/감천리측백수림)-지경리(남자현생가)-원리리(두들마을/석계고택/석천서당/광산문학연구소)-서울의 순입니다.
약 200m가량 성벽 흔적이 남아 있으며 남쪽은 평평한 대지에 쌓았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1.2~2m이며 성곽은 자연석을 약간씩 손질해 쌓았으며 산성 안에는 해방 전까지 방어시설과 막사가 여럿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축조 동기는 벽산의 종숙 김성수가 남긴 문집 <청헌유고>에 기록돼 있는데 이에 따르면 동학과 일본의 화를 막기 위해 목책과 석축으로 갑오년(1894) 2월 8일 착공해 을미년(1895) 8월에 준공했다는데 착공한 시기가 의병을 일으키기 바로 전 해입니다. 동학혁명은 1894년 발발했고 이때 벽산의 생가 뒤편에 동학군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얘기는 이 때문에 나왔습니다. 축성 시기와 관계없이 검산성은 유격전의 근거지였고 의병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며 항일의 성지입니다.
청기면 상청리 마을 안쪽에는 18세기에 건축한 항일의병장 벽산 김도현 생가가 있습니다.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 형 건물입니다. 생가 주위에는 토석으로 쌓은 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3칸 규모의 대문채가 초가를 이고 서 있으며 대문채 처마 아래에 ‘벽산정사(碧山精舍)’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1957년에 영남 유림과 동민이 정성을 모아 세운 ‘벽산 김선생 유허비’와 1988년에 세운 ‘창의 순절 기념비’, ‘애국지사 양우 김녕 김공 항일공적비’가 있습니다.
김도현(金道鉉)은 관향은 김녕, 자는 명옥, 호는 벽산(碧山)입니다.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절한 사육신의 한 분인 충의공 김문기의 15세손이며 김성하 참봉의 아들로서 1852년(철종 3) 청기면 상청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기상이 뛰어나고 힘이 세었으며 모래와 돌을 모아 성을 쌓고 진(陣)치는 형용을 하고 용과 범이 싸움하는 모습을 그렸으므로 조부가 기특히 여겨 귀여워하며 후일에 크게 되리라 기대하였습니다.
어느 날 마을 친구 아이들과 강변에서 목욕하다가 한 아이가 물속에 깊이 빠지니 여러 아이는 달아나는데 혼자 깊은 물에 들어가서 건져낸 일도 있었습니다. 또 어느 아이와 힘을 겨루는데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그 아이가 멀리 가서 넘어져 기절한 것 같이 되니 그 후로 다시는 힘 겨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여러 번 오르내렸으나 나라 사정이 어지러우며 점점 그릇됨을 보고 깊이 한탄하였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세상이 크게 어지러울 징조라 여기고 병서를 주야로 읽었고, 동지 및 후배들과 더불어 매월 초승에 점고회(군사훈련)라는 일종의 군사훈련을 시작했는데 규율이 매우 엄했다고 합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사재를 틀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일가친척들과 소작인들은 강가에서 돌을 날라서 검산에 성을 쌓았답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검산성에 창의도총부를 정하고 봉화 청량산에 들어가서 의병을 일으켜 출진하였는데 벽산이 이끄는 영양 의병은 봉화군 동헌 점령을 시작으로 경상도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경북 지역 7개 의병과 연합 의진을 꾸리고 3월에는 상주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상주에서 태봉 전투를 치렀고, 강릉 의병이 도움을 요청하자 북으로 진군하여 삼척 전투를 이끌었으며 강원도 강릉에서 영양 일월산에 이르기까지 항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896년 4월 삼척 전투에서 패한 뒤 영양으로 돌아와 일월산과 검산성에 본진을 두고 진영을 재편성한 후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나, 의병진은 열등한 무기로 인해 일제의 신식무기에 맞서 패퇴하기 일쑤였으나 벽산은 포기하지 않고 영양, 예안 등지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지속했습니다.
이때 왜적의 압력이 심한데 간신들의 농락까지 있었으니 임금의 명령이라 빙자하여 의병들을 해산하도록 위협하였으므로 의병들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조정의 명으로 의병은 해산됐으며 벽산은 을미의병 때 마지막으로 의병을 해산한 인물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항일 의병 투쟁을 일기체로 기록한 <창의록>을 남겼는데 의병 봉기를 모의한 1895년 12월 1일부터 의병진을 해체한 1896년 10월 15일까지 약 10개월 동안의 일들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벽산은 1902년과 1904년에는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촉구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이른바 을사오적의 처단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각국 공사관에 <포고서양각국문>을 보내 조선을 강제 병합하려는 일제의 횡포를 막는 데 힘써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1906년에는 고종황제로부터 거병하라는 밀지를 받고 의병을 일으키고, 주변 각 고을에도 의병 궐기를 촉구합니다. 의병을 준비하던 중 1907년 봄에 체포되어 달성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감옥에서 나온 뒤 벽산은 지역의 유지들과 옛 영양 관아의 객사를 수리해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에 선임되어 교육을 통한 구국 의지를 펴기도 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며칠을 통곡하고 자결을 결심하였으나 부모보다 먼저,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미뤄 오다가 병환 중이던 아버지가 1914년 돌아가시고 장례를 마치자 선생은 시를 지어 뜻을 밝혔습니다. “늦게야 죽으려니 묻힐 땅이 어디인가. 옛 나라의 남겨둔 땅이 없구나.”
벽산은 영양을 떠나 영해 울티[泣峙]를 넘고 영해면 대진리 산수암에 이르러 미리 써 놓은 임절시를 남기고 상중에 쓰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기꺼이 몸을 던져 외침으로 더럽혀진 조국 강산을 등지고 푸른 바다의 품속에 안겼습니다. 그날이 바로 1914년 음력 11월 7일 동짓날이고 향년 63세입니다. 1973년 순국한 산수암에는 도해단(蹈海壇)이 세워졌으며 해마다 생일인 음력 7월 14일 ‘도해단 전례’가 이곳에서 열립니다.
<벽산집> 2권과 고종 황제께서 내리신 삼인검(三寅劍)과 칙지와 밀지 등 유물이 보관되어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임절시(臨節詩)
我生五百末 조선왕조 마지막에 세상에 나왔더니
赤血滿腔腸 붉은 피 끓어 올라 가슴에 차는구나.
中間十九歲 그 사이 십구 년을 헤매다 보니
鬚髮老秋霜 머리털 희어져 서릿발이 되었구나.
國亡淚末己 나라 잃고 흘린 눈물 마르지도 않았는데
親沒痛更張 어버이마저 가시는 슬픈 마음 더욱 넓다.
獨立故山碧 홀로 고향 산에 우뚝이 서서
百計無一方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가이 없다.
欲觀萬里海 저 멀리 바닷길 보고파 했더니
七日當復陽 칠 일 만에 햇살이 돋아서 오네.
白白千丈水 천 길 만 길 저 물속에 뛰어들면
足吾一身藏 내 한 몸 파묻기 꼭 알맞겠구나.
영양은 엄순봉, 남자현 등 무장 항일 투사를 배출하였습니다.
엄순봉(嚴舜奉)의 호는 추수(秋水), 별명은 형순입니다. 1906년 영양 대천하 옥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이 빈궁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생계유지를 위해 1923년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농업노동에 종사하다가 완바오산 사건(萬寶山事件)이 발발하자 안주할 땅을 찾아 중국 땅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상해 부근 남상의 입달학원 교사 유자명을 만나게 되면서 남상에서 5리쯤 떨어진 남당에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습니다. 1932년 12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백정기, 원심창 등을 만나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33년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청년부장에 피선되었습니다.
1933년 5월 오면직, 주열, 안경근과 함께 일제 영사관 밀정 이종홍을 처단하였습니다. 1933년 8월 1일 정화암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자칭 애국자이자 친일 거부인 옥관빈이 당시 상해에 와서 일본 관헌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고, 그의 사촌 형인 옥성빈의 집을 찾아가는 것을 권총으로 처단하였고 1933년 12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공부국 형사의 지위를 악용해 온 옥성빈을 처단하였습니다.
1934년 3월 초 당시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공사가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또한 장개석을 4,000만 원으로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며 열하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자,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는데 마침 아리요시 아키라가 일본으로 이 문제를 협의하러 출발하기 전에, 3월 17일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고급 음식점에서 송별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등 3명으로 하여금 부근의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934년 3월 25일, 상해의 소위 조선거류민 회장이란 이숭로를 제거키로 하였습니다. 이숭로는 왜경의 밀정으로 독립운동에 많은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숭로 제거 모의를 이규호와 하였으나, 어느 날 엄 의사 혼자서 거류민회관으로 들어가는 이숭로를 붙잡아 묶어서 그자의 죄목을 들추어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이후 엄 의사는 중국 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다시 일본공사관으로 넘어가서 경성 종로경찰서로 인계되어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르고, 1936년 3월 18일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이미 각오한 바 있어 상고하지 않고 2년간 복역하다가, 1938년 4월 9일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입회한 법무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설령 전할 말이 있다 하더라도 적인 너희들을 통하여 유언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요 너희들도 사람이니 공통된 인류애로서 너희들에게 일언한다. 내가 과거에 행한 바는 압박받고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원컨데 그대들은 가식된 논변과 법리 론을 청산하고 참으로 인류를 정복, 피정복이 없고 압박과 착취와 악행이 없는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인류 만대의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하라”라고 일갈하고 ‘아나키스트 만세’와 ‘조선독립 만세’를 3창하고 미소 띄며 유유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니 향년 36세의 한창 나이였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남자현(南慈賢)은 1872년 12월 7일 아버지 남정한과 어머니 진성이씨 이원준 사이에서 1남 3녀 가운데 막내딸로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영양입니다. 유년 시절을 알려주는 자료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부친 남정한이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는데, 7세에 한글을, 8세에 한문을 터득하고, 12세에 소학과 대학을 읽었으며, 14세에는 사서를 독파하고, 한시를 지었다”라는 수학 과정에 관련된 기록뿐입니다.
19세가 되던 1891년 무렵 아버지의 제자였던 의성김씨 김영주와 결혼했으나 김영주는 그가 23살 되던 1895년에 을미의병에 가담했다가 전사하였습니다. 1907년 가을, 열사의 선친 남정한이 의병을 일으켜 자택을 임시 의병 장소로 삼고 활약할 때 남자현은 장정 소집과 정보수집 책임을 지고 적의 후방교란 등의 활약을 하였습니다.
이후 평범한 전업주부로 외아들 김선태를 키우다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남자현은 곧바로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 되었는데 특히 청산리 대첩의 부상자들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우고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편강렬, 양기탁, 손일민 등이 만주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할 때 참가했으며, 무장 투쟁이나 테러 위주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참여도 했습니다. 국내 잠입을 두 차례 했는데 1924년 참의부의 채찬, 이청산과 함께, 1926년에는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국내로 들어왔고, 두 번째 잠입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1926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위해 경성부에 잠입하였지만 거사 직전에 송학선 의사가 먼저 의거를 일으키는 바람에 경계가 강화되어 다시 만주로 돌아왔습니다. 1928년 만주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의 독립운동가가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 운동에 힘써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습니다. 1931년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흰 수건에 ‘한국 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국제연맹에 독립 의지를 호소한 일화가 있습니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 일본대사이며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의 암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 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 노파 차림으로 변장한 채 하얼빈 교외 정양가에서 정탐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2월 27일,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60세가 넘은 나이로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고 보름에 걸친 단식투쟁 전개로 건강을 잃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직후 고려여관이라는 조선인 여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남자현은 죽으면서 아들에게 중국 돈 248원 80전을(현재가치 약 3,500만원) 주면서 200원은 독립을 하면 독립 정부에 축하금으로 전달하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1946년 첫 3.1운동 기념식에서 남자현이 남긴 돈 200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에게 정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으며 1967년 국립현충원에 묘가 조성되었으나 유해의 한국 송환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묘를 조성했습니다. 1998년 후손들이 유해를 찾으려고 했으나 이때는 이미 남강 외국인묘지 자체가 사라진 뒤였습니다. 이후 유해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였고 발굴 조사를 도와달라는 후손들의 요청이 기사화되었으나 후속 대책은 없었습니다.
독립기념관에 새긴 남자현 어록비에는 고정희의 〈남자현의 무명지〉라는 시가 있습니다.
난공불락, 왜세의 도마 위에
섬섬옥수 열 손가락 얹어 놓고 하는 말
천지신명 듣거든 사람 세상 발원이요
탄압의 말뚝에 국적 따로 있으리까
조선 여자 무명지 단칼에 내리치니
피로 받아 쓴, 대한 여자 독립원
아직도 떠도는 아낙의 무명지.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린 불탑으로 197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영양군
영양에는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모전 석탑 3기가 남아 있습니다.
산해리 오층모전석탑(국보)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불탑으로 1977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탑은 험준한 산으로 쌓인 계곡을 따라 흐르는 반변천 옆 밭 가운데 서 있으며 탑이 있는 마을은 오래전부터 봉감(鳳甘)으로 불려 일명 봉감탑이라고도 합니다.
탑이 있는 주변 밭에는 기와 파편과 청자 파편이 많이 흩어져 있을 뿐 사찰에 대한 문헌 기록이나 전해오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1930년대 아리야마 쿄우이치(有光敎一)의 조사로 처음 알려졌으며, 1943년 스기야마 노부조(衫山信三)의 <조선의 석탑(朝鮮の石塔)>에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후 1981년과 1988년 해체보수가 이루어졌으며 1999년의 방수 처리, 2000년의 기단 보수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었습니다. 기단부는 토석을 섞어 만든 4단의 석축으로 쌓아 올렸고 그 위로는 3단의 탑신 받침을 두었는데, 제일 하단은 상면만을 다듬은 높은 판석을 11매 놓고 그 위로 얇게 다듬은 모전 석재 2단을 들여 쌓았습니다.
탑신부는 5층으로 1층에 비해 2층부터 급격한 체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층 탑신은 총 18단으로 쌓아 올렸습니다. 초층 탑신 남면에는 화강암 장대석으로 하인방과 문설주, 상인방을 놓아 문비를 설치하고 내부로는 감실을 마련했습니다. 문비의 문설주와 상인방에는 호형(弧形)의 문비 형을 조각하여 짜맞추었는데, 이 같은 문비 형식은 의성 탑리리오층석탑에서 시작되어 안동 조탑리오층전탑 등 통일신라시대 모전 석탑과 전탑의 문비에 나타납니다.
감실 내부 입구의 상인방과 하인방에는 회전 돌기 축 홈이 남아 있어 원래 문을 달아 개폐한 것으로 보입니다. 옥개석의 지붕 받침은 1층부터 5층까지 7·6·5·5·5단이며 상면 지붕 옥개는 모두 5단으로 내어 쌓았습니다. 특이한 것은 각층 하단에 2단씩의 돌출 턱이 마련되어 있는 점입니다. 이는 안동 운흥동오층전탑과 같이 기와를 얹어 고정하기 위한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륜부에는 2000년 수리 당시에 보수하여 새롭게 추가된 노반이 남아 있습니다.
이 탑은 주로 붉은색 이암 계통의 석재가 사용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다른 모전 석탑에서 보이듯이 돌을 작게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비교적 돌들은 큼직큼직하게 다듬어 모전석의 숫자를 최소화하면서 쌓아 올린 점입니다. 한편 1989년 해체, 수리에서 몇 가지 특징적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먼저 5층 지붕의 중앙에서 직사각형 구멍이 발견되었고 아래로 향할수록 넓어져 3층 탑신 상부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4층 탑신에서 나무 기둥의 흔적이 발견되어 목재 심주가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칠곡 송림사오층전탑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석탑과 모전 석탑 건립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 해체 결과 모전석이 외부로 노출된 부분만 다듬어져 있었고 탑 내부로 감춰지는 부분은 가공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뿌리가 긴 돌들이 내부의 다른 돌이나 흙으로 단단히 다져져 있어 탑이 내구성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한편 5층 상부와 탑 내부에서 다량의 기와가 발견되어 원래 탑 지붕에 기와를 올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전 석탑의 재료의 특성상 파손 및 결실이 두드러져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이 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모전 석탑 가운데 가장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탑입니다. 또한 완전한 해체 수리를 통하여 탑 내부와 기단의 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특히 현이동 모전오층석탑, 삼지동 모전석탑 등 영양 지역에 집중된 지역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어 한국 탑파사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현이동 모전오층석탑(보물)은 점판암으로 건조한 5층 석조불탑으로 영양읍 현리의 반변천과 가까운 평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사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사지 주변에서 출토된 용문(龍紋) 문양의 암막새, 탑의 치석(治石) 형태와 문설주의 인동문(忍冬紋, 꽃무늬와 덩굴무늬가 조화를 이룬 무늬), 일제강점기 당시 만들어진 보고서 등을 통해 신라 말 고려 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석재를 벽돌[塼] 모양으로 다듬어 축조했고 크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됐으며 1층 탑신은 12단으로 축조했고 남면에 감실(龕室)을 두었습니다. 감실은 화강석으로 된 장대석으로 좌우 문설주와 상, 하인방을 놓아 문비를 설치했습니다.
특히, 좌우의 문설주는 표면에 당초문의 문양을 새겨 넣었으며 벽돌 모양으로 석재를 다듬을 때 각진 위치에 자리한 모서리돌을 둥글게 처리해 탑의 조형에 부드러움을 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다른 석탑과 전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적인 사례입니다.
탑신부는 5층이며 2층부터 급격한 체감을 두었고, 경북 지역 모전 석탑의 체감 비와 유사한 81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양 지역에 국보로 지정된 산해리 오층모전석탑보다 규모는 작지만 같은 재료의 사용, 모전 석탑 계열 형식의 5층탑, 남쪽에 설치한 감실, 체감 비 등에서 유사성을 띠는 등 같은 양식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4층 일부까지 남아 있는 모습이었으나, 이후 1979년에 해체 복원 과정에서 5층으로 복원했으며 이후 2003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기단 등의 주변 보수정비 공사를 진행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이동 모전오층석탑(보물)은 5층 석조불탑으로 영양읍 현리의 반변천과 가까운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국가유산청
삼지동 모전삼층석탑은 절벽을 이룬 산 중턱의 튀어나온 바윗돌 위에 서 있는 석탑으로,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전 석탑입니다. 탑은 큰 바위를 기단 삼아 그 위로 탑신을 올려놓은 모습이며, 원래 3층탑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2층까지만 남아 있습니다.
1층 탑신부 앞면에 큰 불상을 안치하는 방인 감실이 있고, 감실의 하단부에는 정면으로 튀어나온 석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1층 옥개 받침은 6단이며, 옥개석 우등에는 풍탁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2층 옥개 받침은 5단이고 상부 낙수면은 6단입니다. 남아있는 2개의 옥개석은 모전이라는 조건 때문에 낙수 면과 옥개 받침이 층계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현재 상륜부에는 두 단의 돌을 쌓고 노반과 복발만 남아 있으며 노반과 복발은 단일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962년 수리를 했는데, 불상을 안치하는 감실 바닥을 정리하다가 매몰되어 있는 소불상 6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중 2구는 다시 감실 바닥에 넣어서 석회로 봉해 안치했고 나머지 4구의 불상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1998년 석탑의 해체보수 시 탑에서는 석재 사리함과 사리 1과가 출토되었습니다.
연대암 부근에 있었던 영혈사에 세워 두었던 탑으로 추정되며 영혈사는 신라 삼국통일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이 탑 또한 그 당시에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삼지동 모전삼층석탑은 절벽 중턱에 돌출된 암반 위 바위를 석탑 기단으로 이용하여 건립하였으며 탑재가 유실되어 2층만 남아 있다.Ⓒ위키백과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신분증(경로자), 마스크, 모자, 식수, 스틱,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따뜻한 여벌옷, 우비, 간식, 개인컵, 선글라스,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실손보험 미가입자는 반드시 여행자보험에 가입해 만일에 대비하세요.
▷2025년 4월 고을학교 참가비는 13만원입니다(강의비, 교통비, 2회 식사비, 운영비 등 포함).
▷단 아침식사(김밥) 안 드실 분은 12만7천원
▷참가비 송금은 국민은행 016701-04-183936 이근성(인문학습원)
▷버스 좌석은 참가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은 여기 <참가신청 바로가기>를 눌러서 해주세요. 비회원의 참가신청은 동시에 회원가입으로도 처리됩니다.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당일 안에 보내드립니다.
▷참가문의는 050-5609-5609 / 010-9794-8494 (월∼금요일 14:00∼18:00시. 공휴일은 제외), 또는 이메일 huschool@naver.com을 이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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