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을 지낸 한국 철학계의 거목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사진)가 27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충북 중원 출생으로 1943년 일본 도쿄대 법학부에 입학했다가 서울대 철학과로 편입해 1947년 졸업했다. 1960년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62∼1986년 서울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인류 보편의 윤리와 한국인의 가치관 연구에 헌신했다. 전공을 바꾼 이유에 대해 생전에 “광복 직후 도덕적 혼란에 빠진 한국에서 윤리 운동을 전개하려고 윤리학을 공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철학문화연구소 이사장, 심경문화재단 이사장, KBS 이사장, 수필문학진흥회장을 지냈고 국민훈장 동백장, 인촌상, 만해대상 등을 받았다. 1964년에 냈지만 아직도 대학 교재로 사용되는 ‘윤리학’과, ‘한국윤리의 재정립’ ‘공자사상과 현대사회’ ‘윤리문제의 이론과 사회현실’ 등의 학술서를 냈다. 장편수필 ‘흐르지 않는 세월’을 비롯해 ‘웃는 갈대’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 등의 수필집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종순 씨, 아들 도식(건국대 철학과 교수) 딸 수경 효남 씨 등 1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30일 오전 7시. 02-2030-7901
선생님, 너무 갑자기, 그러나 매우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마지막 시간이 가까웠을 때 그 누구의 방문도 사양하셨습니다. 평소 폐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선생님답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조용히 맞이하셨습니다. 2년 전 저희 후학들이 미수(米壽)를 맞이하여 ‘우송 김태길 선생님의 삶과 철학’이라는 책을 만들어 증정하겠다고 했을 때 90세 생일 즈음이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돌연히 우리 곁을 떠나시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선생님은 항일운동에 헌신하셨던 부친의 뜻에 따라 윤리학과 실천철학에 투신하셨고, 행동하는 지성인의 전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남의 학설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이른바, ‘가로되’ 철학에 만족하지 않고 자생적인 사상의 창출에 진력하셨으며 대학 강단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철학을 현실화하고, 현실을 철학화하는’ 철학 문화 운동을 전개하여 ‘철학과 현실’이라는 계간지를 발간하시고 철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성숙한 인격의 모범으로 감성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수필문학의 창달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시어 ‘수필문우회’를 이끌어 오시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평소 작은 나의 울타리를 넘어 어떻게 큰 나를 이룩할 수 있을지 고심하신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갈등과 투쟁의 원천은 ‘작은 나(小我)’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임을 깊이 간파하고 모든 것을 감싸는 ‘큰 나(大我)’의 경지에 이르는 삶을 살기 위해 무척이나 번뇌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큰 나’와 ‘작은 나’가 일치할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 스피노자를 흠모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직시할 때 선생님의 삶과 철학은 유난히 큰 한 줄기의 빛으로 다가옵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성숙한 사회와 세계의 중심에 서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이 성숙해야 된다고 믿고 ‘성숙한 사회 가꾸기 모임’이라는 시민운동을 주도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전개해오셨습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학술원’의 회장으로서 한국 학술계의 뚜렷한 이정표가 되시고 그 발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업적들이 너무도 방대하고 심오하여 저희 후학들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그토록 많은 발자국을 남기시고 그렇게 큰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께서는 이제 한 마리 학(鶴)처럼 훌쩍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선생님이 도달한 그 지점에서 그 업적과 가르침을 보배로운 유산으로 삼아 새로운 출발을 시도해보겠습니다. 우리들의 ‘작은 나’가 ‘큰 나’로 승화될 수 있도록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슬픈 먹구름을 거두고 망연한 안개를 헤쳐 나갈 것입니다. 저희들은 때로는 쓸쓸할 때도 있겠지만 선생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결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근엄하고도 온화하셨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그 절제된 열정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