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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수건강마을 임종헌한의원 원문보기 글쓴이: 林 山
과천 추사박물관 1층 전시실
칭(淸)나라 이팅(逸艇)이 유득공(柳得恭)에게 보낸 선면산수화(扇面山水畵)
청나라 일정이라는 사람이 그린 산수도이다. 언덕에는 빈 정자와 몇 그루의 나무가 있고, 그 외에는 수면으로 처리하였다. 이런 구도와 까칠한 필체는 원나라 예찬의 화풍을 구현하기 위함이며 아마도 북경 유리창 취영당 주인이 유득공에게 보내려고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웡팡깡(翁方綱) 제(題) '아이롄수어(愛蓮說)'와 허루이슝(何瑞熊)의 '롄화투(蓮花圖)'
작가/소속옹방강·하서웅
유물명옹방강 제 애련설과 하서웅의 연꽃그림 웡팡깡(翁方綱) 제(題) '아이롄수어(愛蓮說)'와 허루이슝(何瑞熊)의 '롄화투(蓮花圖)'
년도1817..4.23
크기18.3×54.1cm
설명
담계 옹방강이 쓴 주렴계의 「애련설」전문과 장유병(張維屛, 호는 南山, 옹방강의 문인)의 제시(題詩), 그리고 하서웅(何瑞熊, 청나라 順德人)이 그린 연꽃 그림. 주달(周達, 호는 菊人, 강소성 雲間 사람으로 주렴계의 먼 후손이다)이 1811년(가경 16) 북경에 올라와 1816년(가경 21)에 옹담계의 제자가 되어 하서웅에게 연꽃 그림을 그리게 하고, 스승인 옹담계의 찬을 청했다.
웡팡깡(翁方綱)의 '讀書山房(독서산방)' 현판(懸板)
작가/소속옹방강
유물명독서산방 현판 讀書山房 懸板
년도1813
크기28.6×123.8cm
설명
옹방강이 1813년에 쓴 ‘독서산방’ 현판이다. 누군가를 위해 당호(堂號)를 써준 것으로 보인다.
이한복(李漢福)이 '추사동귀도시(秋史東歸圖詩)'를 임모(臨模)한 '증추사동귀시권(贈秋史東歸詩卷)'
작가/소속이한복
유물명「추사동귀도시」 임모
년도1940
크기22×324cm
설명
1810년 2월 1일 주학년(朱鶴年)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추사를 위해 선무문 밖 법원사(法源寺)에서 송별모임을 열어주었다. 그 자리에 완원(阮元)을 비롯하여 이임송(李林松)ㆍ옹수곤(翁樹崑) 등 9명의 청나라 학자가 모여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었다. 당시 주학년이 그린 전별도와 이임송의 전별시가 《증추사동귀시권 贈秋史東歸詩卷》으로 전한다. 이 작품은 이 후 이한복이 임모한 그림으로 가운데 군복을 입고 있는 인물이 바로 추사이다.
20세기 초 추사연구의 선두에 섰던 일본인 학자 후지스카 씨의 유족들이 과천시에 기증한 1만여 점 자료 중 '추사동귀도시'라는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1810년 추사선생이 지금의 북경을 방문했을 당시, 중국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환송연을 베풀고 전별시를 짓고, 선생의 초상과 함께 선물한 것입니다.
우충량(吳崇梁)의 칠언시
작가/소속오숭량
유물명칠언시
년도 1824년
크기107×30cm
설명
옹방강의 문인인 오숭량(吳嵩梁, 1766~1834)이 추사의 둘째 아우 김명희에게 보낸 작품이다. ‘매화’와 관련하여 추사 일가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이다.
이광사(李匡師) 서첩(書帖)
소동파의 시 '박박주(薄薄酒)'를 쓴 서첩. 중간에 운학유천 비연성장(雲鶴遊天 斐然成章, 구름과 학이 하늘에서 노닐고 글이 화려하고 아름답다)이라고 썼다
薄薄酒 박박주
薄薄酒 勝茶湯 박박주 승다탕
皺皺布 勝無裳 추추포 승무상
醜妻惡妾勝空房 추첩악처승공방
五更待漏靴滿霜 오경시루화만상
不如三伏日高 불여삼복일고
睡足北窓凉 수족북창량
珠孺玉匣 주유옥갑
萬人祖送歸北邙 만인조송귀북망
不如懸醇百結 불여현순백결
獨坐負朝陽 독좌부조양
生前富貴死後文章 생전부귀사후문장
百年瞬息萬世忙 백년순시만세망
夷齊盜蹠俱亡羊 이제도척구망양
不如眼前一醉 불여안전일취
是非憂樂都兩忘 시비우락도양망
묽은 술일망정 차보다 낫고
거친 옷일망정 없는 것 보다 나으며
못생긴 아내와 성질 고약한 첩일망정
없는 것 보다는 났네.
오경에 다루원에서
신발 가득히 서리 맞아야하는 벼슬살이는
삼복에 해가 높히 솟을 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북창아래서 시원한 바람 씌우는
야인의 생활보다 못하네.
구슬로 장식한 수의 입고 옥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
만인의 칭송 받으며 북망산에 들어가는 것은
누륵누륵 궤맨 남루한 옷입고
홀로 앉아 아침 햇볕 받으며 살아가는 것만 못하네
살아서는 부귀 누리고죽으면 문장이 남겨지길 원하나
백년도 한 순간이요 만세도 바삐 지나갈 뿐
백이 숙제이건 도척이건 죽어 없어지긴 마찬가지니
지금 당장 취하여
옳고 그름과 근심 즐거움을 모두 잊는 것만 못하네.
薄薄酒-- 묽은 술, 추추布- 거친 마포. 서민의복장. 醜妻惡妾추처악첩-- 못 생긴 아내와 성질 못된 첩.
五更-- 하룻밤을 초경, 이경, 삼경, 사경, 오경으로 나눈다.오전 3시~5시.
待淚-- 대신들이 조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대궐에 나와 기다리는 것.
靴滿霜 -- 궁문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서리가 신발에 가득함.
주유옥갑 -- 구슬로 장식한 속옥과 옥으로 만든 상자.
祖送 -- 관을 묘지에 보냄,
北邙山 -- 죽는 것을 뜻함. 왜 죽는 것을 북망산 간다고 했을 까? 북망산은 하남성과 낙양 땅의 북족에 있는
작은 산인데 이곳에 漢 이후의 역대 제왕과 귀인 명사들의 무덤이 많아 후세에 이르러 사람들이 죽어가는 곳으로 대표하게 되었다.
<縣순>은 < 매추라기 순 (亨+鳥)>으로 (한자지원 안됨) 소매 짧은 옷을 입은 것을 가르킨다.
荀子 <大略篇>에 子夏는 가난하여 옷을 입은 것이 메추라기 같았다.
縣醇百結 -- 가난한 사람과 남루한 옷을 가르킴. 백결은 옷이 헤어져 너덜너들 기운 것.
독좌부조양- 홀로 앉아 아침 햇볕을 받음
瞬息 : 눈 깜작할 사이. 우리말 <순식간>은 한자로 표현한 말이다
俱亡羊-- 구망양이란 모두가 양을 잃었다는 표현. 현자나 우자나 모두 죽고 없다는 뜻.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로 장과 곡이 모두 양을 잃버리고 말았다. 臧은 책을 읽다가 穀은 놀이를 하고 있다가 양을 잃어 버렸다. 두사람 양을 잃은 것은 같았다. 백이는 이름을 위하여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고, 대도 도척은 이욕 때문에 두릉산에서 죽었다. 두 사람 죽은 곳은 달라도 목숨을 헤치고, 본성을 상하게 했다는 점은 같다.
都兩忘 -- 是非憂樂을 모두 잊는 것을 가르킨다.
웡팡깡(翁方綱)이 추사에게 보낸 '담계수찰첩(覃溪手札帖)'
발행연도 : 연대미상
- 크기(가로×세로 cm) : 33.5 x 21.8
- 책수 : 1첩
- 청구기호 : 古4474-8
85세의 옹방강이 32세의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놓은 첩이다. 이 편지는 『완당평전』 3권에 전문이 번역, 수록되어 있다. 김정희의 스승 옹방강은 청나라 후기 경학과 금석학의 대가이자 대수장가(大收藏家)로 알려져 있다. 25세에 중국 연경에 간 김정희는 1810년 1월 29일, 78세의 옹방강을 만났다. 옹방강 서재인 석묵서루(石墨書樓)에서 만나 필담을 나누었고, 옹방강은 김정희의 학식에 감탄하여 “경술문장해동제일(庚戌文章海東第一)”로 인정하였다. 김정희 또한 귀국 후 자신의 서재를 보담재(寶覃齋)라고 지어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출하였다.
'임한경명첩(臨漢鏡銘帖)' 발문(跋文)
'임한경명(臨漢鏡銘)'은 '한(漢)나라 때의 거울에 새겨진 글씨(鏡銘)를 베끼다(臨書)'의 뜻이다. 예서(隸書)는 추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서체다. 추사의 예서는 다른 서체에도 두루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추사는 주로 세련된 둥한(東漢)대의 예서를 배우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고졸한 고예(古隸)를 추구했다. 그는 특히 시한(西漢)대의 고예를 바탕으로 둥한대의 예서 가운데 동경(銅鏡)이나 마애명문(磨崖銘文)을 즐겨 임서(臨書)하였다. 60대 중반 작품으로 보이는 '임한경명첩'은 현재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서첩에는 '阮堂依古隸帖(완당의고예첩)'이라고 써 있다.
'임한경명' 발문(跋文)은 추사가 서체에 임했던 자세와 한대의 경문을 임서한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글이다. 행서(行書)로 쓴 이 발문은 40대 후반 또는 50대 초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漢隷之今存皆東京古碑西京槪不一見已自歐陽公時然矣如鄐君銘東京之最古, 尙不大變於西京略有鼎鑑爐殘款斷識可溯於西京者, 纔數種而已今以其意仿之以塞史言之求. 禮堂.[한대(漢代)의 예서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둥한시대의 고비(古碑)이고 시한시대의 비석은 한 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미 숭(宋)의 우양시우(欧阳修)가 살아 있었을 때도 그렇다. 추쥔밍(鄐君銘)은 둥한시대의 가장 오래된 비(碑)이지만 여전히 시한시대와 비교한다면 크게 변모한 것이 아니다. 대략 정(鼎), 감(鑑), 로(爐), 등(鐙)에 남아 있는 몇 글자를 가지고 시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겨우 몇 종류뿐이다. 지금 시한시대가 가지고 있는 서체의 의미를 모방하여 써서 사언(史言)의 요구에 응한다. 예당.]
'東京(둥징)'은 둥한의 수도 뤄양(洛阳), '西京(시징)'은 시한의 수도 시안(西安, 장안)을 말한다. 각각 둥한시대와 시한시대를 가리킨다. '歐陽公(우양꿍)'은 숭나라의 학자 우양시우(歐陽脩)를 이른다.
허련 판각(許鍊) '완당필첩(阮堂筆帖)'
'완당필첩(阮堂筆帖)' 또는 '추사첩(秋史帖)'은 추사의 글씨를 목판에 새겨 간행한 서첩이다. 추사체를 익히는데 매우 중요한 학습용 글씨첩인 '추사첩'은 전본도 아주 많고, 제목도 제각각 다르다.
제자인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판각한 다수의 탁본서첩 글씨가 있는데, 이는 일반 사람들이 추사를 알고, 추사체(秋史體)를 익히는 매우 중요한 학습용 글씨 첩이었다. 다시 말해 추사 이후 추사체를 공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책, 이것이 소치가 만든 추사 글씨 탁본첩(拓本帖)이었다.
'추사첩'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그린 난초를 칭찬하는 글과 추사의 노우(老友) 이윤명(李允明)의 수계(修禊)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수계는 시계(詩禊)라고도 하는데, 요즈음의 시동인(詩同人)과 같은 것이다. 중궈 진대(晉代)의 왕시즈가 란팅시싀(蘭亭詩社)를 만든 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기로회(耆老會), 죽림고회(竹林高會)나 조선시대 16세기에 성립된 낙송루시사(洛誦樓詩社), 자각시사(紫閣詩社) 등이 수계에 해당한다.
추사의 글씨는 일반적으로 세 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습작기로 24세까지의 글씨, 2기는 25세 이후 칭나라 옌징(燕京)에 다녀온 뒤 55세에 제주도로 유배될 때까지의 글씨, 3기는 제주도와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글씨를 말한다. 3기에 해당하는 글씨를 보통 추사체라고 한다. 하지만 2기 중국에 다녀온 뒤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글씨부터 추사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완당탁묵(阮堂拓墨)
완당탁묵(阮堂拓墨).
19세기. 조선시대. 김정희 글. 허련 판각. 지본목판인쇄.
조선 후기의 서화가인 소치 허련은 김정희의 제자로 김정희의 사후에 탑본첩을 유포하여 스승을 기리고자 하였는데 1877년 3월부터 남원 선원사에서 김정희의 작품을 목판에 판각한 것으로 이 탑본첩의 앞머리에는 김정희를 소식에 빗댄 초상이 실려 있어 제주에 유배되었던 김정희를 해남도에 유배되었던 소식과 동일시하고 그 유래를 써서 밝혔다.
김정희의 그림과 글씨를 탁본한 ‘완당탁묵(阮堂拓墨)’에는 그가 그렸다는 수선화 그림이 실려 있다. 그가 수선화를 사랑한 이유는 간단하다. 꽃이 사랑스러워서다. 사랑스러운데 당차기까지 하다. 그 여린 꽃잎으로 한겨울 추위를 견뎌낸다. 수선화는 12월에서 3월 사이에 개화한다. 김정희는 수선화를 보면서 겨울 추위 같은 제주도 유배를 견뎌야겠다고 다짐했으리라. 스승의 마음을 아는 제자가 굳이 수선화를 그려 넣은 이유다. 뿌리를 드러낸 수선화는 왜 그렸을까. 김정희는 수선화를 사랑했다. 그는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우는 수선화를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이 냉철하고 빼어나다’고 찬탄했다.
水仙花(수선화) 金正喜(김정희)
一點冬心朶朶圓 (일점동심타타원)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品於幽澹冷雋邊 (품어유담냉준변)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은 냉철하고 빼어났네.
梅高猶未離庭砌 (매고유미이정체) 매화가 고상하다지만 뜨락을 못 면했는데
淸水眞看解脫仙 (청수진간해탈선) 맑은 물에 해탈한 신선을 정말 보는구나.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화목 가운데 하나가 수선이다. 수선을 일러 금잔옥대(金盞玉臺)ㆍ여사화(女史花)・설중화(雪中花)・능파선(凌波仙)이라고도 한다. 금잔옥대는 금으로 만든 술잔과 옥으로 만든 잔대란 뜻으로 수선의 생김새가 노란 꽃은 금잔 같고 하얀 꽃잎은 옥잔대 같다는 데서 이르는 말이고, 설중화는 눈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능파선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아들 조식이 사모한 절세미인 견희(甄姬)가 있었는데 형인 조비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이 여인을 황후로 삼는 바람에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었다. 그 여인이 죽자 조비는 견희가 사용하던 옥베개를 아우인 조식을 조롱하기 위해 주었다. 그 베개를 가지고 물결이 일렁이는 낙천(洛川)을 지나면서 견희를 수신(水神)에 빗대어 지은 문장이 시인묵객들이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낙신부(洛神賦)’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수선화를 능파선이라고 불렀다.
수선화의 유래에 대해 서양의 전설을 보면, 수선화의 속명(屬名)인 나르키수스(Narcissus)는 그리스어의 옛 말인 'narkau'(최면성)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물속에 빠져 죽은 그 자리에 핀 꽃이 수선화라고 한다. 꽃말은 ‘자존’, ‘자아도취’이다.
조선시대 때 수선화가 무척 귀했던 듯하다. 그러기에 선비들이 더욱 갖고자 한 꽃이었다. 선비들은 중국 연경에 가는 이들에게 부탁해 그 뿌리를 어렵게 얻어다 키웠다. 추사도 24세 때 연경에 가서 처음 수선화를 본 뒤 매료되었다. 43세 때 평안감사로 재직하던 부친을 뵈러 갔을 때 마침 연경에 다녀오던 사신이 평안감사에게 수선화를 선물하자 그것을 달라고 졸라 당시 남양주에 있었던 다산 정약용에게 선물로 보냈다. 이 사실은 다산이 추사로부터 수선화를 받고 흡족해 지은 시로 확인된다. 55세 때 제주도로 유배되어 대정에 이르니 곳곳에 수선화가 자라고 있었다. 조선에 없는 것으로 여겼던 수선화가 제주에서는 농부들이 소의 먹이로 사용할 정도로 흔하게 자생한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도 추사였다. 추사는 이를 보고 귀한 사물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이렇게 천대를 받는다는 애련한 의미를 담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훗날 추사 김정희의 그림과 글씨를 좋아한 사람들이 '완당탁묵(阮堂拓墨)'이라는 여러 탁본을 간행했다. 그 중에 수선화부(水仙花賦)라는 것이 있다. 수선화를 노래한 청나라 호경(胡敬)의 명문을 특유의 추사체로 쓰면서 '몽당붓으로 아무렇게 그렸다'는 수선화 그림이 여기에 실려 있다. 이를 통해 추사가 얼마나 수선화를 가까이에 두고 완상했으며 관심이 많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추사는 위에 소개한 시에서 겨울을 이겨내고 자라나는 수선화를 보면서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을 지닌 식물이라고 상찬한다. 매화는 뜨락 안에 머물지만 해탈한 신선처럼 보이는 수선화는 맑은 물만 있으면 어디서든 자란다고 읊조린다.
이렇듯이 동서양의 전설 속에 같이 등장하는 꽃이 수선화다. 아울러 추사가 곁에서 직접 살펴보고 완상한 수선화의 자태를 떠올려보고, 수선화에 담긴 전설도 생각해 본다.
추사 김정희의 그림과 글씨는 후대에 사모하는 이가 많아 '완당탁묵(阮堂拓墨)'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탁본이 간행되었다. 무릉도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완당탁묵 원본>을 공개합니다. 이 책에는 추사선생께서 초의선사에게 써 준 반야심경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부작란도(不作蘭圖)
요약 조선 후기 문인서화가 김정희(金正喜)의 대표적인 묵란도.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55㎝, 가로 31.1㎝. 개인 소장. 불이선란도라고도 한다.
김정희 회화세계의 정수는 묵란인데 그중에서도 이 그림이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원래 달준이라는 사람에게 주려고 그렸으나 오대열(吳大熱)이 먼저 보고 가져갔다고 한다.
20년 동안 불이선의 경지에서 마음 속으로만 그리던 난이 갑자기 득도하듯 눈 앞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 그림은 문인화의 사의와 문기의 세계를 넘어 종교적 법열의 심오한 경지까지 느끼게 해준다.
붓질의 방향을 3번 바꾸며 이루어진 삼전지묘의 난엽들이 부드러우면서도 내적으로 농축된 강한 힘을 발산하고 있다. 꽃은 맨 좌측에서 꺾여 뻗어올라간 끝에 달려 있는데 2개의 짙은 먹점이 꽃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난초의 밑과 위를 조화시켜준다. 그리고 특유의 추사체로 여백을 가득 메우고 있는 화제들이 함께 어우러져 시서화일치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필선미와 이념미가 극치를 이루며 융합된 이 그림은 김정희 예술세계의 뛰어난 격조와 함께 조선시대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불이선란(不二禪蘭)'은 선란불이(禪蘭不二) 나아가 선란일체(禪蘭一體)와 같은 말이다. 선(禪)과 난(蘭)을 동격으로 본 것이다. 추사의 벗 초의선사(艸衣禪師)가 다법(茶法)과 선법(禪法)이 하나라는 다선일체(茶禪一體), 다선불이(茶禪不二)를 부르짖은 맥락과도 같다. 원래의 제목은 '不作蘭畵.....'로 시작되는 화제에 따라 '부작란(不作蘭)'이라고 불렀지만 최근 화제의 내용에 따라 '불이선란'으로 바꼈다.
그림은 꽃대 하나에 꽃 한 송이, 장엽 하나에 중엽 여섯, 단엽 예닐곱 장이 전부다. 오른쪽 아래에서 대각선으로 뻗었다가 수직으로 올라간 다음 직각으로 목을 꺾은 꽃대 끝에 화심(花心)만 농묵(濃墨)으로 강조한 꽃 한 송이를 그렸다. 장엽은 장타원형을 이루면서 뻗어올라가다가 꽃대가 꺾인 지점에서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져 휘었다. 화심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담묵(淡墨)으로 처리했다. 매우 단출하고 조야한 듯하지만, 탁 터진 꽃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희열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꽃은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이다.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개와 지조라고나 할까!
추사는 이 그림에 아주 만족했던 듯 낙관(落款)을 무려 열다섯 개나 찍었다. 자신이 추구했던 난초 그림의 이상(理想)을 이 그림에서 실현했다고 본 것이다. 추사의 그런 고조된 감정이 제시(題詩) 칠언절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판교식(鄭板橋式) 역행법(逆行法)으로 쓴 제시도 파격적이고, 글씨체도 매우 특이하다.
不作蘭畵二十年(부작란화이십년) 난초를 그리지 않고 스무해나 지났는데
偶然寫出性中天(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그렸더니 천연의 본성 드러났네
閉門覓覓尋尋處(폐문멱멱심심처) 문을 닫아걸고 찾아헤매고 또 찾았는데
此是維摩不二禪(차시유마불이선) 이게 바로 유마거사의 불이선 아니던가
추사의 희열은 파격적인 제시 바로 오른쪽의 화제 '若有人强要 爲口實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만약 누가 강요한다면 구실을 만들고 또 응당 비야리성에 있던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거절하겠다. 만향)'으로 다시 이어진다. '毘耶(비야)'는 비야리성(毘耶離城)을 말한다. 비야리성은 인도의 고대 도시 바이샬리(Vaisali), 팔리어로 베살리(Vesali, 毗舍離)를 가리킨다. 비야리성에 살았던 유마힐(維摩詰) 거사(居士)는 샤카무니(釋迦牟尼)의 교화를 도왔다. 비야리성의 장자(長者) 유마거사는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자신도 병이 들었다고 자리에 누운 뒤 병문안하러 온 여러 보살들에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하였다고 한다. '유마경(維摩經)'의 핵심인 '불이법문'은 분별과 대립. 차별, 언어를 떠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曼香(만향)'은 추사의 별호다.
난초 장엽이 꺾인 그 아래 여백에 화제를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漚竟又題.(초서와 예서의 기이한 글씨를 쓰는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보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제하다.)'라고 썼다. 자긍심이 가득한 화제다. '漚竟(구경)'은 추사의 별호다.
난초 꽃대 왼쪽 여백의 화제는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 번 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 선객노인.)'이라고 적혀 있다. '불이선란'은 본래 추사가 쑥대머리 시동(侍童)이었던 달준(達俊)에게 어느 날 우연히 손이 가는 대로 그려주었던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달준은 추사가 함경도 북청 귀양 시절에 만난 시동이다. 추사는 먹을 갈아 주는 시동이라고 해서 그를 '먹동이'라고도 불렀다. 달준은 추사가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 은거할 때도 따라와 모셨다. '仙客老人(선객노인)'은 추사의 별호다.
'선객노인' 명의로 쓴 화제와 난초 꽃대 사이에는 '吳小山見而豪奪. 可笑.(오소산이 보고 얼른 빼앗아가니 가소롭다.)'는 화제를 달았다. 이 화제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 쓴 것으로 보인다. '吳小山(오소산)'은 추사의 제자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다. 오규일은 추사의 낙관과 도인(圖印)을 도맡아 새겼던 전문 전각가였다.
원로 미술사학자 강우방(姜友邦,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불이선란'에 대해 '글자를 변형해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다. 그림이건 글씨건 법도를 지키지 않은 획이 없다. 괴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기세(氣勢)가 하늘을 찌르는 것이다. 자유의 세계요, 무애의 세계다.'라면서 '유마경'에 나오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유마거사의 '불이문답(不二問答)'처럼 '이런 고도의 추상적 세계를 다룬 작품이 "불이선란도"다.'라고 극찬했다.
'直聲秀句(직성수구)' 행서 대련
추사가 35세 때 쓴 '直聲秀句(직성수구)' 대련이 걸려 있다. 추사는 1820년 칭(淸)나라 학자 꾸춘(顧蒓, 1765~1835)에게 협서와 함께 이 대련을 써서 보냈다. 그가 칭나라 학자들과 깊이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직성수구' 대련 글씨는 일제시대 박석윤이 베이징(北京)의 수장가에게 구입해서 들여왔는데, 지금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直聲留闕下(직성유궐하) 곧은 말씀으로 대궐 아래 머무르게 되었지만
秀句滿天東(수구만천동) 빼어난 싯구는 하늘 동쪽 나라에 가득합니다
칭나라 관리였던 꾸춘은 서법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성품이 곧고 정직했던 그는 정치에도 밝아 직언을 잘하였다. 꾸춘에 대해서는 '칭싀리에쫜(淸士列傳)' <숭쥔탸오(松筠條)>에 그 일화가 나온다. 숭쥔(松筠, 1744~1835)은 청렴하고 정직하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방관에 임명되자 꾸춘은 '숭쥔 같은 사람은 마땅히 곁에 두고 중용해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황띠(皇帝)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추사는 이 대련을 통해서 꾸춘의 충직함과 빼어난 글씨를 칭송하고 있다.
추사는 꾸춘에게 보낸 대련 협서에 '顧南雅先生文章風裁, 天下皆知之, 向爲湘浦一言, 尤爲東人所傳誦而盛道之. 萬里海外, 無緣梯接, 近閱復初齋集, 多有南疋唱酬之什, 因是而敢託於墨緣之末, 集句寄呈, 以伸夙昔憬慕之微私. 海東秋史金正喜具草'라고 썼다. 풀이하자면 '난야(南雅, 고순의 호) 선생의 문장과 풍채는 천하가 모두 다 압니다. 저번에 샹푸(湘浦, 숭쥔의 자)를 위한 한 말씀은 더욱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해 듣고 외우는 바 되어 크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만리 해외에 서로 만날 길이 없더니 요즈음 <푸추짜이지(復初齋集)>를 보는데, 꾸춘 선생과 주고받은 싯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학문과 예술로 맺은 인연의 끝에 부탁하여 글귀를 모아 보내드림으로써 일찍부터 동경하고 사모하던 작은 뜻을 폅니다. 해동의 추사 김정희가 갖추어 씁니다.'라는 뜻이다.
전련 '直聲留闕下'는 탕나라 주칭위(朱慶餘)의 오언율시 '孔尙書致仕, 因而有寄贈(콩 상수가 벼슬에서 물러났기에 부쳐주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후련 '秀句滿天東'은 출처를 알 수 없다. 추사가 전련에 맞춰서 창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탄생한 이 대련의 명구는 추사의 30대 후반 글씨체의 기준작이 된다. 웅장한 필치에서 중년 시절 대가의 기개가 엿보이는 글씨다. 박규수(朴珪壽)는 이런 글씨를 보고 추사의 중년 글씨가 기름졌다고 말한 것이리라.
남상길, 민규호, 김익환 간행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1867년(간행), 1868년(간행), 1934년(간행)
권수·책수
10권 5책
간행·발행·발급자(처)
남상길, 민규호, 김익환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조선 말기의 학자·서화가 김정희(金正喜)의 시문집.
내용
10권 5책. 연활자본. 1867년(고종 4)에 문인 남상길(南相吉)이 김정희의 고금체(古今體)의 시집 ≪담연재시집 覃揅齋詩集≫과 ≪완당척독 阮堂尺牘≫ 2편을 간행하였다.
이듬 해인 1868년 가을에 남상길·민규호(閔奎鎬)가 산정하여 ≪완당집≫을 간행하였다. 당시의 ≪완당집≫은 5권으로, 소(疏)·서(書)·문답·서(序)·기(記)·제문·상량문·고(攷)·변(辨)·설(說)·명(銘)·서후(書後) 등이 실려 있다.
그 뒤 1934년 김정희의 현손인 익환(翊煥)이 유일(遺逸)된 것을 수습하고 중복된 것을 산정하여 ≪완당선생전집≫을 간행하였다. 권두에 남상길의 서문과 민규호의 소전(小傳)이 있다. 권수(卷首)에는 서(序)·구서(舊序)·소전·초상(肖像)·유묵이 있다.
권1∼5에 고(攷) 5편, 설 6편, 변 3편, 소 5편, 서독(書牘) 108편, 권6∼8에 서(序) 2편, 기 3편, 제발(題跋) 7편, 전(箋) 1편, 명 1편, 송 1편, 잠 1편, 상량문 1편, 제문 4편, 묘표 2편, 잡저 17편, 잡지(雜識) 1편, 권9·10에 시 240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진흥이비고 眞興二碑攷>는 <예당금석과안록 禮堂金石過眼錄>이라는 별책으로 나온 바 있는, 우리 나라 금석학 연구에 있어 최초의 논설이다.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은 실학 사상의 지도 이념으로서 사상성을 보여주는 논설이다.
김정희는 약관 24세에 북경(北京)에 건너가 청대의 석학인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과의 망년교(忘年交)를 통해 청대 학술의 진수인 고증학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금석학(金石學)·서학(書學) 등의 예술 및 역사 방면에 있어 우리의 문화적 우수성을 찾으려는 민족적 주체성을 자각하도록 하였다.
서독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서화가인 동시에 비평가이며 감상가(鑑賞家)임을 알 수 있다. 서화에 관한 이론에서는 집필법(執筆法)·운필법(運筆法)을 비롯한 바르고 정확한 서법을 설명하였다.
금석(金石)은 하나의 편린이라도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기록한 사승(史乘)보다도 낫다고 하였다. 고인이 금석을 한낱 고물로서 애완함에 그치지 않고 귀중하게 여기는 까닭도 사료로서의 가치 때문이라고 하였다.
금석학 연구에 있어서는 량치차오(梁啓超)가 지적한 청대 고증학의 치학 방법(治學方法)인 귀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는 북한산비(北漢山碑)와 황초령비(黃草嶺碑)를 대조하여 당시 무학(無學)의 비라고 일컫는 잘못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대역방통소식 大易旁通消息>과 <항역호역 項易胡易>은 ≪주역≫에 관한 연구로, ≪주역≫의 소식(消息)에 대해 설명하고 항역과 호역의 동이점(同異點)을 지적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완당전집 [阮堂全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완당선생전집
[ 阮堂先生全集 ]
요약 조선 후기의 서도가(書道家)이며 고증학자(考證學者) ·금석학자(金石學者)인 김정희(金正喜)의 시문집.
남상길
시대
1868년(조선 고종 5) 간행
소장
국립중앙도서관
활자본. 10권 5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68년(고종 5)에 문인 남병길(南秉吉) 등이 편집 간행한 《완당집(阮堂集)》 《완당척독(阮堂尺牘)》 및 《담연재시집(覃揅 齋詩集)》 등을 1934년 현손인 익환(翊煥)이 합편, 서울 영생당(永生堂)에서 간행하였다. 권1은 고(攷) ·설(說) ·변(辨), 권2∼5는 소(疏) ·서(書) ·독(牘), 권6은 서(序) ·기(記) ·발(跋), 권7은 전(箋) ·명(銘) ·송(頌) ·잠(箴)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묘표(墓表) ·잡저(雜著), 권8은 잡지(雜識), 권9∼10은 시(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책머리에 남병길의 서문과 민규호(閔奎鎬)의 소전(小傳)이 있고, 권수(卷首)에는 서(序) ·구서(舊序) ·소전 ·초상(肖像)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완당선생전집 [阮堂先生全集] (두산백과)
'완당척독(阮堂尺牘)' 상권
척독(尺牘)은 짧게 쓴 편지를 말한다. 시간이 없어 짧게 쓴것이 아니라 긴 편지를 쓰는 것 이상으로 애를 써서 작품성을 의식하고 제작된 것이다.
가로 19.5cm 세로 26.7cm
문화예술 > 문헌 > 문집류 > 문집류(文集類)
소장처 대전대학교 박물관
<저자> : 김정희
<판표시> : 목판본
<간행년> : 미상
<책수> : 2책
<내용 및 특징>
목판본으로 완당선생의 척독집으로 상, 하 두 권으로 구성되었다.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나 군데군데 좀이 먹은 게 보인다. 겉 표지에는 현재 아무런 제목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에 새로 갈은 것 같다. 책의 구성은 10행 20열로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완당척독 (e뮤지엄)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척독류
· 작성주체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남병길(南秉吉, 1820-1869)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금속활자본(전사자판)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867
· 형태사항 不分卷2冊 : 四周單邊 半郭 21.3 x 14.6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白魚尾 ; 29.9 X 19.0 cm
· 주기사항 序: 歲在丁卯(1867)南至日宜山南秉吉序
印: 白蓮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9.110a
안내정보
1867년 남병길(南秉吉)(1820-1869)이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척독을 모아 2권 2책의 활자본(活字本, 全史字)으로 편집·간행한 책으로, 이하응(李昰應) 외 16인에게 보낸 척독이 수록되어 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저자(著者)인 완당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김노경(金魯敬, 1766-1840)과 기계 유씨(杞溪 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 100여개에 이른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완원(阮元, 1764-1849)·옹방강(翁方綱, 1733-1818)·조강(曹江) 등과 교유, 고증학(考證學), 금석학(金石學)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 1768-1840)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헌종 14)에 해배되었으며,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이후에는 과천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김정희는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그는 함흥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眞興王) 순수비(巡狩碑)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대표적인 서화작품으로 『세한도(歲寒圖)』,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가 있다.
편자(編者)인 남병길은 김정희의 문인(門人)으로, 자는 자상(子裳), 호는 혜천(惠泉)·육일재(六一齋)·만향재(晩香齋)이며 천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이다. 남병길은 1867년 김정희의 시를 수집 편차한 『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와 『완당척독』을 전사자(全史字)로 간행하였다.
구성 및 내용
본서의 첫머리에 “歲在丁卯南至日宜山南秉吉序”라고 적혀 있는 서(序)가 있다. 이하 상권 1장_a면부터 하권 69장_a면까지 17인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하응에게 보낸 편지를 가장 앞에 놓고, 끝에는 편지 외에 「牘外餘言」, 「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을 수록해 두었다. 김정희가 편지를 보낸 17인은 이하응, 권돈인(權敦仁, 1783-1859), 남병철(南秉哲), 조면호(趙冕鎬, 1803-1887), 심희순(沈熙淳, 1819-?), 장인식(張寅植), 오규일(吳圭一), 이상적(李尙迪, 1804-1865), 홍현보(洪顯普, 1815-1896이후), 김석준(金奭準, 1831-1915),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오창렬(吳昌烈), 백파상인(白波上人), 초의상인(草衣上人)이다. 척독은 수신인의 신분에 따라 편차해 두었고, 학문과 예술에 관한 견해를 담고 있는 척독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권 상
「阮堂尺牘序」(1장_ab면), 「上石坡(興宣大院君)」(1장_a-2장_b), 「答石坡」(2장_b-4장_b), 「上權彝齋(敦仁)」(4장_b-41장_b), 「答權彝齋相國」(41장_b-61장_a), 「與南圭齋(秉哲)」(61장_a-68장_a), 「答趙怡堂(冕鎬)」(68장_a-72장_a)
권 하
「答沈桐庵(熙淳)」(1장_a-23장_a), 「答張兵使(寅植)」(23장_a-34장_b), 「答人」(34장_b-38장_b), 「答李知樞(尙迪)」(38장_b-39장_b), 「答洪生顯普」(39장_b-41장_b), 「答金生奭準」(41장_b-54장_b), 「答吳生慶錫」(54장_b-56장_a), 「答吳昌烈」(56장_a-57장_b), 「答白波上人」(57장_b-59장_b), 「答草衣上人」(59장_b-65장_b), 「牘外餘言」(66장_a-68장_b), 「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68장_b-79장_a)
서지적 가치
본서는 1934년 종현손(從玄孫) 김익환(金翊煥)이 서울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연활자(鉛活字)로 인행(印行)한 『완당전집(阮堂全集)』(10권 5책, 한국문집총간 영인본)의 저본 중 하나로, 이 책은 『완당전집』과의 대조 및 교감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제석파난권(題石坡蘭卷)」과 「서원교필결후(書圓嶠筆訣後)」 등은 본서 『완당척독』에서는 편지 말미에 붙인 글로 편지의 일부분으로 수록되어 있지만, 『완당전집』에서는 편지에서 분리하여 ‘제발(題跋)’ 항목으로 재배치하여 한 편의 완결된 문장으로 취급하였다. 여기에서 김정희가 금석학과 예술에 관한 견해를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완성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본서에는 『완당전집』에는 보이지 않는 편지들이 여러 편 포함되어 있어 김정희의 편지글의 본모습을 어느 정도 복원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완당척독』과 『완당전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는 편지의 경우에는 약간의 글자의 출입이 있지만, 대부분 인사말, 편지 투식(套式)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본서와 『완당전집』의 편지의 편차 순서와 기준에 대해서는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완당척독』에서는 독립적인 편지로 간주하여 편차한 척독들을 『완당전집』에서는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한 편의 서독으로 편집·배열해 두었다. 예컨대, 권돈인에게 보낸 척독들 중, 『완당척독』에서는 독립된 편지로 인식하여 여러 페이지에 걸쳐 산재되어 있는 척독 5편(4장_b-6장_a, 12장_ab-13장_a, 15장_ab, 20장_b-22장_a, 47장_ab)이 『완당전집』에서는 ‘「여권이재[돈인](與權彝齋[敦仁])」32’의 제목 아래 하나의 편지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이하응, 남규철, 심희순 등의 척독 편차에서도 보인다.
이를 통해 김익환이 『완당전집』을 간행하며 김정희 척독을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기 보다는, 다른 시기에 작성된 척독이지만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한통의 편지로 재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짧은 편지를 지칭하는 ‘척독’이라는 표현을 일반 편지를 지칭하는 용어인 ‘서독’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완당척독』이 먼저 간행되었고, 『완당전집』의 ‘서독’ 부분이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고려해 볼 때, 본서 『완당척독』은 김정희 척독의 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내용적 가치
남병길은 서문에서 김정희의 척독이 의미가 있는 이유로 ‘해타(咳唾)의 나머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던 척독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경사(經史)·백가(百家)와 고문(古文)·시사(詩詞), 노불(老佛)·금석(金石)과 해례(楷隷)·명물(名物) 등과 같은 다양한 내용을 언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문장의 전형’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수록된 편지의 대상 인물을 살펴보면, 『완당전집』의 ‘서독(書牘)’에서 가족·친지에게 보낸 편지까지 아우르고 있는 반면, 본서에는 학문과 예술 방면에서 교유한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를 위주로 수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편지 수신인이 이하응, 권돈인 등 사대부 뿐 아니라, 이상적, 오창렬, 홍현보 등의 중인, 백파상인과 초의상인인 승려까지 아우르고 있는 점은 김정희의 폭넓은 교유 관계와 그의 사상의 다양성, 개방성을 잘 보여준다.
본서에 수록된 척독의 대부분은 김정희가 지인들과 문학, 예술, 학문에 의견을 주고받은 것들이다. 하권의「독외여언(牘外餘言)」에도 ‘난정첩’에 관한 글 3편, ‘오경(五經)’, ‘참동계(參同契)’에 관한 글이 수록되어 있는 점에서 남병길이 본서에서는 김정희의 일상의 모습 보다는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점과 함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생각까지 보여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의 척독이 학문과 사상에 대한 관점까지 포함하고 있는 점은 18세기에 유행한 소품 척독과는 확연히 다른 경향이다. 당시 김정희의 문단에 대한 영향력과 현전하는 『완당척독』 간행·필사본의 규모로 볼 때, 『완당척독』이 당시 문인들의 편지글의 중요 전범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 김정희가 척독이라는 형식을 통해 학문과 예술에 대한 의론을 주고받은 것은, 동시대 다른 문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척독에 대한 관심이 문예적인 측면에서 점차 넓은 범위로 확장되는 데 일정정도 기여했을 것이다.
롼위안(阮元) 편찬 '황칭징지에(皇淸經解)'
황청경해(皇淸經解)
요약 청나라의 고전 연구의 총서(叢書).
중국 청(1825∼1829)
1,400권. 정편(正編)과 속편(續編)이 있는데, 정편은 양광총독(兩廣總督) 완원(阮元:1764~1849)이 그의 문인 엄걸(嚴杰) 등에게 편집하게 하여, 1825∼1829년에 출판하였다. 고염무(顧炎武) 이하 73명의 청나라 유학자의 경서해석에 관한 서적 188종을 수록하고, 주해고증(注解考證) ·문자훈고(文字訓詁)를 비롯하여 역산(曆算) 연구서까지 포함한다. 판본(版本)은 태평천국(太平天國) 때에 병화(兵火)를 당하였으나, 그 뒤 양광총독 노숭광(勞崇光)이 보각(補刻) ·재간(再刊)하였다.
1888년 강소학정(江蘇學政) 왕선겸(王先謙)이 정편에서 빠진 것과 그 이후의 연구서 209종을 모아 《황청경해속편(皇淸經解續編)》 1,430권을 출판하였다. 정편 ·속편 모두 각서(各書)의 서발(序跋)이 빠진 경우가 많고, 또 그 내용을 생략한 것도 있으나, 십삼경(十三經)의 신소류(新疏類:漢唐 經學의 注疏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해석)를 포함하며, 건륭(乾隆)으로부터 함풍(咸豊)에 걸친 청대 고증학의 정수를 수록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청경해 [皇淸經解] (두산백과)
황청경해(皇淸經解) <26×16cm>
청나라 완원(阮元)이 편찬한 총서로, 뒤에 나온 왕선겸(王先謙)의 속편과 함께 청대 고증학의 정수로 꼽힌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오자 바로 추사에게 전해졌는데 후지츠카 치카시는 자신의 글에서 ‘을축조원(乙丑朝元)’과 ‘용명(龍瞑)’이라 인기를 거론하며 이 책이 혹시 그 중 하나가 아닐까라고 유추하기도 했다.
중국 청나라의 완원이 그의 문인 엄걸 등과 함께 청나라 여러 유학자의 경서 해석에 관한 서적을 모아 편찬한 책
추사 서간 '황청경해(皇淸經解)'
황청경해(皇淸經解) <24×36cm>
모임 자리에서 잠시 뵌 뒤 시간이 지나서도 그리웠는데, 지금 보내신 편지를 받고 포근한 동지(冬至)에 편안하시다 하니 위안이 됩니다. 다만 부스럼의 고통에 대해서는 염려가 적지 않습니다.
저는 기침이 줄곧 사그라들지 않아 걱정입니다.
말씀하신 아홉 사람의 글은 당연히 전집(全集)이 있을 듯합니다. 정징군(程徵君)의 『통예록(通藝錄)』은 고(故) 두실(斗室, 沈象奎) 대감의 장서에서 본 적이 있고, 강세공(江歲貢)의 책은 별도의 문집 없이 『경해(經解, 皇淸經解)』에 모두 들어 있으며, 왕명성(王鳴盛), 전대흔(錢大昕)의 저술은 사람 키만큼 많지만 『경해』의 수록은 대략을 추렸을 뿐이고, 혜사기(惠士奇), 심동(沈彤), 초순(焦循), 장용(臧庸)도 『경해』에서 그 장점을 모두 수록하였고, 상서 왕인지(王引之)의 글은 『경의술문(經義述聞)』, 『경전석사(經傳釋詞)』외에 다른 저서는 판각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장명경(臧明經)의 증조 장옥림(臧玉林)의 글도 『경해』에 있는데, 이 사람은 명나라 말기 사람으로, 근대에 경서를 논하는 이들은 모두 그를 개산조(開山祖)로 봅니다. 그럼.
편지 받은 날 아우 올림.
청주칭(程祖慶) 작 '먼푸투(捫腹圖)'
추사가 청나라와의 학문 교류에 쏟은 열정과, 그의 학문이 청나라에서 얼마나 인정받았는 지는 청나라 학자 정조경(程祖慶)이 추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린 그림 <문복도捫腹圖>를 보면 알 수 있다.
淸의 문인 程祖慶(1785~1855)이 추사 김정희(1786~1856)에게 그려 보낸 그림을 문복도(捫腹圖, 1853년)라 하는데, 그는 이 그림에서 추사보다 한 살 많은 자신을 관을 쓴 노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젊은이로 묘사했다. "완당 선생은 아직 뵙지 못했으나 문장과 학문을 오랫동안 경모해 왔습니다. 이 그림을 그려 보내니 잘못되지 않았다고 여기신다면 수염을 치켜 흔들며 한바탕 웃어 주십시오."라고 그림에 썼다. 배움에는 나이가 문제가 안 되며 나라와 언어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뜻이겠지. 나는 나이가 열 살 이상 아래인 사람을 음식점의 상좌에 앉게 하고 마치 자신이 제자인 것처럼 모시고 삼가면서 그의 말을 열심히 귀담아 듣는 노학자를 최근 보았다.
그 노학자 옆에 내가 앉아 있었다.
捫:잡다 더듬다 삼가다. 심신이 만족스러워 배를 쓰다듬는다는 뜻
捫舌:혀놀림을 삼간다. 말을 삼간다는 뜻
捫蝨(문슬):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를 잡는다는 뜻. 방약무인한 태도를 이르는 말
1853년 청나라 문인 정조경(程祖慶·1785~1855)이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에게 보낸 그림이다. “완당(阮堂) 선생은 내가 비록 아직 그 얼굴을 대하지 못했으나 문장과 학문을 오랫동안 경모해 왔습니다. 이 그림을 그려 보내니 잘못되지 않았다고 여긴다면 수염을 치켜 흔들며 한바탕 웃어주십시오.” 그림에 덧붙인 글이다.
청나라 문인 정조경이 김정희에게 그려 보낸 ‘문복도’ (1853년) 관을 쓴 노인이 김정희이고, 손을 공손히 맞잡은 젊은이는 정조경 자신을 가리킨다.
‘문복도(捫腹圖)’란 제목을 단 이 그림. ‘문복(捫腹)’이란 심신이 만족스러워 배를 쓰다듬는다는 표현이다. 그림에서 추사는 후덕한 대학자의 모습이고 정조경은 배움을 구하는 제자로 보인다. 이 문인화의 작자가 청나라 학자라는 게 중요하다. 더구나 그림을 보낸 정조경은 실제 추사보다 1살 연상이다. 연하의 조선 학자에게 배움을 청하는 청나라 학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때 정조경의 나이 68세. 그가 숨지기 2년 전, 추사의 타계 3년 전, 이 동년배 학자들은 일면식도 없는 가운데서도 국경을 넘나드는 진한 ‘문인향’을 남겼다.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와 개인적 연을 맺은 것은 1809년(순조 9)에 부친 김노경(金魯敬·1766~1840)을 수행해 청나라에 간 게 중국 체험의 첫 계기다. 추사는 23세, 학자로서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나이였다. 이 때의 연행(燕行)에서 추사는 청나라 금석학·고증학의 대학자이자 명문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 직접 교유한다. 이후 금석학과 고증학은 추사의 학문 세계를 좌우했다. 이는 주자학 중심으로 정체돼 있던 19세기 조선의 고루한 사상계에 있어 하나의 뚫리지 못한 ‘숨통’이 된다.
추사가 권돈인에게 쓴 '마천십연 독진천호(磨穿十硏 禿盡千毫)' 서간
磨千十硏(마천십연), 禿盡千毫(독진천호) 추사체 대련은 추사가 말년에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의 글귀 '吾書雖不足言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내가 비록 글씨는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70년 동안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천여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에서 뽑은 것이다. 추사의 예술혼이 단적으로 드러난 구절이다. 글씨가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연습과 피나는 수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무서운 말이다. 추사는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고 나서야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磨千十硏(마천십연), 禿盡千毫(독진천호)로 완성된 추사체는 그의 제자 이하응, 신헌, 서상우(徐相雨), 조희룡(趙熙龍), 이상적(李尙迪), 허유(許維), 전기(田琦), 오경석(吳慶錫)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을 통해 일세를 풍미했다.
편지 원문은 다음과 같다. 古人作書 別無簡札體 如淳化所刻 多晉人書 未嘗專主一簡札 是東俗之最惡習也 吾書雖不足言 七十年磨穿十硏 禿盡千毫 未嘗一習簡札法 實不知簡札別有一體式 來要者輒以簡札爲言 謝不敢耳 僧尤甚於簡一法 莫曉其義諦也[옛 사람들의 글씨는 간찰체(簡札體)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순화각첩(淳化閣帖)'의 경우는 진(晉)나라 사람들의 글씨가 많은데 간찰만을 위주로 하지 않았으니, 간찰은 바로 우리나라의 가장 나쁜 버릇입니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내고, 천여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으면서 한 번도 간찰의 필법을 익힌 적이 없고, 실제로 간찰에 별도의 체식(體式)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게 글씨를 청하는 사람들이 간찰체를 이야기할 때마다 못 한다며 거절합니다. 스님들이 간찰체에 더욱 얽매이는데,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춘화거티에(淳化閣帖)'는 숭(宋)나라 타이중(太宗)이 춘화(淳化) 연간에 금중(禁中)에 춘화거(淳化閣)을 설립하고 한(漢)나라 짱즤(張芝)로부터 웨이(魏), 진(晉), 탕(唐)까지 여러 서예가의 필적을 골라 보관하고 한린싀수(翰林侍書) 왕주(王著)에게 모각(摹刻)하게 한 것이다. '춘화미거파티에(淳化秘閣法帖)'라고도 하고, 줄여서 '거티에(閣帖)'라고도 한다.
1851년 예송 논쟁에서 패한 권돈인은 강원도 낭천(狼川, 지금의 화천), 추사는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1852년 67세의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권돈인은 아직도 낭천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권돈인은 1859년 충남 연산(連山)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편지는 북청에서 돌아온 추사가 아직 낭천에 있던 권돈인이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써 준 것이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권돈인은 간찰체에 대해서 추사에게 물었다. 추사는 간찰체에 대해 조선의 병폐라고까지 하면서 경멸하고 있다. 공을 들여서 쓰는 서체와는 달리 법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리한 대로 자유분방하게 쓰는 간찰체가 못마땅했던 것일까?
선운사(禪雲寺)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 탁본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 입구 근처 부도전 내에 세워져 있는 조선 후기 기념비.
[개설]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1858년(철종 9년)에 세운 것으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기 때문에 비문의 제목을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에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기에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巌) 등 백파의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고 하였다.
백파율사는 조선의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불교의 참신한 중흥을 일으킨 화엄종주이다. 이와 같은 백파율사의 업적을 김정희가 찬양한 내용이 적혀 있는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추사의 글씨체 연구와 율사의 업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백파율사는 조선 후기의 승려 긍선(亘璇:1767~1852)의 법호이다. 화엄종 계통의 승려로, 조선조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오랜 침체기를 헤치며 조선후기 불교의 참신한 종풍(宗風)을 일으킨 화엄종주(華嚴宗主) 백파율사의 업적이 적혀 있는 이 비석은, 네모난 받침 위에 몸통을 세우고 지붕돌을 씌운 모습으로 되어 있다. 백파율사의 업적을 김정희가 찬양한 내용이 적혀 있는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추사의 글씨체 연구와 율사의 업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이 비석은 선운사 입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숲 속의 부도 밭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약간 작은 모형의 닮은 비석이 원래 있었던 부도전에 서 있고, 원비는 1998년 9월 10일 선운사 성보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8세 때 선운사로 출가하였으며, 순창 구암사(龜巖寺)에서 주석하면서 설법한 대강백이자 선승이었다. 50세 때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하여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선논쟁(禪論爭)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 추사는 초의의 편을 들어 백파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선논쟁은 조선후기 불교사에서 1백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백파와 추사는 이러한 논쟁의 인연이 있었는데, 백파가 입적한 후 그의 제자들이 추사에게 비문을 부탁하자 추사가 흔쾌히 수락하여 백파율사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백파율사는 문장에도 뛰어나 유학자들과의 서신교류도 많은 뒷이야기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특히 추사 김정희와의 교류는 저명한 일화거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초의와도 정면 대립하여 논전을 거듭했던 추사는 백파와도 크게 대립하여 선가의 종풍을 결코 쇄신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추사의 주장을 의식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새로운 종풍을 짐작하였다. 추사도 백파의 큰 뜻을 짐작하고 그의 신기한 설법을 긍정하듯 생전에 서로 면식이 없었던 사이였는데도 백파가 입적한 뒤 6년 만에 추사는 백파의 묘비명을 경건하게 공술하고 비문도 정성껏 썼다.
비문의 첫부분은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律師)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로 시작되는데, 여기에서 추사가 백파를 존경의 의미가 담긴 선사(禪師)라 칭하지 않고, 그 대신 율사(律師)로 규정한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립경위]
백파율사 사후에 설두와 백암이 찾아와 김정희에게 글을 부탁하여 써주었는데,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위치]
선운사 매표소에서 100m쯤 가면 오른쪽 숲 속 부도전 내에 있다. 1998년 9월 10일 선운사 성보박물관을 개관하면서 박물관 내로 옮겨졌다가 다시 본래의 자리에 놓였다.
[형태]
조선 후기 일반적인 형태인 갓석과 비신, 그리고 좌대를 갖추었으며, 비신 앞면에는 제목을 해서로 썼고, 뒷면에는 해서로 음기를 썼다.
[금석문]
비석의 앞면에는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되어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금석문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한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것에 해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율사로 썼다.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80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다. 혹자는 기(機), 용(用)을 살(殺), 활(活)로 지리멸렬하게 천착(穿鑿)하기도 하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릇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디에서건 살, 활, 기, 용이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하더라도 살, 활, 기, 용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한 가지 법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의리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살, 활, 기, 용을 백파를 구속했던 착상으로 여긴다면 이는 모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것이 어찌 백파를 충분히 아는 것이겠는가.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왕복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분변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곳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비록 온갖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율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오게 하여 서로 마주하여 한번 웃을 수 있겠는가.
지금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만약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巌)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 다음과 같이 써서 붙인다. ‘가난하기로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기개는 수미산(須彌山)을 누를 만하였네. 부모 섬기기를 부처 섬기듯 하매 가풍(家風)이 가장 진실하도다. 그 이름 긍선(亘璇)이니 전전(転転)한다 말할 수 없다네. 완당(阮堂) 학사(學士) 김정희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오년5월 일 건립하다[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我東近無律師一宗惟白坡可以當之故以律師書之大機大用是白坡八十年藉手著力處或有以機用殺活支離穿鑿是大不然凡對治凡夫者無處非殺活機用雖大蔵八萬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特人不知此義妄以殺活機用爲白坡拘執着相者是皆蜉蝣撼樹也是烏足以知白坡也昔与白坡頗有往復辨難者即與世人所妄議者大異此個處惟坡與吾知之雖萬般苦口説人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今作白坡碑面字若不大書特書於大機大用一句不足爲白坡碑也書示雪竇白巖諸門徒果老記付 貧無卓錐氣壓須彌事親如事佛家風最真實厥名兮亘璇不可説轉轉阮堂學士金正喜撰并書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日立].”
[의의와 평가]
백파율사는 오랫동안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인하여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조선 불교계를 다시 꽃피우게 한 화엄종의 종주이다.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평소 교유와 사상적 논쟁을 벌였던 추사 김정희가 1858년에 직접 비문을 짓고 비명을 썼다. 이를 인정하여 1986년 9월 9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김정희는 비문에서 백파율사를 표현할 때 “가난해서 송곳을 꽂을 땅도 가지지 못하였으나 기운은 수미산도 누를 만하다”라는 명을 지어 백파의 대기대용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백파율사와 추사체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방정한 해서체의 글씨로서 추사가 별세하기 1년 전에 쓴 글씨로서 추사체의 진면목이라고 일컬어진다.
(1858년 5월) 선운사 경내에 있는 비문 전면에는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고 하여 끝까지 선사라 하지 않고 율사라 호칭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비문에 [살활], [기용]같은 문구를 인용하면서 근엄하게 종풍쇄신을 위한 백파의 평생선력을 높이 칭찬 하고 있다. 더욱이 추사는 이 비문의 마지막 부문에서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부처님을 섬기는 것 같으며 그의 가풍은 가장 진실하고 경건하였다. 그 이름은 긍선이라고 하니 다시 말씀을 할 것이 없도다]라고 과로(果老:秋史玩堂이 만년에 사용하던 아호)는 지난날의 논전을 감명 깊게 회상하면서 조선 후기 순조 이후의 불력 부흥에의 기여도를 높이 평가하였다
선운사(禪雲寺) 백파율사비문(白坡律師碑文) 탁본
추사박물관 1층 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