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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마르코 3,13-19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를 제자로 뽑으시는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이 며칠 저희 집에 며칠 묵어갈 때였습니다.
연령대가 두 살부터 스무 살까지, 그야말로 대가족이었습니다.
손이 두 개여서 일일이 다 품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 원장님를 돕기 위해
형들과 누나들은 꼬마들 한 명씩 도맡아 케어해주는 모습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대여섯 살 꼬마들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 꼬마가 우리가 하니 괜찮다고 극구 말려도, 밀걸레를 손에 꼭 쥐고 열심히 바닥을 닦았습니다.
사실 크게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도 함께 돕겠다는 그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 사업,
당신 홀로 충분히 이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 없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도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엄청나고 위대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 시기로 접어드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심으로 당신의 일이 지속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를 사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사절로 부르셨습니다.
그 누군가의 사절은 곧 그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유다 율법의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합법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추종하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을 넘어, ‘파견된 사람’(Apostolos)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목격 증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사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는 다름 아닌 ‘파견 된 사람’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힘과 개인적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손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 직분을 수행하기에 앞서 사도라는 직분에 대한 겸손한 신원 의식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뽑으시어,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재물, 권력과 귀한 신분에 이끌려 믿음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도는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암부르시우스 교부)
오늘도 별 도움 안 되는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과연 무엇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3,13-19
훌륭한 리더는 조직 체계를 만든다
마르코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리더란 첫째,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옳은 신념을 굽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 편애하지 말아야 합니다. 편애는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는 가장 무서운 행동입니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는 ‘시스템을 만드는 리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어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습니다.
이름은 새로 태어났을 때 짓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시스템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 수도회를 세운 것과 같고, 마더 데레사도 사랑의 선교회를 세운 것과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이어갈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리더가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역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는 리더가 사라지면 금방 와해됩니다.
또 리더가 아무리 카리스마가 넘치더라도 혼자 힘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끌 때 처음엔 혼자 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때 모세의 장인이 와서 모든 백성의 송사를 본인 혼자 다 처리하려 하지 말고 그 권한을 천 명, 백 명, 오십 명, 열 명에 해당하는 리더를 뽑아 그들에게 맡기라고 충고합니다.
모세는 그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훨씬 편하게 좋은 결과를 얻어냅니다.
사람은 한 조직에서 참모형이 있고 리더형이 있습니다.
참모형 리더는 참모로 있을 때는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자신이 모든 일을 다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참모들은 뒷짐만 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두세 사람이 합친 힘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반면 리더형 인간은 남 밑에서 일을 할 때도 리더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최선을 다하지만,
지도자가 되면 훨씬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유비와 제갈공명을 예로 들자면 유비는 리더형 인간이고 제갈공명은 참모형 인간입니다.
유비가 만약 남의 밑에 있었다면 그는 중간급 정도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조라는 엄청난 사람이 판치는 곳에서 한 나라의 왕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실력으로는 제갈공명이 더 뛰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 뛰어난 것에 비해 사람들을 일치시킬 능력이 부족했음을 알고 유비의 대를 이어달라는 청을 거절합니다.
만약 유비와 제갈공명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삼국지의 이야기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야 많이 있겠지만,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과 사장실장인 시마 사토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손정의 사장은 비전을 제시하고 무작정 나아갑니다.
그래서 무모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이 중간에 시마 사토시는 그 무모한 도전을 시스템화하여 전략을 짭니다.
예를 들어 손 사장이 몽골에서 일본으로 전기를 끌어오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 시마 사토시는 중국 시진핑 주석을 만났고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대선 후보인 박근혜 측근, 문제인, 안철수까지 다 만나고 다녔습니다.
보스가 꿈을 꿀 때 그 꿈의 실행 계획을 짜주며 일반 직원들도 그 꿈이 황당무계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참모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손발이 잘 맞으면 못할 게 없지만, 참모 스타일이 지도자가 되고 보스 스타일이 참모가 되면 손발이 맞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참모도 되고 리더도 되어야겠지만, 리더가 되었을 때 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온 예화를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마을 촌장이 물을 공급해주는 사람과 계약을 원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딱 2명 하고만.
에드가 먼저 땄고, 신이 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며 두 개의 양동이로 호수에서 물을 날랐습니다.
빌은 한동안 마을을 떠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드는 경쟁자가 없어서 더욱 신나게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빌은 양동이 두 개 대신 사업 계획을 짜고, 투자자 네 명을 모으고, 일할 사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달이 지나고 건설 팀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 년 동안 빌의 팀은 아주 두꺼운 강철 송수관을 건설해서 마을과 호수를 연결했습니다.
빌은 일을 하건 안 하건 매일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에드는 평생 일만 했고 겨우 먹고 살았습니다. 이야기 끝.
에드와 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능력으로 하려는가, 아니면 시스템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가의 차이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을 뽑아 교회라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개인의 힘만을 믿는다면 그건 교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 자신 밑에 있는 사람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3,13-19: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분 곁에 두신 사건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순히 가르치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분과 함께 살게 하시고, 그분의 삶과 구원 사업에 참여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 이는 교회가 ‘공생과 파견’이라는 두 축 위에 세워진 것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며 그분의 말씀에 흠뻑 젖어야,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올바르게 전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제자란 스승의 말씀 속에 잠겨, 그분과 하나 되는 사람이다.”(De Doctrina Christiana, 4.10.16) 즉, 참된 제자가 되려면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스승과의 친밀한 삶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는 삶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은 각기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어부, 세관원, 혁명가 등 인간적으로 보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의 부활과 말씀을 체험하고, 결국 목숨까지 바치며 복음을 전했다. 이는 교회가 각계각층을 포용하는 보편적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또한,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은(시몬→베드로, 사울→바오로, 레위→마태오) 그들의 신분과 정체성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을 상징한다. 우리 신앙인도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으면, 단순히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삶과 정체성 전체가 변화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
복음은 분명히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참된 제자는 단순한 수행자가 아니라, 주님의 친구이며,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의 여정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성 바실리우스는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곧 참된 제자의 삶이다.”(Regulae fusius tractatae, 12) 즉, 예수님께 선택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께 순종하고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에서 오는 은총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가? 그분의 친구로서, 그분을 닮으려 노력하는가?”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바쳐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 우리 모두 주님과 친밀한 삶을 나누며, 그분을 닮는 참된 제자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사실과 의견 그리고 해석의 경계를 구분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과학으로 증명된 것은 모두 사실일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도 과학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에 우려를 보냅니다.
커피를 생각해 보세요. 커피가 몸에 좋다는 말이 많습니다. 당뇨, 파킨슨, 알츠하이머, 간질환, 뇌졸중 등 질병 위험감소에 좋다고 합니다. 또한 풍부한 항산화 성분으로 세포 손상을 막고 노화를 방지한다고 합니다. 집중력 향상과 피로 해소 효과도 있고,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해서 운동 능력도 향상됩니다. 우울감도 감소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거의 만병통치약입니다. 그러나 밝혀진 나쁜 점도 많습니다. 불면증을 가져올 수 있으며, 카페인이 있어서 민감한 사람을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위산 분비를 촉진해서 불안감을 느끼고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철분 흡수를 방해해서 영양소 흡수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중독이나 금단 현상도 있습니다.
좋은 점, 나쁜 점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당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적당히’는 과연 과학적일까요? 실험과 연구로 얻은 결과도 결코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 절대적인 믿음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것에 참 진리가 있지 않습니다. 참 진리는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은 주님에게만 둬야 합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과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산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산은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과 계시가 이루어지는 거룩한 장소를 상징합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했듯이, 산 위에서 ‘새로운 이스라엘(교회)’을 형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제자들의 자질이나 능력이 뛰어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은 철저히 예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공로보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즉, 엘리트들의 모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셔서 부르신 부족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지내게 하시고, 또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면서 변화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엘리트 의식을 갖습니다. 자기의 특별한 능력과 재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내세우는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것없지 않습니까?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는 주시는 무상의 은총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행복에 책임을 질 것. 그리고 그 행복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 말 것(로이 T.베넷)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1.23.금.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마르 3,14)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앞세워
보내시기보다
먼저 곁에
머무르라
부르십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이 시간은
삶으로 익어 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사도의 삶은
멀리 나아가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주님 곁에 머무는 데서
탄생합니다.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사람은 변화됩니다.
참된 변화는
앞서 나아가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머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따로 떼어 놓인
행위가 아니라,
삶 한가운데서
함께 살아내는
생활입니다.
파견은
바깥세상을 향한
이동이기 전에
내면의 중심을
되찾는 여정입니다.
중심이 바로 설 때,
삶 전체가 이미
사명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이 순간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가장 깊은
기도가 됩니다.
참된 가르침은
말을 앞세우지 않고,
스승과 함께
살아낸 삶 속에서
기쁨으로 전해집니다.
사명보다
관계가 먼저입니다.
관계에서 태어난
사명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명 그 자체가
되어 가는 사람을
빚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중심을
조용히
당신께로 옮기십니다.
주님 곁에
머무는 이 시간이,
이미 우리 삶의
가장 좋은
기쁨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그날, 예수님께서 제자로 세운
열두 명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을 떠올려봅니다.
특히 무식한 어부와 죄인 세리와
열혈당원의 집합체를 보면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허탈해져서
코웃음을 쳤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오합지졸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을 살아내며 말씀의 증거자로 도약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나쁜 짓만은 피하기 위해서도
용을 써야 하는 모자란 우리,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품겠다고
수없이 다짐을 하면서도
끝내 걸려 넘어지곤 하는 못난 우리,
이 좁고 편협하며
소극적이고 옹졸하기까지 한 우리를
변화시켜 주려 하십니다.
하여 당신의 곁에 머물기만 바라시고
오직 당신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흠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성격도 못됐어도 상관없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설사 손가락질을 당하며 지낸다 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한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친교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죄의 회개와 용서와 사랑을 배워
익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하고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갔다."(마르3,13)
'부르심과 파견!'
오늘 복음(마르3,13-19)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곧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도록 파견된 사도들입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합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3,16-17)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뽑힌 사람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면서, 동시의 예수님의 일을 하도록 파견된 '사도들'입니다.
성탄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듣고 있는 독서는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태어난 '사무엘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판관이며 대사제이고 예언자'입니다. 사무엘의 부르심과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의 부르심, 그리고 두 번째 임금인 이사이의 아들 다윗의 부르심과 이 둘의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펼쳐나가는 하느님 구원 사업의 활동들'입니다. 한마디로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하느님 부르심에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그 반대인 죽음과 멸망의 모습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24,3-21
그 무렵 3 사울은 온 이스라엘에서 가려 뽑은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과 그 부하들을 찾아 ‘들염소 바위’ 쪽으로 갔다.
4 그는 길 옆으로 양 우리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사울은 거기에 들어가서 뒤를 보았다.
그때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굴속 깊숙한 곳에 앉아 있었다.
5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가 너의 원수를 네 손에 넘겨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 하신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다윗은 일어나 사울의 겉옷 자락을 몰래 잘랐다.
6 그러고 나자,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자른 탓에 마음이 찔렸다.
7 다윗이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
8 다윗은 이런 말로 부하들을 꾸짖으며 사울을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울은 굴에서 나와 제 길을 갔다.
9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와 사울 뒤에다 대고,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하고 불렀다.
사울이 돌아다보자, 다윗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였다.
10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다윗이 임금님을 해치려 합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곧이들으십니까?
11 바로 오늘 임금님 눈으로 확인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 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12 아버님, 잘 보십시오. 여기 제 손에 아버님의 겉옷 자락이 있습니다.
저는 겉옷 자락만 자르고 임금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임금님을 해치거나 배반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고 살펴 주십시오. 제가 임금님께 죄짓지 않았는데도,
임금님께서는 제 목숨을 빼앗으려고 찾아다니십니다.
13 주님께서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시어,
제가 임금님께 당하는 이 억울함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14 ‘악인들에게서 악이 나온다.’는 옛사람들의 속담도 있으니,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15 이스라엘의 임금님께서 누구 뒤를 쫓아 이렇게 나오셨단 말씀입니까?
임금님께서는 누구 뒤를 쫓아다니십니까?
죽은 개 한 마리입니까, 아니면 벼룩 한 마리입니까?
16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시어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송사를 살피시고 판결하시어,
저를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주시기 바랍니다.”
17 다윗이 사울에게 이런 사연들을 다 말하고 나자,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이게 정말 네 목소리냐?” 하면서 소리 높여 울었다.
18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19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얼마나 나에게 잘해 주었는지 오늘 보여 준 것이다.
20 누가 자기 원수를 찾아 놓고 무사히 제 갈 길로 돌려보내겠느냐?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준 것을
주님께서 너에게 후하게 갚아 주시기를 바란다.
21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