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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만주에서 발원한 여진족이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꿔 세운 유라시아 육상 제국이자 중국의 마지막 통일 정복 왕조. 중국의 통일 왕조 중 왕통의 중단 없이 가장 오래동안 존속한 왕조이자 21세기 기준 최후의 퉁구스계 주권국가이기도 했다.
보통은 청나라라고 부르지만 정식 국호는 다이칭 구룬(만주어 독음)이며 한자로는 대청(大清: 한자병음: Dà Qīng(다칭))이다. 당대 영문으로는 대청(Great Qing) 또는 대청제국(Empire of the Great Qing)으로 불렸고 현대 중국에서는 청조(淸朝: 한자병음: Qīng Cháo(칭 차오), 영어: Qing(Tsing) Dynasty))하고 불리고 있다. 순만주어로는, 암바 겅옌 구룬(Amba Genggiyen Gurun)이다.
국명이 추상명사인 까닭은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하겠다는 뜻에서 물 수(水) 변이 들어간 청(淸)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7세기 초인 1636년 4월 11일, 대금의 압카이 수러 한이 국호를 개칭하면서 역사에서 등장했고, 1644년, 중국 북경에 입관(入關)했으며, 이후 20세기 초인 1924년까지 30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리고 1917년 복벽 운동으로 1912년에 퇴위했던 선통제가 다시 즉위하기도 했다. 황성(皇姓)은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한국식 독음으로는 '애신각라'로, 원어인 만주어를 음차한 것이다. 한자를 해석해 '신라를 사랑하고 새긴다'라는 뜻이라는 유사역사학의 주장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여진족 신라인설 문서 참조.
특이하게 비유럽권 국가들 중에서 동군연합을 한 몇 안 되는 나라였다. 이는 유라시아 육상 제국인 대청 제국에서 중화는 일부에 불과했다는 명백한 증거인 셈이지만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중원으로 대거 이주하여 중원에서 살아갔으니 그 일부에 불과한 중화에 동화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만주족이 한족에 거의 동화된 채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비극을 잉태하게 되었다.
옛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의 후예인 건주 여진의 추장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06년 2월 17일, 여진국(주션 구룬)의 수러 쿤둘언 한이 되었고, 1618년, 수러 겅옌 한이 되어 4월 무렵, 국호를 주션국(Jušen Gurun: 여진국)에서 암바 아이신 구룬(Amba Aisin Gurun), 중국식 국호로 대금(大金)으로 개칭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후금(後金)이라 칭했고, 현재에도 대부분 완안 아골타가 건국한 여진 제국 금나라와 구분짓기 위해 후금이라 부른다. 그의 아들 압카이 수러 한은 1635년, 주션(Jušen: 여진)이란 족명을 금지하고, 만주로 고쳤으며, 1636년 4월 11일에, 관온인성황제(Gosin Onco Hūwaliawun Enduringge Han)가 되어 국호를 '대청(Daicing)'으로 개칭했다.
금 - 청 제국은 분명히 명나라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킬 국력은 아니었다. 이는 "군사력 = 국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청나라는 기병 중심의 군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회전에서는 보병 중심의 (그것도 쇠퇴한) 명군을 압도한다. 하지만 반대로 공성전에서는 기병의 효력이 나오기 어려우며, 명나라와 달리 화기를 다수 보유한 것도 아니었기에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며, 결국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산해관을 자력으로 넘지 못한 것이다. 명나라는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중원의 통일 왕조로 오래 전부터 서양과의 접촉으로 인해 홍이포와 같은 신형 화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청나라는 신흥 국가로 명나라에 비해 이러한 국가의 역량이 모자랐다.
대규모의 자연 재해가 명나라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있던 상태에서 부패한 명 관료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최신 화기와 신식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를 포함해 상당한 숫자의 명군을 운좋게 얻고, 하여간 그렇게 산해관을 넘고 오삼계 및 그 휘하의 명군이 합류했고, 더구나 이자성 등이 개판을 만들어 성능이 개선된 신형 화기가 명군에 보급되어 전력이 상승하기 전에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 북경 점령 과정을 보면 천운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명나라의 경우엔 파업 황제(...) 등의 위기를 무지막지한 제도 개혁과 부유함으로 막아내던 사정이라(...)
2.2. 건국 이후
위에서도 말했듯, 운이 꽤 좋은 나라였는데, 천명제 누르하치에 이어서 숭덕제, 산해관을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순치제(順治帝),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등 유능한 황제들이 몇 명씩이나 연달아, 그것도 엄청나게 오랫동안 통치를 하여 동아시아는 물론 주변 아시아 세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동방으로 계속적으로 침략해오던 러시아군과 강온 정책을 번갈아 구사하며 끝내 국경선을 확정했고, 서방과의 접촉도 점점 더 활발해졌다. 중국이 티베트와 위구르, 내몽골, 만주와 현재 러시아로 넘어간 투바, 연해주를 확실하게 지배에 넣은 것도 이때였다.
주요 사건
1618년 국호를 '대금'으로 개칭
1619년 사르후 전투 대승, 여진 통일
1621년 요양 천도
1625년 심양 천도
1626년 영원성 전투 패배
1629년 북경 광덕문 전투
1636년 대청 선포, 병자호란
1639년 이자성과 장헌충 재봉기
1640년 – 1642년 송산–금주 전투 승리
1644년 입관, 자금성 함락
1645년 양주 공방전, 남경 입성
1646년 이자성, 장헌충의 난 종결
1652년 - 1659년 이정국, 정성공 복명 운동
1654년, 1658년 1,2차 나선정벌
1659년 정성공의 남경 공격, 실패
1662년 남명 멸망
1663년 사천 무산 전투
1660년 – 1799년 문자의 옥
1673년 – 1681년 삼번의 난
1683년 대만 원정, 정씨 왕조 멸망
1684년 해금 철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711년 지정은제 시행
1716년 강희자전 완성
1724년 양렴은제 시행
1726년 개토귀류 시작
1727년 캬흐타 조약 체결
1732년 군기처 설치
1735년 명사 간행, 공포
1747년 원명원 건설
1755년 - 1758년 준가르 원정
1760년 공행 설치
1782년 사고전서 완성
1793년 메카트니 사절단, 건륭제 알현
1796년 – 1805년 백련교도의 난
1813년 천리교 의 난
1816년 아머스트 사절단, 쫓겨남
1838년 - 1839년 임칙서, 광저우에서 아편 단속
1840년 –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난징 조약
1844년 황포 조약(프), 망하 조약(미) 체결
1851년 – 1864년 태평천국 운동
1853년 - 1868년 염군의 반란
1856년 – 1860년 에로호 사건, 제2차 아편전쟁
1858년 아이훈 조약, 톈진 조약 체결
1860년 영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 베이징 조약 체결
1862년 - 1895년 양무운동 전개
1863년 상해 공공조계 설정
1864년 - 1877년 야쿱 벡, 위구르 점령
1871년 러시아, 이리 계곡 점령
1874년 일본, 대만 출병
1881년 이리 조약 체결
1884년 영국, 티베트 침략
1884년 – 1885년 청불전쟁
1894년 – 1895년 청일전쟁
1897년 독일, 칭다오 점령 1899년 조차 (~ 1919년)
1898년 변법자강운동 전개, 무술 정변
1899년 – 1901년 의화단 운동
1900년 북경 점령
1901년 신축조약 체결, 신정 지시
1911년 무창 봉기, 신해혁명
1912년 청 멸망, 중화민국 건립
전성기의 청은 지금의 중국보다도 더욱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청말 민초 이래 캐발살내어 지금 중국이 다시금 확보하고 있는 내몽골, 티베트와 위구르만이 아니라 연해주 즉 외만주와 외몽골 전체, 더불어 대만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중국 역사상 이보다 영토가 넓었던 경우는 몽골 제국 뿐인데 이쪽은 지도상의 크기는 넘사벽이지만 여러 칸국으로 갈라진 것도 있고, 통치가 비교적 느슨하기도 해서 몽골 제국 중 중국을 다스린 원나라로만 한정한다면 청나라가 더 크고 실효 지배력 또한 청나라가 우세했다. 이렇게 영토가 넓었던 만큼 단순한 한만국가이라기엔 보다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그래서 지역 및 민족마다 청 군주의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만주에선 금나라를 계승한 한으로, 북방의 몽골에선 원나라를 계승한 칸으로, 중원과 남방에선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로, 티베트에선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으로, 위구르에선 이슬람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키메라의 국가"이라고도 한다. 아시아 동군연합의 끝판왕이다.
그러나 문명을 볼 때 학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제조 금지 등으로 비난을 받는 편이다. 청이 유럽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크게 보아 명나라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가경 4년에 명나라 화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해전에서도 청나라만큼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시 만주인들을 봐도 문명을 이끄는 데 아무래도 유목민의 기풍과 문화가 있어서 학문에 불리하게 작용한 면이 있다. 사실 세계의 유목민 왕조들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경우들이 매우 많다. 일단 정주 국가들의 경우 지배층들이 문명을 주도하며 여러 가지 것들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는데 , 유목민들은 정작 지배층인 유목민들이 직접 문물 발달에 기여하는 게 적은 편이었다. 보통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여 교류를 확산시켜 기여를 했다거나 하는 간접적인 식이고 유목민들이 직접 과학 기술 혹은 수학과 관련된 서적을 쓰거나 하는 일들은 적었다. 아무래도 지배층들이 문명에 직접 기여하는 것들이 적으면서 밑에 피지배층들을 착취해서 그 열매를 가져가니 피지배 민족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잠재력을 깎아먹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다중 수도 체제가 있어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 - 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묵던(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 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3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1년 중 자금성(紫禁城)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한편 대외 관계에 있어 주목할 만한 점으로, 청이 러시아 제국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에는 한자로 쓰인 문건이 전혀 없고, 오직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관련기사 청조(淸朝)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기록에 만주어를 원본으로 삼은 것에 대해 국내 학자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내용을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이하 청 - 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서로 대등한 위치를 가지고 조약을 맺은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편 전쟁 후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평등 조약'인 것에 주목하지 청 - 러 조약이 왜 만주어로 기록되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청 - 러 조약의 기록을 만주어로 남겼냐 하면, 청 - 러 조약이 평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적 화이(華夷)개념에 따르면 '오랑캐'인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야 한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상위, 러시아가 하위인 조약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준가르 몽골 문제의 해결에 쫓기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할 수 없었고 , 결국 청 - 러 조약은 평등 조약이 되었다. 즉, 중국적 중화 세계 개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조약이 돼 버린 것. 이 때문에 청 - 러 조약의 기록은 중국어, 즉 한문 기록이 전무하고 만주어로만 기록되었으며, 조약의 체결 자체에도 한족 관리는 참여하지 못했다. 청 - 러 조약이 만주어로 기록되어 전해진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 이는 청조가 청 - 러 조약에 대한 한문 기록에서는 '대등'이나 '평등'을 연상케하는 구절이나 어휘를 없애거나 모호하게 만든 것에서도 입증된다.
일단 만주족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 나라이며, 초기에 들어왔을 땐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특히 강남 쪽에서는 사람이 나날이 잔뜩 죽어 나갔다. 지금의 양저우(揚州)나 쑤저우(蘇州) 등이 있는 지방에서는 수십만 단위로 대학살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흠좀무. 특히 만주족이 강요한 변발 은 19세기 말 조선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켜 강남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양저우 대학살은 양주십일 이라고 하여 김용의 무협소설 녹정기에서도 나온다.
링크의 3) 항목을 읽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인구가 학살당해서 명청 교체기 대학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중국 인구사와 청나라 시기 인구를 생각하면 5,000만이라는 수치는 매우 과장이 되어 있다. 근거도 빈약하며 주장하는 사람들도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리적으로 솔직히 만주족이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 시대를 능가하는 학살 수준에 한족의 인구의 증감을 봐도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인구 조사 결과가 적은 것은 건륭제 시기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반란과 그로 인한 만주족 행정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 중국 역사서에선 전란에 휩싸이고 나라가 어지러운 난세가 펼쳐지면 기록되는 호구 수가 격감했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상식을 뛰어넘는 속도로 인구가 회복되는데, 이건 그만큼 사람이 많이 죽고 태어났다기보다 호구 조사 시 실제 호구수에서 누락되는 인구 수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대학살이 벌어진 건 확실하다.
이 모든 저항을 짓밟은 이후 간신히 굴복한 한족에게 융화 정책을 펴 한족에 대한 차별을 계속해서 없애나가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으며, 그 뒤에도 저항이 있긴 했는데 훌륭한 황제들이 나와 당근과 채찍으로 차례차례 강온 양면술을 써가며 통치해나갔다. 다만 변발(황비홍 머리(...))만은 철저히 지키게 했다. 이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의 습관을 인정해줄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묻혀서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며 비록 언어나 문화 면에서는 동화를 면치 못했으나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종족은 청나라 말기에도 명확하게 구분되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 청조 말기 한족(漢族)들에 의해 사용된 '멸청흥한(滅淸興漢, 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킴)'이니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을 돕고 서양인을 멸함)'이니 하는 구호에서도 한족과 청(만주족)은 청 말기까지 엄격히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은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제조 금지 등으로 발전이 거의 없었다. 유럽 문명은 계속 발전을 하고 있는데 청은 유럽 문물을 수입하기 전에 보유한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명나라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기이할 정도의 말타기와 활쏘기에 대한 집착 혹은 자체적인 화기 연구 금지 등으로 내부 역량을 떨어뜨렸다. 주요 무력 기반이었던 팔기군 역시 금나라의 맹안모극이 쇠퇴하던 테크트리를 따라서 그대로 쇠퇴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 문제는 무려 전성기라는 강희제 때부터 시작된 현상이었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군사력이 쇠퇴했음이 드러남과 함께 서구 열강에게 쥐어터질 만큼 터지고, 빼앗길 만큼 뺏기고, 심지어, 무시하던 일본에게까지 처절하게 관광을 타는 굴욕을 당하는 등의 외세의 침략이 원인이었다. 결국 청나라는 거의 반쯤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무렵 지방에선 군벌들이 따로 세력을 키우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신사조가 널리 퍼져서 더 이상 과거처럼 통치를 할 수 없게 변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끝없는 굴욕으로 청 황실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원래부터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으로 분리된 민족 구성이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은 민족주의 사상에 따라서 '청나라' 자체마저도 일종의 '외래 민족 침략 세력'으로 보고 만주족의 청 왕조로부터 한족 민중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1911년에 신해혁명으로 산하의 지방 정부들이 독립을 선언하여 청 왕조는 지방 통제권을 잃고 전국이 한시에 공중 분해되면서 파멸을 선고받았다. 1912년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총사령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총구를 돌려 청 왕조를 폐지시켜 버림으로써 1912년 멸망하고 말았다. 오삼계 2세?? 그렇게 청나라는 한족의 투항으로 흥했다가 한족의 투항으로 망했다.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는 청조 멸망 이후에도 중화민국 정부와 체결한 "청실 우대 조건"에 따라 자금성에 잔류하였는데(청나라 소조정),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실 우대 조건>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2.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사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 화폐가 주조되면 사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3.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된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4.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5. 덕종(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6.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7.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 보호한다.
8.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청 황족 대우 조건>
1. 청나라 왕공 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2.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3. 청 황족의 사유 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4.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만몽회장 각족 대우 조건은 생략)
이 조건으로 푸이는 자금성 안에서는 청 황제로서 행세할 수 있었고, 자금성 내에서는 계속 선통 연호가(음력과 함께) 쓰였다. 이후 청나라 황족들과 복벽파들이 복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는 1914년 11월 23일 복병 정치 징치령을 발표해 복벽파들을 탄압했다. 그리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함으로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어버렸다(...). 이후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으며 전국 각지가 군벌들이 할거하는 개판으로 떨어진 와중에 복벽파 장쉰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훈복벽을 단행함으로 1917년 7월 10여일 동안 청이 부활하기도 했으나 돤치루이가 이를 진압하면서 복벽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북양 군벌 정부에 실질적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북양 군벌 정부는 청실 우대 조건을 지키는 데 별 관심이 없었고, 군주제를 혐오하던 군벌 펑위샹이 2차 직봉전쟁 와중에 1924년 11월 5일핍궁사건을 일으키면서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1924년 11월 5일에 청실 우대 조건이 수정되면서 사실상 청 황제 존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의는 천진에 도착한 이후부터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31년 11월에 장제스는 푸이가 톈진에 남는다면 청실 우대 조건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도이하라 겐지가 획책한 천진 사변을 비롯한 수차례의 암살 협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푸이는 거절한다. 게다가 북벌군이 1928년 북평을 점령한 다음에 장쭝창의 부하인 손전영이 국민혁명군에 투항하면서 벌인 서태후 능 도굴 사건을 비롯한 청나라 역대 황족들에 대한 능묘 약탈이 처벌당하긴커녕 오히려 방조되었고 서태후의 능묘에서 나온 진주들이 쑹메이링의 신발을 장식하는데 쓰였단 소문에 푸이는 남경 정부에 완전히 학을 뗐다.
결국 그 달 10일에 푸이는 만주로 가게 되고, 이듬해(1932년)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 만주국의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만주국이 청의 후신이라고 선전했지만, 현실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청의 강역. 그러나 이 강역은 청의 최대 영토는 아니다. 러시아에게는 연해주, 이리 지역(일리강 유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영국에게 홍콩과 라다크를 상실한 1896년의 지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일본 제국에게 타이완 섬도 할양하였다. 현재의 중화 인민 공화국 + 몽골(외몽골)+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을 포함하는 영역으로 현재 중국의 강역보다 훨씬 더 넓었으며 이것은 중국을 지배한 역대 국가들 중 두번째로 넓고 유럽대륙(혹은 유럽 아대륙)으로 분류되는 곳보다 더 넓은 면적이다.
이 지도는 청나라의 최대 강역과 근대적 조약을 통해 확정한 영토를 표시한 영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원본이 올라와있는 사이트로 들어가면 더 큰 것을 볼 수 있다. 단 사할린과 북해도, 쿠릴, 우다 강 주변 등은 신빙성이 낮다. 물론 하바로프스크 등 북만주는 네르친스크 조약의 결과 중국이 차지한 것이 맞는 엄연한 청의 영토였다. 연해주의 경우는 원래부터 함경도와 함께 만주족의 발상지라서 후금 시절부터 청나라가 차지해 왔고 봉금 정책으로 인해 외만주라 부르며 한족의 출입을 통제했다.
이 시대의 문학 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본토에서는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이 대표적이다.
청 황가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의 한국식 한자 발음이 애신각라이고, 스스로 조상을 신라로 꼽았기 때문에 신라 왕조와 연관지어 만주족도 원래는 신라인과 같은 뿌리가 아니냐는 물음도 있으나, 애신각라는 만주어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를 빌려서 가차한 것일 뿐이어서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썩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식의 성씨와 본관을 떠올리면 쉽다. 만약 고대 로마에 관심이 있었다면 로마인의 이름을 생각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이해할수도 있다.즉 로마인 이름에서 세번째이름과 두번째이름의 관계와 같다.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 아이신은 만주어로 금(金, 쇠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만주족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금(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참고로 '신라' 또한 우리말인 '사로' 혹은 '서라벌' 등의 음차로, 되도록 뜻이 좋은 한자를 쓰려다 보니 부르게 된 것이다. 신라 = 사로 = 서라벌은 모두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썼을 뿐인데, 실제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족 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를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 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다라고 생각하며,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근대화에 진입하지 못하고 열강들의 능욕을 당한 것도 만주족의 통치 때문이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현재 중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명이아닌 청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이민족의 왕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청 후기의 황제들(도광제부터)을 보면, 초기 황제들과 달리 궁중 생활만 해서 그런지 대체로 얄팍한 체형에 심지어 대부분 단명했다. 또한 청의 12명의 황제 중 5명이 10살이 되기 전에 황제로 즉위했다.
국기의 이름은 황룡기(黃龍旗)이며 1889년부터 신해혁명(1912년) 때까지 사용되었다.
황룡기의 바탕색인 노란색은 중국 황제의 상징 색이며, 용은 청나라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곧 '짐이 곧 국가다"라는 인식을 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원래 황룡기는 사각이 아니라 삼각이었다. 양무운동 당시 청나라의 정식 국기가 필요했는데, 권력자인 서태후의 결정으로 1862년 10월 17일
청나라의 국기가 삼각의 황룡기로 결정 되었다가 1889년 사각의 황룡기로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