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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1)
겔 47:1-12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겔 47:1-12 / [성전에서 흐르는 생명의 강] 나를 안내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나를 데리고 성전 건물의 동향한 정문 앞으로 갔다. 거기서 내가 보니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줄기가 하나 솟아 나왔다. 이 물줄기는 성전의 정면에서 얼마쯤 동쪽을 향해서 흘러가다가 제단 오른쪽으로 지나간 다음부터는 계속 동쪽으로 흘러 나갔다. 2) 안내하는 사람이 나를 데리고 성전 구내의 북문 둘을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그 다음 큰 담을 돌아서 바깥 동문으로 갔다. 거기서 내가 보니 그 물줄기는 바깥 동문의 오른쪽에서 다시 솟구쳐 올라왔다. 3) 안내자는 줄자를 들고 동쪽으로 가며 그 물줄기를 쟀다. 그러더니 1천 자가 되는 곳에 이르러 내게 그 물을 건너가 보라고 하였다. 그 물은 내 복사뼈까지 차올랐다. 4) 그가 또 1천 자를 재더니 다시 나더러 그 물을 건너가라고 하였다. 그 물은 이미 내 무릎까지 차올랐다. 또 1천 자를 지난 다음에 똑같이 하게 하였는데 이제는 물이 내 허리까지 차올라왔다. 5) 그가 네번째로 1천 자를 잰 다음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물이 이미 바닥에 발을 딛고 설 수 없을 만큼 강물로 불어나 있어서 나는 헤엄 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건널 수 없었다. 6) 안내하는 사람이 내게 말하였다. `너 사람아, 똑똑히 보았느냐?' 그리고 그는 내 손을 붙잡아 깊은 물에서 끌어내 강가로 데리고 나갔다. 7) 거기서 내가 바라보니 강 언덕 양편으로 수많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8) 안내하는 사람이 내게 일러 주었다. `이 강은 계속 동쪽으로 흘러 가다가 마침내는 요단강에 이르고 그 뒤에는 다시 요단강을 따라 사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 물은 사해 속으로 들어가서 그 바다의 소금물을 생수로 바꾸어 놓는다. 9) 이 강은 흐르는 곳마다 생명을 준다. 이 물이 흐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무성한 나무가 자라고 짐승들이 많아지며, 사해를 단물로 바꾸어 놓아 수많은 물고기들이 뛰놀게 할 것이다. 10) 그 많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사해 주변에는 어부들이 항상 늘어서 있고 사해 서안의 중앙 요지에 위치한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에도 빈틈없이 그물을 펼쳐 놓고 말릴 것이다. 그때에는 사해에 지중해와 똑같이 수많은 갖가지 물고기들이 살겠지만 11) 늪지대와 연못들은 그대로 소금기를 보유하고 있어서 계속 소금을 만드는 곳으로 사용될 것이다. 12) 강의 양쪽 언덕에는 일년내내 잎이 푸른 과일 나무가 늘어서서 쉬지 않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모든 과일나무가 종류대로 다달이 새로운 열매를 맺어 거기서는 일년에 열두 번이나 새 과일을 수확하게 될 것이다. 그 나무들은 주님의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그토록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 과일은 특별히 맛이 좋고 잎은 약재로 사용될 것이다.'
40장부터 전개된 성전의 측량과 절기와 규례, 그리고 율법의 지침의 환상이 일단락되고 이제는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을 중심으로 성취될 하나님 백성이 누릴 생명수의 환상이 서술됩니다.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1-2) 생명의 강의 발원이 되는 물이 하나님의 영광 곧 여호와의 영광이 머물렀고 들어갔던 바로 그 문, 즉 그 문의 문지방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겔 9:3; 10:4; 43:4-5). 이는 생수는 성전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발원되고 있음을 깨우칩니다. 그 생수가 “동쪽으로 흐르다”,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는 묘사는 성전 앞 문지방에서 발원된 생수가 성전이 세워져 있는 지형에 따라서 흐르는 물의 진행 방향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3-6) 에스겔은 천사가 일천 척(약 450-525m, 혹은 에스겔이 알고 있었던 길이 단위의 일천)을 측량해 일천 척씩 나아갈 때마다 흐르는 생수의 강에 들어가 자기 몸으로 물의 깊이를 재어 보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발목, 그 다음에는 무릎, 그 다음에는 허리, 그리고 다음 측량을 할 때는 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고 그 물속에서 지쳐 있을 때에 주님이 손을 붙잡아 이끌어 내어 강가로 데리고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7-12) 실제 지리적인 직접 표현으로는 이 생수의 강은 계속 동쪽으로 흘러 가다가 마침내는 요단 강에 이르고 그 뒤에는 다시 요단강을 따라 사해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수는 사해 속으로 들어가서 그 죽음의 바다의 소금물을 생수로 바꾸어 놓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생수의 강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게 될 것이며 이 생수의 강물이 흘러 들어가는 어떤 강이든, 어떤 바다든 물이 치유되어 생명수로 변함으로 온갖 물고기 가득한 생명의 바다가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늪과 갯벌은 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라 하시므로 상징적으로 생수의 강을 통해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구원의 축복에서 제외 되어 영멸 속에 버려지게 되는 죽음(악)의 세력도 있음을 가리킵니다(슥 14:17). 그 생명수 강으로 인하여 강가 양편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는데 그 잎사귀마저 생명을 살리는 약재가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창세기 3장 24절의 생명나무 보존이나 요한계시록 22장의 생명수 샘과 그 주변의 생명나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강이 되게 합니다(요 7:38).
적용: 당신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습니까(고전 3:16)? 어떻게 당신 내면의 성전 문지방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게 할 수 있습니까(요 7:38)? 당신에게서 흐르는 생수의 강이 항상 관계하는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살리고 있습니까?
남가일몽[南柯一夢]-「남가태수전」이공좌. 일생의 부귀영화는 한낱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축복과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가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길 사모하며, 성전에 나오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며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거룩한 제단입니다. 그 제단에 엎드려 기도할 때 무너진 가정이 세워지고 어그러진 관계가 회복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며 성전으로 나아와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삶이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설 교 >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강
계강현 목사 / 금광교회
코로나 때문에 부부들이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혼 위기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일본 트위터에 결혼생활이 한계에 달했다는 하소연과 남편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쏟아내는 아내의 글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남편은 자주 술에 취해 있고, 잘 씻지도 않는다.”, “지난 열흘 동안 남편의 고성, 시끄러운 TV소리, 코고는 소리를 참아냈지만,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나라에서도 코로나로 부부관계가 악화되는 현상이 흔히 나타나지만, 유독 일본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위기 가운데 처해있다. 코로나 자체도 문제지만, 이에 따르는 경제, 정치, 교육, 취업과 진학과 결혼, 관계, 신앙 등 총체적인 붕괴가 더 문제다. 이런 시대에 기독인으로, 기독 청년으로 산다는 게 정말 힘들다. 주체할 수 없는 시대적, 교회적 책임 앞에 무력하고 소망이 없다.
그런데 청년 에스겔은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위기에 있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바벨론 포로생활을 했으니 말이다. 뭐라 해도 나라 없는 설움 같기야 하랴! 그렇게 포로로 지금 50세가 되버린 거다. 자기 조국 이스라엘은 모든 면에서 죽은 존재, 말 그대로 황무지와 폐허였다. 전쟁에서 패했고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고 나라를 빼앗겼고 포로로 끌려갔다. 무엇보다 성전이 파괴되고 영적으로 피폐해졌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윤리, 그리고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죽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강포의 죄악을 저질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조금도 억울한 일이 아니고 너무도 마땅했다. 주변 이방나라들도 이 사실을 알고 비방할 정도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황무지와 폐허와 마른 뼈 같았다.
하나님은 이런 에스겔에게 전반부에는 여러 가지 환상을 보여주시며 왜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을 심판하시는 지 말씀해주셨다. 이어서 후반부에는 크게 세 가지 환상을 보여주시며 구원과 회복의 희망을 갖게 하신다. 그 첫째가 겔 37장의 골짜기에 마른 뼈가 말씀과 생기를 대언할 때 살아나 군대를 이루는 환상이다. 둘째가 겔 40장의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이 재건된 환상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흐르는 물이 생명수 강을 이루는 환상이다. 에스겔은 세 가지 환상을 그냥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라, 함께 동참하며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체험하게 된다. 이 환상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국에 귀환시키고 성전을 재건축하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소망의 내용이다. 이 환상을 본 에스겔은 꿈에 부풀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외쳤고 또 에스겔서의 기록을 우리에게도 남겼다.
오늘은 겔 47장에 집중해보자.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데,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제단을 지나 흘러갔다. 처음에는 그 물이 적은 것 같았지만, 그 물의 흐름을 따라서 점점 많아지고 점점 깊어져서 헤엄쳐야 하는 깊은 강물이 되었다. 그 생명수 강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자 닫는 곳마다 소생하고 모든 생물이 살아났다. 그리고 각종 실과나무가 자라서 푸른 잎과 열매를 풍성히 맺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1. 생명수 강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다.
본문 v1을 유의해보라. 물이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상식적으로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오면 기초에 문제 있는 집이다. 물꼬를 잡지 못한 채 그 위에 집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나? 곧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건 환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메시지가 있다. 여기서 물은 무엇을 상징할까? 상식적으로 물은 생명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70%가 물이다. 1~2%만 수분이 손실되어도 인체는 심한 갈증과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5%를 잃으면 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며, 12%를 잃으면 생명을 잃게 된다. 음식물을 먹지 않고는 4~6주 정도 버틸 수 있지만, 물을 먹지 않고는 1주일 안에 사망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물이 있어야 생명이 산다. 화성에는 물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 없다.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여기까지는 상식이다. 그래서 지인 목사는 하루 3L의 알칼리 물을 마신다.
그렇다면 이 물이 상징하는 게 뭘까? 일단 성전 문지방에서 나왔다고 했으니까, 이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란 얘기다. 그 강물이 모든 것을 소생하게 하고 열매 맺게 했으니 이 물은 생명수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것을 살리는 생명수가 뭘까?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영혼을 살린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러니 성전 문지방에서 나오는 생명수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죽은 영혼이 무얼 접하면 살아나나?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명령을 지키면 살리라고 많이 말씀하신다.(신 4:40, 잠 4:4) 레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 말씀을 대언할 때 마른 뼈가 살아나듯이 말이다. 특별히 복음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을 살린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기 때문에 말씀을 잘 경청하고 삶 공부에 열심을 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이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핵심이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어디로 흘러가느냐를 살펴보면, v1b,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의 오른쪽에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서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제단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지는 십자가 구속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할 때 구원받고, 그 십자가 사랑을 되새김질 할 때 영혼이 소생하게 된다.
또한 성령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살린다. 창조 때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코에 넣을 때 생령이 되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호흡이 생명이다. 이때 호흡의 헬라어 πνεῦμα(프뉴마)는 ‘바람, 입김, 호흡, 영혼, 영, 성령’ 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요 4: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물에 대해서 요 7:38을 보면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그리고 부연설명하기를,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고 했다. 그러니 생명수 강물은 성령을 뜻한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롬 12:3b,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약하면,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상징하고, 복음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상징하고, 우리를 구원하고 소생시키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결국 본문은 생명을 구원하고 살리는 역사는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를 지옥 갈 죄악으로부터 건져내는 구원과 회복과 더불어 열매 맺게 하는 풍성함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과 성령의 우리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능력을 통해서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을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님은 감동과 능력의 역사로 각 사람에게 구원을 적용시켜 살리시고 풍성히 열매 맺게 하신다. 살리는 건 우리 인간이 아니라 오직 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코로나19의 위기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붙잡자.
크리스텐 콜드((Christen Kold, 1816–1870))는 덴마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룬트비 목사에 의해 세워진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크게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의 소박하고 알아듣기 쉬운 강의는 듣는 사람들에게 항상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강의 내용을 필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평생 한 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한 학생이 말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럴 때마다 그 내용을 써두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콜드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말게. 땅속에 묻는 하수관은 땅위에 표시를 해두어야 찾아낼 수 있겠지만 살아있는 씨앗은 별다른 표시를 해두지 않아도 반드시 움을 틔우는 법일세. 내 말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어느 때고 자네 삶속에서 되살아날 것이 분명하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심겨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 안에 살고,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모셨다면 그분은 반드시 살아서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도 오직 삼위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면 우리는 회복될 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으로 반드시 인도될 것이다. 사람이나 돈이나 세상에 집중하지 말고, 오직 삼위 하나님에게 집중하여 살자. 거기에 생명이 있다.
2. 생명수 강의 역사는 점점 풍성해진다.
여름에 바다에 놀러 가면 수영 못하는 사람은 어디서 노나? 모래사장에서 뙤약볕에서만 논다. 햇볕에 살이 다 화상을 입어도 물속에는 안 들어가고 모래사장에서만 논다. 물이 위험하고 싫기 때문이다. 애들은 어디서 노나? 발목 차는 데까지만 가서 논다. 조금 수영 배운 사람은 허리쯤 오는 데까지만 간다. 수영하다가 얼른 위험할 것 같으면 발을 쭉 뻗으면 모래바닥이 닿기 때문이다. 수영은 하지만 수영의 참맛은 잘 느끼지 못하는 거다. 그러나 수영을 잘 하는 사람들은 바다 한 가운데서 유유히 수영을 즐기고 섬까지 헤엄쳐 가는 거다. 수영의 참맛을 아는 거다. 이게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다.
vv3-5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생명수 강물을 따라 줄자를 가지고 재면서 천 자가 되는 지점마다 에스겔에게 물을 건너보라고 하신다. 그때마다 물이 에스겔의 발목에, 또 무릎에, 또 허리에 그리고 마침내 헤엄쳐야 건널 수 있는 큰 강물이 되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던 생수가 갈수록 점점 불어나 큰 강물을 이루게 된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만 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요 10:10,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삶은 풍성한 은혜의 삶이다. 나 혼자 급급한 삶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삶이다.
발목의 은혜는 교회 출석하는 정도다. 모태신앙인들이 이렇다. 일단 예배에 참석해야 발목의 은혜라도 받는다. 코로나 때문에 예배를 참석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는데, 발목 은혜도 놓치는 거다. 예수님에게 나가면 치유 받고 만나면 살아난다. 발목의 은혜다. 또 무릎 은혜가 있는데, 이건 기도의 은혜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누리는 은혜다.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 이건 이론이 아니라 실제다. 이런 응답을 체험했는가? 무릎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면 이성적인 신앙생활 밖에 안 된다. 다음엔 허리 은혜다. 온유와 겸손의 은혜다. 이런 분들이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좀 힘들어 하면서 사역한다. 다음엔 헤엄치는 은혜, 성령 충만한 은혜다. 상상도 못할 큰 은혜, 알지 못했던 은혜, 성령의 인도 가운데 사는 삶이다. 성령의 열매,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온유와 절제가 생기면서 저절로 열매가 맺힌다. 은혜가 깊을수록 좋은 열매가 많다. 생각지 않은 열매가 주어진다. 헤엄치듯 성령의 운행에 맡겨 살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재미있는 신앙생활이 어디 있나? 그러니 초월적 은혜다.
여러분은 어떤 은혜의 단계에 있는가? 우리 모두 얕은 물가에서 발목만 적시고 있지 말고, 깊은 바다에서 수영하는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자. 수박 겉핥기 신앙생활만 하지 말고 이젠 수박을 쪼개서 시원한 수박속살을 맛보는 신앙생활을 하기 바란다. 성령님을 구석에 처박아 놓지 말고, 그분이 내 인생의 주인 되어 역사하도록 온전히 지배받으며 살자. “오! 우리의 부족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생명 강이신 성령을 마음껏 마시며 초월적인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 여러분이기를 축원한다.
3. 생명수 강의 역사는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킨다.
본문에 보면 ‘생명수 강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땅이 변화되는 걸 볼 수 있다.(vv9-12) 생명수 강물이 닿자 죽은 바다로 알려져 있는 사해가 소생된다. 엔게디는 성지순례 가서 소금물에 몸이 둥둥 떠보나 확인하며 수영하는 사해의 서쪽 중간지점이고, 에네글라임은 사해의 북쪽 끝부분이다. 그러니 소금과 유황이 가득차서 고기들이 전혀 살지 못하는 이 죽은 바다 전체가 살아난단 얘기다. 물이 소생하니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많이 살고 어부들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다. 강변의 수목들도 잎과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실과는 먹기에 탐스럽고 잎사귀는 약재료로 쓰인다. 삶과 사역에 열매가 맺히고 마음의 상처와 쓴 뿌리가 치료되고 육신의 질병이 치료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v11에 “진펄과 개펄이 남겨져서 계속 소금에 절어있을 것이다”는 내용은 좀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서 NIV 성경은 이 하번절을 ‘계속 소금에 절어있을 것이다.’ 대신에 조금 긍정적 의미로 ‘소금을 위해 남겨질 것이다.(They will be left for salt.)’로 번역했다. 고대로부터 소금은 귀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해는 지금도 썩어있는 호수니 이건 상징적인 뜻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에스겔에게 있어서는 포로귀환과 스룹바벨을 통한 예루살렘 성전 건축과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것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회복과 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소망만 얘기하고 끝인가? 에스겔은 그 소식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고, 우리 또한 이 세대에 사명과 의무와 할 일이 남이 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 인간은 살아있는 영이지만, 살리는 영은 아니다. 살리는 건 하나님의 영역이고 나는 그 통로 역할을 하는 거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시절을 따라 열매를 내듯 구원받은 성도는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존재가 된다. 성령님의 능력은 죄의 노예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무 목적자에서 사명자로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효과가 창조 세계 전반에까지 파급된다. 그렇게 우리는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 사랑의 통로, 복음의 통로 역할을 하는 거다. 내 속에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과 말씀의 충만과 성령의 충만은 나를 흘러넘쳐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달된다. 이게 우리의 할 사명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통해 브루조아 계급을 깨부수고 재산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공동 분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공산당 간부들이 부와 명예를 다 차지하고 인민들을 더 궁핍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죄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100년이 못되어 공산주의는 붕괴되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행 2:44-45) 주님의 사랑 때문에 스스로 재산을 내어 놓았다. 성령의 감동하심 때문에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았다. 삭개오 같은 사람은 주님을 만나자, 자원하여 토색한 것의 4배나 갚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내주었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받으면 방언을 하고 큰소리 내며 기도하고 펄쩍펄쩍 뛰는 것만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섬기는 자로 바뀐다. 이번에 우리 교회도 부활주일 헌금을 코로나로 어려운 교회와 이웃을 위해 쓴다고 하니 성도들이 다른 때보다 더 많이 헌금하였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통해 권능과 용기를 얻고 공회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 전하는 자가 되었다. 우리 교회에는 예수 믿고 사명을 깨닫고 목자 목녀로 교사로 팀장과 팀원으로 헌신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며 영혼구원을 위해 헌신한 사역자들이 많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제 우리가 이 사명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더욱 충만해져야만 한다.
코로나19 이후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한가? 또 어떻게 바뀌게 될까? 로날트 게르슈테의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를 보게 되면 14c중반 유행한 흑사병(페스트)이 유럽의 인구 1/3을 죽였다. 그것으로 인해 유럽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에게 있던 급사나 심신의 약함은 한 나라의 역사 뿐 아니라 세계역사를 바꿨다. 코로나 여파로 신앙생활에 많은 지각변동이 일어날 거라고 기독교 미래학자들은 예측한다.
그러나 복음은 변함없이 똑같고,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 또한 변함이 없다. 생명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러므로 더욱 삼위 하나님에게만 집중하자. 그리하여 풍성한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 가운데 살자.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아 더욱 장성해지고 풍성한 열매를 맺자. 우리가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이고 우리는 그 생명을 전달하는 은혜와 축복과 복음의 통로일 뿐이다. 통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더욱 성령 충만을 구하는 우리가 되자. 아멘.
생수의 강이 넘치는 교회
양인순 목사 / 성지교회
오늘은 성지교회가 세워진 지 34주년이 되는 뜻 깊은 주일입니다. 거룩할 성(聖), 뜻 지(志)-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 땅에 선포하기 위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성전에는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와 헌신이 새겨져있습니다. 여기까지 지켜주신 에벤에셀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옆에 계신 분과 함께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당신의 헌신이 교회를 부흥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이 성지교회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물론 이 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인노릇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져야합니다. 주인노릇을 하는 것은 기존의 성도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일종의 텃세를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달라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주인노릇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부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식을 가진 분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부흥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로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주인의식을 가진 자는 항상 깨어서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합니다.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듯 성전을 귀하게 여깁니다. 부족함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말없이 수고합니다. 성도를 존귀한 자로 대합니다. 한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합니다. 이런 주인의식을 가진 성지가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미국의 침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교회의 부흥 비결이 독특합니다. 목사님 한 분이 그 교회에 부임을 했습니다. 몇 해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목회를 했지만 교회가 좀처럼 부흥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지만 교인들은 전도와 선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 신앙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교인 수는 줄어듭니다. 목회자의 생활비는 물론이고 교회의 운영조차 어려운 지경에 빠집니다.
목사님이 어느 주일 날 이렇게 광고를 했습니다. “더 이상 이 교회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다음 주일에 고별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교회 장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방 신문에도 크게 광고를 실었습니다. “다음 주일에 교회의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그 신문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 장례식을 치른다는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교회 장례식을 치르는 주일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교회 장례식을 거행하는 지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교회에 등록만 하고 출석하지 않던 사람들까지 호기심을 가지고 다 모였습니다. 목사님은 짧게 고별사를 하고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교회 강단 앞에 큰 관이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관 앞으로 한 사람씩 나오도록 했습니다.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 관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호기심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관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관속에 자신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관 속에는 큰 거울이 있어서 들여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관 속에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교인들의 마음속에 큰 깨달음이 왔습니다. 관 속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본 교인들이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아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은 결국 자신이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은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부터 교회 안에 새로운 영적 갱신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는 죽은 모습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야겠다는 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장례식을 치른 후 놀라운 부흥과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교회가 정체되거나 쇠퇴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내 심령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영적으로 자신이 성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생명줄과 같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해서 부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을 사모하며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 힘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더욱 힘써 주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지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부흥할 때 여러분의 심령이 회복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새로워집니다. 여러분의 일터와 사업장이 복을 받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품고 더욱 충성하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영광을 선포하며, 주의 뜻을 이 땅에 펼쳐가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건강한 성지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입니다. 에스겔은 나이 25살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30살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됐습니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몇 년 후면 돌아올 것이라고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절망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회복될 것을 예고(겔37장)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의 환상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성전을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소성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지금 이 사회가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부정과 불의가 만연한 세상입니다. 거짓과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마름 속에 지쳐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교회의 맛을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옵니다. 가장 어두운 밤에 별은 더욱 반짝입니다.
어둠의 시대를 밝힐 수 있는 있는 등불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유지할 때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 혼자의 믿음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어둠의 이 땅에 소망의 빛을 던질 수 있을까요? 오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그 비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생수의 근원이 어디인가?
요즘 우리들이 마시는 생수의 근원은 대부분 깊은 산 속입니다. 청정지역에 깊이 구멍을 뚫어서 그 물을 퍼 올립니다. 그 물을 마시면 시원합니다. 좋은 물을 마시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서울의 수돗물 아리수가 아무리 좋다고 홍보를 해도 사람들이 먹지를 않습니다. 식수원이 오염되고, 한강물이 오염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물을 사서 먹습니다. 새벽부터 산 속 약수터를 찾아갑니다. 비싼 정수기를 사서 정화를 해서 먹습니다.
좋은 물을 마시면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물을 찾아 마셔도 결국은 병이 듭니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영혼의 생수가 있습니다. 이 영혼의 생수를 마시면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살아서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 물이 나오는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성전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섬기시는 성지교회입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겔47:1)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은 성전의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합니다. 성전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시작됩니다. 그 생수가 성전 주변을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사해 바다에 이르기까지 흘러넘칩니다. 그리고 죽은 바다를 살려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루살렘 지역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한 성전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닙니다. 그러면 생수가 흘러나오는 성전은 어떤 곳일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 그 해답을 던져주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7:38)
생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됩니다. 1절에 성전 문지방에서 시작된 생수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립니다. 여기서 제단은 바로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짐승을 드리는 제사는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합니다. 모든 죄를 다 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그 아들을 유월절 어린양 희생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온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마지막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위하여 다 쏟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했습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 생명수 샘물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먹고 마시고 삽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생명수 생수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생수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계속해서 요한복음 7장 39절에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9)
생수는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 전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보혜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우쳐주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해주십니다.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는 이 세상의 방법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간에도 많은 분들이 세상의 것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주님 대신에 주(酒)를 찾습니다. 그래서 요즘 조폭보다 더 무서운 주폭이란 말도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일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그래서 경마장이 매주 주말마다 만원입니다. 자전거 경주인 경륜과 보트를 이용한 경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물론 이것들이 건전한 오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고장난 브레이크처럼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최근에는 로또 같은 복권에 목을 매는 목매달 인생이 많습니다. 전에 남녀친구 사이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 주는 TV프로를 보았습니다. 여자가 하소연을 합니다. 젊은 남자친구가 돈만 생기면 복권을 산답니다. 심지어 차비도 남겨놓지 않고 복권을 사서 난처한 경우도 있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로또 한번 당첨되서 대박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되면 대박인생이 될까요?
어제 신문에 보니 4년 전 로또 24억에 당첨되어서 18억을 받은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돈을 받자마자 조그만 가게를 집어 치웠습니다. 주식에 투자하고, 경험도 없는 사업에 투자를 했습니다. 사기를 당하고, 거듭된 실패로 18억을 모두 날리고, 결국 빚더미에 올랐습니다. 이혼까지 당했습니다. 그 결과 목욕탕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성령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우리는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더 큰 인생의 갈증을 느낍니다. 오직 탐욕의 상징인 배에서 생수의 강물이 흘러넘칠 때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살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수 샘물을 날마다 마시고,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생수의 분량이 얼마만큼인가?
생수의 샘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목마름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그 생명의 강가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사방으로 흐릅니다. 천사가 손에 줄을 잡고 측량을 합니다. 천척은 약 500미터입니다. 측량을 계속할수록 발목에 잠긴 물이 무릎, 허리에 까지 찼습니다. 그리고 수영을 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강물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발목까지 잠긴 성도는 초보신앙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수준의 교인입니다. 무릎까지 잠긴 성도는 교회는 다니지만 훈련받지 않고, 교회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수준입니다. 허리까지 잠긴 성도는 말씀도 배우고, 봉사도 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반응할 줄 압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긍지를 가지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헤엄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완전히 잠기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날마다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밖는 자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갈증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이 생수의 강물에 완전히 잠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얕은 물가에서 물놀이 수준으로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은혜의 강가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성령충만의 단계로 우리의 신앙을 업그레이드 해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주의 자녀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권세를 누려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날마다 은혜의 강물에 잠겨야합니다.
수영을 배울 때 처음에는 물을 두려워합니다. 허리에만 차도 무섭습니다. 물이 적으면 자유롭게 수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영에 자신감이 생기면 깊은 물에 들어갑니다. 물이 깊을수록 자유롭게 수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깊이가 낮을수록 세상에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그러나 신앙의 깊이가 깊을수록 은혜와 축복의 삶을 삽니다. 주님의 은혜의 강물에 자신을 완전히 담그면 이런 놀라운 찬양이 나옵니다.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입니다.
♬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 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후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만 보이도다 ♬
예수를 내 인생의 구주로 모시고, 성령의 거듭남을 체험하고,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 가운데 사는 자의 고백입니다. 이 찬송의 고백처럼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림으로 오직 구속하신 주만 바라보고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생수가 흐르는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생명수 샘물이 흘러넘치는 곳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넘칩니다. 성전에서 나온 생수가 흘러서 사막이 있는 아라바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 생수가 흐르는 곳에는 죽었던 것들이 소성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던 사막에 강물이 흐르자 나무가 번성하게 됩니다. 썩었던 바다의 물이 살아납니다.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살아납니다. 그곳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습니다. 강 좌우편에는 각종 과일나무들이 열매를 맺습니다. 생수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는 이처럼 치유와 회복과 풍성한 축복이 넘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생수의 강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살면 이런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다니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면 이런 넘치는 복을 허락하십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 은혜를 누리시는 성지가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교회창립 34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물이 흐르지 않는 사막처럼 아직도 인생의 목마름에 지쳐있지는 않습니까? 11절 말씀에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말씀하십니다. 지금 생수의 강물이 사방에 흘러넘치고 있는데 그 생명수 강물을 거부하는 상태가 바로 진펄과 개펄입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져서 복음을 거부하고, 성령님을 거스르는 자를 말씀합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메마른 사막같은 인생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살면 모든 것들이 다시 되살아납니다. 죽은 영혼이 회복됩니다. 병들었던 자들이 치유됩니다. 손으로 하는 일마다 복되게 하시고, 더 풍성하게 하십니다.
바로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를 성지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땅에 34년 전에 성지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들이 먼저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복음을 깨닫지 못한 자들, 여전히 세상 것에 매여서 목말라 지쳐있는 자들에게 생수의 강물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 복음의 물결이 흐르는 곳마다 모든 영혼들이 소성케 되고, 번성케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 성지가족이 주님의 성전으로 아름답게 지어져서 성지교회가 교회다운 교회,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교회’를 회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황무한 이 땅을 옥토로 회복시키며, 부흥의 새로운 불길을 일으키는 영적 부흥의 진원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계속해서 전도와 선교를 통해 생명을 살리며, 세상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우리 자신이, 우리 교회가 그렇게 쓰임받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흥 2000>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위해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에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에 바람 이 땅 가득 불어와
흰 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 주의 영광위해 이제 일어나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영광의 그날을 주소서 ♬
생수의 강
조용기 목사
<서론>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생수의 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물은 모든 생물의 생명 근원이 됩니다. 어떤 황막한 사막에라도 물이 흐르면 축복된 농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옥토라도 가뭄으로 물이 마르면 사막이 되는 것입니다. 물과 생명체는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체는 약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실 옷을 입고 앉아있으니 사람이지 물주머니에요. 우리가 다 물주머니라구요. 왜냐하면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체내는 물을 1∼2%만 잃어도 심한 갈증을 느끼고, 5%정도를 잃으면 거의 혼수상태에 빠지며, 12%를 잃으면 생명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의 국립건강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현대인의 질병 가운데 3분의 1이 수분 불균형”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인 것입니다. 이렇듯 물은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물과 생명체는 분리해야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물에 관하여 종종 언급하셨습니다.
<본론>
1. 에스겔의 환상 중 성전에서 나오는 물
오늘 읽은 성경 말씀 가운데 보면 에스겔이 본 환상 중 성전 지방 밑에서 나오는 물에 대한 해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긴 성경구절을 읽었습니다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환상 중에 보여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회복해서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성전 좌석에 앉으매 물이 그 성전을 통해서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왜 물을 제일 먼저 말했습니까? 물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근본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흘러 나와서 좌우로 강을 이루고 흐르는데 나무가 무성하게 서 있어 보통 나무들이 아닙니다. 과일이 풍성하게 맺어지고 또 나아가서 그 물이 흐르는 곳에 짠 바닷물이 전부 단물이 되고 치료함을 받고 나뭇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는 잎사귀가 되어서 나뭇잎사귀만 몸에 얹어도 병이 낫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은 깊이가 달라요. 자로써 재니까 천척을 재니까 발목에 채이고 그 다음 또 천척을 재니까 또 무릎에 채이고 그 다음 천척을 재니까 허리에 물이 오고 그 다음에는 헤엄치는 물이 되더라. 이것은 상징적인 말인데 여러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할지라도 발목에 충만한 정도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있고 무릎까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있고 허리까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있고 성령 속에서 헤엄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정도 성령께서 충만하시는지 스스로 가늠해 보시면 재밌을 것입니다. 강 좌우편에 형통을 상징하는 나무가 심히 많더라고 했는데 모든 일에 형통하게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성전의 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 바닷물이 소생하게 되므로 물이 흐르는 데로 바닷물이 되살아나서 생선들이 많이 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물로 모든 생물이 살고 바다는 물고기가 심히 많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더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전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 놀라운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근처에만 가면 좋은 일이 생겨나고 축복이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이것을 보았는데 이 환상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축복을 말합니다. 다른 축복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와 계시면 하나님께로부터 생수의 강이 넘쳐나서 그 물로 말미암아 초목곤충이 다 살고 모든 독이 사라지고 모든 환경과 심신이 치료를 받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강원도 태백시에 가면 2대 강인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가 있습니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연못은 예상과는 달리 아주 작은 연못입니다. 둘레가 100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루에 5천 톤이나 되는 물이 솟아올라 마침내 거대한 낙동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강이 시작되는 검룡소 역시 둘레 20미터 정도 밖에 안되는 작은 연못입니다. 그곳에서 하루에 2천내지 3천 톤의 물이 뿜어져 나와, 마침내 거대한 한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두 발원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수백 만 명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수돗물이 다 그런 것입니다. 이 한강물을 정화해서 수돗물로 씁니다. 옛날에는 저는 물을 아끼지 않고 썼는데 한번은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까 물은 아주 귀한 것이니 물을 아껴쓰라고... 예를 들어 말하면 화장실에 혼자만 가지 말고 여러 사람 시간을 정해놓고 한꺼번에 볼일 보고 난 다음 물을 눌러야지 너무 물을 많이 쓴다. 세수할 때도 물을 조금 받아서 써야지 수도꼭지 틀어놓고 세수하지 말라. 그 말이 내 마음에 딱 부딪혀가지고서 요사이 화장실에 가도 미안하고 세수를 해도 미안합니다. 세숫물을 담아서 한번 아니라 몇 번 쓰고 목욕도 매일같이 할 것을 일주일에 두세번으로 낮추고 그래서 영향력이란 것이 이렇게 다르구나. 좋은 말은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물을 아껴써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물이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인데 우리 하나님이 가시는 곳마다 물을 중심으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2.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생명수 강
사도요한 신약시대에 그가 하나님께 나오는 계시를 보았습니다. 하늘로써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 그 성소에는 물이 역시 보좌에서 흘러넘치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하나님 보좌가 있으면 곧 생명수가 그곳에 넘쳐 나와요.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12가지 실과를 맺고 나무 잎은 만국을 소성케 하기 위해 있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생명수가 넘치는 곳에는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못 먹고 못살고 헐벗고 굶주리는 이마에 땀을 먹고 사는 저주가 없고 밤도 없습니다. 밤낮이 다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하고 우리는 세세토록 만물을 다스리며 왕 노릇하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을 적었습니까? 에스겔이 왜 천년왕국 시대에 있을 성전에서 생수가 넘쳐나서 만물이 소생될 것을 말하고 요한은 또 하나님 나라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 성전이 계시고 하나님 앉은 보좌에서 생수가 넘쳐 나온다는 일을 왜 말하느냐. 이것은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의 모형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마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
우리는 이 마음 성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보좌를 베풀고 계십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고 요한이 본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우리의 가슴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므로 우리 속에서도 눈에 안보이게 생명수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는 일반적으로 집에서 마시는 물이 아니라 성령의 생명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계신 곳에는 생명의 생명수가 흘러나와 우리 생활 일대에 크나큰 생명의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로 39절에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내 마음 성전에 앉아 계시면 여러분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난다. 어떠한 생수입니까? 죄를 용서하고 의로움을 주는 생수, 허물을 사하고 의로 거룩함을 주는 생수, 연약과 질병을 고치고 치료의 건강을 주는 생수, 저주와 가난을 물리치고 아브라함의 복과 축복을 주는 생수, 사망과 음부를 멸하고 영생과 천국 영광을 누리는 생수, 이런 생수가 그리스도가 보좌에 앉아 계시면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계시면 여러분 속에서 이 생수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면 종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수를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로 1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낮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어깨에 걸머메고 우물에 물 길러 왔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다가 이 여인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 여인은 목마른 여자입니다. 돈은 있고 상당히 미모의 여자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재꼈으니까 보통 남자가 여자를 갈아재끼는데 여기는 여자가 남자를 갈아재껴요. 제1호 오너라. 살아보고 갈아 차버리고. 2호, 3호, 4호, 5호, 다 갈아 차버리고 여섯 째 남자와 사는데 이제 결혼도 안하고 오다가다 만나서 사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이 물가에 앉아 있는 것을 알면서도 쳐다보지도 아니하고 자기 물만 기릅니다. 그에게 대화의 문을 열어서 예수님께서 이 물은 아무리 마셔 봐도 목마르다. 또 물을 길러 와야 된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생토록 솟아나는 물이 된다. 이 여자가 무엇에 목마르느냐. 인간의 기쁨과 소망, 즐거움, 평안, 영적인 은총에 목이 마른 것입니다. 세상물 을 길르러 왔지만 실상은 영적물이 없어서 갈급한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을 다 가지고 있어도 마음에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으면 행복은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과 기쁨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고 어떠한 역경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는 물은 믿음, 소망, 사랑, 의, 평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보배로운 영적인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이것은 영원히 솟아올라서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여러분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잘살려고 애를 쓰는데 우리 국민소득이 처음 6백불 밖에 안되는 가난한 나라였는데 지금은 2만불이 넘었어요. 3만불을 향해서 나가는데 우리 국민들이 더 행복하냐. 통계에 보면 OECD 20개국 중에 제일 행복 안한 민족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일 자살률이 많아요. 자살률만 많은 것이 아니라 이혼율도 우리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많아요. OECD 국가에서... 왜 자살합니까? 살기 싫으니까 자살하지요. 왜 살기 싫습니까? 안 행복하니까... 그리고 이혼은 왜 합니까? 서로 마음이 안맞고 서로 가시가 있어서 찔리니까... 에라 고달픈 것보다 혼자 사는게 좋겠다라고 생각해서 이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기독교의 복음은 수양과 도덕으로 훌륭한 인격자가 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로써 영원히 죽고 범사에 저주를 받고 병들고 냄새나고 절망에 처한 인간들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해서 새사람이 되어서 그 영혼 속에 주님께서 넘쳐나는 행복의 생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보면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값없이 생명수를 받고 나면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해집니까? 마음의 보좌에서 생수가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이스라엘 나라에서 생명의 생수가 흘러나오고 요한이 본 하나님의 보좌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듯이 우리도 여러분, 하늘나라가 여기있다 저기있다 못하리니 하늘나라는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본부에 들어가는 것이고 지부가 다 여러분 가슴속에 있어요. 지금 여러분 속에 예수님이 와 계시고 아버지가 계시고 성령이 계십니다. 안 보이는데요. 하나님은 영이시라 여러분 육의 눈으로는 안보이지만 믿기 전에는 가슴속에 사탄이 드러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만들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탄은 쫓겨나가고 그리스도가 와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와 계시면 아버지가 와 계시고 성령의 생수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보십시오. 그날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으니 완전히 보좌가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나는 여러분 보니까 여러분 속에 하늘나라가 들어있어 대단합니다.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감추었으니 어떻겠습니까? 보배를 감추고 있으니까 하늘나라가 여러분 속에 들어있어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보배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보배를 통해서 여러분은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므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수가 우리 속에서 넘쳐 나오는 것을 알면 이 생명수의 효과가 엄청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명이 넘치는 것입니다. 만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예수 믿어서 소용이 있지요. 왜냐, 하나님 없이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집을 아무리 하나님 없이 세워봤자 헛돼요. 야훼가 없이 성을 지으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고생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편안히 잠자고 일어나면 얼마나 상쾌하고 좋습니까? 생수가 우리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알고 그 생수에 의지하면 생명이 넘쳐나는 형통의 생활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 쓴물, 짠물이 달아져서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 속에 들어오면 십자가는 쓴물을 달게 만들고 독을 제어하고 짠물이 소성케 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에스겔도 환상 가운데 보았고 요한도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 물이 치료 받는다는 것... 여러분의 마음이 치료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료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미움을 어떻게 치료하겠습니까? 미움 때문에 얼마나 고통당합니까? 분노, 원한, 좌절, 절망, 이 고통을 해결하지 않고는 행복이 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생수가 흐르기 시작하면 다 치료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고 짠물을 달게 하고 영혼을 소생케 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한다는 말이 바로 이 생수를 받으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주가 사라져요. 저주라는 것은 여러분, 모든 것이 가시밭길이 되고 이마에 땀을 흘려도 먹고 살기 힘들고 고통을 당하는 삶이 이 저주 때문에 왔는데 이 생수가 흐르면 광야 같은 사막에 옥토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황무지 인생이 되어 가는데 그리스도가 와서 생수가 넘치게 나면 황무지가 옥토가 되어버려서 정말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물이 풍성합니다. 생수 강 주위에 푸른 나무가 우거져있습니다. 형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물고기가 놀고 생명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 잎사귀는 약재가 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넘쳐나는 성령의 생수가 우리 속에 들어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라. 하나님을 섬기면 영혼이 잘되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면 너희 양식과 물에 복을 내려 병을 제하여 주겠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오늘 이 설교를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있으면 역사가 없습니다. 알아야지요.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이 이러한 은혜를 예비해 놓아도 우리가 모르면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면 사용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고 하셨으니 섬겨서 생수가 넘쳐나면 놀라운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수가 넘치게 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4. 생수가 넘치기 위하여
우리 속에 아버지와 아들 예수가 계시고 마음 성전에서 우리를 살리고 우리 범사를 살리고 강건하게 되는 생수가 흐르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기도로써 맺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여러분 나는 기도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내가 늘 말하던 불광동에서 목회할 때 장로님이 새벽기도 나와서 해가 뜰때까지 기도하는데 가서 들어보니까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래서 아니 장로님 무슨 기도가 말이 되어야지 그저그저 감사합니다가 뭡니까? 아이구 목사님 모든 것이 그저그저 감사한 것밖에 없어요. 나는 피난살이 내려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안 죽었으니 감사하고 이산가족이 있는 사람은 밤마다 날마다 우는데 나는 안 울고 우리 가족들 다 데리고 왔으니 감사하고 그리고 나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는데 입에 풀칠하고 먹고 살 수 있으니 감사하고 또 우리 동네 천막교회가 들어와서 아침에 와서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하고... 무엇이든지 감사할 것밖에 없으니 잔소리 할 것 있습니까?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게 와서 묻는 목사님이 계시기 때문에 감사하고... 그런데 내가 가만히 보니까 이 할아버지가 하나님께 감사만 하는데 정말로 생수가 넘쳐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권사님 한분이 오래 기도하는데 내가 무슨 기도하는가 가만히 보니까 또 특별한 기도를 해요. 하나님 아버지시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위에 있습니다. 한 30분 지나고 난 다음 다른 기도하는가 싶어서 들어보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 그러니까 아이구 놀래라! 그게 무슨 기도입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위에 있다는데 그게 무슨 기도입니까 그러니까 아이구 나는 긴 좋은 기도를 할 줄 모르는데 내가 아는 것은 하늘이 땅보다 높고 하늘이 땅을 다스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까 내 인생을 다 다스리려 주고 내 인생을 잘살게 만들어 줄 것을 믿고 다른 사람 다른 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다 아는 사실인데..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으니까 그저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 기도를 매일합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도 지금 어디가 있는 모르겠지만 잘 살게 하나님 해주셨음이 틀림없습니다.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과거에는 많이 기도하다가 요사이는 편지를 적는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아주 못 쓰는 노트북 같은 것 있으면 휴지라도 종이가 생기면 아껴서 모아 놓았다가 거기다가 기도를 적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안녕하십니까? 내 마음의 소원을 지금 적으니까 읽어 보십시오. 하루에도 세 번 네 번 아버지 앞에 수 통의 편지를 냅니다. 그러면 그 편지를 적어서 읽지요. 소리 내어 읽으면 엄청나게 좋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누님이 본땃다면서 내 생일날 우리 형제들이 모였는데 우리 누님이 기도해 주는데 종이를 꺼내서 읽어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동생 내외가 기도를 적는다고 해서 나도 기도를 적어서 오늘 동생을 위해서 기도하려고 하니까 내 말이 잘 안나와서 오늘 적어서 가지고 왔다고... 적으십시오. 여러분! 기도가 안되면 적으십시오. 하나님은 적으시는데 어깨너머로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시지 아니하시고 여러분 속에 계시기 때문에 기도를 계속하는데 정 기도가 어려우면 성전기도를 하면 좋습니다. 성전에 가면 성전 바깥에 번제단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는 속죄제물, 속건제물, 번제물, 화목제물을 드리는 곳인데 예수님이 속죄제물, 속건제물, 번제물, 화목제물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했었으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 다음 나오면 물두멍이 있습니다. 물두멍은 수족을 씻고 성전에 들어가는데 그 수족을 씻는 물두멍에 가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나를 정하게 해주시니 감사하다고 하고 죄를 회개하고 그 다음 성소에 들어가면 금촛대가 있습니다. 아무런 빛도 못들어오나 금촛대에서 불을 붙여서 환하게 지성소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성령의 일곱 금촛대가 들어가면 진리가 환히 보이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야훼의 영, 하나님의 영, 일곱 영이 여러분을 비춰주는 것이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다음 법궤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진리가 법궤인 것입니다. 그것 감사하고 진설병은 떡입니다. 성경말씀을 우리가 떡으로 먹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차례로 생각해서 기도하면 기도를 오래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여하간 골로새서 4장 2절의 말씀처럼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항상 기도에 힘쓰십시오. 여러분, 여러분 이웃 친구와 이웃과 이야기 하듯이 하나님과 늘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사야 44장 3절로 4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주님께서 성령의 생수를 주시면 시냇가의 버들같이 형통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찬양을 통해 생수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찬양을 좋아해요. 나같이 곡조를 잘 맞추는 사람의 찬양도 좋아하시는데 여러분 가만히 보면 다 찬양을 잘 불러요. 찬양을 주님께 늘 부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아침에 잠에서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내 속에서 찬양을 막 부르게 하시고 성령께서 찬양을 부르는 것을 느끼고 찬양할 때도 많고 잠자리에 들어가서 자려고 하는데 자꾸 찬양이 나와서 찬양하다가 언제 자는지 자기도 하고 여행할 때도 찬양이 나오고 찬양은 곡조를 붙인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도 되고 노래도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찬송 중에 하나님이 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07편 8절로 9절에 “야훼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자식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항상 좋은 것을 생각하십시오. 좋은 하나님, 좋은 것을 주시고 성소에서 생수를 넘치게 흘러나게 해주시는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하고 감사가 생수가 강같이 흐르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여러분 하나님을 한없이 기쁘게 하시는 것인데 감사할 것이 없으면 감사한 것을 찾아서라도 감사를 하십시오. 제일 마귀가 싫어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는 마귀킬러입니다. 마귀가 와서 여러분에게 의심을 갖다주고 마음에 불안과 고통을 갖다주면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감사는 마귀 킬러로서 마귀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 아버지를 감동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에베소 감옥에서 감사를 드리니까 온 옥터가 진동해서 쇠고랑이 풀려서 해방이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감사는 보좌를 진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생수의 강이 되는 것을 알고 시편 69편 30절로 32절을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야훼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감사를 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수를 주어서 마음이 가라앉은 단계에서 소생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늘 기도할 때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깨끗해야 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을 수가 없으니 옷을 깨끗하게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입는 것이 영적인 옷을 깨끗하게 입으라는 것입니다. 탕자가 더러운 옷을 입고 오니까 아버지가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이냐하면 가장 좋은 옷을 입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도 여러분 옷을 깨끗하게 입으면 자기만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기분이 좋습니다. 저는 50년을 목회를 하면서 너무너무 가난할 때도 목회를 했고 좀 잘살게 되었을 때도 목회를 했고 오늘날 다 잘사는 여러분 오실 때도 내가 목회를 했는데 언제 제일 사람을 보니까 좋으냐. 요사이 보는게 제일 좋습니다. 옛날에 가난할 때 너무 가난할 때는 완전히 걸레 같은 옷을 입고 오면 정말 마음이 언잖고 좋지 않았어요. 그러면 남대문시장에서 입던 옷 고물을 사서 입던 옷은 몸에 맞지 않아 헐렁헐렁하고 보기가 사나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기 몸에 딱 맞는 좋은 색깔의 옷을 입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의의 옷을 입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고 의의 옷을 입으면 하나님이 우리보고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는데 성령의 전에 들어가는 하나님과 같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로운 옷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은총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말씀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씻어서 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장차 올 천년왕국 시대나 천국의 보좌에서만 생명강수가 넘쳐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이 충만하면 생수가 넘쳐나 영혼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며 생명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천국에 계시고 천년왕국 후에 이스라엘 국토 예루살렘에 지어질 것이고 지금은 우리는 우리 마음천국이 이루어졌다가 다음에 진짜 본부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우리에게 띠는 것은 생수가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아버지와 성령이 속에 들어와서 계시므로 여러분 마음이 생수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데 가서 뭘 찾지 마십시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것을 다른데 가서 쓸데 없습니다. 예수님 속에 계세요.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이 여러분 속에 계세요. 이 속에 계신 생수가 여러분 넘쳐나도록 있는 것을 알고 감사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며 회개하고 생수의 물고를 터놓으면 이것이 여러분 생애 속에 넘쳐나면 여러분이 그 생수를 마시고 살고 이웃을 살리고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여러분을 통해서 넘쳐나면 강가에 나무들이 무성합니다. 여러분 가는 곳마다 모든 형통한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그리고 그 생수가 흘러가는 곳마다 물이 짠물이 쓴물이 달아진다. 모든 환경이 변화를 받고 치료를 얻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요, 많은 고기들이 살더라.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이 여러분 속에 가까이 와서 함께 즐거워하고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치료가 다가오고 좋은 일이 많이 다가오는데 이것을 우리 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보좌가 여러분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가 건지리라. 우리가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감사하며 찬양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가 내 이름을 안즉 저가 나를 높여 주리라.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해 주리라. 환난 때 같이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해주리라. 장수하게 하여 오래오래 살게 하여 소원을 만족케 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성령과 더불어서 우리 속에 와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르면 안 됩니다. 이 질그릇에 보배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이 질그릇 속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는 보배로운 보좌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시지 아니하시고 여러분 안에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차원의 영성 이상이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심과 동시에 여러분 속에 와서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자리에 계시고 그러면 당연히 여러분 속에 생수가 넘쳐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여러분께서 기도하면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좌가 있는 것을 알고 그 다음 여러분에게 생수가 넘쳐나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자기 모습을 꿈꿀 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은 바라는 소망을 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소망이 있고 바라봄의 법칙을 따라서 소망이 이루어진 모습을 가슴속에 품고 그것을 늘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마음속에 소원을 또 행하게 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런 인생에 소원이 없는 사람은 꿈이 없고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꿈이 있어야 돼요. 적은 꿈이든 큰 꿈이든 꿈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같이 하여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소망이 있으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냐.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그것을 이루어지도록 믿음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역사하고 믿음이 역사해서 마음이 밝고 맑고 환해지면 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축복받았다. 나는 승리했다. 나는 치료받았다. 나는 생수가 강같이 넘쳐난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다. 여러분 말은 굉장한 큰 효과를 발생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가 말로 통해서 살고 죽습니다. 네 입의 말로 죽을 것이요 네 입의 말로 살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 70%가 물이랍니다. 물이 우리 말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물학자인 에모또 박사는 시험한 결과에 두 컵을 갖다 놓고 한 컵은 축복을 해주고 칭찬해주니까 육각형의 아름다운 결정을 가진 물이 되었고 한 컵에는 욕을 해주고 못됐다. 나쁘다. 같이 안 살겠다 그러니까 물이 낙심을 해가지고서 현미경으로 보니까 구멍이 펑펑펑 뚫리고 조직이 다 와해되고 형편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은 알고 있어요. 밥을 지어도 여러분 식탁을 놓고 기도를 합니까 안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안하고서 밥을 먹는데 큰 손해가 나는 것은 밥을 두 그릇에 떠서 한 그릇은 축복을 해주고 기도를 하고 현미경 조사를 해보니까 밥이 아름다운 누룩이 되어서 일주일 후에는 향기로운 누룩이 되었어요. 그러나 다른 밥그릇을 보고 아이 냄새가 나고 맛도 없고 욕을 해주면 일주일에 보니까 팍팍 썩어서 냄새가 나서 먹지도 못하게 되었어요. 사람의 입술의 말이 우리 운명과 환경에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네 입의 말로 네가 묶였으며 네 입의 말로 네가 사로잡힌 바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에 있으니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는 것을 알면 내 속에 용서와 의의 강물이 흐른다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생수의 강이 흐른다. 나에게 치료의 강물이 흐른다. 그리고 내 형통의 강물이 흐른다. 영생복락의 강물이 흐른다. 이 강물이 흐르므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된다. 나는 좋은 남편 만나서 시집가게 된다. 나는 좋은 신랑 만나게 된다. 나는 좋은 직장 얻게 된다. 우리 집은 전세금이 나간다. 이렇게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긍정으로 말을 하면 생수가 그에 따라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서 생수가 넘쳐 나올 뿐 아니라 여러분도 물이요.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늘이 물 가운데서 나오고 땅이 물로써 있으니 우리 모든 환경이 전부다 물속에 있는 것입니다. 물이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굉장히 반응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 잘하면 행복하게 살게 되고 말 못하면 고통을 당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보좌를 배설하고 제일 먼저 인생에게 주는 것이 생수의 강물 아닙니까? 보좌에서 넘쳐나 생수의 강물이 길 가운데로 흐르니 양 강 주위에는 무성한 나무가 우거지고 물이 소생하게 되고 치료받고 물고기가 넘쳐나고 아주 좋은 일이 생수의 강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구약에도 그렇고 신약에도 요한이 보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이 아름다웠는데 그 보좌에서 생수가 흘러나와서 똑같이 나무가 무성하고 열매가 많고 물고기가 많고 다 치료받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은 이러한 보좌가 너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교회가 하나님 보좌가 되어서 이 자리에 너희 두세 사람 모인 곳에 나도 있겠다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교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면 잘살게 돼요. 영혼이 잘되게 돼요. 범사가 형통하게 돼요. 그리고 강건하게 돼요. 그 때문에 교회 모이기를 패하지 말라는 것이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생수의 강물을 마시고 가므로 운명이 달라지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여러분 속에 하나님 보좌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과 더불어서 깨닫고 하나님과 더불어서 꿈을 꾸고 하나님과 더불어 믿고 하나님과 더불어 말을 하면 여러분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좋아지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있게 되고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 항상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은 신비한 능력을 베푸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서 우리와 같이 계시면서 기적을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다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생수의 강
이윤재 목사 / 한신교회
계절의 여왕, 4월과 5월의 한복판입니다. 여러분은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계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언제나 우리 불행은 행복을 뒤로 미루는 데서 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세 가지 질문을 물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답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지금 이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시원한 물가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저는 물을 좋아합니다. 아마 물이 없는 이스라엘에서 물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끝에 헬몬산이 있습니다. 이 산에 눈이 오면 다음해 봄부터 녹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원한 폭포가 흐릅니다(사진1). 이 물이 갈릴리호수로 들어가 이스라엘의 생물줄이 됩니다. 광야로 가면 드물게 이런 물도 있습니다(사진2). 사방이 광야인데 이곳에만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속에 나무 하나가 서 있습니다. 아마 이것을 보고 다윗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엔게디는 광야의 끝자락, 사해 바다 옆에 위치합니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 “다윗폭포”라고 불리는 폭포가 있습니다(사진3). 아마 이 근처 어디에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쏟아지는 폭포밑에서 너무 너무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생명을 물을 비유한 것은 이스라엘의 지리적 상황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장 가깝게 이해하는 가장 이스라엘적인 표현방법입니다. 저는 그동안 1월 첫주부터 이 생명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는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동안 드린 생명에 관한 말씀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생명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꿈을 꾸는 시간입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환상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입니다.
먼저 생명은 물과 같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겔47:1, "성전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끝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오늘 말씀은 선지자 에스겔이 본 물의 근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에스겔이 살던 시대는 물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생수가 없어서 물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에스겔의 시대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지배를 받던 시대였습니다. 주전 587년,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질풍노도와 같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말발굽으로 밟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70년,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 시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대였는지 겔37장이 잘 말해줍니다. 겔37:1-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얼마나 피폐하고 메마른 시대였으면 골짜기에 죽은 시체로 가득했겠습니까? 그 냄새나는 악취와 무기력, 그 시대는 분명 생명이 사라진 죽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겔47장으로 오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의 환상을 보여 줍니다. 그 것은 생수의 환상이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겔47: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하나님은 에스겔을 환상가운데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에스겔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성전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 성전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2절 뒷부분입니다. 겔47:2,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에스겔이 본 것은 생수였습니다. 맑고 시원한 생수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물이 없어 메마르고 물이 없어 죽어가는 시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생수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죽음의 시대에 물이 필요할까요? 물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물이 없으면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람의 생명은 대부분 물로 되어 있습니다. 몸의 70%가 물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는 99%가 물이고 그 후로 점점 줄어들지만 죽을 때도 몸은 50%가 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비가 없어서 물이 없는 상태가 가장 큰 저주입니다. 시63: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여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생명없는 삶은 마치 물이 없어 목마르고 곤핍한 삶과 같습니다. 시107:4-5절입니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물이 없으면 피곤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축복은 하늘의 비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시72:6절입니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하나님의 복은 밭고랑에 물이 넉넉한 상태입니다. 시65:9-10절입니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나이다.”
왜 물이 생명입니까? 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세 가지 체액을 만들어 냅니다. 눈물과 땀과 피입니다. 눈물은 슬플 때 흘리고 땀은 일할 때 흘리고 피는 아플 때 흘립니다. 그 결과 눈물은 슬픔을 이겨내고 땀은 가난을 이겨내고 피는 죽음을 이겨냅니다. 생명은 우리에게서 고난을 이겨내는 저력이요 부지런히 일하게 하는 능력이요 죽음을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물은 또한 시원합니다. 목마를 때 마시는 물은 뼈속까지 시원하게 합니다. 잠25:25-26,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가 얼마나 시원합니까? 생명이 그렇습니다. 생명은 우리를 맑게 하고 깨끗하게 합니다. 생명의 힘은 우리 속에서 우리 영혼을 시원하게 합니다.
물은 또한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몸속에 물이 들어가면 몸에 영양분을 만들어 생명을 유지시킵니다. 금식할 때 압니다. 인간을 유지시키는 힘은 물입니다. 밥을 안 먹어도 살지만 물을 안 마시면 죽습니다. 보통 남자는 7일, 여자는 9일까지 물을 안 마셔도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 마시지 않으면 죽습니다. 물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물이 어디에서 옵니까? 다시 1절을 보십시오.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생수는 성전 문지방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샘입니다. 사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I am the living water, 나는 생명의 물이다. 그런데 한 번 마시고 끝나는 물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물이다. 하나님 떠나 어디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생수는 나를 먼저 적십니다.
에스겔에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환상을 보여준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강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점점 물이 깊어 지더니 처음에는 발목까지 오르더니 다음에는 무릎까지, 조금씩 허리까지 차더니 마지막엔 헤엄쳐야만 건널 깊은 강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경험했던 강은 그가 직접 들어가서 경험한 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경험적입니다. 이론적이 아닙니다. 그 생명은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올라 결국 우리 키를 넘깁니다.
물은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도 우리가 마십니다. 요7:37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하나님의 생명은 마시는 것입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고 인격이요 그나마도 신적인 인격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마시라”고 합니다. “마신다”는 말은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가진 예비엄마들이 느끼는 감동이 이런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뱃속에서 발로 툭툭 찹니다. 어떤 때는 웃고 놉니다. 음식을 삼키면 아이가 먹는 것이 느껴집니다. 열달동안 이 느낌을 갖고 있다가 아이를 낳는 엄마에게 아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입니까? 그래서 엄마는 특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안에 있는 생명은 엄마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받은 것이고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생명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날 우리 속에 들어왔고 우리안에서 자랍니다. 언제 그 생명이 들어왔을까요? 태초부터 있던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께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입고 세상에 왔을 때 그 생명과 함께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십자가에서 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껍질을 깨어지고, 향유처럼 옥합을 깨어졌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진액입니다. 그 생명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들어왔고 우리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받았습니다. 받았기 때문에 있고 받았기 때문에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폴 밀러는 <우리 사이를 거닐던 사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사랑은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만 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생명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받지 않고는 줄 수 없습니다. 받은 것이 없다면 줄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압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은 우리안에 있습니다. 기독교와 일반 종교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기독교는 안에 있고 일반 종교는 밖에 있습니다. 요7:38절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다같이 “그 배에서”. “배”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 “안”입니다. 우물물이 우물안에 있듯이 하나님의 생명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갈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사십니다. 밖에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좋은 것은 안에 있습니다. 골1:27절입니다. “이 비밀은 너희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예수님안에 영광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사막교부 안토니가 말했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바다를 건너지 말라. 진리는 네 안에 있느니라”. 이 말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는 어디를 가도 결국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로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성 어거스틴이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제가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계셨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분, 제가 하나님을 밖에서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제 안에 계셨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찾으러 오랫동안 밖에서 방황했습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마니교에서, 수사학과 학문에서, 그리고 인생의 쾌락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돌아와 보니 뜻밖에 하나님은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있기 때문에 가끔 우리는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너무 가깝게 있기 때문에 때로는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문제도 생명도 다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한 환자가 의사를 찾아와 말했답니다. “선생님, 온몸이 다 아픈데 아파도 너무 아파요. 원인을 알려주세요”. 그래서 어디가 아프냐고 했더니 손가락으로 여기 저기를 누릅니다. 팔을 눌렀더니 “앗”하고 아프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다리를 만지더니 “아이구”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얼굴을 만지더니 “아얏”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서 여자가 말합니다. “선생님, 보세요. 재가 얼마나 아픈지”. 그러자 의사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아주머니는 몸의 여기 저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딱 한 군데가 아픕니다. 아주머니 손가락을 보세요. 손가락이 부러졌잖아요”. 환자는 다른 데가 아픈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부러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손으로 모든 곳이 아팠던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으면서 또한 생명도 내 안에 있습니다. 골3:3절입니다.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저도 많이 속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 안에 무엇이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열등의식속에 살았습니다. 2005년, 고 이중표목사님이 저에게 “이 목사가 한신교회 목회해” 했을 때도 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남들이 들을 때는 굉장히 겸손한 사람이구나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제 안에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골3:3절을 읽고 제 안의 거짓 겸손의 함정에서 벗어났습니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구나. 그래서 잘 안 보였구나. 안 보인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부터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노력과 훈련으로 깊은 생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생명은 우리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속으로 깊히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 피상적이 됩니다. 그래서 두 귀절이 중요합니다. 잠25:2절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하나님의 일은 숨겨져 있습니다. 안 주시려고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라고 숨겨져 있습니다. 또 롬11: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있지만 그것은 우리 지식과 경험으로 쉽게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깊습니다. 들어갈수록 더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찹니다. 그래서 “이 정도는 해볼만 하네” 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이제는 무릎까지 찹니다. “아, 조금씩 깊어지네” 하고 긴장했는 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허리까지 차고 더 들어갔더니 키를 넘깁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물을 지배했다가 나중에는 물이 나를 지배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별 것이 아닌 것 같은 데 그렇게 물이 깊은 줄 몰랐습니다. 2천년 교회사의 전통적인 영적 훈련에서는 이 세 단계를 이렇게 표시합니다. 정결, 하나님앞에 내가 누군지 보는 것입니다. 조명, 하나님앞에 선 나에게 성령의 조명이 비췹니다. 그러면 그 조명앞에 죄를 드러내고 연악함을 고백합니다. 연합, 마지막이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단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깊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이 다시 롬11: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말을 이사야의 말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사45:3,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우리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생명은 흑암중에 숨긴 보화입니다. 은밀한 곳에 숨기운 재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 사람이 되는 것과 깊은 영성의 사람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기만 하면 누구나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깊은 영성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깊히 사귀는 사람입니다. 밖에서 서성대지 않고 감추어진 생명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발목에서 무릎으로 허리에서 어깨로 들어갑니다.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생명은 더 크고 놀랍습니다. 교회사에 나오는 영성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생명안으로 깊히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중 하나가 18세기 프랑스의 잔느 귀용입니다. 고난의 풀무속에 산 이 여인은 평생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의 신비한 생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믿음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안으로 깊히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걸리는 것이 자기 자신, 곧 자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자기 포기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이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것은 당신이 얻을 하나님의 생명에 비하여 지극히 작은 것이 아닌가? 당신은 당신을 포기한 만큼 당신 자신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을 잃은 만큼 하나님을 얻을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얻는 것만큼 가장 크게 얻는 것은 없다”. 그가 했던 가장 중요한 말은 이것입니다. “생명의 샘의 근원인 예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래야 생수의 강이신 예수님이 당신을 통해 흐를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까? 안에 감춰져 있는 생명의 샘인 예수님의 깊이로 날마다 가까이 가겠습니까? 그 생명을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겠습니까? 예수님안으로 들어가 발목을 적시고 무릎을 채우고 허리까지 차올라 마침내 그 생명의 샘이 여러분을 움직이기 하겠습니까?
생명의 강은 흐른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그 속으로 깊히 들어가도 한 가지를 잊으면 생명과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강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8절입니다. 겔47: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성전에서 뚝뚝 떨어져 에스겔을 적신 물이 동쪽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강은 곧 바다를 이루었고 바다는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흐르는 곳마다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9절입니다. 겔47: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성경에서 바다를 말할 때 바다는 대개 세상을 가르칩니다. 성경의 바다는 세상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바다는 지금보다 훨씬 무서웠습니다. 지금은 큰 배도 많고 배가 아니면 비행기로 가지만 옛날에는 배밖에 없었습니다. 그 작은 돛단배로 그 대양을 지날 때 사람들은 무서워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다에 리워야단이라는 용이나 악어가 산다고 믿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다의 공포는 여러번 나타납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때 많은 애굽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전에 노아홍수가 있었습니다. 노아 홍수는 40일 40야를 비가 퍼부어 온 세상을 물로 뒤덮은 사건이었습니다. 노아 8식구가 구원받았지만 바다는 모든 생명을 집어 삼켰습니다. 요나도 바다의 공포를 느끼게 해준 사건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살았습니다. 갈릴리 바다 풍랑도 바다의 무서움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집채만한 풍랑이 불어 치자 모든 제자들은 무서워 떨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로 갈 때 지중해의 유라굴라 때문에 죽을 뻔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재미있습니다. 거기에는 다 있는 데 바다가 없습니다. 계21:1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왜 천국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있는 데 바다는 없을까요? 상징입니다. 바다에 있는 공포, 무서움, 죄, 악이 더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흘러 나온 하나님의 생수가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가자 그 바다에는 더 이상 용이 없습니다. 리워야단도 없고 악어도 없습니다. 요나를 삼켰던 큰 물고기도 없고 집채만한 풍랑도 없고 심지어 파도도 없습니다. 대신 끝없이 열린 아름다운 열매와 싱싱한 물고기와 시들지 않은 무성한 잎사귀만 있습니다. 다시 12절 보시겠습니까? 겔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의 마지막 꿈을 보여줍니다. 성전에서 흐르는 생수가 모든 죽음, 모든 공포, 모든 질병, 모든 죄악을 이기고 결국 최후 승리하는 꿈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은 물이 흘러갈 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물이 가만히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이 성전에서 나와 바다로 흐를 때 나무가 살아나고 고기가 살아났습니다. 바닷물이 살아나고 각종 생명들이 살아 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명도 흘러야 세상을 살린다는 것을 믿습니까? 내 속에 있는 생명이 적지만 그것이 흐르면 흐를수록 커지고 많아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처음 나올 때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흘러가면서 많아졌습니다. 동으로 남으로 북으로 흐르다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섭던 바다는 낙원이 되었습니다. 8절이 중요합니다.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 나리라”. 바다를 살리는 꿈, 세상을 살리는 꿈, 성전에 흘러온 하나님의 생명, 예수님을 통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그 생명이 흐르면 세상을 살리는 꿈, 그러자면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사막교부 아바 벨로스의 미우스가 한 말이 중요합니다. “순종은 순종을 낳는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도 그의 요청 앞에 순종하신다”. 우리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의 겸손한 순종을 통해 흘러갑니다.
우리 안에 생수가 흐르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12절 뒷 부분을 보십시오.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여기서 “약재로”는 히브리어 “리트루파”입니다. 이 말은 “라파”, “치료하다”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세상을 치료합니다. 우리가 가면 세상은 치료됩니다. 우리안에 생수가 흐르면 세상을 평화로와 집니다. 죄는 사라지고 전쟁은 그칩니다.
생수가 흐르면 평화가 일어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평화가 필요합니다. 1945년부터 1995까지의 50년동안 지구상에는 80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전 세계적 28군데에서 전쟁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무기로 사람을 찌르고 죽입니다. 가인이 처음 사용한 무기는 돌이었고 사람들은 그 후에 쇠로, 금속으로, 원자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전쟁의 마음은 단단한 돌같은 마음입니다. 돌과 쇠를 부수는 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입니다. 단단한 밭고랑에 새 생명을 내는 힘은 하늘의 단비입니다. 시64:10입니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고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주시나이다”. 하나님의 생수만이 이 세상을 부드럽게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막는 힘도 하나님의 생명이요 평화를 가져오는 힘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가면 이 한반도를 평화의 나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겔47절을 지금 전쟁과 핵의 공포로 가득한 이 민족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 한반도에 차고 넘치면 바닷물이 살아 납니다. 어부들의 열심히 고기가 심히 많아 집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모든 영혼이 구원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전쟁은 사라지고 평화가 옵니다. 강 좌우에 시들지 않은 잎사귀와 달마다 새 열매가 맺힙니다. 주여, 이 나라가 그렇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전쟁은 사라지고 평화가 정착하는 나라, 수많은 물고기와 열매로 굶주린 세상을 먹이는 나라, 생명수 강가에서 모든 민족이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를 목 놓아 부르는 나라, 그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나라, 그 꿈, 그 환상, 그 비전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소성케 하는 생수의 강
피영민 목사
서 론
에스겔은 모두 48장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이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에스겔 전반부 1장에서 24장까지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솔로몬 성전이 파괴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다 백성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후반부 25장에서 48장까지는 죄로 인해 무너진 유다 백성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다는 내용입니다. 에스겔서는 죄에 대한 심판으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회복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서 나오는 환상은 성전에서 나온 생명수가 강이 되어 사해바다를 소성케 한다는 내용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에스겔을 이끌고 성전으로 갑니다. 놋 같이 빛난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천사일 수도 있고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님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인도를 받아서 환상 속에서 본 성전으로 가게 되는데 그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조금씩 스며 나왔습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동쪽은 요단강인데 이 강을 따라 내려오면 아라바 광야가 나옵니다. 아라바 광야를 지나가면 바다가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사해바다입니다. 성전에서 스며 나온 물이 동문으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요단강을 따라 아라바 광야를 지나서 사해바다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 물의 천 척(약 550m)을 측량하여 강을 건너는데 물이 발목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또 천 척을 측량하여 강을 건너니 무릎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천 척을 더 측량하여 강을 건너니 물이 허리까지 왔고 마지막으로 천 척을 측량하니 헤엄쳐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나올 때는 스며 나오는 물이 천 척을 네 번(약 2.2km) 측량하고 나니까 사람이 능히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된 것입니다.
이 강물 좌우로는 나무들이 높이 서 있었는데 모두 과실나무였습니다. 이 과실나무들은 달마다 열매가 맺혔습니다. 또한, 나무 잎사귀들은 치료 효과가 있어 무슨 병에 걸렸던지 그 나무 잎사귀만 바르면 나아버렸다고 합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던 사해바다에 고기가 넘쳐나서 어부들이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으니 큰 고기들이 많이 잡혔다고 나와 있습니다.
I. 성경에 계시된 생명수 강
첫째, 성경은 생명을 주는 강(창 2:10)으로부터 시작해서 만국을 소성케 하는 생명수의 강으로 끝나고 있습니다(계 22:1-2). 창세기 2장 10절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시작되는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강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 제일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또 강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을 보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이 생명수의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12가지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케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둘째, 포로귀환 이후의 스가랴 선지자도 에스겔 47장과 동일한 환상을 예언했습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 14:8) 이스라엘 땅은 여름과 겨울이 건기입니다. 비가 오지 않아 물이 아주 귀한 때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 여름과 겨울 즉 건기에도 물이 풍성하여 동해와 서해로 절반씩 흐를 것이라고 스가랴 선지자도 예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축복의 복음이 나와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신약에 와서 예수님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라 하셨고(요 4:14) 성도들에게도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요 7:38-39).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8-39) 예수님께서는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와 성도들에게도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도 안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 그들의 영혼을 소성케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생명을 주는 복음이요 성령인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에스겔의 환상은 오순절날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시고 성도들은 성령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고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섯째, 생수가 흐르는 곳에는 생명이 살아납니다. “소성케 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계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역사를 매우 좋아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잊어버렸는데 기억하기로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리 밝은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명이 넘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G20을 개최하여 세계 20개국 정상들이 서울에 와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장은 바로 1885년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가 복음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한국 침례교의 토대를 세운 펜윅 선교사님께서 1889년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대한민국이 소성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명수가 처음에는 조금씩 스며 나오더니 이제는 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 믿어 사람들의 영혼이 살아나고 구원을 받았으며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부요와 번영이 있어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는 꿈같은 얘기가 우리 앞에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이 1991년인데 수교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홍콩을 거쳐 마카오에서 광저우로 가게 되었습니다. 또 광저우에서 90시간 기차를 타고 연길로 가는데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수도인 북경 화장실에 문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후진국이었던 중국이 지금은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이제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중국의 대통령 후진타오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중국이 복음을 받아들이니까 부요와 번영과 생명이 넘치게 된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돈과 권력이 아무리 많아도 복음을 거부하면 그 가정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가정은 처음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점차 번영하고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 생명수는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만국”을 소성케 합니다. 생명수의 근원은 예루살렘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이 본 성전은 문자적인 예루살렘 성전이 아닙니다. 에스겔이 환상 속에 본 성전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생명수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변두리에 놓으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우리 삶 중심에 두어야 생명수가 흘러들어와 사업과 가정 모두가 잘되는 것입니다. 생명수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아니라 만국을 소성케 하는 것입니다.
Ⅱ. 사해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
에스겔 47장과 요한계시록 22장의 내용이 거의 비슷하여서 어떤 분들은 에스겔 47장이 천국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22장과 달리 에스겔 47장에는 “사해”가 나옵니다. 사해는 소금, 유황, 역청만 있는 죽은 바다입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은 사해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생명이 없는 타락한 인류를 의미하고 둘째는 생명이 없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생명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유한한 생명입니다. 타락한 모든 인간은 이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생명은 유한한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린 것이지 아담이 받았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잃어버린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다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죽어도 다시 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 또한 우리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오늘 여러분 가운데 육신의 생명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시는 영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생 없이 사는 사람들의 영혼은 사해바다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사해바다 같이 타락한 인간의 영혼에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겔 47:8) KJV 성경을 보면 “the waters shall be healed”로 조동사 shall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바다를 살려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은 것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죽은 것도 살려내실 수 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7) 영생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진시황이 그렇게 찾으려고 했다가 못 찾은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두티켓을 선물 받으면 고마워하면서도 영생은 왜 그렇게 사소히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착하게 살아서 복 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의 반대는 영사가 아니라 영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지옥 떨어져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최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꼭 믿으시길 바랍니다.
Ⅲ. 성도에게 주시는 두 가지 사명
그렇다면 이미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 사명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복음의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19) 사해바다에는 서쪽에 엔게디가 있었고 동쪽에는 에네글라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곳의 이름을 기록해놓으셨을까요? 엔게디는 새끼 염소의 우물을 의미하고 에네글라임은 두 송아지의 우물을 뜻합니다. 그런데 엔게디와 에네글라임은 히브리어 문자지만 숫자도 나타냅니다. 엔게디는 17, 에네글라임은 153을 의미합니다. 17과 153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1에서 17까지 모두 합하면 153이 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의 숫자가 153마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에 갑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순종하여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잡혔는데 모두 153마리였습니다. 성경이 왜 잡힌 물고기의 마릿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잘 모르지만, 히브리사람들은 이것이 에네글라임을 의미한다고 알았을 것입니다. 결국, 생명수가 흐르는 곳에 우리가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낚싯대가 있거나 그물이 있어야 합니다.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복음의 그물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그물을 가지고 다니십니까? 집에다 놓고 다니시거나 복음의 그물에 구멍이 나서 물고기가 새어나가는 고장 난 그물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으십니까? 복음의 그물을 잘 정비해서 어디로 가든지 물고기를 많이 잡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을 아는 체험에서 성장해 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성령의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데 어떤 사람은 발목까지 오는 곳에서만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릎까지 오는 곳에만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그런 곳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생수의 강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져야 물고기도 많이 잡고 사해바다 같은 우리의 영혼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기도함으로 성령체험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체험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1월 3-5일까지 하는 신년산상축복성회에 올라와서 이번에는 생수의 강이 넘쳐 성령체험을 꼭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복음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도 다 증발시켜버리는 진펄, 개펄 같은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교회를 안 나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교회를 나오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성경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도 주지만 치료와 부요와 번영도 줍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믿지 못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심령으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과 사업 모두 잘되는 것입니다. 번영과 부요가 있게 되고 몸에 병이 들어도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암에 걸린 사람들도 목숨 걸고 기도하면 병이 낫습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지 않고 믿지도 않으니까 진펄, 개펄처럼 되어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은 심령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복을 향한 갈망
노경모 목사 / 함께하는 교회
성경의 핵심은 회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낙원의 모습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은 다시 찾는 천국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드라크마를 잃었다가 다시 찾고, 앙 한 마리를 잃었다고 다시 찾고, 탕자를 잃었다가 다시 찾고 온통 성경은 다시 찾는 것 즉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온통 회복을 위한 일을 하셨습니다. 영생을 잃어버린 자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고 건강을 잃어버린 자들로 건강을 회복하게 하셨으며, 죽음으로 생명을 잃은 자들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회복은 예수님 사역이 중심이요, 복음의 핵심입니다.
기독교는 회복의 종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영생을 제2의 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영생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시킬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의 회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 얼마나 크신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시는 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복을 위해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예수님은 우리의 회복을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성령님도 우리의 회복을 위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마샤 에븐스라는 십대 소녀가 있었습니다. 입 주위의 신경조직이 잘못되어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도중 신경을 잘못 건드려 어린 소녀의 입이 그만 비뚤어지고 말았습니다. 입이 비뚤어진 소녀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학교에 가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집에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점점 더 우울한 소녀가 되어갔습니다.
13번째 생일을 맞던 날, 이 소녀 앞으로 선물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치자꽃이었는데 누가 보냈는지 이름이 없었습니다. 단지 “마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적은 메모지만 있었습니다. 치자꽃을 보고 있던 마샤가 몇 달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누가 이 꽃을 보냈을까?” “글쎄, 누굴까? 너를 좋아하는 남학생이겠지.”
“누가 나 같은 걸 좋아해?” “아니야.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거야.” “그럴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치자꽃 하나 때문에 마샤가 입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다음해 생일에도 치자꽃이 배달되었습니다. 마샤는 점점 더 밝아졌고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치자꽃은 마샤가 결혼할 때까지 계속 배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는 더 이상 꽃이 배달되지 않았습니다. 마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마샤는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 꽃을 보냈는지…. 꽃이 마샤의 인생을 회복시킨 것이 아닙니다. 엄마의 사랑이 마샤를 회복시킨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부분에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에 유명한 바다가 있습니다. 이 바다의 이름은 '사해(死海)'라고 합니다. '죽음의 바다'라는 말입니다. 생물들이 살 수 없습니다. 염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37%나 됩니다. 다른 바다보다 약 5배나 높은 염도입니다. 사람이 사해에 누우면 둥둥 뜹니다. 왜 이런 바다가 되었을가요?
이스라엘의 위쪽 갈릴리 호수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요단강을 거쳐 사해에 이릅니다. 그런데 외부로 물은 들어오는데 물이 빠져나가지를 못합니다. 물은 계속 증발되니 염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지요.
사해 주변에는 식물이 자라지 못합니다. 사해에는 물고기가 살지를 못합니다. 당연히 어부가 사해를 떠날 수밖에 없지요. 사해는 황폐한 곳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범죄한 이스라엘이 이러한 사해와 같은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이방나라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 땅은 황폐한 채로 방치됩니다. 건물들은 폐허가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상태를 예레미야 9:11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소망이 없을 것 같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회복과 치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본문 9-12의 말씀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죽었던 바닷물이 살아납니다. 물고기가 살 수 없었던 그곳에 물고기가 심히 많아지는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곳에 다시 어부들이 몰려옵니다. 죽음의 바다가 황금어장으로 바뀝니다. 염분기로 인하여 식물이 살 수 없었던 주변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잘 자랍니다. 얼마나 잘 자라나하면 잎이 시들지를 않습니다. 각종 과일이 일년 내내 풍성하게 열립니다. 그 나무 잎사귀까지 약재료가 됩니다.
죽었던 바다, 아무것도 살 수 없고 자랄 수 없었던 바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회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놀라운 회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회복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이 회복의 은총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암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환자는 예후가 중요합니다. 보통 5년은 지켜보아야 합니다. 5년 동안 아무 이상이 없어야만 계속해서 생존할 수가 있습니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한 사람들도 예후가 안 좋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환자에게 의사는 이렇게 당부를 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마시고, 음식을 이렇게 조심하시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고 적당히 운동을 하셔야 하고..
그러면 이 환자는 의사가 이야기 한 것을 지키려고 10년, 20년 마시고 피워오던 술과 담배를 한순간에 끊습니다. 그렇게 주변에서 술과 담배를 끊으라고 권유했지만 도저히 못 끊었고, 자기가 끊어보려고 수없이 결심했지만 안되었는데 한순간에 끊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왜 끊게 됩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살기위한 몸부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간 돼지고기를 못먹으면 현기증이 나고 손발에 힘이 없어진다는 사람도 의사의 말대로 육식보다는 채식을 하게 되더라고요. 왜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살기 위한 몸부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를 회복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회복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회복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한 우리의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부분에 몸부림을 쳐야 할 것인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중한 병에 걸린 환자는 그 병을 누가 잘 고칠 수 있는가, 즉 그 병에 대한 최고로 권위 있고 실력 있는 의사를 찾습니다. 어느 병원이 그 분야에 최고 전문병원인지를 찾습니다. 그냥 찾는 것이 아니라 간절하게 찾습니다. 그 의사와 그 병원을 찾았으면 모든 것을 다 재쳐놓고 달려갑니다. 이렇게 그 의사와 그 병원을 사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진정으로 회복과 치유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얼마나 사모하셨는가 하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님 자신을 삼킬 정도였습니다.
시편 84:1-5에는 주의 사모하는 그 갈망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오늘 본문 속에는 회복을 위한 보물을 숨겨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보물을 찾아내고 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죽음의 바다를 소생시킨 그 물이 훌러 나온 근원은 어디였습니까? 본문 1절을 보면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점점 많아져서 어디로 들어갑니까? 죽음의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맑은 물이 흘러들어가니 그 바다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복되고 치유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회복의 생수가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죄로 인해 상처 나고 찢겨지고 만신창이가 된 인간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오늘날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복을 원하시는 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모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갈망해야 합니다. 회복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예배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모하는 열심히 어느 정도 있습니까? 교회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선순위가 한참 밀려나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예배에 대한 열심과 열정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것들이 아직까지 더 좋고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암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열심과 열정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의사의 권고를 그 인생의 가장 최고의 것으로, 가장 소중한 것으로 불잡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3절에 '하나님은 참으로 에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찾으십니까? 회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 속에 잠겨야 합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소생시키는 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입니다. 회복시키고 치유하는 물입니다. 이 물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생수를 가르킵니다.
요한복음 7:38-39을 봅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런데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처음에는 발목에 찹니다. 그리고는 무릎에 찹니다. 점점 허리에 차오릅니다. 드디어는 걸어서 건너갈 수 없을 만큼 물이 찹니다. 이 물은 수영을 해야 건너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회복이 되고 치유가 됩니다. 성령을 받되 성령의 은혜가 있구나 하는 정도로 살짝 맛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은혜를 조금만 받아서도 안됩니다. 성령도 맛보고 세상의 즐거움도 맛보고 이래서도 안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내 머리 위로 차서 내가 잠길 정도로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면 마치 물이 내 머리 위로 찬 것처럼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물에 내 몸을 온전히 맡겨야만 헤엄을 치게 되듯이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면 내가 성령께 내 삶을 맡기고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며 성령이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 속에서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라고 로마서 8장 2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적인, 정신적인, 육체적은 모든 연약함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5:18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취하면 그 사람을 술이 지배하듯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령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오직'이란 말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가장 우선적이란 말입니다. 충만을 받으라는 동사는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성령을 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지금 내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받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받으라는 말은 말은 명령형입니다. 받아도 되고 안받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안받으면 불손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이 충요합니다.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엘리사 선지자는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어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몸을 씻는 것은 손발만 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물에 완전히 몸을 담그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까지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몸이 물에 잠기는 것이지요.
일곱 번씩이나 요단강물에 잠겨야 합니다. 얼마나 충만히 잠기는 것일까요? 요단강물에서 일곱 번 몸을 잠그니깐 그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문둥병을 앓았던 나아만, 육체적인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마음의 상처도 얼마나 켰겠어요. 이것이 완전히 회복되고 치유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성경에는 어린아이 피부처럼 회복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회복되어야 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회복을 준비하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거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준비되지 않아 회복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면 이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전을 사모합시다. 예배를 사모합시다. 회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갈망합시다. 성령을 사모합시다. 충만히 사모합시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온전한 회복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깊고 더 풍성하게
이규현 목사
어린 시절에 저희 집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물이 꽤 깊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저희 집에 물을 길으러 많이 왔습니다.
1년에 한 번 우물을 청소했습니다. 우물이 깊어서 우물을 청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물이 얕으면 비가 조금만 와도 빗물이 우물 속에 들어가 물이 흐려집니다. 그리고 가물 때에는 물이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우물이 깊으면 비가 와도 물이 깨끗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물이 솟아납니다.
깊은 우물은 쉽게 마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물어도 사람들이 먹을 수 있습니다. 물이 깊기 때문에 언제나 물이 넘쳐흐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의 환상에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여러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환상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실 때에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일 때에는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상황이 굉장히 절망적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기적이 많이 일어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가로막혀있는 듯합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면, 소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절망을 뛰어넘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환상과 기적이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시대가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에스겔 시대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현실의 상황과 반대되는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있을 때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현실의 상황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은 매우 다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로마 황제의 핍박이 혹독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현실의 삶이 힘들고 미래가 불확실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만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환상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비전(vision)’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비전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은 우리의 꿈과 계획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우리에게 비전으로 주십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야망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꿈입니다. 그런 꿈은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본문과 잘 어울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의 시대는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남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한된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것이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부어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흥분되는 일입니다.
신분, 직분, 나이, 성별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과 한계를 초월하여 성령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환상도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데리고 성전 문으로 가셨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발목에 오르고 나중에는 넘쳐서 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 주변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이 살아나고 울창해져서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리고 그 잎사귀는 약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본문 에스겔 47장 1절에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핵심은 물의 근원입니다.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역사가 어디에서 시작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생명의 근원, 능력의 원천이 어디인가가 중요합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과 능력이 흘러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외적 조건을 많이 봅니다.
교회에 대해 말할 때, 교회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이는가, 교회 건물이 어떠한가, 교회 조직이 얼마나 잘 되어있는가, 교회의 위치가 어떠한가, 교회를 어떻게 홍보하는가, 교회의 시설이 어떠한가,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가 등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세상이 훨씬 더 탁월합니다. 조직, 건물, 시스템 등은 세상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 것을 교회에서 찾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잘 되지 않으면, 방법론적으로 생각합니다. 묘안을 찾기 위해 의논합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해 아래에 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각해야 하는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원천, 능력의 원천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갈보리 언덕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이 있고 시스템이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가입니다. 복음이 역사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사람들이 깨어지고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이 나오는 것이 핵심입니다.
본문 에스겔 47장 2절의 끝부분에 보면,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진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은 미미해보입니다. 그런데 똑똑 떨어지는 물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본문 에스겔 47장 3~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물이 점점 많아져서 물이 발목, 무릎, 허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점점 심화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이 똑똑 떨어졌습니다. 똑똑 떨어지는 물이 점점 많아져서 발목, 무릎, 허리까지 오르고, 나중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의 특징입니다.
처음에는 미미해보입니다. 스며 나오는 물, 똑똑 떨어지는 물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미미해보입니다. 성전의 물은 똑똑 떨어집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거기서 어마어마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저는 사역할 때에 광고를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광고를 많이 하지 않아도, 꼭 필요한 사람들이 와서 은혜 받고 변화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면 역사가 점점 커집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겨자씨가 그렇습니다. 겨자씨는 매우 작습니다. 심으면 자라서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됩니다. 씨는 작지만 자라서 창대한 나무가 됩니다.
씨는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심으면 자라서 나무가 됩니다.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그것이 밭을 이룹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12명의 제자로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는 120명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실 때에는 미미해보였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격이 별났습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이었습니다.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 불릴 정도로 별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도마는 의심을 잘 했습니다. 제자들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120명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사실 120명도 미미한 수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 나온 물이 점점 많아진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5천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셀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한국에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에는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처럼 복음의 역사가 매우 약했습니다. 미미했습니다.
그들이 한국 땅에 영향을 끼치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는 거대했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 처음에는 두 가정이 모여 예배드렸습니다. 호주인의 교회를 빌려 초라하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불어났습니다.
셋집 살이 할 때에 아이를 많이 낳으면 집 주인이 싫어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가 점점 많아지자 호주인들이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우리를 쫓아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립니다. 짧은 시간에 복음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주일마다 사람들이 뒤집어졌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여자 성도들은 화장이 번졌지만, 그래도 그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은 척박한 땅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처럼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점점 커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를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올 때에 수치(數値)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이 발목에 올랐을 때에는 컨트롤할 수 있었습니다. 무릎에 올랐을 때와 허리에 올랐을 때에도 컨트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점점 많아져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컨트롤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점점 더 풍성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면, 사람이 어찌할 수 없습니다.
신앙과 삶은 갈수록 깊어져야 합니다. 심화되어야 합니다. 증폭되어야 합니다. 가속화되어야 합니다.
물이 발목에 오른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이 발목에 오른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물이 무릎에 오른 것, 허리에 오른 것이 끝은 아닙니다. 물이 무릎과 허리에 오른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단계에서는 자아가 얼마든지 작용할 수 있습니다. 더 깊어져야 합니다.
왜 우리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성령 충만하면, 우리가 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힘이 우리의 인격을 뒤집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술에 취한 것 같습니다. 성령 충만과 술에 취한 것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태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의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욱 큰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영적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매너리즘에 빠지면, 현재의 상태에서 멈춰버립니다. 은혜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더 큰 은혜의 세계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마치 다 경험해본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기대를 빨리 포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은혜가 파도치는 교회에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기대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칫하면 친목 단체와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실제로 많습니다. 예수님을 얘기하는 친목 단체와 같은 교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는 예수님이 살아있지 않습니다. 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친목을 도모하는 데만 열심입니다. 사람끼리 모이니 재미는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니 크게 문제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종교놀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자칫하면 그것이 신앙인 줄 압니다.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닐 뿐입니다.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떠난 사람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올바르게 알지 못한 채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환멸을 느끼고 교회를 떠난 사람은 교회를 친목단체와 비슷한 곳으로 인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매우 많습니다.
영적 세계는 경이롭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세계를 넘어선 세계, 우리의 지식세계를 넘어선 세계가 있습니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국립공원은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그곳에 서있으면 입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소름이 돋을 만큼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두 번째 가면 처음만큼 경이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기대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 보기 원합니다.
경험한 사람이 갈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경험한 것이 없는 사람은 갈망이 없습니다. 맛을 본 사람이 기대합니다. 사모함이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은혜의 세계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가 갈망합니다. 그래서 더 큰 은혜를 사모합니다. 은혜를 더욱 간절히 갈망합니다. 물러서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의미합니다.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릴 것을 의미합니다. 형식적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3장에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켰습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나이가 40여 세나 되었습니다(행 4:22). 어쩌면 그는 40년 동안 성전 앞에서 구걸했을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사가 화려하게 드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 앞에 있었지만 성전과는 상관없이 버려져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먹고 살았을 뿐입니다.
그 시대의 성전에서는 생명의 역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순례자들만 끝없이 왔다 갔다 할 뿐이었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사가 끝없이 드려졌지만, 성전 앞에 앉아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자비와 긍휼을 행하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거기서는 생명의 역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을 덧입은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에 압도당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병자를 낫게 한 기적이 일어났음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무기력한 종교, 성전 체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의미가 반복될 뿐입니다. 그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종교적 활동만 반복될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임하시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형식적이고 능력 없는 성전 시대는 끝났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킨 사건은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물이 나온 것이 중요합니다. 그 물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것으로 통해 거대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나온 물이 깊어진 것이 중요합니다. 깊어지지 않으면, 유치한 일이 생깁니다. 인간 본성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자아가 활동합니다.
인간의 자아가 활동하면, 제사장과 백성들이 성전 안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놀고 장사합니다. 이익을 남기려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제사는 있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와 물이 깊어져야 합니다. 은혜의 세계가 깊어져야 합니다.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생수의 발원지
겔 47:1-12, 행 2:1-13, 요 7:37-39 / 인명진 목사 / 갈릴리교회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가 태어난 생일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당신 생일이 언제입니까? 하고 물으면 몇 월 몇 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자기 생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생일은 언제일까요? 물론 우리 교회의 생일은 6월 첫 번째 주일입니다. 제가 질문 드리는 것은 전 세계 교회, 교파를 초월한 세계교회의 생일을 묻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모르더라도 말눈치가 사람은 오늘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전 세계교회의 생일인 성령강림절입니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시작부터 끝까지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말하지 않고는 교회를 말할 수도 없고, 성령을 교회에서 빼버리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시작도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었고, 교회의 운영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리라. 몇 날이 못 되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이 이르자 제자들은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성령의 임재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이 신비한 현상을 사도행전은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았다. 불의 혀처럼 갈라졌다.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다 알아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 임재를 체험한 제자들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갈릴리 촌사람인 제자들을 향해서 “새 술에 취하였다.”고까지 했습니다. 이 신비한 현상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성령이 모든 사람을 압도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었고, 성령은 제도를 뛰어넘었고, 성령은 민족과 언어마저 뛰어넘었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를 바람과 같았다, 불과 같았다, 생수와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성령과 함께 시작된 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결코 환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성령을 상당히 위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인간이 만든 제도와 문화를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는 313년 기독교가 공인 된 이후부터 지난 천칠백 년 동안 끊임없이 제도화 되고, 권력화 되어 갔습니다.
교회가 제도화 되어간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면, 질서가 있는 것이고, 사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부정적으로 보면, 성령의 다스림보다는 사람이 만든 제도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사람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교회가 부패하게 됩니다. 성령은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사람이 만든 제도와 문화와 이기심을 과감하게 뛰어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았고, 새롭게 갱신해 나갔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유대인들이 만들어놓았던 종교의 틀을 뛰어넘었습니다.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인종과 민족도 뛰어넘었습니다. 언어도 뛰어넘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갈라졌던 나라도, 민족도, 언어도 한 순간에 뛰어넘었습니다. 바람을 사람을 통제할 수 없듯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경계의 벽을 성령은 단숨에 무너뜨렸습니다. 언어도 민족도 나라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가족과 혈통과 민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등장했는데 후대 사람들은 이것을 교회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떠난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 갈등과 분쟁, 혼란과 다툼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기주의 틀에 갇혀 끊임없이 차별을 만들어냅니다. 사람은 분열하고 미워하고 갈등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혼잡한 것을 정결하게 하시고, 갈라진 것을 하나로 만듭니다. 성령강림절은 인간중심의 갈등과 분열의 물줄기를 끊고 하나님이 새 세계를 열어 가시기 위해 그 파트너로 교회를 선택하신 날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단순히 복을 받고 자식 잘 되는 차원을 넘어 새 세계를 열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성령과 함께 시작한 교회가 제도화 되어가고, 사람의 목소리에 지배를 받자 교회는 성령을 아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교회가 타락 했을 때 더욱 더 성령을 멸시했습니다. 성령은 사람이 만든 조직을 뒤흔드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건강할 때에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 교회가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건강하지 않을 때에는 사람이 만든 제도 속에 갇혀 버렸습니다. 이때 성령은 사람이 만들어놓은 경계와 차별의 벽을 거침없이 뛰어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항상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또한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는 선교를 할 때에도 항상 성령이 앞장서서 나갔습니다.
1850년대에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공업지역인 북부는 남부의 노동력을 공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예 해방을 찬성 했습니다. 반면에 농업지역인 남부는 소유하고 있는 노예들을 해방시키면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없어질 것 같아 노예 해방을 반대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결국은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쟁과 분열은 교회마저 갈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미국 장로교회가 남 장로교와 북 장로교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때 남 장로교 총회에서 너무도 이상한 결의를 했습니다. “흑인에게는 영혼이 없다.” 지금 우리가 들으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결정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 위해, 신앙의 이름으로 이기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가 이런 결정을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교회가, 그것도 총회가 저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제도화 된 교회의 약점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모습도 교회가 지나치게 제도화 되고, 권력화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서도 안 되고,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뜻을 분별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결국은 남 장로교 총회가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남북전쟁과 교회의 분열로 미국 사회는 큰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이때 일어난 운동이 3차 대각성운동입니다. 미국 사회 전체에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회개와 함께 선교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이 3차 대각성운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나라 선교사로 들어왔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한국선교는 3차 대강성운동의 열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놀라운 것은 흑인에게 영혼이 없다고 결의한 남 장로교회가 우리나라 전라도와 충청도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가장 늦게 한국 선교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북 장로교, 감리교, 호주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여러 교단에서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가장 신실하게 한국을 사랑했고,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한 교단이 남장로교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신사참배를 가장 먼저 반대했고, 미션스쿨이 폐교를 당하더라도 일본 군국주의에 맞서서 온 몸으로 저항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목요일 5.18, 38주년 기념식 전날 한 외국인의 유해가 5.18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이 분은 헌틀리 선교사인데 아마 마지막 남 장로교 선교사일 것 같습니다. 이분은 한국에 오셔서 5.18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계셨는데, 사태가 심각해지자 광주 시민들과 함께 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계엄군의 만행과 살해당한 시민들의 참상을 촬영해 전 세계에 알렸고, 계엄군에 쫓기던 시민들을 숨겨서 보호해 주기도 했습니다. 결국 군부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되었지만 죽어서라도 자신이 사랑했던 한국에 묻히기 원해 유해가 안장된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이 흑인에게 영혼이 없다고 말했던 사람들을 흑인보다 더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조선에 와서 이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게 만든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이기심을 뛰어넘었습니다. 지금도 성령은 교회를 새롭게 하십니다.
구약의 말씀은 성령의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생수처럼 모든 만물을 살리는 생명의 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그발강가 포로수용소에서 예언자로 소명을 입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무너지고, 젊은이와 지식인들은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희망이라고는 파편 한 조각도 발견하지 못하는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상 중에 예루살렘으로 두 번 데려갑니다. 에스겔서는 마치 SF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습니다. 그발강가 포로수용소에 에스겔의 머리채를 잡고 공중으로 끌어올려 예루살렘으로 데려갑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스라엘을 서서히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지성소에 있던 하나님의 영이 성소로 나오고, 성소에 있던 하나님의 영이 성전 동문을 빠져 나와 문지방을 맴돌다가 감람산으로 떠나갔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스겔이 이상 중에 두 번째 예루살렘을 본 장면입니다. 이번에는 떠나간 하나님의 영이 다시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감람산으로 떠나갔던 하나님의 영이 성전 동문으로 들어오고 성전 동문 문지방에서 물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이 물이 성전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온 땅을 흘려 적셔 만물이 되살아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령을 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공익광고에서 “물을 대체체할 수 있는 것은 물 밖에 없습니다.” 했습니다. 물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흐르는 물을 막아서 환경 재앙을 초래하고 있는 4대 강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고 있습니다. 낙동강 하구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찻집에서 녹차 라떼를 주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강에 널린 게 녹조 라떼인데 왜 비싼 돈 주고 주문하느냐고 빗대어 한 말입니다. 녹조가 심해서 물고기가 죽어나가고, 바닥은 펄도 변해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강물은 흘러야 합니다. 깨끗한 물을 많이 흘려보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넘쳐나면 녹조 현상처럼 사람들이 살기가 참 힘들어집니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물을 세상 속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되살릴 구원의 물, 생명의 물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물은 과연 어디서부터 발원하는 것일까요?
에스겔은 한 가지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갈릴리교회의 현관 입구에서 물이 스며 나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큰 일 아닙니까? 지하에 있는 수도 배관이 터졌든지, 하수구가 역류하고 있든지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은 본래 물이 흘러나와야 하는 곳입니다. 이 물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생명과 물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은 물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이 전혀 없어도 40일 정도까지는 버티기도 하지만 물이 없으면 3일을 버티기가 힘듭니다.
한국, 독일, 가나교회가 함께 운영하는 가나 컴퓨터 센터에서는 젊은이들 직업 교육하는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가나에 우물 파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영등포여전도회 연합회와 여러 교회의 후원으로 우물을 파서 생수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영유아 사망률은 우리나라보다 수 십 배가 높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바로 물 때문입니다. 많은 질병이 오염된 물을 먹기 때문에 수인성으로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물을 파서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물은 생명과 건강과 활력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물이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바로 이 이상을 보고서 하나님의 회복을 알아차렸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사람의 목마름을 해결하고 말라 죽어가는 만물을 소생시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전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보았던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정말로 성전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 물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이 생수로 영혼의 목마름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성전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성전입니다.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곧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서 세상을 살리는 물이 흘러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로 세상을 살리는 생수의 발원지입니다. 그런데 생수의 발원지인 교회가 오염되고 타락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근원이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수의 발원지인 교회가 메마른 세상을 향해 생수를 흘려보내지 않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우리 갈릴리교회의 문지방에서 매일 생수가 흘러넘쳐 근원을 새롭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천사가 줄을 잡고 네 차례에 걸쳐 천 척씩 측량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처음 측량하니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습니다. 두 번째 측량하니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습니다. 세 번째 측량하니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측량하니 물이 흘러넘쳐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는 한강이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한강의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입니다. 일전에 TV를 통해서 본 일이 있는데 석회암반 사이에서 용천수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졸졸 흐르는 물이 어떻게 한강이라는 큰 강물을 이룰까?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 모이고 모여서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큰 강물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물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에스겔에게 이 이상을 보여준 것일까요? 그것은 성전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점점 더 성장하고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콸콸 요란하게 흐르지 않아도 됩니다. 조용하게 졸졸 스며들듯이 흘러나와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쉬지 않고 흘러나와야 합니다. 작지만 꾸준히 모이고 모이면 큰 강물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물은 동쪽을 향하여 흘러 아라바를 지나 바다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 바다는 사해를 가리킵니다. 사해는 사실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입니다. 호수임에도 바다라 부르는 것은 사해의 물이 바닷물처럼 짜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의 염도는 약 5 퍼센트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해의 염도는 25%나 된다고 합니다. 염도 때문에 수영하지 않아도 저절로 떠있기 때문에 수영금지 팻말까지 붙어 있습니다.
사해에 물고기를 넣으면 얼마 있지 않아 죽고 맙니다. 물고기뿐만 아니라 사해 근처에는 염분 때문에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질 않습니다.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물고기가 없으니 어부도 없고 마을도 없고 사해 주변은 황량합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죽은 바다의 물이 되살아났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내려 온 물이 죽음의 바다를 치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번성하고 물고기가 많아졌습니다.
죽음의 바다가 생명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 모든 일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곳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상이라고 말할 때는 주로 엉뚱하거나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본 이 환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때에 모두 현실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교회 위에 임하자 환상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생명이 되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소아시아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까지 달려가 생수의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 성령은 교회가 타락하고 오염되었을 때 늘 교회를 새롭게 갱신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은 어디서나 이렇게 죽음의 바다가 되살아나 생명의 바다로 변화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만물을 되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해와 같습니다. 사해처럼 자기에게 다 빨아들이려고 할 뿐 아무 것도 내보내려고 하질 않습니다. 결국은 적폐가 계속 쌓이면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정화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갈릴리교회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이 죽음의 바다, 죽음의 땅에 흐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생수의 발원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강물처럼 흘러넘쳐야 합니다. 그럴 때 가는 곳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전 세계 교회의 생일인 성령강림절에 에스겔이 포로수용소에서 보았던 바로 그 이상이 우리의 꿈과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생수의 발원지가 되는 그 꿈 말입니다. 메마른 땅을 적시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고,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성령이 충만한 역사가 가득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복 시켜 주시는 하나님 사랑
임현수 목사
오늘 본문의 핵심은 물 이야기 입니다. 물은 모든 생물의 생명 근원이 됩니다. 아무리 황막한 사막에도 물이 흐르면 축복된 농토가 되고, 어떤 옥토라도 가뭄 으로 물이 마르면 사막이 되는 것입니다. 물과 생명체는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체는 약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몸은 물 주머니 라고 합니다. 우리 체내는 물을 1∼2%만 잃어도 심한 갈증을 느끼고, 5%정도를 잃으면 거의 혼수상태에 빠지며, 12%를 잃으면 생명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질병 가운데 3분의 1이 수분 불균형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인 것 입니다. 이렇듯 물은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지구 조차도 71%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류 최초 문명의 발생지는 모두 강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일강의 애굽문명, 유브라데스 강의 바벨론 문명, 인더스강의 인도문명, 황하강의 중국문명이 그것들입니다. 한강의 기적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종종 물을 언급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 리라."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강이 되었다고 했는데 실상 예루살렘은 강이 없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강이 흐를 수 없지요. 더구나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그 물이 사막을 통과하고 사해 바다 까지 이르러 마침내 죽은 사해 바다를 살렸다고 하니 이 말씀은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 제단을 한바퀴 돈 다음 그 제단을 통과하여 다시 남쪽으로 흘러갔다고 했는데 여기 성전 문지방은 무엇이며 제단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죽어가는 인류를 살려낼 수 있는 강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예수님 골고다 언덕에서 흘려주신 피의 은총, 보혈의 능력, 그것만이 인류를 살려내는 생수의 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생수 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보혈은 이 역사 한가운데를 힘 있게 흘러가고 있습 니다.
또한 역사를 살릴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낼 수 있는 생수가 무엇입니 까? 성령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생수가 아니고서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이, 성령의 생수가 제단에서부터 흘러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구원의 방주이고, 인간 구원을 위해 만물 위에 세우신 신적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구원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만물을 회복 시키십니다.
성경의 핵심은 회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낙원의 모습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은 다시 찾는 천국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었다가 다시 찾고, 양 한 마리를 잃었다고 다시 찾고, 탕자를 잃었다가 다시 찾고 온통 성경은 다시 찾는 것 즉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온통 회복을 위한 일을 하셨습니다. 영생을 잃어 버린 자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고, 건강을 잃어버린 자들로 건강을 회복하게 하셨으며, 죽음으로 생명을 잃은 자들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회복은 예수님 사역의 중심이요, 복음의 핵심입니다.
기독교는 회복의 종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영생을 제2의 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영생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시킬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의 회복 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 얼마나 크신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시는 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성령님도 우리의 회복을 위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부분에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전 일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왔습니다.
많은 문물을 약탈해 갔고 1만명의 젊은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포로 가운데 25세의 젊은이 에스겔이 함께 갔습니다. 그의 나이 30이 되던 해,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노예생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 다. 용기와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였다면, 아모스가 정의의 선지자였다면, 에스겔은 소망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또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 해 성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예루살렘의 임금 시드기야를 잡아 두 눈을 뽑았습 니다. 그리고 손발을 묶고 말에 매달아 끌고 다녔습니다. 비참하게 끌고 다니다 처참히 죽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제 조국도 없어졌습니다. 돌아갈 땅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 에스겔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니 소망을 선포하던 에스겔의 꼴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러한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말 합니다. 예레미야 9:11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도저히 소망이 없을 것 같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회복과 치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본문 9-12의 말씀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죽었던 바닷물이 살아납니다. 물고기가 살 수 없었던 그곳에 물고기가 심히 많아지는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곳에 다시 어부들이 몰려옵니다. 죽음의 바다가 황금어장으로 바뀝니다. 염분기로 인하여 식물이 살 수 없었던 주변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잘 자랍니다. 얼마나 잘 자라나 하면 잎이 시들지를 않습니다. 각종 과일이 일년 내내 풍성하게 열립니다. 그 나무 잎사귀까지 약재료가 됩니다. 죽었던 바다, 아무것도 살 수 없고 자랄 수 없었던 바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회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놀라운 회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회복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회복의 은총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회복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회복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1.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중한 병에 걸린 환자는 그 병을 누가 잘 고칠 수 있는지 알아보고 그 병에 대해 최고로 권위 있고 실력 있는 의사를 찾습니다. 어느 병원이 그 분야에 최고 전문 병원인지를 찾습니다. 그냥 찾는 것이 아니라 간절하게 찾습니다. 그 의사와 그 병원을 찾았으면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달려갑니다.
이렇게 그 의사와 그 병원을 사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진정으로 회복과 치유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얼마나 사모하셨는가 하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님 자신을 삼킬 정도였습니다.
시편 84:1-5에는 주의 사모하는 그 갈망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 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 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 하리이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죽음의 바다를 소생시킨 그 물이 흘러 나온 근원은 어디였습니까? 본문 1절을 보면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점점 많아져서 어디로 들어갑니까? 죽음의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맑은 물이 흘러 들어가니 그 바다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복되고 치유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회복의 생수가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죄로 인해 상처 나고 찢겨지고 만신창이가 된 인간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오늘날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선포합니다. 말씀을 가르칩니다. 말씀으로 사람들을 치유합니다. 교회는 치유 공동체 입니다. 어거스틴이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연장이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의 입술을 열어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사람, 아픈 사람을 자기의 발걸음으로 찾아 가셨고, 그들의 손을 잡으셨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일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계속될 수가 있습니까? 주님은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자신이 하시던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자신의 몸을 남겨두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의 교회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시던 그 일을 그대로 계속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가 주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하시던 그 일을 그대로 계속할 수 있다면 동일한 복음, 변함없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gospel)을 증거하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또 하나 주님이 하셨던 그일 그대로 불쌍하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역을 계속할 수 있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 대답을 성경에서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나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약5:14
어느 날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교회 의 지도자로 부르셨다면, 치유의 은사와 상관없이 교회는 치유의 공동체이고 치유의 책임이 있다면 교회의 리더인 나에게 하나님께서 치유의 권세를 맡기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놀라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습 니다. “교회 지도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목사,장로,목자의 믿음중요!!!
문제는 교회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은사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중보기도의 사역이 자리를 잡는다면 교회의 검증과 교회 지도자의 감독 아래서 이러한 은사 있는 사람들의 은사가 가장 효과적으로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약 5:15)
복음서에 기록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사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어떤 질문을 던지셨습니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리고 그 여인을 향하여 어떻게 선포하셨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 니라.” 이 여인은 자기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정말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것입니다. 그 순간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 있던 놀라운 신성의 능력이 흘러 들어가 이 여인은 고쳤다고 믿습니다. 저는 믿음의 기도는 지금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고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영적 지도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치유하시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이 타인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믿음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네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치신 사건을 기억 하실 것 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왕의 신하의 아들은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대목이 왜 중요합니까?
자, 우리 주변의 다른 성도들이 아파 고통받고 있습니다. 본인이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기력조차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기도해 줄 수 있습니까? 그를 사랑하는, 걱정 하는 주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주변의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 조직적으로 날마다 기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교회 내에서 중보기도 사역이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든지 내가 아플 때 전화 한 통만 하면, 기도 제목을 접수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아니, 때로는 본인이 기도할 기력조차 느끼지 못할 때 주변 사람들이 그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그런 이유 때문에 주님이 중보기도의 사역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치유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8~20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이지만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너희 가운데 나의 임재를 베풀겠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임재를 ‘아주 특별한 임재’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임재, 그리고 특별한 기도의 응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세 사람은 그냥 어쩌다 모인 두세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것은 ‘교회’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가 성전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둔 아버지에게 아들이 와서 “아빠, 이거 들어주세요.” 하면 자식을 사랑하니까 들어주겠만, 아들이 다섯이 있는데 아들들이 단체로 와서 “아빠 우리가 합의했는데요, 이건 꼭 들어줘야겠어요.” 하고 다섯 명이 만장일치로 합의가 되어서 아빠한테 어떤 문제를 제출하는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교회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저는 거기에 특별한 약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기도 제목이든지 교회에 내면 응답돼!” 이런 소문들이 교회에 돌기 시작하면 교회 기도 운동이 어떻게 전개될까요? 한번 상상해 보셨습니까? “야, 너 기도실에 기도 제목 내봐. 응답돼. 나도 응답 받았거든…….” 이런 소문들이 퍼지면 교회 안에 무서운 기도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기도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려면 언제라도 교회 안에 자기의 기도 제목을 낼 때에 그 기도 제목을 가지고 비판하지 않는다. 험담처럼 루머로 퍼지지 않는다는 보장 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시키는게 아닙니다. 훈련을 받고 전교인 앞에 서약을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부흥 될 때는 바로 이 기도가 살아 있을 때입니다…..(목적 40일 새벽기도 응답!! 원단 금식기도 응답!!)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복을 원하시는 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성전)를 사모해야 합니다.
2. 예배를 갈망해야 합니다.
회복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예배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모하는 열심히 어느 정도 있습니까?
교회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선순위가 한참 밀려나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예배에 대한 열심과 열정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것들이 아직까지 더 좋고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암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열심과 열정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의사의 권고를 그 인생의 가장 최고의 것으로, 가장 소중한 것으로 불잡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3절에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 니다. 왜 찾으십니까? 회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3.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소생시키는 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입니다. 회복시키고 치유하는 물입니다. 이 물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생수를 가르킵니다.
요한복음 7:38-39을 봅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런데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처음에는 발목에 찹니다. 그리고는 무릎에 찹니다. 점점 허리에 차오릅니다. 드디어는 걸어서 건너갈 수 없을 만큼 물이 찹니다. 이 물은 수영을 해야 건너갈 수가 있습니다.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 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5절)
가슴이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의 연조만 깊어지다 보면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자칫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상이지요. 습관에는 원래 감격이 없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빨을 닦으면서 아~ 이빨이 닦여진다. 은혜가 된다. 그리고 아침에 세수하면서 아~ 세수하는구나. 눈물이 핑돌면서 감격스럽다. 그러면서 세수하시는 분 계십니까? 빨리 헤치우는 겁니다. 예배 한시간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을 하더래도, 찬송 한번을 하더래도 습관적으로 부르는 사람은 감격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회복이 되고 치유가 됩니다. 성령을 받되 성령의 은혜가 있구나 하는 정도로 살짝 맛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은혜를 조금만 받아서도 안됩니다. 성령도 맛보고 세상의 즐거움도 맛보고 이래서도 안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내 머리 위로 차서 내가 잠길 정도로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면 마치 물이 내 머리 위로 찬 것처럼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면 내가 성령께 내 삶을 맡기고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며 성령이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 속에서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라고 로마서 8장 26-2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적인, 정신적인, 육체적은 모든 연약함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5:18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면 그 사람을 술이 지배하듯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령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오직'이란 말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가장 우선적이란 말입니다. 충만을 받으라는 동사는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성령을 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지금 내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받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받으라는 말은 말은 명령형입니다. 받아도 되고 안받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안받으면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 에게 엘리사 선지자는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어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몸을 씻는 것은 손발만 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물에 완전히 몸을 담그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까지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몸이 물에 잠기는 것이지요.
일곱 번씩이나 요단강 물에 잠겨야 합니다. 얼마나 충만히 잠기는 것일까요? 요단강물에서 일곱 번 몸을 잠그니깐 그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문둥병을 앓았던 나아만, 육체적인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마음의 상처도 얼마나 켰겠어요. 이것이 완전히 회복되고 치유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성경에는 어린아이 피부처럼 회복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차 올 천년왕국 시대나 천국의 보좌에서만 생명강수가 넘쳐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이 충만하면 생수가 넘쳐나 영혼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며 생명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보좌를 배설하고 제일 먼저 인생에게 주는 것이 생수의 강물 아닙니까?
보좌에서 넘쳐나 생수의 강물이 길 가운데로 흐르니 양 강 주위에는 무성한 나무가 우거지고 물이 소생하게 되고 치료받고 물고기가 넘쳐나고 아주 좋은 일이 생수의 강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구약에도 그렇고 신약에도 요한이 보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이 아름다웠는데 그 보좌에서 생수가 흘러나와서 똑같이 나무가 무성하고 열매가 많고 물고기가 많고 다 치료받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은 이러한 보좌가 너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회복되어야 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회복을 준비하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거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준비되지 않아 회복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면 이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예배를 사모하고, 회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사모하시되 성령 충만한 삶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온전한 회복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