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26(2)]매천 황현의 신교(神交)
‘매천 황현’하면 동생, 친구, 스승 등의 이야기도 꼭 알아야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명한 절명시(絶命詩) 4수중 3번째 시일 터. 3首의 전문. <鳥獸哀鳴海岳嚬 / 槿花世界已沉淪 / 秋燈渰卷懷千古 / 難作人間識字人>. 어려운 한자라야 찡그릴 빈(嚬), 빠질 침(沉), 덮을 엄(渰) 정도. 뜻은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가을 등불 아해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이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이 있듯, 배운 것이 ‘죄’이어서 지식인으로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이유가 『매천집』에 실려 있는데, 한번 뼈아프게 읽어보자.
“내가 가히 죽어 의(義)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으나, 국가에서 선비를 키워온 지 5백년에 나라가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라고 쓰여 있다. 보라. 일평생(55세까지) 글공부한 선비의 유서답지 않는가. 어떤 의미로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선비는 오늘날 지식인 또는 지성인을 말한다.
아아, 끝구절에 와서는 2009년 어느 봄날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너무 슬퍼하지 마라/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미안해 하지 마라/누구도 원망하지 마라/운명이다>. 부엉이바위 위에서 몸을 던진 전직 대통령의 짧고 명료한 유서의 구절이 생각나지 아니한가. 매천은 ‘동쪽 디딜방아 아래 전답 3마지기를 동생(황원)에게 나누어 주라’는 애뜻한 글을 남기고, 한말(韓末)의 ‘마지막 선비’답게 그렇게 순절(殉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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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김택영-황현 3인의 ‘神交’
이제 매천이 1880년부터 신교(神交. 서로의 시문이나 글씨를 통해 상대의 고결한 정신을 알아보며 마음으로 나누는 우정)를 나눈 한말 3인방, 즉 영재(潁齋) 이건창(李建昌. 강화도 출신.1852-1898),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개성 출신. 1850-1927)과의 우정에 대해 알아보자.
이건창은 1852년 강화도에서 태어난 전주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조부는 병인양요때 순절한 이시원. 양명학을 계승했다. 5세때 시문을 지은 천재 문장가로 15세에 별시문과 급제, 19세에 홍문관직을 시작으로 한성부 소윤 등을 역임하며 청백리 암행어사로 이름을 떨쳤다. 23세때 외교사절단으로 북경에서 문명을 떨쳤고, 창강 매천과 신교를 가졌다. 갑오경장 이후 고향 강화도로 낙향, 『당의통략』(黨議通略. 붕당정치의 폐해를 객관적이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정리)을 저술했으며, 문집 『명미당집』이 있다. 47세에 병으로 숨지는데, 마지막까지 "매천을 보고 싶다”고 했다한다.
김택영은 1850년 개성에서 태어나 일찍이 시와 문장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7세에 성균초시에 합격, 20대 무렵부터 이건창 황현과 교유해 문명을 크게 떨쳤다. 42세에 벼슬길에 올라 역사문서와 기록을 다루는 일을 주로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가가 망했으나 역사와 문화마저 끊기게 둘 수 없다”며 중국 친구 장건의 도움으로 망명, 상해 출판사(한묵림인서국)에서 일하며, 우리 역사와 문학을 저술하거나 출판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다. 『매천집 』 도 그가 아니었으면 나올 수 없었다. 친구의 유작을 손수 교정하여 펴냈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를 간행, 우리 한문학의 정수를 보존했다.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소복을 입고 사흘간 통곡했다는 불멸의 애국지사, 문장보국(文章報國)한 공로로,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친구 황매천의 문집을 내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이건창이 숨졌을 때에도 행장과 묘지명을 기록했던 진정한 ‘신교 3인방’이었다.
일제강점기 평화주의자 함석헌 선생이 김교신 등과 교유하며, 진정한 친구 3명만 있어도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각오의 우정론을 피력한 것이 생각났다. 투옥중인 함선생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절친 김교신이 맏상주 노릇을 한 실례처럼, 실제로 함선생은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는 명시를 남기기도 했다.
나이로는 매천이 창강보다 5살, 영재보다 3살 아래였으나, 시골벽지 구례에서 만권을 읽은 후, 시문에 능한 매천이 두 천재를 상봉하고자 상경하여 죽는 순간까지 사귐을 유지했다는 것은, 오늘날 경박한 우정들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나게 교훈적이지 않은가. 동생 황원이 “(형이) 평생에 글로 사귐에 있어 영재와 창강 두 사람을 으뜸으로 쳤으나 영재와 더 자별했다. 꿈에서도 만나는 시간이 수십 년이었다”고 기록했다. ‘구한말 3대 문장가’로 꼽히기도 한 이 3인중 이건창은 ‘조선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의 별세소식에 매천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愕然下涕) 졸기를 썼으며, 창강은 그의 문집 『명미당집』(20권 8책)을 중국에서 간행했다. 그의 사후 친동생 이건승과도 친형제처럼 교유했고, 매천 사후 동생들끼리도 잘 지냈으니, 이런 두 집 형제들의 우정은 결코 흔치 않을 일일 듯하다.
아무튼, 창강과 매천의 우정은 1880년 처음 만나 서로의 비범함을 알아본 이래 30년간 이어졌는데, 무슨 일이든 불가분의 관계였으니,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고매한 우정'이라 할 것이다. 매천이 1900년 연말에 잊지 못할 20명의 벗들을 그리워하며 쓴 시가 있는데, 첫 번째가 단연 창강이었다. 오죽하면 창강이 중국으로 같이 망명을 가자고 했을 것인가. 서로 만나고자 한 천리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기도 했지만, 꾸준히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 추사 김정희와 중국 옹방강의 교유와 다름없었다. 매천의 순절 소식을 들은 창강은 친구를 위한 제문을 지었는데 “오호라, 자고이래 뜻있는 장부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할 경우에 죽어 인생을 헛되이 지낸 자가 있는데, 이제 형은 죽어야 할 경우에 죽었다”고 했을 것인가.
<경남일보>는 1909년 경남 진주에서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인데, 매천이 순절한 소식을 들은 주필 장지연(1864-1921)이 1910년 10월 11일자에 매천의 절명시 4수와 추모의 글을 실었다. 일제는 항일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정간처분을 내렸으나, 신문과 동생 황원의 노력으로 순절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만해 한용운도 <義로써 조용히 나라의 은혜를 갚으려고 한 번 죽자 만고에 겁의 꽃이 새로워라>라는 만시(輓詩)를 남겼으며, 156인이 쓴 애사(哀辭)와 39인의 제문이 현재도 전해지고 있다. 어디 이게 일과성으로 잊혀질 보통의 사건이었겠는가. 항일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을. 매천의 장례는 순절 후 73일인 양력 11월 21일에 치러졌으며, 추후 고향인 광양 할아버지 묘 밑으로 옮겨졌다. 면암 최익현과 함께한 의병장 임병찬은 몸이 아파 직접 문상은 못하고 혼자 제사를 지내며 동생 황원에게 제문을 지어 보냈다.
경술국치 이후 많은 분들의 순절이 있었으나, 유독 매천의 순절이 역사 속에서 크게 부각되는 이유는 동생 등의 ‘진실된 기록’이 있고, 매천이 자신의 치열한 삶을 수많은 시와 글로 남겼으며, 친구 창강이 중국에서 문집을 펴내 배포했기 때문일 터. <기억과 기록의 차이는 천지차이>라는 나의 지론인 ‘명제’가 새삼 떠오르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