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感情의 거리]
명동 어떤 그릴에서 오찬을 하고 김석호는 대단히 바쁘다는 말과 함께 일한 무역으로 먼저 돌아갔다.
영훈과 연숙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김석호가 옆에 있을 때는 뭐라고 적당히 대화를 이어 가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 김석호가 훌쩍 사라져 버리기가 바쁘게 둘이는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연숙은 말끄럼이 벽에 걸린 풍경화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고 영훈은 쇼오·윈도오 너머로 한길을 묵묵히 내다보고 있었다. 둘이는 오랜 동안 그러고 앉아 있었다.
『불쾌하시나봐요, 얼굴 표정이……』
풍경화를 쳐다보는 그대로의 자세로 혼잣말처럼 연숙은 외웠다.
영훈은 시선을 돌렸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풍경화를 쳐다보면서 연숙의 얼굴이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불쾌하실거야요. 보기 싫은 사람이 자꾸만 접근해 와서……』
『…………』
『아주 냉혹하던데요. 성실을 위해서는 거지에게 동냥 한 푼도 안 줘야 하는가 보죠!』
『…………』
『정말로 제가 싫어졌다면 하는 수 없어요. 그렇지만 영훈씨의 눈동자를 보면 그렇지도 않는 것 같던데……내가 잘못 보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요.』
『나갑시다.』
들었던 찻잔을 영훈은 놓았다.
『사장의 의사를 무시하고 혼자 나가세요?』
영훈은 웃었다.
『얼마나 잘난 사원인지는 모르지만 사장의 말에는 대답 한 번도 없지요. 건방진 사원이야요.』
『백사장, 인제 그만하시고 일어서지요.』
영훈도 종시 농담조를 썼다. 그렇게 해서 밖에는 받아 넘길 도리가 없는 연숙의 푸념이었다. 일단 그렇게 해 받아 넘겨 보니, 자기의 완고한 감정이 숨길을 펴는 것 같아서 괴롭던 마음속이 다소 가벼워졌다.
『인제부터 사장을 잘 모셔야 해요.』
방글방글 웃고 있던 연숙의 얼굴이 웃음을 후딱 걷우면서 하는 말이다.
『잘 모시겠습니다.』
『사장의 말에는 절대 복종을 해야만 해요.』
『네 하지요.』
『복종을 안 하면 재미없을 거야요.』
『목이 잘리웁니까?』
『목이 문제가 아니죠.』
『그럼 뭐가 문젠가요?』
그러나 연숙은 거기는 대답을 하지 않고
『샹하이·양재점이라죠?』
했다.
『뭐가요?』
너무 돌연한 질문에 영훈은 어리둥절 했다.
『샹하이·양재점에 취직을 하고 있다죠?』
『…………』
말귀를 그제서야 알아보고
『그런 건 다 어떻게……?』
『다 알고 있지요. 총명하다죠?……』
『…………』
『귀엽게 생겼다죠?……』
『…………』
『이름이 뭐야요?』
『한은주 ──』
『본시는 「신여인」사의 여기자였다죠?』
『그렇소.』
『그처럼 총명하고 유능한 기자라면 도루 우리 사로 모셔 오는 게 어때요?』
이미 연숙의 이야기는 농담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일종의 도전(挑戰)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처녀들처럼 단순하지 않은 연숙의 삼십 대가 일종의 협위를 지니고 영훈을 압박해 왔다.
『그이를 불러오면 제가 특별 대우를 하겠어요. 영훈씨 편에서도 매일 찾아다니는 수고가 덜어질테니 편할 게 아냐요?』
은주의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순간, 불안과 초조로서 새운 어제 하루밤을 영훈은 불현듯 생각하며 훌쩍 몸을 일으키었다.
『나가요.』
연숙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섰다.
그릴을 나온 두 사람은 명동 입구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후 두 시, 번잡한 가두 풍경이 영훈의 심정처럼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연숙에게서 받는 유혹과 은주에 대한 불안이 파도처럼 덧두겨지며 밀려왔다. 안정된 심정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영훈은 꿈결처럼 허둥지둥 걸었다.
빨리 사로 돌아가서 샹하이·양재점에 전화를 걸어 봐야겠다고, 그것만을 골돌히 생각하며 명동 입구로 빠져나와 오른편으로 커어브를 해서 서너걸음 걸어가는데 은주의 그리인 색 투·피스가 또박또박 눈앞으로 닥아왔다.
『아, 은주!』
영훈은 후딱 걸음을 멈추며 닥아오는 은주를 불렀다.
은주의 표정이 다소의 놀람을 지니고 영훈과 나란히 걸어오고 있던 연숙의 모습을 핼끔 붙잡았다. 두 여인의 시선이 무섭게 부딪치다가 홱 떨어지며 군중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제 집에 갔었는데……』
그러나 은주는 대답 대신 가벼운 조소의 눈초리로 영훈을 말똥말똥 쳐다만 보고 있었다.
『양재점엔 왜 결근을 했소?』
『…………』
『오늘은 나갔었소?』
『…………』
자기의 불안이 마침내 현실화한 것이라고, 영훈은 불길한 예감을 앞질러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 무척 귀여운 분이예요. 한은주씨죠?』
연숙의 얼굴이 영훈의 폭넓은 어깨 옆에서 화려하게 꽃 피는 순간, 은주는 홱 고개를 돌리며 영훈의 옆을 지나쳐 또박또박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호호호……암만 봐두 총명한 아가씨야!』
연숙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은주의 뒤를 따라 은방울처럼 굴러갔다.
『아, 은주! 은주!』
영훈은 은주를 따라 군중 속을 헤엄쳐 갔다.
은주가 뛴다. 영훈도 뛰었다.
『아, 은주! 잠간만……』
한길 한복판으로 은주는 무턱대고 뛰었다.
『아, 위험!』
달리던 자동차 하나가 크락숀 소리와 함께 급정거를 했다.
『죽어두 좋아?……』
운전수의 목소리가 발악을 하듯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은주의 자태는 물밀듯이 폭주하는 차도를 사슴처럼 깡충깡충 건너 가는데 성공하였다. 교통순경이 뭐라고 소리 소리를 질렀다.
『은주, 잠간만 기다려요!』
떠나려는 택시 안에 영훈은 우뚝 막아섰다. 일단 움직이었던 택시가 그 자리에서 다시 섰다.
영훈은 닥아가서 택시 문을 열려고 했으나 은주는 안으로부터 고리를 비틀어 잡고 좀처럼 열어 주지를 않는다.
『빨리 떠나요!
빽하고 은주는 소리를 쳤다.
『위험합니다.』
운전수는 떠나 주지 않는다.
영훈은 하는 수 없이 조수대에 올라탔다.
『떠나도 좋소!』
영훈은 운전수에게 발차를 명령했다.
차가 움직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은주는 차에서 뛰어 내려 을지로를 향하여 또 달리기 시작하였다.
『미안하오.』
영훈도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면서 백환 한 장을 운전수에게 쥐어 주었다.
『이 양반들 술래잡기를 하는 모양인가?……』
운전수는 멍하니 핸들을 잡고 앉아 있었다.
을지로 네거리에서 영훈은 마침내 은주를 붙드는 데 성공하였다.
『은주, 이야기가 있소!』
은주의 숨결이 할딱할딱 높다. 둘이는 잠자코 네길 얼음을 건너 「신여인」사 앞을 그대로 지나 종로로 걸어갔다.
인제 은주는 뛰지 않았다. 숨결이 차차 가시고 은주의 표정이 여니 때처럼 태연해 졌다.
『여기 좀 들어가요.』
광교 다리 근처에 와서 영훈은 은주의 팔을 다방 안으로 잡아끌었다. 순순히 은주는 끌리어 들어갔다.
구석진 복스에 둘이는 마주 앉았다. 그러나 은주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다. 죽어라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새침한 얼굴이 무섭게 차다.
『은주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를 오해하고 있는 거요.』
그러나 은주는 레코오드에 귀를 가만히 기우리고 있다. 홍차가 왔으나 은주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오해라는 것처럼 우리에게 해로운 것은 없는 것이오. 은주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충분히 풀어 줄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은주는 표정 하나 까딱없이 손을 들어 레지에게 신호를 하면서
『미안하지만 무슨 유쾌한 경음악 하나 틀어 주세요.』
했다.
『은주, 내 말 좀 들어요.』
『경음악이 적당한 것이 없으면 바이올린 콘첼트 같은 것도 좋아요.』
『이거 봐요, 은주!』
『그렇지만 그런 게 없으면 피아노 독주 같은 것도 무방해요.』
이윽고 경음악이 흘러나왔다.
영훈은 마침내 발언을 중지하였다.
은주는 가만히 귀를 기우리고 구두 끝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이 다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까지 은주는 영훈의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