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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히잡’ 가능하지만… 시위 동력 떨어지면 강경파 득세 우려
이란 ‘히잡 의문사’로 촉발된 反정부 시위 반년
거리 곳곳에 ‘포니테일’ 머리 여성… 악명 높은 ‘도덕 경찰’ 단속 위축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겉으론 유화… “히잡 제대로 안 써도 우리 딸들”
여학생만 노린 ‘독가스 테러’ 확산… 사법부 수장 “노 히잡 처벌” 경고
《‘히잡 시위’ 6개월, 이란은…‘노 히잡’ 여성들이 이란 거리를 누비고 있다. 동시에 반(反)정부 시위대에 대한 공개 처형, 여학생을 노린 ‘독가스 테러’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9월 ‘히잡 의문사’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 이후 6개월, 이란 사회를 살펴봤다.》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의 도심에서 시민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다. 대다수 여성은 히잡을 착용했지만 일부는 쓰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 ‘히잡 의문사’를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가 발발한 후 히잡을 강제 착용하는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테헤란=AP뉴시스
“히잡 강제 착용 시대는 끝났어요.”
이란 북서부 사난다지에 사는 여대생 키미아 씨(23)는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히잡을 쓰고 다니지 않은 지 몇 개월이 됐다. 심지어 갖고 다니지도 않는다”며 “남자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 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쿠르드족이 많은 사난다지는 지난해 9월 16일 히잡을 느슨하게 썼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의문사한 22세 쿠르드족 여성 마사 아미니의 죽음 이후 반정부 시위가 잦은 곳으로 꼽힌다.
여성 억압의 상징 ‘히잡 의문사’가 촉발한 반정부 시위가 발발한 지 반년이 지났다. 키미아 씨의 발언처럼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분위기는 많이 완화됐다. 수도 테헤란 등 곳곳의 도심과 대학 캠퍼스에는 히잡 대신 머리를 묶은 ‘포니테일’ 스타일의 여성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다. 무자비한 히잡 단속으로 악명이 높았던 이른바 ‘도덕 경찰’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정일치 국가 이란의 억압적인 사회 체계는 바뀐 게 없으며 실질적인 변화 또한 요원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 전역의 여학교에서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젊은 여성을 겨냥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벌인 것으로 추정되는 ‘독가스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반정부 인사와 인권운동가 또한 “당국이 언제든 히잡을 다시 강제 착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지 않아도 서방 제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란 경제 또한 더 큰 위기에 처했다. 리알화 가치는 시위 반년 만에 반 토막으로 떨어졌다. 고실업과 고물가 또한 여전하다. 세계은행(WB)은 지난해와 올해 이란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모두 2%대에 불과해 주요 석유 수출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 공개 처형에 독가스 테러까지
아미니는 도덕 경찰에 체포된 후 사흘 만에 감옥에서 숨졌다. 경찰은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주장했지만 “경찰이 진압봉으로 아미니의 머리를 때렸다”는 증언이 속속 등장하면서 전국에서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아미니 사망 직후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17세 여학생 니카 샤카라미가 변사체로 발견되고 당국이 군경을 동원해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한 것도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이로 인해 반년간 최소 530명 넘게 숨지고 1만9700명이 구금됐다. 당국은 시위대를 지지하거나 당국을 비판한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유명 여배우, 축구 선수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세계 각국에서 이란 당국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고 마리옹 코티야르, 쥘리에트 비노슈 등 서구 유명 여배우가 “시위대와 연대하겠다”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동영상을 올려도 개의치 않았다.
당국은 지난해 12월 시위에 참여한 20대 남성을 잇달아 사형하면서 전 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겼다. 23세 남성 마지드레자 라나바르드는 “신과 전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시아파 성지 마슈하드에서 공개 교수형을 당했다. 당국은 손과 발이 묶인 채 건설 크레인에 매달린 그의 처형 사진까지 공개했다. 강경 진압을 멈추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반정부 시위에 대한 보복 행위로 추정되는 여학생 대상 ‘독가스 테러’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또 다른 시아파 성지 쿰에서 처음 공격이 발생했고 지금까지 230곳이 넘는 학교에서 최소 5000명 이상의 학생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지난달 28일에는 테헤란 인근 여학교에서 37명의 여학생이 호흡곤란 증세로 집단 입원했다. 당국은 당초 “난방 설비 노후화로 인한 단순 사고”라고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 사태가 학부모들의 시위로 번질 조짐이 보이자 뒤늦게 진상 조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 하메네이도 겉으론 유화책
히잡 착용 등 이슬람 풍속 단속을 전담했던 도덕 경찰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긴 했다. 이들은 예전부터 체포 및 구금 권한을 남용해 길에서 여성을 구타하거나 납치하듯 연행하는 마구잡이식 단속으로 악명이 높았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악마”라고 부를 정도로 서구에 적대적이었던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전 대통령 시절 특히 위세를 떨쳤다.
온건파인 하산 로하니 전 대통령 시절에는 이들의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2021년 보수 이슬람 학자 출신의 강경파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들이 즐겨 타는 초록색 줄무늬의 승합차는 이란 여성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12월 모마하드 자파드 몬타제리 검찰총장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도덕 경찰을 폐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강경파를 중심으로 “총장이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반박이 이어졌다. 최고권력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직접 폐지를 거론하기 전까지는 검찰총장의 발언이라 해도 믿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다만 미 워싱턴포스트(WP)는 “도덕 경찰을 폐지했는지에 대한 혼란과 모호함은 여전하지만 길거리에서 이들을 보기가 어려워졌다”며 규모와 활동 범위가 대폭 축소된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하메네이 또한 겉으로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올 1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아도 우리의 딸들”이라며 과거처럼 히잡 착용을 엄격히 단속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 지난달 5일 반정부 시위대를 포함한 수감자 수만 명을 사면했다. 이달 6일에도 약 8만 명을 풀어줬다. 여학생 대상 독가스 테러에 대한 엄중한 조사도 천명했다.
● 경제난-외교 고립 심화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당국이 최근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민심 이반과 외교적 고립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유엔 산하 여성지위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이란을 여성지위위원회에서 제명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또한 각종 제재를 쏟아내며 이란을 압박하고 있다. 특히 ‘정부 위의 정부’로 불리는 이란 최고조직 ‘혁명수비대’ 관계자들에 대한 제재 또한 속속 가했다.
경제 위기도 심각하다. 이란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보고하지 않은 핵시설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2002년 이후 20년 넘게 서방의 제재를 받아왔다. 이로 인해 고물가, 고실업, 화폐가치 하락 등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이 와중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덮쳤고, 전염병 후폭풍이 가시기도 전에 반년 동안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면서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시위대와 당국의 물리적 충돌은 그렇지 않아도 낙후된 도로, 건물 등 각종 인프라를 더 훼손했다. 인터넷 접속 차단에 따른 손해액만 3800만 달러(약 459억 원)에 달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혁명수비대가 직접 운영하거나 후원하는 기업의 제품을 향한 불매 운동도 끊이지 않아 경제의 근간인 내수 또한 얼어붙었다.
최근 세계은행은 반정부 시위 여파 등으로 2022년 이란의 GDP 증가율 전망치를 3.7%에서 2.9%로 낮췄다. 올해 성장률은 2.2%로 제시했다. 이는 주요 석유 수출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해 12월 기준 인플레이션이 48%로 1995년 이후 27년 최고치라고 전했다.
반정부 시위 이전 달러당 31만 리알대였던 리알화 가치 또한 최근 60만 리알대가 됐다. 6일 NYT는 리알화 가치 급락으로 곳곳의 환전소에서 달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전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시위 한 달째인 지난해 10월 기준으로만 시위에 따른 직간접적 경제 피해가 240억 달러(약 31조2000억 원)라고 분석했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흐른 지금은 이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확실시된다.
● 러 지원으로 서방과 관계 악화
계속된 반정부 시위와 당국의 탄압은 그렇지 않아도 타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란 핵협상 복원 논의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와중에 이란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무인기(드론), 탄약 등 각종 무기를 계속 공급하는 점도 서방과의 관계 악화를 부추기고 있다.
8일 영국 스카이뉴스는 이란이 올 1월 일반 화물선 2척을 이용해 러시아군에 총알, 로켓, 박격포 포탄 등을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또한 대가로 현금을 지급해 국제사회의 대이란 제재를 위반했다고 전했다. 그간 이란이 러시아군에 드론을 지원했다는 보도는 많았지만 구체적인 탄약 지원 정황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전쟁 장기화로 탄약 등 각종 군수품 보급에 차질을 빚고 있는 러시아가 이란을 후방 기지로 이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방과의 관계 악화, 시위 장기화 등이 되레 강경파의 득세에 힘을 실어주는 일종의 악순환도 나타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위 발생 직후에는 공개석상에 등장하는 것을 자제했던 하메네이가 최근 공개 행보를 늘리고 있다고 전했다. 미 외교매체 포린어페어스(FA) 또한 반정부 시위가 정권 퇴진 운동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면서 하메네이, 라이시 대통령 등 지도부 또한 강경파에 더 기대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대법원장 역할을 맡고 있는 사법부 수장 골람호세인 모세니에제이가 6일 “히잡을 반대하는 행위는 이슬람 가치에 반하는 반국가 행위”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겠다”고 경고한 것 또한 강경파 득세의 증거로 풀이된다. 시민단체와 인권운동가들은 반정부 시위가 발발하면 잠시 유화책을 내놓는 듯하다 시위가 소강 상태를 보이면 다시 인권을 옥죄는 과거의 행태가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전 이란을 통치했던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왕자 레자 팔레비는 최근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시민 혁명(반정부 시위)이 운명의 순간을 맞았다”고 평했다. 서방 주요국 정부가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제공하면 시위대가 힘을 얻겠지만 방관하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과거보다 더 거센 탄압을 가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무슬림 여성 최초로 200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유명 여성 인권 운동가 시린 에바디는 지난달 10일 미 워싱턴 조지타운대 강연에서 “우리가 연합하지 않아 이슬람 정권이 44년 동안 살아남았다”며 시민사회의 연대를 주문했다. 변호사 겸 인권 운동가 나스린 소투데 또한 미 CNN에 “시위의 불길이 죽었다고 해서 여론의 분노가 가라앉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정권교체를 원한다”며 시위를 계속할 뜻을 분명히 했다.
카이로=강성휘 특파원, 이채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