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25,13-21; 요한 21,15-19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의 공통 주제는 심판 혹은 재판입니다. 죄의 유무를 가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 상이나 벌을 받는 자리가 심판정 또는 재판정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화의 배경과 소재가 된 사건은 예수님께서 대사제 카야파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배반이었지만, 사실 내용상으로 보면 이보다 더 이전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던 질문에 부실하게 대답했던 최초의 신앙고백을 보완하여 제대로 된 신앙을 고백받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면하기 위해 그 자리를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심판 성격의 대화는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신앙 고백으로 수제자로서 베드로를 여전히 신임하고 계심을 나머지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마련된 자리인 것입니다. 독서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오로가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면서 로마법에 의한 정식 재판을 황제에게 항소함으로써 바야흐로 복음선포의 무대가 제국의 변방에서부터 제국의 수도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바오로는 유다인들 사이에서 여론 재판을 받는 불리한 처지에서 벗어나서 로마인들이 행해 온 다신교 숭배 풍습 내지 황제 신격화 및 황제상 경배와 바오로의 그리스도 신앙 내지 부활 신앙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혹은 그른지를 판결받는 것으로 재판의 성격을 바꾸었습니다.
베드로가 저지른 죄란 그가 스승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가셔서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에 그 자리를 얼쩡거리다가 주변 사람들의 눈에 띄어 추궁을 당하자 얼떨결에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배신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고, 바오로가 고소를 당한 죄목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자렛 예수가 살아났다고 주장한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자신을 일부러 찾아오신 예수님께로부터 단독 심판을 받았고 바오로는 로마제국의 한복판에서 공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받은 심판은 신앙에 관한 사랑의 심판이요, 바오로가 받은 재판은 부활에 관한 종교사항 재판입니다. 심판이든 재판이든 무척 엄중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지만 분위기는 둘 다 매우 싱겁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심판은 어차피 죄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해 주기 위한 심판이고, 바오로의 재판도 로마인들은 하도 많은 신들을 믿고 있고 그 신들이 죄다 부활과 같은 하늘의 사정이나 내세의 일에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지라 무죄로 판결날 것이 뻔해서 그렇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발현하셔서 물으셨던 이 질문은 우리가 지녀야 할 부활 신앙의 은총스러운 효과를 알려줍니다. 그분은 죄를 따져서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없애고 용서하기 위해서 발현하십니다. 정작 예수님께서 가지신 관심의 초점은 베드로의 배신죄가 아니었고, 베드로가 당신의 양 떼를 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시고 이를 위해 체면을 세워 주시려고 베드로의 입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다른 제자들이 모두 듣는 앞에서 하게 하시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래도 다른 제자들보다는 수제자가 더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하시는, 그래서 죄책감을 덜어주고 리더십을 강화시켜 주려는 의도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복음’ 즉 기쁜 소식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도 베드로처럼 수시로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책임을 잊어버리고 결과적으로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다른 베드로가 아닙니까?
또한 바오로의 목표는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교함으로써 복음선포의 효과는 극대화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로마에 압송되기 위해서 로마 시민권을 발동했던 것이었으며, 어차피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부활 신앙 문제를 꺼낸 이유는 바리사이들을 끌어 들여 사두가이들을 제쳐 놓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사실 바오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사는 인생이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열성적인 바리사이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다니던 시절의 자신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고 대단한 영적 진보가 생겨났습니다. 수시로 그분의 제자임을 잊고 사는 우리가 베드로일 수 있는 것처럼, 부활 신앙을 앞세워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도 또 다른 바오로이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오늘의 말씀에서,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은 수제자로 임명되었던 그의 권위와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고, 로마 황제와 관헌들은 본의 아니게 로마의 재판정에서 부활 신앙을 공식재판을 통해 공표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쾌하리만치 시원스럽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역전의 상황이 오늘 말씀의 공통 코드입니다.
이제 이틀 후면 부활 시기를 장엄하게 마치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수시로 그리고 자유자재로 제자들에게 발현하셨음을 부활 시기 내내 오십 일 동안 복음으로 선포받았습니다. 이 발현 사건들은 제자들도 사도로서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사기지은을 발휘하신 일들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 시기 동안 부활과 발현에 관한 복음을 들었던 일 또한 우리도 사도들처럼,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주어진 은총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기반이요 핵심은 부활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신앙 현실이 복음적 매력에서 멀어진 것은 결국 부활 신앙이 약화된 것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니 ‘사기지은’에 대한 믿음과 관심이 희박해 진 현실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교우 여러분! 우리도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 때에 사도들이 받았던 같은 성령을 받았고, 또한 성령 강림 대축일에 또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같은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믿음이요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강림에 대한 믿음이 아직 굳건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성령이 오시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요한 14,26. 복음 환호송) 는 약속은 오늘 미사에서 바로 우리에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꺼내 들었던 비장의 카드 즉 로마 시민권이 있었다면,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이 있습니다.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던지신 물음, 즉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신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변에 따라서 사랑의 심판이 우리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신앙으로 완성되는 심판의 은총이 내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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