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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섬신도비(洪暹神道碑)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증시(贈諡) 홍공신도비명(洪公神道碑銘) 병서(幷序)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議政府左議政 兼 領經筵 監春秋館事) 김귀영(金貴榮)은 글을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남응운(南應雲)은 전(篆)을 하고.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승의랑(承議郞) 한호(韓濩)는 글을 쓴다.
황명(皇明) 만력(萬曆) 13년(1585년) 2월 임자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 중추부사 겸 영 경연사 홍공(洪公)이 집에서 졸하여, 4월 경신일에 남양(南陽)의 서쪽 청명산(淸明山) 동북쪽에서 서남향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선영에 모신 것이다. 1년이 지난 뒤에 공(公)의 손자가 찬성 심수경(沈守慶)이 편집한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묘비문을 청하면서 하는 말이 “붓을 잡을 분 중에서 선군을 알기로는 공(公)이 가장 적임자이기에 청합니다.”라고 하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휘(諱)는 섬(暹)이오, 자(字)는 퇴지(退之)이며, 호(號)는 인재(忍齋)이다. 홍씨(洪氏)는 본래 남양(南陽)의 번창한 성씨로 먼 조상의 휘는 선행(先幸)이니 고려에서 벼슬하여 금오장군(金吾將軍)이 되었고, 장군의 7세손 휘 덕의(德義)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으며, 전서가 휘 자경(子儆)을 낳으니 본조에 들어와 벼슬이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 분이 증병조판서 행동지중추부사 휘 익생(益生)을 낳으니, 공(公)의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는 휘 귀해(貴海)는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형(泂)은 우부승지를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부친 휘 언필(彦弼)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문희공이 영의정 송질(宋?)의 따님을 맞이하여 홍치(弘治) 갑자년(연산군 10, 1504년) 9월 10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태어날 때부터 영리하고 슬기로와 남보다 뛰어났는데 장성하여 경서를 가르치니 눈으로 한번만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워버렸다.
드디어 학문에 전력하여 무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기축년 정시에 합격하고 곧바로 신묘년 전시에서 급제하여 겨울에 홍문관 정자(正字)로 선발되었으며 두 번 박사(博士)로 옮겨 시강원 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 일찍이 입시할 때 아뢰기를, “일전에 복성군 미(福城君 嵋 : 중종의 아들)의 모자(母子)분이 죄를 입었는데 그것은 비록 죄를 스스로 부른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대하시는 방도에 실수가 없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일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오나 앞으로는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께서도 “네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갑오년에 부수찬으로 승진하여 지제교와 사서(司書)를 겸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 휴가를 주어 학문을 수양하게 하는 것)의 명을 받으니 이는 당시에 가장 영예로운 선발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등영(登瀛 : 登瀛州, 당태종이 문학지사 18인을 초빙하여 개관하니 시인들이 그들을 등영주에 비유한데서 온 말. 瀛州는 三神山의 하나)에 비유하였다.
얼마 후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좌랑으로 옮겼다. 이때에 권간(權奸)들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어 사람들이 삼흉(三兇 : 김안로, 임백령, 허자)이라 지목하였는데 공(公)이 일찍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자에게 그 잘못을 면전에서 배척하니 그 무리들이 함께 공(公)을 무함하여 조옥(詔獄 : 왕명으로 죄인을 가두는 옥사)에 가두고 신문하여 예측할 수 없는 위경에 처하였다가 흥양현으로 장류(杖流)되었다.
정유년에 흉한 무리들이 처벌되어 수찬으로 소환되었는데 도중에서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그 때에 권간에 아부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무리들을 다스리는 일이 매우 강경하였는데, 공(公)은 조금도 사심이 없이 힘써 정대한 의론을 주장하니 식자들이 크게 보았다. 무술년에 홍문관 교리로 옮겨 여러 차례 응교(應敎), 전한(典翰), 사헌부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거쳐 경자년에는 직제학(直提學)에 승진되고, 겨울에는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여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신축년에는 여러 번 대사간, 대사성, 이조 참의로 옮겼고, 그 해 겨울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전임하여 도승지에 이르렀으며, 계묘년 겨울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별 승진하여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임기가 끝나자 동지중추부사로 있다가 을사년에 예조 참판 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칙사(勅使)가 나와 명종을 책봉하였는데, 공(公)이 원접사가 되어 접대하는 것이 예절에 합당하였다,. 조금 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하는 법도를 의논하여 정하는데 명종이 발 안에 앉게 되니 공(公)이 아뢰기를, “임금은 마땅히 남쪽으로 향하여 임금의 자리에 앉아 만인이 함께 우러러 보아야 하는데, 지금은 자전(慈殿 : 임금의 어머니)께서 발 안에 계시어 전하께서 자전의 북쪽에 앉을 수도 없는 일이니 발 밖에 나와 앉아 군신들을 대하심이 가할까 합니다.”라고 하니 즉석에서 윤허하였다. 가을에는 공조 참판으로 옮겨 동지경연사와 부총관을 겸직하고 정미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가 되고 겸직은 계속하였다. 기유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였고 복을 벗고는 다시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한성 판윤으로 옮겼는데 두 겸직은 그대로였다.
임자년에는 임금께서 청렴하고 신중한 신하를 선발하라고 명령하였는데, 모두가 공(公)의 이름을 천거하니 대뤌 마당에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을 장려하였다. 겨울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갑인년에 공조 판서로 전직하여 동지경연사 성균관사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고, 을묘년에는 예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옮겼다. 정사년에는 춘궁(春宮 : 동궁, 순회세자)이 책봉되었는데 공(公)에게 좌빈객(左賓客)을 임명하였고, 명종께서 오릉(五陵)을 전알(展謁 : 성묘)할 때는 공(公)이 찬례(贊禮 : 제향때 왕을 이끌어 예를 행하게 하는 일)가 되어 백관이 단에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주관함이 예절에 맞았다. 무오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하여 우찬성에 임명되고 예조 판서, 세자이사(世子貳師)와 여타 직은 그대로 겸직하였다. 가을에는 이조 판서가 되고 겨울에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나머지 직도여 예에 따라 겸하게 되니 공(公)이 힘써 이를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기미년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예조 판서가 되고, 경신년에는 어필(御筆 : 왕이 직접 어필로 써서 임명함) 특별히 좌찬성에 임명하였다. 가을에 별시를 관장하였는데 ‘역대의 척리(戚里 : 임금의 외척)와 환시(宦侍 : 환관)의 화’를 들어 책(策 : 과거시험의 문체의 하나, 정사에 관한 논문)을 짓도록 시제를 내었은데 이에 당시의 정치를 가리켜 배척한 것이라고 참소하고 모함하니 공(公)은 병을 핑계하여 문을 굳게 닫고 손님도 사절하였으며 현직을 모두 내어 놓고 단지 판돈녕부사의 직위만 가지고 있었다. 계해년에 권간들이 쫓겨나니 다시 예조 판서에 복직되고 대제학도 다시 맡았다.
갑자년에는 좌찬성에 임명되었고, 을축년 문정왕후의 상에는 공(公)이 제조로서 산릉(山陵)의 역사를 맡았는데 그 보상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진했다. 이해 겨울에는 흉년이 들자 공(公)은 진휼사가 되어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생명을 보존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병인년 봄에는 글을 올려 힘껏 사양하여 대제학을 내 놓았으며, 정묘년에는 예조 판서로 옮겼다. 6월에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 지금의 임금, 선조)께서는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으니 공(公)은 원상(院相 : 국상을 당하였을 때 26일간 대소정무를 맡아본 임시벼슬)으로 승정원에서 번갈아 가며 근무하였다. 무진년에 어필(御筆)로 우의정에 임명하여 총재로 명종 실록을 감수하였고, 기사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여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다시 글을 올려 과분하다는 뜻을 표하고 사직하려 하였으나, 상께서는 너그럽게 타일러 허락하지 않았다. 계유년에도 나이가 정년에 이르자 예에 의거하여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 나이많은 관원에게 국가에서 내려주는 책상과 지팡이)을 하사하였으며, 다시 병으로 사면을 청하니 영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 그 때에 대부인(어머니)의 나이가 90이었으나 아직도 건강하였는데 공(公)이 궤장을 받고 술과 음악까지 하사받아 잔치를 벌리니 보는 사람마다 혀를 차면서 근래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였다. 갑술년에 영의정에 승진하였는데 가을에 힘써 사직하니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을사년에 다시 수상이 되었는데 공(公)이 다리에 병을 앓아 걸음이 불편하니 임금께서 젊은 환관에게 부축하고 출입하도록 명하였으니 항상 후하게 대우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병자년에 사직하여 면직되었다. 겨울에 다시 좌의정이 되었는데 공(公)은 쇠약하고 병든 것이 점점 더하고 어머니의 나이도 또한 많아서 여덟 번이나 상소하여 힘써 물러날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 편지를 내렸는데, 대략 “경은 원로이며 나이많고 덕망이 높아 나라의 주석이고 또 90세 편모가 있으니 특별히 경의 어머니를 위하여 미두(米豆 : 쌀과 콩,곡식)와 술, 고기를 내려, 내가 대신을 후대하는 뜻을 보인다.”라고 하였다. 공(公)은 병든 몸을 이끌고 임금을 찾아 은혜에 감사드리고 재상직에서 물러나게 해 줄 것을 간청하니 임금께서도 부득이 이를 따랐다. 오래지 않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고 영의정에 나아가니 세 번째 수상이 된 것이다. 열 번째 차자(箚子: 상소문의 한 종류. 사실만을 간략히 기록)를 올려 다시 사면을 청하니 기묘년에 전임이 허락되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경진년에 대부인이 세상을 뜨니 임금께서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또 도승지를 보내서 하유하기를, “경이 슬퍼하여 몸을 상하는 것이 예에 지나친다고 들었으나, 예법에도 나이 80이면 재최(齊縗 :상복의 한 종류)를 입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원로 대신은 자신을 가벼히 할 수 없는 것이니 경은 예문에 따라 시묘살이는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졸곡(卒哭)에도 승지를 보내서 개소(開素 : 육식을 함)를 권하였고 해당 관청에 명하여 달마다 주육을 내리라 하시니 공(公)은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힘써 사양하였으나 소상(小祥)을 앞에 두고는 미두를 내렸고 또 담제(禫 祭: 대상을 지냄 그 다음 다음달에 지내는 제사)에도 제물을 내렸다.
다시 영중추부사 겸 영 경연에 임명되었는데 공(公)은 경연과 봉조하(奉朝賀)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公)은 고령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슬픔과 추모를 그치지 못하고, 기력은 더욱 쇠약해지져서 병이 오래도록 낫지 못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졸하였으니 향년 82세이다. 임금께서 공(公)의 병이 더함을 듣고 승지를 보내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으나 이미 말을 못하였다. 임금께서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중지하고 어소(御素 : 소찬을 먹음)하였으며, 부조와 장례를 돕는 것이 모두 유달랐고, 벼슬이 높던 낮던 간에 분주하게 달려와 슬퍼한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공(公)은 타고난 천품이 빼어나게 아름다왔고 평소의 품행과 지조가 단정하고 중후하였으며, 오직 경적만 탐독하고 살림살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말을 거칠게 하거나 얼굴빛을 사납게 하지 않았고 따뜻하게 사람을 대하여 온화한 기운이 지극하였다. 위포(韋布 :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있을 때부터 두터운 명망을 지녔고, 벼슬에 나아가 일에 임해서는 힘을 다하여 봉직하였으나 조금도 이름을 얻으려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일찍이 성격이나 언행이 상도에 벗어나는 것이 없었고 항상 자신을 겸손하고 낮게 하여 선비들을 대하였으며, 4조를 내리 섬겨오면서 매번 임금의 자리 앞에서는 인재를 아끼고 선비들의 기상을 넓혀 줄 것을 권하였다. 작은 벼슬에 있을 때에는 강직하고 방정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려 누차 좌절되었으나 끝내 꺾이지 아니하였으며, 괴극(槐棘 : 삼공과 구경)이 되어서는 대체를 유지하여 이미 정해진 법률과 규정을 지키기에 힘쓰고 사소한 변경같은 것은 하지를 않았다.
문장은 고상하고 성실하며 온화하고 우아하였으며 화려하고 과장된 말을 절대로 쓰지 않아, 사대부들이 공(公)에게서 비문을 받으면 하나의 실록이라고 일컬었다. 어릴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종일 단정히 앉아 있어 남들이 한번도 태만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일찍이 송나라 현인들의 훌륭한 말과 선행을 가려서 ‘자경절기(自警切已 : 스스로 경계함이 나에게 절실함)’라 제목을 붙였고, 만년에는 이천선생(伊川先生 : 송나라 程頤)의 사잠(四箴)과 장사숙(張思叔)의 좌우명을 써서 벽에 붙이고 늘 눈여겨 보고 조심하였으니 집에서도 수양을 함이 이와 같았다. 문희공(文僖公)은 가법이 심히 엄하여 손님이 오면 공(公)에게 접대하게 하였는데 공이 가난한 선비처럼 의복을 입고 자제의 예를 행하며 매우 삼가하니 공인지 알지 못하는 손님도 있었다.
문희공(文僖公 : 아버지)이 늙고 병이 들자 공(公)은 반드시 손수 약을 다려 먼저 맛을 본 뒤에 드렸으며, 문희공이 졸하니 집상에 예를 다하여 3년 동안 여막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공(公)은 나이 70이 넘었어도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지성을 다하고 어김이 없었으며, 가벼운 병환이라도 있으면 식음을 폐하고 눈물지으면서 잠도 자지 않았고 상을 당하여서는 크게 슬퍼함이 그 전의 상(아버지의 상)과 같아서 비록 임금의 개소하라는 명을 받았어도 며칠 뒤에는 다시 소식(疏食)을 하였고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는 한번도 자녀에게 대행시키지 아니하였다. 상이 끝난 뒤에 자제들이 공(公)의 생일을 맞이하여 사죽(絲竹 : 풍악)으로 즐겁게 하여 드리려 하니 공(公)이 막으면서 말하기를, “전에는 어버이를 위하여 베풀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차마 이 소리를 듣겠느냐?”하고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니 자제들이 더 말하지 못하였다.
매번 집안이 너무 번창항 것을 걱정하여 일찍이 경연에서 문희공(公)은 영사(領事)로 공(公)은 지사(知事)로 동서에서 부하를 거느리고 들어오니 남들은 영광으로 여겼으나 공(公)은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였다. 항상 절약과 검소함으로 자제들을 경계하였고 지위가 백료의 우두머리였음에도 손님을 맞는 방은 쓸쓸하였으며, 자제들도 감히 함부로 부탁을 못하였고 노복들도 동네에서 방자히 멋대로 굴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어진 정승이라 일컬음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공(公)은 처음에 진산군(晋山君) 유홍(柳泓)의 따님을 맞이하였는데 현숙하였으나 일찍 돌아갔고, 계실 한씨(韓氏)는 좌의정 확(確)의 5대손 증참관 자(慈)의 따님으로, 어려서부터 선량한 자질이 있었고 홍씨 문중에 출가하였어도 집안에서의 행실이 온전히 갖추어져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동서간에도 화목하니 집안간에서 두루 칭찬하였다. 기묘년 정월 26일에 공(公)보더 먼저 졸하였으니 향년 57세요, 그 해 3월 28일에 공(公)묘의 좌측에 장사지냈다.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 기영(耆英)은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고, 딸은 종실 하원군(河原君) 정(鋥)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3남을 두었으니, 기년(耆年)은 천문교수(天文敎授)요, 기수(耆壽)와 기형(耆亨)은 모두 관상감 정(觀象監 正)이다. 첨정은 의정부 우찬성 심수경(沈守慶)의 딸을 맞이하여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경소(敬紹), 경철(敬哲), 경찬(敬纘)이고, 딸은 어리다. 하원군(河原君)은 3남 1녀를 낳았으니, 인령(引齡)은 당은도정(唐恩都正), 형령(享齡)은 익성정(益城正), 석령(錫齡)은 영제정(寧堤正)이며, 딸은 진사 기자헌(奇自獻)에게 출가하였다. 기년(耆年)은 2남을 낳으니 경윤(敬胤), 경승(敬承)이고, 기수(耆壽)는 2남 3녀를 낳으니 아들은 경창(敬昌)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기형(耆享)은 2남 4녀를 낳으니 아들은 경립(敬立), 경의(敬義)이고, 딸은 고응진(高應軫)에게 출가하였다. 경소(敬紹)는 딸 하나를 낳았다. 당은도정(唐恩都正)은 3남을 낳았고, 익성정(益城正)은 1남 1녀를 낳았으며, 영제정(寧堤正)은 1남 1녀를 낳았고, 기자헌(奇自獻)은 1녀를 낳았다. 경윤(敬胤)은 1남을 낳고, 경창(敬昌)은 1녀를 낳았다. 명(銘)하기를
달존(達尊 : 모든사람이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셋이 있으니 치(齒), 덕(德), 작(爵)이로다.
하나는 드물고 둘은 어려운데 하물며 세가지를 겸함에랴?
세가지를 다 누린 이는 처음 보았으니 오직 공(公) 하나 뿐이로다.
그 덕(德)은 어떠하였는가?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였도다.
그 작(爵)은 어떠하였는가? 벼슬이 황각(黃閣 : 재상)의 우두머리였도다.
그 치(齒 : 수명)는 어떠하였는가? 나이 대질(大耋 : 80세)을 넘었도다.
숙정(肅靖 : 송질의 시호)의 외손자요, 문희의 아들이로다.
경사스러움은 상은 선대에게서 받고 선에 힘씀은 몸소 하였도다.
시례(詩禮 : 선조의 가르침을 받음)가 아름답게 전해지고 존귀한 자리도 선대를 계승하였구나.
청렴과 검소를 스스로 경계하고 공손함과 삼가함으로 직무에 종사하였도다.
아름다운 덕을 모아 여러 도움 받았으니 복록이 모였도다.
살아서는 영화로웠고 죽어서는 애도를 받았으니 처음도 좋았고 끝도 잘 마쳤도다.
옛날의 세신(세가)이란 공(公)을 말함이 아닐는지?
봉분과 집이 있으니 남양(南陽)의 세천(世阡)이로다,
돌 뜨고 글 새기니 천천년을 전하소서.
만력(萬曆) 14년 병술 9월 일 세움.
홍섬신도비(洪暹神道碑)
洪暹神道碑
洪 暹 神道碑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贈諡洪公神道碑銘并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監春秋館事金貴榮 撰
嘉 善 大 夫 禮 曹 參 判 南應雲 篆
活 人 署 別 提 承 議 郎 韓 濩 書
皇明萬曆十三年二月壬子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兼領 經筵事洪公卒于第四月庚申葬于南陽治西淸明山丑坐未向之原從
先塋也旣朞公之孫以沈賛成守慶所次行狀屬余墓道之碑曰
在秉筆知先君惟公㝡請銘之辭不獲謹按公諱暹字退之號忍齋洪本南陽巨姓遠祖諱先幸仕高麗爲金吾將軍將軍之七世孫諱德義工
曹典書典書生諱子儆入本朝官至戶曹參判寔生 贈兵曹判
書行同知中樞府事諱益生於公爲高祖考也曾祖諱貴海水軍節度使 贈左賛成祖諱泂右副承旨 贈領議政考諱彥弼領議政 贈諡
文僖公文僖聘領議政宋軼女弘治甲子九月十日生公公生而
頴悟絕倫旣長授以經書過月成誦遂肆力於問學中戊子司馬魁己丑 庭試直赴辛卯 殿試冬選補弘文館正字再轉博士兼侍講院說
書嘗入侍 啓曰頃者福城君嵋母子被罪彼雖自取未必非待
之失其方也徃者不及來者可戒 上曰爾言是甲午陞副修撰知製敎兼司書 賜暇讀書此極一時之選人比之登瀛焉俄拜司諫院正
言遷吏曹佐郎是時權奸亂政人目爲三兇公見嘗所識者面斥
其非其徒共構下詔獄訊之幾不測杖流興陽縣丁酉兇徒伏辜 召拜修撰道陞司憲府持平時治阿附濁亂之輩頗急公略不爲形迹力持
正大之議識者多之戊戌移弘文校理累轉應敎典翰司憲掌令
執義庚子陞直提學冬 特加通政陞副提學辛丑累遷大司諫大司成吏曹參議冬拜承政院同副承旨轉至都承旨癸卯冬 特加嘉善拜
京畿觀察使任滿同知中樞乙巳拜禮曹參判兼同知成均是年
勑使來册 明廟公爲遠接使承接稱禮俄拜大司憲時議定 文定垂簾之儀 明廟坐于簾內公 啓曰人君當正位南面萬目咸
覩今者 慈殿在簾內 殿下縱不得坐北冝出坐簾外以
臨群臣即 允之秋移工曹參判兼同知 經筵副摠管丁未陞資憲知中樞兼帶仍舊巳酉丁內艱服闋復知樞轉判京兆兩帶亦復壬子
上命選廉謹之臣僉擧公名 錫宴闕庭以獎臣庶冬出按關
西甲寅遞判工曹兼同知 經筵成均藝文提學乙卯移判禮曹兼知義禁府丁巳 春宮受册授公左賓客 明廟展謁五陵公賛禮陞降
周旋中節戊午加階崇政授右賛成仍兼禮判 世子貳師餘仍
舊秋判吏曹冬爲弘文藝文大提學餘兼依例公力辭不 允已未遞判樞府尋禮曹庚申 御筆特除左賛成秋掌別試發策擧歷代戚
里宦侍之禍讒口交構指斥時事公引疾杜門謝客悉褫見任只
判敦寧癸亥權奸屏黜復判禮曹再典文衡甲子拜左賛成乙丑 文定之恤公提調山陵之役賞階崇祿是冬荒甚公爲賑恤使措置得宜
全活甚多丙寅春上章力辭主文得遞丁卯移判禮曹六月
明廟昇遐 上以冲年嗣服公以院相輪直政院戊辰 御筆拜右議政以摠裁監修 明廟實錄己巳辭不 允夏陞左議政又以盛
滿辭 上敦諭不 許癸酉以年至據禮請致仕不 允賜几
杖復以疾辭遞領中樞時大夫人年垂九旬尙康强公受几杖 賜酒樂以侈之觀者嘖嘖咸以謂近古所未有也甲戌陞領議政秋力辭遞領
樞府乙亥復爲首相公患脚病不利步趨 上命小宦挾扶出
入常被優禮如此丙子辭遞冬復爲左議政公以衰病漸加母年亦深力辭章八上 上賜御札略曰卿元老耆德爲邦家柱石又有九十偏
母 特賜卿母米豆酒肉以示予厚待大臣之意公力疾謝 恩
懇辭相職 上不得已從之未久復拜左議政即陞領三爲首相連上十劄以辭己卯 許遞領樞府庚辰大夫人辭堂 上遣承旨致吊
又遣都承旨 諭曰聞卿哀毀過禮禮八十不及齊之事况元
老大臣不可自輕卿勉從禮文勿爲居廬卒哭 遣承旨開素令該司月給酒肉公再疏力辭將祥 賜米豆禫又 賜祭物遂領樞府兼領
經筵請辭經筵奉朝請不 許公高年喪母哀慕不已氣力益
沉綿不起享年八十二 上聞公病革遣承旨問所欲言已不能言矣 上震悼輟朝御素贈賻葬並從異數大小奔走嗟悼載路公資
禀秀美操履端重惟耽經籍不事產業無疾言遽色溫溫接人和
氣藹然自在韋布已負重望居官莅事奉公盡瘁不肯爲近名之事未嘗有崖異之行常持謙卑引接士類歷事 四朝每於榻前以愛惜人才
恢弘士氣爲勸其在小官剛方觸忤屢挫不撓曁都槐棘惟持大
體務守成憲不爲瑣屑變更之論爲文章典實溫雅絶去浮誇之語士大夫得其碑碣之述稱爲實錄自少晨興盥洗終日端坐人未嘗見其惰
容嘗選宋賢嘉言善行題曰自警切已晚年書伊川先生四箴張
思叔坐右銘掛諸壁間常目在之其居常砥礪類此文僖公家法甚嚴客至輒使公候之公冠服如寒士執子弟禮甚謹客或有不知其爲公者
文僖公旣老有疾公必躬湯藥嘗而後進文僖旣卒執喪盡禮三
年不出廬外公年踰七十奉養母夫人至誠無違如有微疾輒不食涕泣目不交睫及殁慘痛之深一如前喪雖承 上命開素數日輒復疏
食朔望奠獻一不令子弟代之喪畢之後子弟遇公生日欲以
竹娛之公止之曰前者爲親設也親旣沒矣何忍聞此因泣下沾襟子弟不敢更言每以盛滿爲懼嘗於 經席文僖以領事公以知事東西作
頭以入人以爲榮而公常懍懍也常以節儉戒子弟位冠百僚而
客坐簫然子弟不敢妄有干請僮僕不敢橫於里閭世以賢相稱之不亦宜公先娵晋山君柳泓之女賢而早卒繼室韓氏左議政確五代孫
贈參判慈之女少有淑質及歸洪氏內行純備事舅姑以孝處
妯娌以睦宗黨洽然稱之己卯正月二十六日先公卒享年五十七是年三月二十八日葬在公瑩之左生一男一女男曰耆英掌樂院僉正女
適宗室河原君鋥側室生三男曰耆年天文敎授曰耆壽曰耆亨
皆觀監正僉正娶議政府右賛成沈守慶之女生三男三女男曰敬紹敬哲敬纉女幼河原生三男一女曰引齡唐恩都正曰享齡益城正曰
錫齡寧堤正女適進士奇自獻耆年生二男曰敬胤敬承耆壽生
二男三女男曰敬昌餘幼耆享生二男四女男曰敬立敬義女適高應軫敬紹生一女唐恩生三男益城生一男一女寧堤生一男一女奇自獻
生一女敬胤生一男敬昌生一女銘曰
達尊有三齒德爵也 一稀二難矧兼三者 肇見克嚮惟公也獨 其德伊何孝親忠國 其爵伊何位冠黃閣 其齒伊何齡逾大耋 肅
靖之甥文僖之子 承慶于先邁善于已 詩禮傳芳風雲繼軌
淸儉自飭恪謹從事 鍾美受益福履攸同 生榮死哀善始令終 古云世臣其不在公 有封若堂南陽之阡 伐石辭垂示千千
萬曆十四年丙戌九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