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하여 온전한 해석을 가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 해석은 어두운 세계를 향해 쏘는 이성의 빛이다. 해석은 인간의 권한을 넘어선 세계를, 인간의 권한 하에 두고자 하는 근원적 본능으로부터 출발한다. 해석은 유한한 인간을 무한한 우주의 특별한 한 점에 위치시킨다. 그리하여 인간은 해석을 통하여 세계를 획득한다. 결국 인간은 우주의 한 점이지만, 해석을 통하여 우주는 인간의 한 점이 된다. 세계에 대한 완전한 설명의 체계를 손에 쥐려는 열망은 인류역사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세계를 해석으로 온전히 담아내려는 시도는 인류 불멸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역사를 거쳐 간 지성들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떠한 사람들보다 설명의 체계를 장중하게 축조하여 후세들에게 영원히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철학은 1차적으로 형이상학이며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할 수 있도록 일반 관념들의 정합적·논리적·필연적 체계를 짜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아주 폭넓고 일반적인 이해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조망하려는 시도였으며, 이러한 이해력은 그의 위대한 3부작 〈과학과 근대세계〉〈과정과 실재〉〈관념의 모험 〉이 지향한 목표였다.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인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영국 램즈게이트에서 출생, 케임브리지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강사(1885~1911), 런던대학 교수(14~24), 하버드대학 철학교수(24~37)를 역임하였다. 처음에 G.W.라이프니츠, L.A.쿠튜라, H.G.그라스만 등의 영향 하에 수학적 논리학(기호논리학) 연구에 종사하였고, B.러셀과의 공저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저술하여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또한《자연인식의 제원리: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상대성 원리:The Principle of Relativity》를 집필하여 ‘사상(事象:event)’의 개념을 사용해서 자연에서의 모든 사상 상호간의 확급(擴及) 및 상입(相入)의 원리를 구명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자연과학에서도 항상 경험과 구상성(具象性)을 존중하고, 사변적(思辨的)·추상적 태도를 배척하였다.
그 후 미국에서 저술한《과학과 근대세계:Science and Modern World)》《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은 유기체(organism)의 개념을 중핵으로 하는 그의 발전적·창조적 형이상학을 전개한 것이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과정과 실제:Process and Reality》《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자연과 생명:Nature and Life》등이 있다.
화이트헤드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는 그가 인류 지성사에 얼마나 큰 획을 기록 하였는지를 알게 해 준다. 김경재 교수는 화이트헤드를 "고도의 전자현미경과 같은 정밀한 분석력으로 이 세계를 파 해친 천재"라고 하였다. 김상일 교수는 화이트헤드를 "20세기 최대의 지성을 갖춘 인물로, 20세기의 그 어느 누구도 방대한 그의 학문 능력을 현재로서는 능가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동양철학자 김용옥 은 "화이트헤드는 21세기의 붓다다. 안타깝게도 서양인들은 그를 쳐다볼 눈이 없다"고 하였다.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를 번역한 연세대학교 오영환 교수는 "20세기는 수학과 철학의 분야에서 화이트헤드를 능가할 만한 인물은 낳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미국의 과정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은 "금세기에 있어서 형이상학자로서의 화이트헤드를 능가할 사람은 없으며, 어쩌면 그와 견줄 만한 경쟁자도 없는 것 같다. 개념의 명료성이나 우리의 전체적인 지적 상황에 대한 적합성에 있어서 화이트헤드에 대등할 만한 이는 없어 보인다."고 말하였다. 또한 과정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은 인류역사의 창조적 사상가로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이트헤드라고 평가하였다.
화이트헤드는 첫째로, 자연과학과 철학의 세계에 동시에 정통했다. 물질과 정신은 존재의 양 극(dipolar)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근거로 한 자연과학과 정신을 근거로 한 철학은 근본적으로 상보적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은 실재의(actual) 세계를 다루고, 철학은 실재하는 세계의 배후를 다룬다. 그렇다면 오늘에 있어서 자연과학과 철학은 어떤 관계인가. 어쩌면 오늘의 자연과학은 철학에 대하여 실재의 세계를 상실한 자들이라고 매도하고 있으며, 또한 철학은 자연과학에 대하여 실재의 근본을 따지지 않는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았나. 이리하여 자연과학과 철학은 시간이 점점 흐르며 일란성 쌍생아의 고향을 상실한 불우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화이트헤드는 물리학과 철학에 능통하였으며, 실로 그는 물리학과 철학을 이어줄 수 있는 당대의 수학자, 논리학자로서 대성하였다. 그가 버트란트 러셀과 공동으로 저술하여 수학기초론과 현대 논리학의 성립에 기여한《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는, 모든 시대를 관통하여 가장 위대한 지적인 개념비로서 칭송 받는 저서가 되었다.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수학적 논리적 체계는 후기의 독특한 철학체계를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다른 철학자와 뚜렷한 변별 점을 갖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면 화이트헤드 철학의 근거에는 다른 철학에서 쉽게 엿볼 수 없는 것들, 즉 물리학의 성과, 수학의 성과, 논리학의 성과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의 체계는 20세기의 전자장 이론, 상대성 원리, 그리고 양자역학을 포섭하면서 그것들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체계이다.
둘째로, 화이트헤드는 체계적인 형이상학을 구축한 철학자이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형이상학은 점점 와해되어 가고 있다. 현대의 시대적 특징은 다양성과 복잡성이다. 이러한 다양하고 복잡한 현상의 본질을 현대의 형이상학이 해명하기엔 너무 쉽게 지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형이상학을 그의 사유 안에서 당당하게 복원해 나아가고 있음을 만나게 된다. 그가 웅혼한 사유의 궤적을 그려낼 수 있었던 이유는 수학과 논리학으로 철저하게 단련된 치밀한 논리적 분석과 종합, 그리고 그의 깊고 풍부한 감각과 청순한 지조(志操)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린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하여 그의 체계적인 형이상학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과정과 실재}는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1부인 <사변적 구도>는, 화이트헤드 자신이 독특하게 축조한 근본 개념과 범주의 도식을 제시하는데 할애한다. 그리고 나머지 2부에서 5부까지는 1부에서 언급한 근본 개념과 범주에 대한 설명과 예증, 그리고 현실에 대한 적용을 치밀하고 일관된 어조로 제시해 주고 있다.
{과정과 실재}는 20세기의 새로운 물리학적 개념과 수학의 기초 위에 섰기 때문에 수학적 훈련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저작임이 사실이며, 그 논리는 엄밀하다. 그러므로 그의 형이상학이 다른 형이상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체계가 엄밀한 연역적 체계이며, 수리 논리학에 입각한 기호 체계와 엄밀한 과학 철학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서 주장되고 있는 것은 모두 그 체계의 전제가 되는 몇 개의 기본 법칙(공리)에 의해서 증명될 뿐만 아니라, 그 체계에 도입 되고 있는 개념도 모두 몇 개의 기초 개념에 의해서 엄밀히 정의되고 있다. 체계성과 전체성을 상실한 채 오히려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몰아가는 대다수 함량미달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는 가히 체계성과 전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사상의 정교함을 추구한 저서로 정평이 나 있다.
셋째로, 화이트헤드는 독창적 사상을 건설한 철학자이다. 독창적 사상은 전통과 혁신에서 피어난다. 전통이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혁신이 없는 사상은 맹목적일 뿐이다.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거장들로부터 데카르트, 록크, 칸트와 같은 근대 철학자들의 사상에 묻혀 있는 전통들을 제한, 적용, 전환을 통해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 하지만 그 거장들이 사용 하였던 부정확한 개념이나 표현들에 대하여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과의 관련성 안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전통과 혁신 사이의 무한한 운동 가운데에 서 있었던 화이트헤드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록크, 버클리, 흄, 칸트, 헤겔 등이 뒷전에 물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것이 아니고, 이들이 철학의 전통에 끌어들였던 관념들은 그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심지어 그들이 명백하게 거절했던 제한과 적용 그리고 전환을 통해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관념은 새로운 대안을 이끌어 들인다. 또한 어떤 사상가가 버린 대안을 취한 경우에도 우리는 그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는 셈이 된다. 철학은 위대한 철학자로부터 충격을 받고 난 후에는 결코 옛날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진리를 그 가장 깊은 뿌리에서부터 탐구하려는 열정, 진부한 사고습관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라는 토양 위에서 화이트헤드의 독창적 사상은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진보는 언제나 자명한 것을 초극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말하였다. 어쩌면 그 자신은 너무 진보하였는지도 모른다. 화이트헤드 사상에 대한 올바른 연구나 합리적인 비판이 아직 미약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근거한다. 그의 사상이 너무나 새롭고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너무 앞선 자에게 돌아오는 몫은 의도적인 무관심이나 맹목적인 비판이다.
과정과 실재는 어떤 책인가?
인간의 문자역사는 넉넉잡아야 겨우 반만년 남짓한 것이지만, 그 역사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어려운 책 한권을 뽑으라면 단연코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가 꼽힐 것이다.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내가 접한 책 중에서 가장 난해한 책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 {과정과 실재}를 들겠다고 말했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까? 한 줄 한 줄에 모두 들어가 있는 것도 같고,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아리송하면서도 심오한 듯이 보이고, 헤겔이나 칸트의 어려움은 이에 비하면 새 발의 피고, 도무지 난해한 도수로 말하면 인류언어 사용사상 챔피언 중의 챔피언이 될 것 같다.
{과정과 실재}에 대한 김용옥의 평가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기존의 철학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적절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평가에는 {과정과 실재}의 독특한 색조가 잘 드러나고 있다. 사실, 새로운 것에 민감한 사람들조차 화이트헤드는 너무나 새롭고 난해하여 온전한 정복이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화이트헤드의 독특함과 난해함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형이상학적 사변의 깊이와 폭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주저인 {과정과 실재}는 그의 형이상학 체계가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나타난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함과 난해함의 무게로 인하여 단지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논의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화이트헤드에 대하여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인류가 해명해야 할 '세계의 비밀'에 어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쉽게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꺼지지도 않는 섬광과 같은 철학이다. 그렇다면 {과정과 실재}는 어떤 책인가? 1927년 1월, 에딘버그 대학은 화이트헤드를 초청하여 기포드 강의(Gifford Lectures)를 열었다. 그 강의실에는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라는 이름이 걸려 있었다. 자신의 형이상학을 유기체의 철학(The philosophy of organism)이라고 명명한 이 강의에서,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의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를 그려내었다. 그는 강의에서 위대한 몇몇 유럽 철학자들과의 대면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 강의는 이후 25개의 장(章)으로 보완되어 1929년 {과정과 실재}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과정과 실재}는 서양 형이상학의 가장 위대한 고전(古典)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용옥은 서양철학사의 모든 문제가 일단 {과정과 실재}에서 종결되었다고 감히 선포한다. {과정과 실재}는 5부로 나누어진다. 1부에서는 유기체의 철학의 방법이 설명되고, 또한 우주론을 구축하게 될 여러 관념의 구도가 개괄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2부에서는 문명 사상의 복잡한 구조물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관념이나 문제를 1부의 구도를 통하여 적절하게 밝힌다. 3부와 4부에서는 우주론의 구도가 전개된다. 마지막 5부는 우주론의 문제를 고찰해야 할 궁극적 방법에 대한 최종적 해석을 내놓는다.
우린 {과정과 실재}라는 제목을 주의 깊게 응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제목을 잘 음미하면 <과정>과 <실재>는 한 세계의 두 측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통 철학은 과정보다 실재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많이 두었다. 전통 철학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의 물음보다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물음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실재를 과정이라고 말하였다. 화이트헤드는 저서의 제목을 {실재와 과정}으로 명하지 않고 {과정과 실재}로 명하였다. 제목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듯이 화이트헤드는 실재만을 주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과정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다시 말하면 화이트헤드는 존재(Being)보다 생성(Becoming)에 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그 관심은 다음과 같은 최종적인 질문으로 수렴 된다 : "도대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과정과 생성'이라는 개념은 '실재와 존재'라는 개념보다 더욱 중요한 단 서가 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존재가 생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성이 존재를 만든다.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가 어떻게 생성하느냐가 바로 그 현실적 존재가 무엇이냐를 구성한다. 더 밀고 나아가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생성이 존재를 결정한다. 또한 존재는 생성에 의해 구성된다. {과정과 실재}는 생성과 존재 사이에서 맺어지는 함수관계를 그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통하여 탐구한 책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정과 실재}에서 생성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조망해 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 생성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 인류 철학사의 문제는 생성과 존재의 관련성의 문제이다. 우리는 그 문제를 2500년 전 헬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라는 두 고대 그리스인의 목소리로 만나 볼 수 있다. 헬라클레이토스는 생성의 철학자이다. 헬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사물은 흐른다."라는 생각을 철학화 하였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철학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은 없고 존재만 있다"라는 생각을 철학화 하였다. 철학사의 두 흐름 가운데 화이트헤드는 헬라클레이토스의 수맥에 놓여 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헬라클레이 토스의 주장에 더욱 더 과학적이고 세련된 의상을 입힌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헬라클레이토스의 "모든 사물은 흐른다."(all things flow)는 주장은, 체계화 되지 못한 채 가까스로 분석된 인간의 직관이 낳은 최초의 막연한 일반화로 평가된다. 화이트헤드는, 헬라클레이토스의 직관은 인정하지만 그 직관의 근거가 공허하게 비어있음을 간파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2,500여년의 세월을 통하여 축적된 인류의 기술적 과학과 합리적 정신을 활용하여 헬라클레이토스의 그 빈자리를 채워 준다.
선조는 후대에게 직관을 넘겨주고 후대는 선조에게 직관에 대한 합리화로 보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정과 실재}는 헬라클레이토스가 가슴으로 보듬어 안으며 고민했던 '생성의 문제'를, 인류의 보고(寶庫)를 통하여 가공한 메스로 날카롭게 해부하여 충실히 보완한 역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헬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옛 된 파피루스 향이 베어 나오는 "모든 사물은 흐른다."는 저 주장은, 화이트헤드에게 넘어오면서 "모든 사물은 벡터이다"(all things are vectors)라는 세련된 주장으로 다시 복원된다. 화이트헤드는 우리 시대의 우주를 4차원적인 시공간을 갖는 <시공간연속체>space-time continuum로 새롭게 직조해 낸다. 결국 이 우주시대는 방향성을 갖는 4차원 시공간 연속체이다.
<생성이 존재를 빚어낸다.>는 저 주장은 실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린 저 문장에 질문을 던져 본다. "생성은 존재를 어떻게 빚어내는가?" 지금 내 앞에는 장미 한 송이가 있다. 저 장미를 영화필름으로 찍는다. 영화필름은 1초에 24장면을 찍는다. 필름의 한 커트 한 커트는 장미이다. 한 프레임과 그 다음 프레임에 찍힌 장미는 분명히 변화한다. 왜냐 하면 시간의 흐름은 변화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프레임과 다음 프레임 사이의 찍히지 않는 빈틈에서 <생성>이 이루어진다. 그 생성은 한 프레임과 다음 프레임으로 넘어가는 <과정> 이다.
그렇다면 한 프레임과 그 다음 프레임 사이에 "도대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화이트헤드는 그 질문을 던지며,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해명하려 한다. 결국 한 장면과 다음 장면 사이에는 온 우주가 개입한다고 화이트헤드는 주장한다. 단지 내 눈앞에 보이는 저 조그마한 장미의 순간적인 생성에 온 우주의 맥박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저 장미를 만들어 나아감에 있어 우주 전체의 빛이 거기에 깃든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한 존재의 생성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온 우주가 개입한다. 매순간 생성의 과정에는 우주의 전체성이 진입한다. 생성이 존재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주는 침투해 들어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 있어서의 모든 항목은 각 <합생>concresence 속에 포함되어 있다" 합생 가운데 장미가 우주의 모든 호흡을 <파악>prehension하여 <향유>enjoyment하고 <만족>satisfaction하며 종결하는 순간, 새로운 장미가 탄생한다.
결국 모든 존재는 우주의 춤을 새롭게 경험한다. 모든 존재는 우주의 새로움을 매 순간 만나는 존재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는 우주의 모든 항목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소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 존재를 빚어내는 생성 가운데 온 우주는 깊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실로 자연의 역사와 그리고 그 안에서 호흡하는 인간 역사의 진행의 과정들은 저 우주의 <진입 >ingression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속하지 못한다. 책상위에 조용히 놓여있는 저 장미는 지금 우주를 넘나든다.
물고기는 물 안에 살면서도 물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화이트헤드를 통하여, 이 세계에 편만(遍滿)히 배어있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었던 우주의 연금술을 감지하게 된다. 사실, 우주의 질서는 세계에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저기 단아하게 하늘을 향한 한 그루 소나무를 보고 있다. 놀랍게도 그 소나무 뿌리가 땅을 향해 깊은 뿌리를 드리울 수 있는 힘은 거대한 지구의 중력 때문이다. 지구의 중력은 한 그루의 나무를 감싼다. 어디 그뿐인가. 아주 간단한 나침반에도 지구의 자력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나침반을 여행가방에 꼭꼭 숨기고, 땅에 깊숙이 묻어버릴 지라도 나침반은 지구의 자력을 외면할 수 없다. 우리는 소나무와 나침반에서 우주를 엿본다.
소나무와 나침반이 지구의 중력과 자력에 맞닿아 있듯이,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나를 그냥 쳐다보는 저 강아지의 투명한 눈망울과, 바람 끝에 얹혀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에도 지구의 맥박은 깃들어 있다. 더 나아가서 1년에 태양을 한 바퀴 도는 푸른 지구와 끊임없이 백조좌를 향해 나아가는 태양계를 볼 때, 우주의 맥박은 모든 세계를 투명하게 관류(貫流)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는 새로움을 끊임없이 창출하는 우주의 약동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도 이 세계는 새롭게 갱신되어 가고 있다. 우린 여기에서 결론을 내린다. : 생성이 존재를 빚어낸다. 그리고 그 생성의 과정에는 우주 전체가 <진입>한다.
이성의 기능
플라톤은 이성을 신들과 공유했고 율리시즈는 이성을 여우들과 공유했다. 화이트헤드의 감각적인 말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이미 이성에 대한 관심이 시작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관심은 플라톤이 살고 있던 고대 그리스는 물론이거니와 근대철학을 거쳐 지금까지 꾸준히 논의되고 있는 바이다. 대체적으로 이성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플라톤이 신들과 공유하였던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이성이며, 다른 하나는 율리시즈가 여우들과 공유한 실천적인 이성이다.
지금까지 이성은 두 가지 측면 중에서 바로 전자가 후자보다 그 우위를 지켜 논의되어졌다. 희랍철학에서부터 근세 합리주의를 거쳐 현대철학의 모든 논리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성은 한결 같이 시공을 초월한 고정불변의 실체이거나 최소한 시공성에 구애되지 않는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에 우리의 몸에서 멀찍이 떨어져나간 이성은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거나 몸이 기능하는데 있어서 상관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성을 바라보면 평범한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성이 우리 삶에 무슨 필요가 있는지 회의가 느껴질 것이다. 이성에 대한 회의에 연이어 이성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꺼낼 수 있다. 정말 이성은 우리의 몸, 우리의 생활 밖에 있는 고고한 존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의 일상생활을 떠올려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간다. 학교에서 아침 수업을 듣고, 수업이 빈 시간에는 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숙제를 하고 공부를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오후 수업에 들어간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저녁을 먹은 다음, 도서관에 2시간 정도 있다가 집으로 귀가한다. 나의 일상생활을 텍스트 그대로 받아들이면, 굉장히 기계적으로 몸 가는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정해진 스케줄에 맞추어 행동하거나, 수업을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 배고파서, 심심해서, 할 일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이러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나는 좀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밥을 제때 먹어야 학업에 지장이 안 간다는 생각을 한다거나, 좀 더 지식을 쌓고 싶거나, 내가 지금보다 인간적으로나 지적으로 성숙하고 싶다는 계산 하에서 앞선 행동을 한 것일 수 있다.
결국 내가 학교를 가고, 밥을 먹고, 공부를 하는 것이 정해진 스케줄이나 욕구 때문만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두고 성숙해지기 위해서 내 스스로 정하고 규제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의 규칙적인 생활에는 나의 이성이 개입되어 나의 몸이 바쁘게 움직이도록 한다.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나의 이성이 기능하는 것이다.
역사는 사건의 과정 속에서 두 개의 경향이 있다. 그 한 경향은 물질적 성질을 가진 것들의 매우 완만한 해체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눈에 뜨이지 않는 필연성 속에서 그 물리적인 것들에게는 에너지의 저하 현상이 있다. 그 활동의 근원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래로 하향하고 있다. 그들의 물질 그 자체가 소모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경향은 매년 봄마다 반복되고 잇는 자연의 싹틈에서 구현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 진화의 상향적 과정에서 예증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펼쳐질 나의 논고 속에서 나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을, 그러한 역사의 두 개의 대비되는 경향성의 측면과 관련하여 고찰할 것이다. 이성은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역사 속의 창진적 요소의 자기규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성의 작용을 떠나서는 이러한 창진적 요소는 무정부적 혼돈으로 떨어지게 될 뿐이다.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이 이성의 기능이라는 주제는 철학적 논의로서는 가장 오래된 주제 중의 하나다. 우리의 정신적 체험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직관, 감정, 지향하는 목표, 강조된 판단이나 결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이성의 기능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성의 성격, 그 본질을 규명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매우 진부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논의는 바로 철학적 사유의 원초적 시간에까지 뻗쳐 올라가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진부한 작업, 그렇지만 매우 근원적 주제들을 다시 상고해보고, 그것을 오늘 우리의 근대적 사고방식으로 조명한 무대에 새롭게 올리는 작업이야말로 철학자의 임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오늘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관계의 세계
첫째, 우리 시대는 '실재'의 근거가 되는 '관계'의 무게를 상실한 어둠의 시대이다. 관계를 상실한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가 관계를 상실하는 순간 실재는 허무로 돌아간다. 그것은 홀로 존립할 수 없다. 존재하기 위하여 그 자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란 결코 없으며, 비록 신일지라도 그러하다. 존재하는 것은 항상 상호간에 연관되어 있고, 또 그 체계적 우주를 필요로 한다. 결국 한 실재는 다른 실재와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실재보다 관계에 우위를 두고 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를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이유는, 그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기 때문 이다. 우주의 관계성은 실재가 태어난 고향이다. 관계는 실재가 거하는 처소이다. 우리는 우리를 세계로부터 분리하여서 따로 설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의 일어섬은 우주의 관계성 안에 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든 실재는 관계이다. 또한 우리의 눈에 보이는 실재는 저 보이지 않는 관계의 실핏줄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얽힌 결합체이다. 우린 여기에서 "나는 너와 맞닿아 있다"는 낮은 지대를 넘어서서 "나는 저 우주와 맞닿아 있다"는 저 우주와의 연대성까지도 만나야 만 하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관계의 상실을 선택하였는지 모른다. 관계의 상실만이 실재의 주체적인 자유를 확보하는 면허증이라고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가 깨어지면, 실재도 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 그 자신도 깨어진다. 관계의 망각은 삶을 찢는다. 우주와의 관련성, 우주와의 연대성을 포기하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삶은 관계이다. 삶은 교환이다. 그리고 세계는 관계의 그물이다. 세계는 관계로 직조되어 있다.
이 관계의 그물을 쉽게 끊을 수 있다고 여겨왔던 인류의 값싼 지혜는, 결국 우리 시대의 모든 전쟁과 기아와 환경 문제의 요인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 모든 심각한 위기는 나와 우주와의 연대성의 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망각의 강을 거쳐 가며 사라져버린 이 연대성의 문제는 우리의 시선을 윤리의 문제로 새롭게 인도한다. 화이트헤드는 새로운 윤리의 왕국을 향한 건설로 우리를 초대한다. 왜냐하면 연대성을 상실한 채 앓아누운 우리 세계는 이제 인류의 숭고한 의(義)를 주리고 목말라 하기 때문이다.
불멸의 세계
둘째,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관계의 세계' 속에서 그 주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체는 자기초월체로서 창조적으로 전진한다고 말한다. 그 점에 있어 모든 주체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를 통하여 새로움에 참여한다. 모든 존재는 주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창조적 활동을 펴 나가는데 있어 하나같이 객체적 불멸성을 향유한다.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소멸하거나 사라지지 않게 된다. 무(無)로 돌아가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모든 존재는 불모의 시간 속에서 결코 무로 와해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자신을 시의(時宜)에 맞게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자기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저기, 양 쪽으로 기다랗게 놓여진 가로수를 지나가는 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포플러 가로수 밑에 떨어진 휴지 한 쪽을 줍는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떨어진 휴지 한 쪽을 줍는 소녀의 행위는 단지 그녀만의 운동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그 소녀의 미덕은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모든 존재들에게 전달되어 영원히 간직된다. 우리 마음의 단층에는 이미 수백만 년을 영위한 인류의 자산이 정갈하게 겹쳐져 있다. 그래서 그 장구한 세월을 거쳐 존속하는 인류의 자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깊이 삼투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주위를 감싸고, 공명을 일으키며 지금도 우리를 지탱한다. 기나긴 시간이 흘러도 객체적 불멸성을 통해 전달된 삶의 나이테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소멸하는 삶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멸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세계에 축적된다. 우리의 삶은 영원에 의하여 향유되었고, 영원과 더불어 향유하고, 영원을 향하여 향유하려는 삶이다. 그리고 우리의 숨결은 영원한 숨결이다. 실로 오늘을 달려가는 우리 삶은 역사적 경로의 계기를 타고 과거로부터 건너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미래를 향하여 계속 이어지며 불멸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 소녀의 미덕은 우리의 혈관에서 지금도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인류를 향한 그 소녀의 보편적 행위는 어느덧 가로수를 넘어서 온 도시에 넘실거린다.
이제 <모든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다. 는 화이트헤드의 저 깊은 시선은,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근시안에 사로잡힌 현대 문명에 대하여 준엄한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또한 묵묵한 발걸음으로 희망을 꿈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빛을 오늘도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