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제 20강 (이 근호목사, 2008년 9월 19일-b, 서울의존교회)
둘째시간 시작합시다. 첫째시간에 제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구원받은 사람, 참된 믿음은 자기를 벗어나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자기생각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로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처럼 자기를 포기하고 전체가 하나라는, ‘나’ 하나가 아니라 ‘나’말고 다른 하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전부인데. 첫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자기 밖으로 못 벗어난다고요. 그래요. 못 벗어납니다.
글쎄, 못 벗어나는 사람이 어떻게 ‘내 몸은 주님의 몸이고…’ 라는 이야기가가 억지로가 아니고 아주 당연히 그렇다는 식으로 술술 나올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이야기란, 우리가 구원받는 능력이 천지 창조한 능력, 홍해가 갈라지는 능력,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능력, 같은 큰 능력이 임해야 구원받습니다.
구원, 하니까 아무나 개나 소나 구원받는 줄 아는데 주님의 천지창조, 해와 달을 다 만든 그런 능력이 퍼부어져야 우리가 구원받아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못 벗어나요. 지난시간 끝부분에 한 것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구원에 합류됩니다. 합류될 때는 ‘나’를 그냥 합류시키는 식으로 넣어주지는 않습니다.
나를 죽이고 합류될 때 나 말고 ‘어? 이미 하나가 있네’라는 말을 할 수 있거든요. 나는 이미 죽은 자로서의 나, 죽은자가 되어서 여기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누가 찾아오지요. ‘합류해. 이제 네 몸은 네 몸이 아니고 나, 예수님의 것이야’ 라고 이야기하면서 찾아오지요.
찾아오게 되면 우리 보통 인간들은 나라는 것이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도 안 지려고 악을 쓰지요.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바보 등신은 자살을 안 합니다. 자기생각에 몰두하는 사람이 자살하는 거예요. 자기 생각에 몰두하니까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하잖아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깨기가 힘들어요.
유명한 소설가 헤르만 헷세가 지은 소설 중에 『데미안』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옛날에 고등학생들이 좋아하는 유명한 소설입니다. 거기에 보면 ‘어른이 되려면 알이 껍질 깨고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 껍질이 너무 두껍습니다. 이게 알이고 이 속에 병아리가 있다고 칩시다.]
이 속에 든 병아리가 자기 스스로 날개 짓을 해서 이 껍질을 깨고 나와 버리면 그대로 닭이 되듯이 사람도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인데 사실은 이 껍질이 너무나 두꺼워서 어떤 인간도 자기라는 껍질을 벗을 수가 없어요. 이것을 키우면 키웠지 이것을 깨고 나올 수는 없어요. 따라서 외부에서 ‘구원받으세요. 탈출 하세요’ 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기가 살아 있는 이상은 이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회 10년 20년 다니고 심지어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자기자존심 상했다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도 있어요. 교회에 그런 사람이 한 둘이겠습니까? 심지어 어떤 목사는 예배를 드리다가도, 예배가 뭡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예배시간인데, 자기 자존심 건드렸다고 삐져서 ‘오늘 예배 안 드립니다’ 하고 치워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하나님을 안 섬기는 사람을 정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르고 그것을 어떻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정상이 될 수 없어요. 왜? 하나님을 섬길 때 자기를 깨고 섬겨야 되는데 자기를 깨지 못하고 자기를 키우면서 섬기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섬기니까 나를 판사 만들어주세요. 나를 재벌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자기를 점점 더 키우면서 하나님께 가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는 안 깨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나 하나님 안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도 안가고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켰다’고 하면서 절에 가요. ‘하나님은 코도 없고 눈도 없는 분이다’라고 하면서 비난하고 욕하고 자기라는 껍질을 못 깨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네가 네 스스로 탈출해서 하나님을 만나라’가 아닙니다.
탈출이 안돼요. 안되니까 하나님이 그 속에 침투하는 식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침투하게 되면 나의 절대영역, 나만의 영역, 다른 것은 다 놓아도 이것만은 놓지 않겠다는 것, 그것마저 박살나 버립니다. 그것마저 깨뜨리고 그것이 깨지면 여기서 뭘 느끼는가? 자기의 죽음을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내가 하나님한테 얻어맞아 죽는구나. 내가 믿는 하나님한테 이렇게 얻어맞아 죽을 줄이야.’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죽어야 산다.’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너는 죄인이야. 네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구원받아. 네가 그동안 구원 못 받은 것은 네가 죄인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죄인인 것을 모르고 자꾸 자기 자신을 안 버리기 때문에 엉터리 예수를 찾게 되는데 네가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내가 십자가에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이 바로 네가 산 순간, 네가 너 바깥으로 빠져나온 순간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면을 구약에서는 집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갈 때 무슨 바다가 앞을 가로막았습니까? 홍해바다였죠. 홍해바다가 갈라진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고 치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밀어닥치고 앞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바다가 있다고 했을 때에 여러분 같으면 원망 안 하겠습니까?
거기서 그들은 뭘 느꼈겠습니까? 진퇴양난 속에서 ‘아,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그것도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홍해를 건너와서 광야에 갈 때 그들은 무려 열 번이나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볼까요? 민수기 21장 5절입니다.
민수기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여기서 그들은 뭘 느꼈습니까? 죽음을 느꼈지요. 여기서 그들이 뭘 느꼈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죽는 순간이 올 때 비로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배고프면 안 먹으면 되고 죽으면 죽으면 되지’라고 한 것이 아니고 기어이 반발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까? ‘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대들 수 밖에 없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되받아 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마지막 무엇은 포기 못하겠다? ‘나, 나는 포기 못하겠다.’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그 나를 뒤집어라. 그 나 뒤에 천국이 있다. 천국은 바로 네 뒤에 있다. 너만 치워버리면 네 뒤에 바로 천국이 있는데 그 천국을 네가 가로막고 있다.’
다 왔는데 자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통과 될까요, 안될까요? 통과 안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통과하는 방법을 하나님 쪽에서 제시해주었습니다. 그게 뭐냐? ‘놋뱀을 보라’입니다. ‘나’라는 것이 왜 생기는가 하면 과거가 누적이 되어서 생기거든요. 이 사람들이 옛날에 어디서 살던 사람입니까? 애굽에서 살던 사람 아닙니까? 민수기 20장 5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민수기 20: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수기 11장 5절도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민수기 11:5,6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나’라는 것은 자기 과거의 축적된 경험이 쌓여서 나가 됩니다. 옛날에 애굽에 있을 때는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 정력 좋다는 것,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었는데 어떻게 이꼴이 되었느냐고 하는 겁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애굽….’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것이 신자나 불신자나 관계없이 다 같이 출세하려고 애쓰는 그런 세상에서 습관화되어서 탄생된 나로 살아갑니다.
부모도 애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모든 교회당 새벽기도회 시간에 가르치는 것이 뭐냐? ‘너는 이 애굽에서 출세해라. 이 애굽에서 성공해라. 애굽에서 대장질해라.’ 우리는 그래서 항상 그 교육을 받고 애굽 사람, 이 세상사람 되는 것을 우리는 잊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요 18:36)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가 언제 그런 설교를 했지요. ‘비행기가 떠야 되는데 고장이 나서 하루 종일 활주로를 돌아다니면 그게 비행기냐?’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비행기가 아니고 애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비행기입니다. 뜨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게 중심이 나예요. ‘신이시여 내가 원하는 내가 되게 해 달라’ 그것 때문에 교회 갑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 믿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여기서 경상도 사투리가 하나 들어갑니다. 수금포. 표준말로는 삽입니다. 삽으로 푹 떠서 인간이 가지 못하는 천국, 예수님이 구름타고 가신 그 천국, 불수레를 태워서 올려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누가 방해하는가?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장된 ‘나’가 바로 반대하는 거예요. ‘주님, 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제가 한수 가르치겠습니다. 내가 뭣 때문에 교회 나오는데 이렇게 나오시면 저 교회 안 나옵니다. 저 교회 발 끊습니다.’ 주님은 노래를 불러요. ‘교히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면 되고 천당 가기 싫으면 안가면 되지. 뭐든지 맘대로 하면 그만이지.’
교회? 한국교회? 전부 다 가짜입니다. ○○교회 빼놓고. 한국교회 전부 다 이단입니다. 어떤 분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저는 그 말씀을 표구해서 우리 집에 걸어놓고 싶다고 했어요. ‘예수 믿기 싫은데 잘되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교회 올 때마다 거짓말을 해 대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 있어요. 당회장부터 어린아이까지거짓말로 하나가 되어 있어요. 자기를 사랑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로 하나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복음 전하는 교회 갔다가 다른 교회 가는 이유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제 갈 길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쪽도 하나로 다 모여요.
자기 사랑 포기 못하는 사람 다 한쪽으로 모으고, 주님 사랑하는 사람 한쪽으로 다 모으고 결국은 천당 지옥은 이 땅에서 이미 분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애굽(나)으로 돌아가려는 관성 때문에 안 되는것을 어떻게 하나님은 되게 하시는가? 그게 바로 놋 뱀이었습니다.
놋 뱀을 설명하겠습니다. 놋 뱀에 담긴 비밀이 얼마나 어려운지, 놋 뱀이 무엇이며 왜 놋뱀을 들라고 했는가? 그 비밀을 이 한글자에 들어 있습니다. ‘벌.’ 하나님의 말씀, 곧 법은 벌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그 법으로 살아나게 되어 있어요. 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마음이 순한지 ‘학생 여러분, 숙제를 꼭 해주세요. 숙제 검사 꼭 합니다.’
애들이 진짜 숙제검사를 하는지 알고 코피 터져가면서 숙제를 했어요. 그런데 숙제검사를 안하는 거예요. 또 선생님이 ‘어린이 여러분, 숙제 꼭 해주세요. 내일 숙제검사 합니다.’ 어떤 애들은 ‘숙제검사 또 안한다’ 고 했는데 또 다른 어떤 애들은 ‘이번에는 한다’ 하면서 열심히 숙제를 했더니 또 숙제검사를 안합니다.
그러고 나서 또 ‘어린이여러분, 내일 숙제검사 꼭 합니다. 숙제 꼭 해오세요.’ 애들이 일제히 말합니다. ‘에~이! 숙제 검사 하지도 않으면서.’ 그 다음날, ‘여러분, 숙제 했습니까? 지금부터 검사 하겠습니다.’ 그래서 애들 다 얻어맞았어요. 꼭 선생님이 양치기 소년 같아요. ‘늑대가 온다’고 했는데 안 오고 ‘늑대가 온다’고 했는데 안 오고 진짜 세 번째는 늑대가 와버렸어요.
아프게 벌을 받을 때 ‘아하, 진짜 선생님의 말씀이 맞구나’하는 것을 알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어떤 벌을 내리는가? 말씀대로 안하고 원망했을 때 무서운 불 뱀이 와서 어떤 사람들은 물려 죽어가고 있기 어떤 사람은 이미 죽었을 때, 사람들은 생생히 느꼈어요.
‘아, 말씀이 헛말이 아니고 진짜 벌을 받는구나’ 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때 주님께서 내 놓은 해결책이 뭐냐? ‘놋 뱀, 백성들을 물려죽게 한 그 뱀, 회초리죠, 그 뱀을 높이 들어라.’ 높이 들 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는 하나님이 맞습니다. 옳습니다. 나는 벌주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잘하겠습니다’ 라고 쳐다보는 그 사람은 용서를 받아서 깨끗하게 나아서 구원을 받고 그 하나님의 벌주심에 대해서 외면할 때 그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요.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놋 뱀에 담긴 비밀입니다. 벌주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살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는 것,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 있다는 것을 벌을 통해서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 벌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누가 받습니까? 예수님이 받지요.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무엇처럼? 마치 모세가 놋 뱀을 든 것처럼.(요 3:14,15)
마치 오뎅에 작대기가 꽂힌 것처럼 누가 작대기에 꽂혀서 올라간다? 예수님 본인이 벌 받는 모습으로 높이 들릴 때 ‘저 벌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벌이다’라고 그 독생자를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요 3:16) 그게 바로 자아로부터 통과하는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그 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냥 매를 몇 대 때리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나’라는 그 자체, 인간 육신이라는 그 자체를 벌주는 거죠.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인간이 왜 ‘나’, 자아를 주장하느냐? 처음에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심어놓은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존중하고 하나님이 심어놓는 그 나무들을 존대해서 그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라고 인간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인간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어놓은 선악과의 생명나무를 통해서 나타내는 예수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간이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에 나오지요? 만물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고요? 예수님을 위해서 인간 만들어놓고 예수님을 위해서 선악과와 생명나무 있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이 선악과가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망쳤다는 점에서 갑자기 자기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 입장에서는 누구를 치워버려야 됩니까? 가로막는 누가 있습니까? 나를 치워야 돼요. 어떤 식으로 치웁니까? 벌을 줌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함으로써 나를 걷어치우고 내가 없어질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나는 이 땅에서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 가져다 바치라는 몸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몸으로 내 몸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을 주시고 벌주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는 어디서 생겨났습니까? 이들은 원래 이 벌을 통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게 유월절이라는 겁니다.
유월절 날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때 그들이 뭐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자기들이 열심히 찬양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기도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무엇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자기 몸을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자기들 몸은 아무 관계없었지요. 그냥 가만있었지요. 가만있었는데 하나님은 뭘 쳐다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까?
이스라엘의 몸짓? 행동? 아니지요. 이스라엘의 문 앞에 발려 있는 뭘 보고? 피, 그냥 피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된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우편배달부가 와서 ‘계십니까? 사인하세요’ 하고 배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편배달부가 턱 보고 난 뒤에 ‘어? 이 집이 맞네.’ 하고 물건을 놓고 그냥 가버리죠.
그러면 ‘어? 택배(소포)가 왔네. 이 사람들이 뭘 보고 이렇게 배달했지? 아하, 밖에 걸려 있는 문패를 보고 왔구나.’ 그런데 그 문패가 누구의 문패입니까? 내 이름은 이근호인데 이근호문패가 아니고 뭐가 있습니까? 어린양의 피, 주의 이름이 문패가 되어 있으니까 이 집, 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의 소유, 누구에게 편입, 누구에게 합류되었다?
예수님, 어린양의 피에 합류되었다는 것 때문에 생겨난 것이 무슨 나라?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집단적으로 끌어 모은 자기백성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7절과 8절입니다.
에베소서 4:7,8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예수님의 자식이 한명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여러 명이 됩니다. 여러 명이 될 때 그들을 자기 사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에게 뭘 바친 것이 아닙니다. 여기 포도가 있는데 예수님이 포도 받으시고 구원해준다고 하면 저는 포도농사 짓겠습니다. 목사 할 필요 없어요. 포도농사 지으면 구원받잖아요. 우리가 바친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준 게 있어요. 그 선물로 준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호적을 바꾸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호적의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내가 우리 집 주인이었는데 호적이 바뀝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주도 하나요’, 예수님이 우리의 주, 주님이 되는 겁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주 예수여, 나의 임금이시여.’ 어떤 사람이 우리의 구세주가 따로 있는 것을 아느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선물로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선물은 은혜로 줍니다. 그냥 선물로, 공짜로 주는데 자기 사람들에게 나눠 준다고요. 나눠줘서 선물로 받은 사람은 자기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얻었습니까? 그냥 주님으로부터 얻었지요? 주님한테 받은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성도가 되고 주님의 소유의 합류가 되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구원받았어요. 이것, 주님한테 받았잖아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을 받았어요. 이것을 서로 자랑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게 더 나으냐, 이게 더 나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게 더 좋다, 혹은 이게 더 나쁘다, 가 아니라 주신 것은 전부 다 ‘주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다 하나에 이미 합류되어 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선물로 준 거예요.
선물로 안 받으면 경쟁이 됩니다. ‘네가 잘났어? 내가 잘났어?’ 그런데 선물로 받게 되면 누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잘났고 주님이 우리 주님이 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한분뿐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뽑아 세운 겁니다. 제가 새벽마다 한 시간씩 산책을 하는데 그날도 산책 중에 한 30대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를 봤어요.
그분이 그 시간대에 산에 오니까 저하고 마주치게 되는가본데 그 분이 늘 입고 오는 티셔츠에 무늬가 있어요. 등 뒤에는 ‘2학년 7반’이라고 되어 있고 앞에는 ‘야! 신난다. 다시 만나자. 우리 잊지 말고 또 만나자’ 이런 것이 있어요. 그리고는 테두리가 쳐져 있고 그 안에 잔뜩 이름들이 씌어 있어요. 아마 졸업할 때 기념으로 맞춘 셔츠 같아요.
제가 하도 그 셔츠를 봐서 거기 씌어져 있는 이름을 거의 외웠어요. 거기 이름 씌어져 있는 사람은 그 테두리 밖을 안 벗어나지요. 이름이 어디에 적혀져 있습니까? 여기 2학년 7반, 이 안에 들어 있지요. 2학년 7반 이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와 관계없이 한번 2학년 7반은 영원한 2학년 7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구원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너만 구원 받아라’는 식으로 달랑 구원한 적이 없습니다. 개인 구원 없습니다. 어떤 구원만 있다? 집단구원입니다. 개인구원 받아서 그 다음에 모여서 하나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 된 것을 힘써 지키라’입니다. ‘이미 너는 하나야. 하나 된 것을 잊지 말아라. 절대로 잊지 말아라.’
하나 된 것을 잊어버리고 만약 개인 구원으로 나간다면 ‘주님, 저 사람에게는 복주고 왜 나에게는 복을 안줍니까? 저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응답되는 복 주고 왜 나에게는 안줍니까?’ 경쟁하는 거예요. 지금 너와 나의 자질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더 성화되었나, 그 문제 아닙니다.
처음에 강의한 내용을 다시 하고 싶어요. 저는 그 말을 할 때마다 너무 감격스러워요. 엘리야가 불 수레 타고 한 10킬로미터 올라갔는데 저 땅 밑에 보니까 2학년 7반의 못된 아이가 있단 말이죠. 자기는 천당 가고 있으면 ‘주님, 쟤가 나 놀렸어요. 혼내주세요.’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지금 괴롭힘 받은 애는 불 수레 타고 능력을 받고 올라오는 입장이고 그 괴롭힌 애는 지금 이런 능력도 못 받은 입장 아닙니까? 누가 더 안 되었고 누가 더 불쌍합니까? 주님의 능력을 못 받은 애가 더 불쌍하잖아요. 그 불쌍한 애를 갉으려고? 갉을 것이 뭐가 있다고. 불과 몇 년이면 늙어 죽을 때 그게 돈이든 뭐든 다 놓고 가요. 소용없다고요.
중요한 것은 구원을 받는 능력이 이게 소중하고 귀한 것이지, ‘세상, 애굽에서 마늘 많이 먹고 수박 많이 먹고 부추 많이 먹어라. 우린 그런 것 안 먹어도 돼. 우린 구원받으면 돼’, 이것이 중요하지, ‘쟤는 수박 먹는데 우리는 만나 먹고 이렇게는 못살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오면 섭하지요. 주님께서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여러분, 장난감 비행기 쪽입니까, 아니면 진짜 비행기 쪽입니까? 비행기는 떠야 맛입니다. 하늘로 떠야 비행기지 땅에서 굴러다니는 것은 장난감입니다. 이게 장난감이지 무슨 비행기입니까? 비행기 보면 참 신기해요.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별로 안신기하지만 그냥 보면 참 신기해요. 어떻게 그리 무거운 것이 하늘로 뜹니까?
그것보다 더 신기한 것이 불 수레 불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신기한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나밖에 모르는 내가, 어떻게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어떻게 해서 주님이 한분이며 그 주님 덕분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내가 알게 되었을까?’ 이런 기쁨이 있어야 이런 시장바닥에 있는 안 믿는 사람들하고 비교도 안 됨을 아는 겁니다.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동급 반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어린 자녀들, 이 애들 애굽입니다. 그리고 내 배에서 나왔기 때문에 역시 자기밖에 몰라요. 애굽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안 가르쳐줘도 본성상 세상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어요.
지금 여기서 여러분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지만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야 진짜 구원받으면 ‘아이고, 정말 은혜로만 구원 되는구나’가 되는 겁니다. 괜히 기대 많이 했다가 안 나오면 실망이 크잖아요. 실망 덜 하라고 제가 이런 이야기 합니다. 바라기는 다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애굽에 속합니다.
그럴 때 부모 역할이 뭐냐 하면, 부모는 가정에서 목사의 역할입니다. 복음을 아는자, 먼저 복음을 아는 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애가 세상적으로 억울한 일 당했다든지, 공부 못해서 낙심하고 절망스러워 할 때에는 용기를 북돋워주세요.
‘숙제 안 해서 선생님에게 맞았나?’ ‘맞았어요.’ ‘더 맞아봐야 한다. 잘 맞았고 더 맞아야 한다. 더 맞아봐야 네 자신이 나쁜 인간인줄 안다. 벌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해 주세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네 하는 일이 공부 아닌가? 공부하기 싫거든 오늘 밥 없다.’
이것이 목사로서 부모가 할 일입니다. ‘아이고, 내 새끼를 누가 때렸더냐?’ ‘선생님이 때렸어.’ ‘내일 내가 학교 찾아갈게.’ 이렇게 나오지 마시고, 자꾸 ‘네 선생님이 참 훌륭하다. 네가 게을러서 하나님이 보내신 모양이다. 더 맞아라. 맞아도 안 죽는다. 맞아야 네가 큰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애굽 같은 이스라엘을 모세가 놋 뱀을 들면서 이렇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으냐, 이 말이죠. 실제로 벌을 내려 준다는 이것이 얼마나 고마우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은 죽어도 무엇은 남기를 원한다? 이스라엘은 종속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성경은 개인을 위한 책이 아니고 무엇을 위한 책입니까? 교회를 위한 책입니다. 교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일찍 죽더라도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죠.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가 일찍 죽었지요? 물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기는 했습니다만. ‘오빠가 죽더라도 마리아와 마리다야 너무 개의치 말라. 만약에 그가 이스라엘이 된 채 죽으면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왜? 같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내에는 뭐가 없는가? 시간요소, 이게 없어요.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천당 가면 그만입니다. 1995년도에 죽으나, 2008년도에 죽으나 한곳에 합류하면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약 수 천년전에 아브라함 있고 이삭이 있고 먼저 간 모세 엘리야 여기 다 있어요. 그 다음 차례가 누구 차례입니까? 저와 여러분 차례입니다. 그냥 합류하면 됩니다. 오늘 이거 하나 배웠습니다. 합류!
2008년도에 합류하는가? 1900년에 합류했는가? 2050년에 죽어서 합류하는가? 그 시간은 별 문제 없어요. 어디에 합류하느냐? 합류하게 되면 ‘내가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았다’입니다. ‘주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우리가 구원받았구나.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뭘 주어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뭡니까?
내 중심으로 살던 나에게 나 중심으로 살던 그 뒤편에 이미 천국, 영생이 있었던 거예요. 그걸 평소에 누가 가렸습니까? 내가 가렸기 때문에 내 뒤에 붙어 있던 영생을 자꾸 가렸던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가끔 우리를 치면, 내가 죽으면 내 뒤에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만 알아요.
‘야, 내가 열심히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구나. 괜히 내가 나 혼자 낙심하고 절망했구나.’ ‘쟤가 나를 막 미워해요.’ 그런 식으로. 그럴 필요 없는데, 미워하든 안 미워하든 이미 구원받았는데. 그래서 합류하는데 그 합류는 시간에 관계없지요. 안 재환씨를 아시지요? 다른 사람이 죽어도 별 이야기 없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고 그렇게 야단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젊거든요. 젊을 때는 안 죽는 것이 보통이잖아요. 연세 많은 사람이 죽으면 호상이라고 해서 ‘호호호호호!’ 하고 웃으면서 장례를 치르지만 젊은 사람이 죽으니까 그의 부인인 정 선희가 세 번씩이나 졸도를 해서 다 죽어가요. 평소에 새벽기도회를 다니던 사람인데 졸도를 해 버렸어요.
도대체 새벽기도회 때 무엇을 기도했으며 새벽기도회때 그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던가, 말이죠. 우리교회 새벽기도회는 안하지만 만약 하게 되면 ‘여러분, 늘 죽으세요.’ 만약 새벽기도회 때마다 이런 설교를 들었더라면 새벽마다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당장 죽어도 나에게 손해가 아니구나’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 몸은 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데려간다고 해도 내가 화 낼 이유가 없구나. 안 돼요, 라고 가로막을 이유가 없구나.’ 주님께서 자기 몸 자기가 회수하는데 왜 내가 가로막습니까? 언제 가도 합류하면 그만인데. 그래서 안 재환씨가 36살에 죽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몇세 때 돌아가셨습니까? 1) 36세 2) 35세 3) 34세 4) 33세 몇 번? 33세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안 재환씨는 예수님보다 3살 더 살았어요. 그만큼 제대를 늦춘 거예요. 예수님은 33세만 살았어도 ‘더 살련다. 더 살련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합류하면 그만이니까. ‘나이, 성별, 몇 년 살았는가? 몇 년도 사람인가? 너 해병대 몇 기인가?’ 그런 것을 안 묻습니다. ‘네가 어느 교회 출신인가? 의존교회냐, 우리교회냐?’ 그런 것을 안 묻습니다.
‘고 3이야? 안경 썼어?’ 그런 것을 안 물어요. 젊었거나 나이 드셨거나 이거 하나 아세요. 내 몸은 애초부터, 창세전부터 주님의 몸으로서 키워져 온 거예요. 꽃을 따고 열매 따는 것은 농장주인 맘대로 입니다. 꽃 따고 열매 딸 때 ‘따지 마세요’ 하면 안 됩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저주를 했잖아요(마 21:18-22)
.
이것은 ‘무화과나무야, 너는 열매를 맺을 때 맺어 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필요할 때 알아서 데려 갈 사람 데려가시고 남겨 둘 사람 남겨두기에 주인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 우리가 관여할 바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느 쪽에서 합류하든 그게 제일 지름길입니다. 바로 올라가면 되니까요.
멀리 돌아갈 필요 없어요. 바로 올라가면 됩니다. 오늘밤에 너와 함께 어디에 있으리라? ‘낙원에 있으리라.’ 그것보다 더 지름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편히 쉬게 하리라.’ 얼마나 좋아요. 평소에 우리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다’ 라는 이것이 훈련이 안되다 보니 기도하는 것도 ‘죽이면 안 됩니다. 마지막 내 자아는 포기 못합니다’ 라고 합니다. 협박인지 기도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여러분, 약속합시다. 제발 주님을 협박하지 마세요. ‘날 죽이면 안 됩니다. 내 인생 망치면 안 됩니다. 이것만큼은 못 내놓겠습니다.’ 이렇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 하나님 맘대로 하세요. 맘대로 하세요.’
세상에서 행복이란 뭐냐? ‘나 없다.’ 이것보다 더 행복한 게 없어요. 나는 없고 주님의 몸뚱아리만 있고, 이제 주님의 지시만 나에게 있고 숙제하라면 숙제하고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하고 시험치라면 시험치고, 복음 전하라면 복음전하고 강의하라면 강의하고, 집에 가라면 집에 가고, 놀라면 놀고, 아프라고 하면 아프고, 이렇게 주님의 지시만 받으면 돼요.
한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코피가 난다. 코피 나는 것이 나쁜 겁니까? 아니지요. 어떤 생명체가 코피 나는 것을 보면 ‘그것 참 신기하네’ 그러면 됩니다. ‘엄마, 나 코피나. 나 죽었다’ 이러지 마시고 ‘어? 내 몸이 아닌 이 몸에서 피가 나오네. 피가 나오는데도 살아 있네. 이상하네’ 하고 그것을 아주 신기하게, 감사함으로, 내 몸이 아니고 하나님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반겨야 합니다.
‘누가 그랬어? 나는 피나면 안 돼. 하나님이 책임지세요’ 라고 하지 마시고 ‘어? 나한테서 피도 나네’ 하면서 뭐든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몸도 아니고 주님의 몸인데 건방지게 내 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제 주님의 몸으로 생각하는 그 순간 그 동안 몰랐던 감사와 행복이 밀려오고 내 몸이 아니기에 모든 것이 선물이고 축복인 것을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