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흥사단 약사
1. 고등학생 아카데미의 창립과 학생 아카데미운동의 확산
자갈밭에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우고
대구흥사단은 1964년 9월 13일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의 창립으로부터 시작한다. 대구고A가 창립되기 1년 전인 1963년은 흥사단이 창립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청년운동으로 출발한 흥사단이 창단 50주년을 맞으면서 단우의 노령화로 흥사단의 후속 세대의 확보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요한 선생의 주창으로 학생아카데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전국 순회강연을 추진하였다. 대구에서도 1963년 가을에 주요한 선생의 교양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강연회에 참석했던 이만근 군(당시 대구공고 3학년, 전 흥사단 공의회장)을 중심으로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초대회장 박병전:대구공고 2학년)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가 창립되기 이전에 대구에는 도산사상을 공부하는 <근우회>라는 단체가 있어서 시민강연회 개최와 아카데미 창립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1963년 가을의 주요한 선생 강연회 이후에는 이만근, 엄덕수, 서현수 등의 고등학생들이 장차 흥사단의 학생조직으로 활동할 계획으로 <수양동우회>를 조직하였으나 흥사단 산하 고등학생아카데미 결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부 회원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할 것을 강력히 희망하여 아카데미로 개편되지를 못하였다. 이에 이만근 군은 <수양동우회>를 떠나 박병전(당시 대구공고 2학년), 한용외(당시 대구고 2학년) 등과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를 창립하였다. <수양동우회>는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가 창립된 이후 오랫동안 아카데미와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1965년 가을에는 대구지역 최초의 고등학교 학내 조직으로서 <대구고등학교 도산연구회>가 창립되었다. 대구고등 도산연구회는 흥사단 산하의 학생아카데미로 조직되어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와 긴밀하게 교류하였으나 창립 당시의 회원들이 모두 졸업한 이후에는 흥사단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초창기의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는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회원들이 모여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회원들은 각 회원들의 집을 순회하면서 동맹독서, 토론, 회원강론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때로는 재건국민운동 중구지부 사무실, 대구시청 청소과 사무실 등에서 집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회원들은 동우성로원 위문행사, 달성공원 및 2·28기념탑 조기청소, 하기농촌봉사활동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창립1주년이 되는 1965년 9월 13일에는 당시 대구에서 가장 큰 현대예식장에서 약 700여명의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안병욱 교수의 <민족의 스승 도산의 사상과 생애>에 관한 공개강연회와 회원들의 발표회를 개최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회원들의 발표 내용을 보면 시 낭송, 콩트 낭독, 테너 독창, 소프라노 독창, 여성 사중창, 남성 삼중창, 합창, 무용, 피아노 독주, 트럼펫 독주 등 매우 다양하였다. 창립 1주년을 맞는 20여명의 고등학생 회원들이 이처럼 성대한 행사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로서 회원들의 열정과 단결력이 얼마나 강인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후 대구지역에서 흥사단운동이 활성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A의 확산과 대A의 창립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가 창립1주년을 맞은 이후 회원들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10여 명이 참여하던 주말 정기집회에 20~30명을 넘어서게 되었고 안병욱 교수의 순회강연이 개최된 1966년에는 40~50명을 넘어서서 100차 집회를 개최했던 10월 29일에는 64명이 모여서 기념집회를 가졌다. 회원들의 학교분포도 초기의 소수 학교 중심에서 점차 대구지역의 주요 고등학교가 두루 참여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고A의 회원수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여러 학교로 확산되면서 하나의 조직으로서는 활동의 한계를 느끼게 되어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는 점차 학교 단위로 분할되기 시작하였다. 1966년에 대구공고, 청구공전, 경북대사대부고가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뒤이어 경북공고(1968), 경북고(1971), 계성고(1973)에 아카데미가 창립되었다. 이러한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의 양적 성장은 지방으로 확산되어 1968년에 김천성의여상 아카데미가 창립되고 이어서 감포고(1969), 경주고(1970), 안동공고(1978) 등에도 아카데미가 조직되었다.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가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고 초기 고등학생아카데미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1966년 4월에는 대학생아카데미(초대회장 김병렬:대구대총학생회장)가 창립되어 고등학생 중심의 흥사단운동이 대학사회에까지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기 대학생A는 고A출신의 수가 매우 적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다가 고A출신의 대학진학자가 대폭 증가한 1968년 10월 19일에 재기총회를 개최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이후 대학생A는 계속 충원되는 고A 출신을 영입하여 영남대, 경북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영남공전(구 청구공전)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점차 회원들이 대구교육대, 계명대, 한국사회사업대(현 대구대학교)로 확산되었다. 포항과 안동에도 포항실업전문대학과 안동상지전문대학에 아카데미가 조직되었다.
이처럼 대구의 학생아카데미운동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걸쳐서 고A와 대A를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으며, 학생아카데미 출신들이 단우로 계속 입단하여 대구분회를 결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시국이 어수선해지고 학생들의 관심이 진학과 취업을 위한 실리 위주의 활동에 치중되면서 19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아카데미의 활동도 점차 위축되는 경향을 보여주게 되었다.
황무지에서도 외롭지 않은 격려와 보살핌의 손길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대구의 학생아카데미운동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분들의 격려와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이 고 강정애 여사이다. 강 여사는 기독교장로회 경북노회의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신앙의 모범이 되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일찍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회사업가였다. 당시 강 여사는 대구 삼덕동에 삼덕육아원을 운영하면서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전국 노회 모임에서 부산분회의 김광업 단우로부터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의 활동상을 전해 듣고 육아원 2층 넓은 교실을 집회장소로 제공해 주었다. 창립1주년 행사를 마친 1965년 9월부터 1년 반 동안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는 주말마다 넓은 장소에서 안정적인 집회를 개최할 수 있었고, 고A가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강 여사의 보살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67년 2월에는 삼덕육아원 앞에 직접 경영하던 봉산목욕탕 2층(약 20평)을 임대료라 할 수 없는 명목상의 보증금(20만원)만 받고 흥사단 단소로 제공해 주었다. 이 장소에서 대구흥사단은 1978년 2월 남산동(영남고 앞)으로 단소를 옮길 때까지 11년 동안 수많은 고등학생 대학생 아카데미 회원들을 배출하였고, 대구분회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로서 삼덕육아원과 봉산탕2층은 대구흥사단에서 초기에 활동한 회원들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남게 되었다. 대구흥사단에서는 1967년 6월 24일에 강정애 여사를 특별단우로 추대하였다.
단 내에서는 안병욱 교수가 해마다 한 두 차례씩 각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순회하면서 도산사상과 흥사단이념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아카데미 운동을 확산시키는 가운데 대구지역에 거주하던 김정주 단우(대구시청 근무)와 권영식 단우(경북대 강사)가 아카데미 지도에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하였고, 이어 계명대 조교이던 김진홍, 도종옥(개명 도형수) 단우가 아카데미 지도에 합류하였다. 이분들의 지도와 후원이 아카데미의 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
2. 감동과 신념을 안겨준 수련활동들
조기청소와 근교 등산활동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생아카데미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흥사단 외부의 여건으로서는 민족중흥을 외치며 조국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젊은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자극하였고, 안병욱 교수를 주축으로 한 흥사단의 훌륭한 연사들이 순회강연을 통해 이들의 민족의식에 불을 지펴서 대거 흥사단으로 인도하였다. 한편 흥사단 내부의 요인으로서는 도산사상과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다양한 활동들이 젊은 학생들의 지적욕구와 탐구의욕을 충족시켜주었다는 점이다. 흥사단 아카데미에서 행했던 각종 발표와 토론, 강론, 희락회, 수련회, 체육회 등의 프로그램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새롭고 신선한 것들이었으며, 회원들이 흥사단 활동에 흥미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각종 수련활동들은 아카데미 활동을 거쳐 간 많은 회원들의 가슴 속에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다.
대구지역의 수련활동은 조기청소와 근교 등산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의 조기청소는 창립 초기부터 달성공원과 2·28기념탑에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달성공원은 단군성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고, 일제에 항거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한 왕산 허위 선생의 동상과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대구시민들에게는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경건한 성지로 인식되는 장소였다. 지금은 두류공원의 한쪽 구석으로 옮겨져 있지만 명덕로타리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던 2·28기념탑은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분연히 일어섰던 1960년 2월 28일의 의거를 기념하는 상징물로서 학생운동의 메카로 의식되던 장소였다. 일요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이러한 성지를 청소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마음을 정갈하게 가다듬는 일이었으며, 회원들의 마음속에 정의감과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성스러운 수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학생운동이 격화된 시기에는 2·28기념탑에서 행하는 행사를 경찰이 저지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말자 달려와 경찰이 출동하기 전에 청소를 마치는 경우도 있었다.
대구 근교의 등산활동도 중요한 수련의 한 과정으로 꾸준히 진행하였다. 근교 등산은 1966년 2월 25일 회원 25명이 대구 앞산(대덕산)에서 등산회를 개최한 이후 매년 2월 말이면 정기적으로 등산하였고, 이후 청룡산, 비슬산, 팔공산 등을 등반하여 <YKA정기등산>의 기틀을 만들었다. 대학생아카데미의 창립을 기념하여 1966년 6월 17~18일에 팔공산에서 1박2일로 개최한 등산회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33명이 참여한 최초의 야영등반 행사였다.
하계수련회와 동계수련회
회원들의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수련행사로는 하계수련회가 단연 으뜸일 것으로 생각된다. 시설이 열악하고 장비가 빈약했기 때문에 고생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보람도 컸다.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의 하계수련회는 농촌봉사활동으로 시작되었다. 1965년 7월 27일부터 8월 2일까지 일주일 동안 경북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와 김흥리에서 진행한 농촌봉사활동에서는 김매기, 이발봉사, 변소소독, 우물소독, 의료봉사, 마을청소, 향토계몽좌담, 주민위안회 등을 실시하였다. 이 행사를 마치고 한용외 군이 대구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활동 내용을 보고하기도 하였다.
1966년 7월 27~29일에는 경남 밀양군 산외면 긴늪숲에서 부산분회와 함께 하계수련회를 개최하였다. 부산에서 단우 및 아카데미 회원 55명이 참여하고, 대구에서 33명이 합류한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통신이 원활하지 못하여 대구 회원들의 참여를 통보받지 못하고 부산 자체 행사로 준비하였던 행사에 대구 회원들이 대거 합류함으로써 행사진행에 큰 고초를 겪었지만 이후 대구와 부산의 회원들이 긴밀하게 교류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긴늪숲의 수련회 이후 1967년부터는 대구에서도 독자적으로 하기수련회를 매년 개최하였다. 1967년 밀양군 산외면 산외초등학교를 필두로, 밀양군 상동면 상동초등학교(1968, 1971), 월성군 감포읍 감포중고등학교(1969, 1970), 월성군 양남면 나산초등학교(1972), 경남 합천군 합천읍 남정초등학교(1973), 영일군 장기면 양포초등학교(1974, 1980), 청도군 매전면 매전중학교(1975), 대구시 범물동 지산초등학교 범물분교(1976, 1978), 영일군 의창읍 칠포초등학교(1977), 영일군 구룡포읍 남부초등학교(1979, 1981, 1982, 1983), 영덕군 남정면 남호초등학교(1984, 1985), 영덕군 영덕읍 매정초등학교(1986) 등 주로 방학 중인 학교 시설들을 이용하여 직접 취사를 하면서 4박5일 정도의 고된 일정을 소화하였다.
하기수련회의 주요 프로그램은 도산과 흥사단에 관련된 이념강론, 역사의식 고취와 인성개발에 관한 교양강론, 토론과 발표, 체력단련과 해양훈련, 레크리에이션과 포크댄스, 연극공연과 장기자랑 등 매우 다양하였다. 때로는 지역사회 봉사활동이 곁들여지기도 하였고, 회의진행법 강습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아카데미 활동이 점차 침체되면서 규모를 갖춘 정례적인 하계수련회는 더 이상 개최되지 못하였다.
하계수련회와 더불어 겨울방학에는 동계수련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동계수련회가 처음 개최되었던 1966년 12월(26일~28일)에는 단소가 마련되지 않아 구 청구대학 강의실을 빌려서 안병욱 교수의 특강을 중심으로 진행하였지만 단소가 마련된 1967년 겨울부터는 단소에서 대개 3일 일정으로 진행하였는데 도산사상을 통한 정신무장과 조직운영의 실무연수가 주요 내용이었으며, 때로는 눈 덮인 근교 산악의 등반활동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아카데미 수가 증가하고 경북지부가 결성되면서 동계수련회는 점차 대구·경북지역 아카데미 간부수련회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대구흥사단이 주관하는 합동수련회와는 별도로 각 아카데미에서는 자체적인 수련회를 수시로 개최하여 회원들 상호간의 정의돈수와 이념무장을 강화하였다. 특히 대학생아카데미와 경주, 포항, 안동에 산재한 아카데미에서 개별 수련회를 자주 개최하였다.
3. 분회·지부의 성장과 시련들
흥사단대구연합회의 발족과 분회, 지부의 결성
1964년에 고A가 창립되고, 1966년에 대A가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대구에는 단무를 관장할 단우 조직이 결성되지 못하였다. 본부와의 단무 연락은 주로 고A 회장의 자택을 주소지로 하여 통신을 주고받았고, 활동보고도 고A가 맡아하고 있었다. 1966년 4월 대학생아카데미가 창립되자 대구의 단우들은 고A와 대A를 지도하고 단무를 총괄할 단우 조직의 필요성이 절실하였으나 아직 단우의 수가 소수에 지나지 않아 분회 창립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선 분회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단우와 고A, 대A를 구성원으로 하는 연합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1966년 5월 29일 계명대학교 학생회관에서 흥사단대구연합회(회장 권영식, 총무 박병전)를 결성하였다. 당시 대구에 거주하고 있던 단우는 김정주, 권영식, 도종옥, 김진홍, 정덕환, 박병전, 오성덕 등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때 결성된 대구연합회는 비록 소수의 단우와 산하 2개 아카데미로 구성된 소규모 조직이었지만 대구지역의 흥사단운동을 총괄하는 사실상의 분회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대구예비분회, 대구분회, 경북지부(대구지부)로 성장하는 모태가 되었다.
대구연합회가 발족된 이듬해인 1967년에는 대A 회원과 고A 명예회원 13명(손중욱 한용외 안형수 오영윤 최재수 권영애 김영태 윤장근 채영수 이동진 이창기/이상 6월 11일 입단, 최근배 윤상훈/이상 9월 10일 입단)이 장리욱 박사 주례로 입단하여 대구지역의 단우수가 대폭 증가하였다. 이렇게 증가한 단우를 바탕으로 이해 9월 9일에 대구예비분회를 결성하였다. 대구예비분회는 1972년에 정식분회로 승격되었다.
1970년대 후반 단우 수가 증가하고 학생아카데미 조직이 늘어남에 따라 흥사단 조직이 여러 개의 분회를 총괄하는 광역지부 조직으로 개편되기 시작하였다. 대구지역에서도 1979년 1월에 종래의 대구분회를 제1분회, 제2분회, 제3분회로 분할하고 경북지부(지부장 박인주)를 결성하여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구축하였다. 이해 4월 경산예비분회(초대분회장 최기호)와 안동예비분회(초대분회장 이득우)가 창립되어 경북지부는 대구, 경산, 안동, 경주, 포항을 관할하는 광역지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경북지부는 1983년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가 분리되면서 대구지부로 개칭되었다.
의욕적인 대외사업의 전개와 과욕이 불러온 시련
경북지부를 결성한 대구흥사단은 박인주 지부장을 중심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새로이 추진한 주요한 사업들로는 지부 기관지인 「새빛」발간, 범도민적인 도산추모식 및 강연회 개최, 「도산서관」설립, 도산의 생애를 극화한 연극 「아! 섬뫼」의 제작 공연 등을 들 수 있다.
경북지부는 1979년 5월에 지부기관지 「새빛」을 창간하여 단우와 아카데미 회원들 상호간의 소통과 토론의 광장을 마련하였다. 1969년 5월에도 대구예비분회지로서 타브로이드판 4면의 「새정신」을 월간으로 발간한 적이 있었으나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다. 「새빛」은 1983년 6월 11호까지 발행하고 기러기잔치를 준비하면서 1984년 5월부터 발간한 「단우통신」, 1차 단소 건립 후 1996년 3월에 창간한 계간지「윤회악수」로 이어졌다.
경북지부는 그동안 단소에서 단우와 아카데미 회원들 중심으로 개최하던 도산추모행사를 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각 신문사와 방송국의 후원을 받아 1979년 3월 10일에 대구시민회관에서 도산 41주기 추모식을 거행하고 이한빈 박사(「미래 한국과 청년의 좌표」)와 안병욱 교수(「대표적 한국인」)의 추모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추모 행사에는 약 1,8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였다. 시민과 함께 하는 도산추모행사는 이듬해에도 이어져서 1980년 3월 10일에 대구시민회관에서 추모식과 추모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추모 강연회에는 안병욱 교수(「세계 일등국민이 되자」), 김동길 교수(「한국 국민에게 고함」), 이정무 선생(「바람직한 한국 청년상」)이 연사로 나서서 열강하였는데 3,800석 규모의 대강당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청중이 운집하여(약 5,000명 추산) 대성황을 이루었다.
「도산서관」은 신민회 시절의 「태극서관」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출판사 겸 서점의 기능을 가진 영리기관이었다. 「도산서관」은 1979년 1월에 출판사 등록을 마친 후 시내 중심부에 도서판매를 위한 서점을 개설하고 첫 출판사업으로 이광수 저 「도산안창호」를 간행하였다. 1979년 5월에 개최한「도산안창호」 독후감 현상모집에는 400여 명이 응모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중등부와 고등부 당선작 각 1편은 7월호 「기러기」지에 게재하였다. 도산서관은 도서보급의 확대를 위해 오늘날의 신용카드와 흡사하게 현금 없이도 도서를 구매할 수 있는 구매권을 발행하여 회원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도산서관은 흥사단의 성격에 부합하는 사업으로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으나 자금력의 한계와 경영의 미숙으로 이후 지부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경북지부가 또 하나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사업이 도산의 생애를 극화하여 시민들과 청소년 학생들에게 관람토록 하고자 하였던 연극 「아! 섬뫼」의 제작과 공연이었다. 경상북도교육위원회의 후원 아래 극단 「원각사」(연출 이필동)가 제작한 「아! 섬뫼」는 1980년 3월 29~31일에 대구시민회관 대강당에서 공연하였다. 이 연극은 시민회관 공연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와 지방의 순회공연까지 기획하였으나 공연이 계획과 같이 진행되지 못하여 제작에 투입된 많은 경비가 큰 부담으로 남게 되었다.
이처럼 1979년 경북지부의 결성을 계기로 전개한 의욕적인 활동들은 지역사회에 도산과 흥사단의 위상을 드높이고 단우들의 열정을 한데 모으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단의 재정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추진한 이러한 사업들은 적지 않은 부채를 남기게 되었고, 사업진행 방법을 둘러싸고 단우들 간에 갈등이 증폭되어 한동안 대구흥사단이 깊은 침체에 빠지는 요인이 되었다.
4. 마음을 모아 이룩한 두 차례의 단소건립
창립 20주년 기념 <기러기 큰잔치>
1979년에 경북지부가 결성되고 두 해 동안 의욕적으로 전개했던 사업들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많은 문제점을 남기게 되자 단우들의 마음도 점차 단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아카데미는 여전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나 이들을 지도하고 관리할 단의 능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약 3년간이 대구흥사단이 가장 힘든 시련을 겪은 시기였다. 단우들이 떠나고 재정이 고갈된 이 어려운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남아있는 몇 몇 단우들과 힘을 합쳐 지부를 이끌어 온 이동진 지부장과 윤장근 지부장, 송주필 사무국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구의 단우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흥사단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계기를 고A의 창립으로부터 기산하는 대구흥사단운동 20주년으로 삼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단소를 수성동(무궁화주유소 앞)으로 이전하고 단을 떠난 단우 동지들을 찾아 나섰다. 오래 동안 단에 나오지 않던 단우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옛정을 되새기고, 단우 및 아카데미 명예회원들의 주소록을 재정비하여 월간으로 새로 발행한 「단우통신」(1984년 5월 8일 창간)을 발송하였다. 여성 단우와 아카데미 명예회원 및 단우 부인들도 1984년 6월 2일에 회합을 가져 흥사단운동의 재기와 20주년 행사에 적극 참여하기로 다짐하고, 행사 당일에 소요되는 모든 음식을 직접 조리하여 공급하였다. 창립 20주년 행사를 위해 모임을 가지게 된 여성 동지들은 행사를 마치고 모임을 정례화하여 「여성기러기」(초대회장 윤경희)를 발족시켰고, 1차 단소건립 후에는 푼푼히 모은 기금으로 피아노 1대와 단체급식용 접시 100개를 기증하는 한 편 <기러기노래교실>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여성기러기는 2002년에 단 외부 여성들에게도 가입을 개방하여 「대구흥사단 여성아카데미」(초대회장 류경순)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하여 1984년 9월 22일 금성예식장에서 제1회 「기러기 큰잔치」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단우와 아카데미 회원 및 명예회원들 약 250여 명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약 300만원 가까운 모금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모인 300만원과 기타 수입 90만원 중 행사경비와 일부 부채를 정리하고 남은 180만 원을 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었다.
「기러기 큰잔치」는 수 년 동안 침체해 있던 대구지부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단을 떠나 있던 동지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용기를 심어주었다. 대구지부의 성장을 위한 튼실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단소부지 매입과 두 차례의 단소 건립
처음 기러기잔치를 기획할 때는 20주년을 기념하는 일회성 행사로 계획하였다.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으는 계기로 삼아서 이후의 흥사단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자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 이상의 원대한 계획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기러기잔치의 성과에 고무된 단우들은 기러기잔치를 일회성 행사로 끝내지 말고 기러기 가족의 Home Coming Day로서 연례행사로 정착시키기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단우들의 여망을 수렴하여 대구지부에서는 기러기잔치를 연례행사로 정착시키고 모금운동도 계속하기로 하였다. 이후 「기러기잔치」는 두 차례의 단소 건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개최되었다. 단소 건립 이후에도 규모가 축소되고 몇 해씩 건너뛰기도 하였지만 최근까지 지속되고 있다.
첫 기러기잔치를 마치고 적립한 180만 원은 비록 큰돈은 아니었지만 대구지부의 단우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는 종자돈이 되었다. 기러기잔치가 해를 거듭하면서 단소건립기금도 해마다 200~400만원씩 늘어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투지신탁 정기예금의 이자 수입도 따라서 증가하게 되었다. 단소 부지를 매입하던 1989년에는 300만원 전후이던 평년 모금액의 열배가 넘는 3,800만원이 모금되었다. 이러한 부단한 노력이 모여서 창립 25주년을 맞은 1989년 12월에 단소건립 부지 55평을 4,800만 원에 매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부지를 매입한 이후에도 기러기잔치와 모금운동을 계속하여 30주년이 되는 1994년에 지상3층 연건평 95평의 단소를 건립하였다.
단소를 건립한 이 부지는 건립된 지 20년이 가까워 오는 국민주택단지의 한 쪽 모서리 땅이었는데 우리가 단소를 건립한 직후 주민들은 이 지역을 재개발하여 낡은 주택을 허물고 아파트단지를 건립하고자 하였다. 단소 건물을 그대로 두고서는 아파트 건립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많은 동지들의 정성을 모아 건립한 새 건물이라 허물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주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부에서는 적절한 보상을 받고 단소 부지를 주민들의 재건축조합에 양도하기로 하였다.
단소 부지를 재건축조합에 양도하고 받은 보상금과 청구주택이 제공한 기부금을 가지고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는 회관을 1998년 4월에 완공하였다. 대지 160평, 지하1층 지상3층, 연건평 290평으로 종전 회관의 약 3배에 이르는 규모가 되었다. 이 회관에는 현재 <대구경실련>, <참교육학부모회>, <소비자연맹대구지부> 등 3개 시민단체가 입주해 있고, 2층에는 <우강송종익선생기념관> 겸 <국채보상운동자료상설전시실>을 마련해 두었다.
두 차례의 단소 건축은 임성영 단우가 운영하는 <영건축>이 설계와 감리를 맡고, <신성종합건축(대표 정문호)>이 시공을 맡아 튼실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공되었다. 특히 두 번째 건축한 현재의 회관은 1998년 <대구광역시 건축상작품전>에서 은상을 받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기금 확보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
두 차례에 걸친 대구지부의 단소건립은 몇 몇 사람의 희생적 노력이나 재력가의 거금 희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단우와 아카데미 명예회원들의 정성이 모이고 모여서 결실을 맺은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 가치가 빛나 보인다. 1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많은 동지들이 모금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준 것은 적립된 기금을 단 한 푼도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 한 건의 사무 착오도 발생하지 않았을 만큼 철저하게 금전을 관리하고,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단계적으로 착실하게 사업을 추진한 집행부의 성실한 노력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도산 선생이 강조한 신용의 자본과 점진주의가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단소건립의 기금은 기러기잔치를 통한 모금운동으로만 조성된 것은 아니다. 모금운동과 더불어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1992년 5월에 대구시민회관 전시실에서 안병욱 교수의 서예전을 개최하고 작품을 판매한 수익금 전액을 단소건립기금으로 적립하였다. 총수익금 2,450만 원 중 약 800여만 원의 소요경비를 제하고 1,600여만 원을 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었다. 안병욱 교수는 이 전시회를 위해 서예작품 50여 점을 기증해 주었다. 안 교수의 서예전은 금전적인 도움도 무척 컸지만 대구의 단우들에게는 무한한 정신적 격려가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대구의 동지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안병욱 교수의 서예작품을 한 점씩 소장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1992년 10월 24~25일에 대구 팔공산호텔에서 개최된 제79차 전국대회도 기금확충에 큰 힘이 되었다. 전국의 동지들이 납부한 대회기부금 650만원 중 대회경비로 지출하고 남은 370여만 원을 단소건립기금으로 적립한 것이다. 당시에는 대회운영경비를 주최 지부에서 부담하였기 때문에 대회기부금 전액이 기금으로 적립되지는 못하였지만 부지 매입 이후 건축비가 턱없이 부족한 시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도산의 동상과 어록비 등을 수록한 5종의 엽서를 발행하여 판매하기도 하고(1992년), 순은제 링에 순금 기러기를 도안하여 통가죽 끈에 매단 링타이를 제작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1993년). 비록 재정적으로 큰 보탬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모금운동의 분위기를 성숙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단소건립은 위한 모금운동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대구출신 기러기 가족들의 모임인 <재경달구벌>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큰 힘이 되었다. 대구와 서울의 중간 지점인 수안보, 계룡산 등지에서 대구의 동지들과 달구벌 회원들이 합동으로 여러 차례의 가족수련회를 개최하여 단소건립의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대구흥사단회관은 이러한 다양한 노력들과 많은 동지들의 정성이 한데 모여 이룩된 소중한 자산이자 우리 모두의 긍지이다. 특히 기러기잔치를 기획하고 행사를 진두지휘한 이동진 단우와 지부 간사로서 전국을 돌며 모금을 독려해 준 김영태 단우의 노고가 참으로 컸다.
5. 지역사회로 뻗어가는 대구흥사단
단소건립과 적극적인 연대활동 참여
1980년대 초반 의욕적인 대외활동과 뒤이어 불어 닥친 좌절을 경험한 후 대구지부는 한동안 대외활동을 극히 자제하고 있었다. 내적인 힘의 축적이 없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러기잔치와 모금운동을 통해 단소 부지를 매입한 이후에는 새로운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다. 모금운동은 단순히 돈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 과정은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었고, 사람이 모이고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과정이었다. 신뢰가 쌓이고, 사람이 모이고, 마음이 하나가 되면서 희망과 용기도 배가되었다. 이러한 용기와 자신감이 대외적인 활동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대구지부가 대외활동에 처음 참여한 것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대구지역 시민운동협의회」(「대구정사협」)의 결성이었다. 1993년 8월 2일에 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개최한 창립대회에서 창립준비과정을 주도했던 이창기 지부장이 공동대표 겸 집행위원장에 선임되고, 최현복 사무국장이 정사협 사무국장을 맡아서 정사협 사무국을 대구지부에 설치하였다. 「대구정사협」은 대구경실련,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 17개 시민단체가 참여하여 대구 동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등 지역 현안에 대해 시민사회의 의견을 적극 개진함으로써 대구지역 시민운동의 구심체가 되었고, 이후 시민단체 연대운동이 활성화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서 대구흥사단이 대구지역 시민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흥사단 활동의 개방과 대외사업의 활성화
단소가 건립된 이후 대구흥사단회관은 명실상부한 시민운동의 구심체가 되었다. 독자적인 활동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여러 단체들이 우리 회관을 이용하는 기회가 늘어나고 각종 연대활동의 모임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회관을 건립하면서 우리가 목표하였던 바이기는 하지만 활용의 정도와 속도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벅찬 수준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종래 단우들끼리 모여서 하던 흥사단의 활동도 점차 개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흥사단 밖을 대상으로 하는 대외사업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의 활동도 이러한 대외사업과 연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월례회의 개방이었다. 1994년 10월부터 월례회 프로그램을 공개강좌로 진행하여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로 하고 단 내외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강론을 듣게 되었다. 월례회의 공개강좌는 2차 회관이 건립된 1997년까지 지속되었다.
단우 자녀와 일반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비고등학교교실>(1994~1997)도 흥사단 사업을 개방한 좋은 사례이다. 고교 진학을 앞둔 중3 학생을 대상으로 특강, 집단상담, 성교육, 토론, 문화 답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예비고등학교교실>은 1994년 1월에 처음 시행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예비고등학교교실>과 함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으로는 <청소년 통일캠프>(1991~1997/본부 지원), <청소년 가족사랑 캠프>(1996/대구시 지원), <청소년 초록환경 캠프>(1996/환경부지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청소년 대상의 프로그램을 착실히 진행한 결과 대구광역시에서는 유일한 청소년 국제교류 프로그램인 <중학생 고구려유적지 탐방> 프로그램을 대구흥사단에 위탁하여 10년째 매년 8월에 진행하고 있으며, <영호남 청소년 교류 캠프>, <중학생 인성 캠프> 등도 공모 프로그램으로 꾸준히 진행하게 되었다.
대구지부에서 외부의 재정지원을 받은 공모사업으로는 <건강한 가정 가꾸기 운동>이 처음이다. 1995년 대구광역시의 지원을 받은 <건강한 가정 가꾸기 운동>은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믿음 아래 각급 학교 어머니교실을 대상으로 한 순회강연(5개교)과 월례회와 연계한 공개강좌(4회), 가족문제 세미나(1회), 기러기 가족캠프(1회) 등을 개최하였다. 어머니교실 순회강연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가족문제와 자녀교육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1999년 7주간에 걸친 <학부모를 위한 자녀교육 전문강좌>로 이어졌고, 교육이 끝난 후에는 교육 이수자를 중심으로 <학부모사랑방>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여성아카데미> 회원으로 계속 참여하고 있다.
시민들과 함께하는 흥사단 사업으로는 <문화답사>를 빼놓을 수 없다. 문화답사는 기존의 <물에 산에 YKA>를 산행 위주에서 벗어나 ‘가족과 함께 하는 문화유적답사’로 개편하여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프로그램이었다. 매월 1회 답사(동절기 제외)를 원칙으로 하여 영남 일원뿐만 아니라 전국의 문화유적지를 답사하였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횟수가 다소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해마다 5~8회씩 답사하여 2006년까지 총 62회를 기록하였고, 산악회가 조직되어 <YKA등산>이 활성화된 2007년 이후에는 년1회만 진행하고 있다. 대개는 당일 코스였지만 년1회는 1박2일로 진행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참가비가 저렴하고 단 내외 전문가들의 해설이 매우 충실하여 흥사단 외부의 일반인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6. 최근에 추진하는 대구흥사단의 주요 사업들
1998년 2차 단소를 준공한 이후 대구흥사단의 사업은 크게 확대되었다. 대구지부가 자체적으로 수행하는 사업도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위탁사업도 힘에 겨울 정도로 증가하였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많은 단우가 새로 입단하여 봉사활동, 사회교육활동, 청소년지도사업, 시민단체연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대구흥사단의 사업이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최근에 대구흥사단이 수행하고 있는 자체사업과 대외사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체사업
대구흥사단이 자체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업들은 그 종류가 매우 많지만 크게 사회봉사활동, 여성 및 청소년 관련 사업, 사회교육사업, 정의돈수와 동맹수련을 위한 수련활동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구흥사단에서는 2008년에 사회봉사단을 조직하여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매월 둘째 토요일에 <요셉의 집> 무료급식소를 방문하여 급식을 보조하고 있으며, 독거노인 가정의 환경정비 및 연탄배달, 사랑의 김장담그기, 농촌일손돕기 등을 전개하고 있다.
여성 및 청소년지도 사업으로는 <여성아카데미> 활동, <참사람멘토링> 사업, <청소년상담소> 개설, 각급 학교아카데미 지도 등을 들 수 있다. <여성아카데미>는 단우 및 단우 부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여성기러기>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외부의 일반 여성들에게도 가입을 개방한 대구흥사단의 여성운동 조직이다. <여성아카데미>는 자체 활동뿐만 아니라 대구흥사단이 추진하고 있는 청소년지도사업에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참사랑멘토링> 사업은 불우한 가정의 초등학생 30명을 대상으로 인성교육, 학습지도, 독서지도, 문화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함으로써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청소년교육 사업이다. 1년 과정으로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오전 오후에 걸쳐 3개 반으로 나누어 진행하는데 상담전문 여성 단우 3명이 각 반의 지도교사를 맡고,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보조교사를 맡아서 진행한다. 학생들의 수송과 체험학습장 이동을 위해 많은 단우들이 차량을 지원한다. 2009년에 처음 시작하여 4년째 진행하고 있는데 금년(2012년)에는 대구광역시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두 팀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청소년지도 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2012년 7월 5일에 <청소년상담센터>를 개설하였다. 이를 위해 대구흥사단에서는 전후 3차에 걸친 27주간의 교육(상담사양성 기초과정 10주, 심화과정 10주, 칭찬프로그램 7주)을 거쳐서 40여 명의 상담사를 양성하였다. 이러한 인력을 바탕으로 학교아카데미 창립에 주력하여 현재 14개의 중고등학교 아카데미를 지도하고 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으로는 2007년 미래사회리더스쿨 수료생을 중심으로 발족한 대구대학생리더스아카데미(DULA)가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2012년에는 7주간의 <대학생 경제교육강사 양성과정>을 운영하여 30여 명의 경제교육강사를 배출하였고, <대학생통일문제 대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사회교육 사업으로는 대구흥사단 평생교육원 산하의 <애기애타웃음교실>과 <기러기풍물단>, <스피치아카데미> 등을 들 수 있다. <애기애타웃음교실>은 다양한 웃음기법과 웃음치료방법을 교육하는 유료 프로그램으로서 10주 과정을 성실히 이수하면 웃음치료사 2급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2011년 1월부터 시작한 이 활동은 이수 희망자가 많아서 오전반과 저녁반으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으며(현재 7기 교육 중), 매월 넷째 주 화요일에는 <시지노인전문병원>에서 웃음 및 레크레이션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기러기풍물단>은 사물놀이를 학습하는 동아리로서 풍물학습 과정에 부정기적으로 연주 봉사활동에 나서기도 한다. <스피치아카데미>는 올바른 발음과 조리있는 말하기 훈련과정으로 매주 화요일에 강좌를 진행한다. 이 외에도 대구흥사단 평생교육원이 주관하는 <교육마술사 양성과정>, 19세 이하의 자녀를 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MBTI 부모교육> 등이 유료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교육프로그램은 외부에 개방하여 일반인들의 참여가 매우 활발하고, 이들 중 일부는 흥사단의 다른 사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단우로 입단하는 수도 증가하고 있다.
단우들 간의 정의돈수와 동맹수련을 위한 수련활동으로는 <대흥독서아카데미>, <YKA등산>, <번개모임> 등이 있다. <대흥독서아카데미>는 지정된 한권의 책을 읽고 모여서 토론하는 동맹독서 모임으로서 2010년 5월부터 매월 진행하고 있다. <YKA등산>은 한 동안 활동이 주춤하였으나 대구흥사단산악회가 결성된 2006년부터 활동이 활성화되어 매월 근교의 명산들을 순례하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있다. <YKA등산>에도 외부인들의 참여가 많아 등산 활동을 통해 흥사단에 입단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번개모임>은 휴대폰을 통해서 불시에 소집하여 다양한 이벤트를 즐기는 ‘깜짝 모임’인데 단우들 간의 정의를 돈수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외사업
대외사업은 외부기간이 위탁한 수탁사업과 시민단체연대사업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수탁사업은 환경 및 에너지 관련 사업과 청소년지도 사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시민단체연대사업은 1993년 <대구정사협>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후 지역사회의 주요 현안이 등장할 때마다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연대활동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들을 열거한다면 경부고속철도 지하화 문제, 공명선거운동, 중앙초등학교 폐교부지 공원화 운동, 친일파 박정양 기념비 철거운동, 대구지하철 참사 대책, 반부패투명사회운동, 대구청소년단체협의회 및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운영, 대구사랑운동시민회의 참여 등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활동에 여러 시민단체들과 함께 적극 참여함으로써 대구지역의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외부의 여러 기관 단체가 위탁하여 대구흥사단이 수행하고 있는 수탁사업으로서 환경 및 에너지 관련 사업으로는 대구광역시, 대구테크노파크, 에너지관리공단 등이 위탁한 여러 종류의 <찾아가는 그린에너지 체험교실>이 대표적이다. 대구시가 제공한 솔라캠핑카를 이용하여 각급 학교와 신청기관을 방문하여 에너지 절약, 재생에너지 체험, 지구기후변화 대책 등에 관해서 체험교육을 실시하는 사업으로서 교육대상 인원이 연중 10,000여 명을 넘어서고 있다. 대구시의 <태양광시민발전소>의 건설과 운영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청소년지도와 관련된 수탁사업으로는 <청소년국제교류캠프>, <청소년인성캠프>, <영호남교류캠프>,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 <청소년토론대회> 등을 들 수 있다. <청소년국제교류캠프>(대구시)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고구려 유적지와 백두산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으로 2001년에 처음 시작하여 금년까지(2010, 2011년 제외) 10회째 진행하고 있다. <청소년인성캠프>(대구시)는 중학생 및 지도자 약 80명을 대상으로 2박3일 동안 공동체의식을 함양하고 건강한 인격체를 형성하도록 훈련하는 프로그램인데 2000년부터 계속 대구흥사단이 진행하고 있다. <영호남교류캠프>(동서교류재단)는 영남지역의 청소년과 호남지역의 청소년이 이해와 소통의 폭을 넓히고 상호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사업으로서 2003년부터 대구흥사단이 주관하고 있다.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대구시)은 청소년단체 및 유관기관이 함께 청소년유해환경을 감시하고 정화하기 위해 협력하는 사업으로 대구흥사단이 사무국을 유치하여 주관하고 있다. <청소년토론대회>는 고등학생들이 3인 1조로 팀을 이루어 주요 현안에 대해서 찬반 토론을 하는 경연대회로서 원래는 지부 자체 사업으로 시작하였으나 최우수 발표자에게는 대구광역시 시장상과 대구광역시 교육감상이 수여되어 고등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외에도 2006년부터 해마다 2월 하순에 <국채보상운동기념전시회>(대구시)를 개최하고 있으며, 2012년에는 미소친절 플래시몹과 사물놀이 홍보단을 통해 미소친절 강사를 양성하는 <미소친절대구만들기운동>(대구시), 어린 청소년들에게 투명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어린이를 위한 찾아가는 투명연극>(국민권익위원회) 등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상근실무자들의 노고
이러한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는 데는 많은 재정과 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이 다 그러하듯이 대구흥사단도 재정이 넉넉지 못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단우 동지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헌신적 봉사가 있기에 이러한 사업들이 부단히 지속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의무금을 납부하면서도 많은 동지들이 각 사업에 별도의 특별 찬조를 해 주었고, 차량을 비롯한 노력봉사도 아끼지 않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단의 행정과 각 사업의 실무를 맡아 불철주야 헌신해 준 실무자들의 노고가 참으로 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봉산탕2층과 남산동 단소를 지켜준 박병전 단우, 국립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음에도 이를 포기하고 상임간사를 자임한 최근배 단우, 1980년대 초의 어려운 시기에 사무국장을 맡아 수고해 준 송주필 단우, 기러기잔치와 모금운동에 열과 성을 다한 김영태 단우, 두 차례의 단소 건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고 시민사회 속에 대구흥사단을 우뚝 서게 한 최현복 단우 등은 대구흥사단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인물들이다. 특히 최현복 단우는 간사에서부터 사무총장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을 대구흥사단에 헌신하여 대구흥사단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권위정 부장, 오용석 부장, 우지현 간사, 강은혜 간사, 이성애 간사, 조민화 간사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최현복 단우와 더불어 그 많은 사업들을 차질없이 추진해 주었다. 현재에도 김지욱 사무처장과 김기령, 권병체 실장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