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랍비의 옷자락을 만지다.
토라의 재발견- 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의 주된 의미는 가르침 또는 지침이다. 토라는 활을 겨누다, 겨냥하다, 소다를 뜻하는 동사 <야라>와 관련이 있으므로 인도라는 의미도 된다. 유대 성경에서 토라는 대부분 율법이 아닌 교훈 또는 가르침으로 번역된다.
히브리어로 계명은 미츠바로서 유대 용례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통한다. 미츠바를 실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길 원하시는 어떤 선을 실천할 기회를 붙잡는다는 의미로 통한다. 미츠바라는 단어는 늘 긍정적으로 사용되며 하나님이 부탁하신 일을 행하는 것이 부담이 아닌 기쁨이자 영적 기회임을 시사한다. ( SG: 쓰임 받는 것은 은혜요 특권이다.)
옷술의 의미: 민수기15장 38-40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질문: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반석위에서 계속 질문을 하라.
옷술: 존귀함의 표시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과 왕자들은 옷단에 술을 달아 단장했다. 고대사회에서 치치트(옷단)은 귄위와 고귀한 성장 배경 그리고 귀한 신분의 표시였다. 따라서 치치트는 하나님이 한 민족을 당신의 대표자로 전 세계에서 제사장 나라로 택하셨음을 나타냈다. 치치트라는 장치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계명에 대하여 겉으로 드러낼 것을 독려하셨다. 치치트는 유대인이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속했으므로 주변의 다른 민족과 뒤섞일 수 없다는 가시적 기억 장치였다. 치치트는 착용자에게 공공장소에서 신앙대로 살 기회를 제공하는 가시적 표식이었다.
예수님의 옷술을 만진 여인 – 옷단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예수님의 정결이 너무도 큰 나머지 여인의 손길로 인해 더렵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부정을 치유하였다.
시내산의 가르침 – 급진적으로 차별화되며 시대의 통념에 도전을 제기한다. 큰 공평과 긍휼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 – 하나님은 일순간에 변화 시키는 대신 익숙한 것에서 출발하여 급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그들을 옮기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희생제사와 더불어 예배하는 방식을 통해 세상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셨다. 아울러 음식법을 제정 하셔서 이스라엘과 이교도 이웃을 분리 하셨다. 우리에게 이상해 보이는 음식법과 의례법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을 열국 중에서 독특한 존재로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토라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토라를 실천한다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그리스도는 토라가 목표로하는 거룩함과 긍휼이 살아 있는 완성이다. 예수님은 육신이 된 말씀이다. 예수님은 토라를 삶으로 살아 내신 유일한 분이다. 따라서 토라의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이다.
12장 : 예수와 토라
예수님의 진의 – 예수님은 토라를 약화시킬 의도가 없으셨다. 율법을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토라를 제대로 해석한다는 것이고 율법을 폐한다는 것은 토라를 그릇 해석함으로 무력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그릇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 해석한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토라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으로 예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준행하심으로 율법을 온전케 하셨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참된 삶의 방식과 그 의미를 설명하시고 밝히심으로 율법을 온전케 하신 것이다.
다른 랍비와의 본질적인 차이 –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생각을 알 고 있듯 큰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본질적 차이다. 다른 랍비들은 율법이 최소한으로 요구하는 사항을 규정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경계선 안에 머무르도록 울타리를 친 것이다. 최소치를 계속 옥죄어 들어감으로써 사람들이 점점 거룩함에 근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정반대로 접근하셨다. 토라를 최대치의 표현으로 끌어 올리셨다. 최대치에 초점을 맞추셨다. 최소치의 기준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열렬히 최대치를 추구하길 바라신다.
산상수훈은 토라를 반대하는 혁명이 아니라 토라의 실천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는 혁명이었다. 토라의 정수는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에 대한 최고의 해석이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가르치신 모든 것의 궁극적 요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