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영웅전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두 명의 영웅 라이하르트 폰 로엔그람 백작과 양 웬리는 모두 영웅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동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대부분의 면에서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작품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며 원작자의 뛰어난 인간성에 관한 고찰의 능력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면이다.
라인하르트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전형적인 역성혁명의 주역이다. 세계사적으로 보자면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 우리나라의 역사로 치자면 왕건이나 이성계 같은 인물이다.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태어나서 개인의 능력에 관계없이 그 지위가 결정되는 신분제의 모순을 느끼고 시운을 타서 훌륭한 취지를 가지고 시대를 바꾸겠다는 야망에 불타서 종국적으로 권력을 획득하게 되나 그 과정의 속에서 원래의 취지는 잃어버리고 지배자 특유의 잔인성과 끝없는 권력에의 추구 욕만이 남는 그러한 인물로, 이러한 것은 은하영웅전설 제1부의 막판에 친우 키르히아이즈를 잃은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하는 그의 독백에서 잘 나타나있다.
"그래, 나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싸운다…."
라인하르트는 외형적으로는 대단한 영웅이지만 한마디로 외화내빈, 그의 안은 공허함만이 가득 차 있고 그것을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력이 닿는 범위를 늘려감으로써 채우려 하나 결국 자신의 빈 마음을 채우기는커녕 더욱더 비어만 가는 불쌍한 존재에 불과하다.
사실 그의 친우인 키르히아이즈의 죽음은 그의 순수한 일면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고 봐야 하고 조금 더 비약해서 말하자면 자기자신에 의한 자신의 순수함의 살해를 상징한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제국의 집권 후에도 자유행성동맹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게 된다. 아래의 민초들에게는 어떻든 간에 전쟁은 슬픈 일이라는 것을 무시하고서……..
이에 반해 양 웬리는 뛰어난 역사적인 통찰력을 가지고있는 불타는 권력욕 뒤에 공허감과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불행만이 남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는 인물이다.
집권이니 성전이니 하는 것보다는 맛있는 홍차를 마시면서 여가를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인물이다. 또한 상인의 후예답게 이익을 볼 것이 없는 전장에서는 가차없이 도망가고 일반인들의 전쟁에 따르는 피해를 통감하고 제국과의 화친을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몇 가지 명언을 소개해 보면,
아스타 테 회전에서 자유행성동맹의 패배 후, 전몰자의 묘지를 둘러보며,
뎌스티 아텐보로 중령: 정부는 또 이번의 전투도 대승리라고 발표했습니다.
양 웬리 중장: 아마 우리 자유행성동맹은 단 한번도 싸움에 지지않고 모두 죽어 버릴거야.
아스타 테 회전 후 전몰자추도식중의 국방위원장의 연설의 방송을 보면서,
국방위원장 트류니티: (방송) 그러면 이들은 왜 죽어갔습니까?
양 웬리 중장: (방송을 보다가) 사령관의 작전지시가 잘못 되서 죽었지.
양 웬리의 제 13함대 창설연설
우리모두 살아 남읍시다. 맛있는 홍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살아있을 동안뿐이니까, 모두 살아 남읍시다.
양 웬리가 전술적인 능력은 라인하르트 보다 뛰어나지만 전략적인 면에서는 뒤진다고 평가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능력이 뒤진 다기보다는 전략이라는 자체가 야망이 있은 후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야망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양 웬리로서는 그런 것 자체를 세우지 않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것은 그들의 인간관계에서도 반영되는데, 한마디로 라인하르트 주위에는 유능한 막료가 더 많지만 키르히아이스를 제외한 나머지의 막료들은 주종관계, 동업자관계, 또는 상호간에 이용당하는 관계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양 웬리 주변의 인간관계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만남이 일차적이다. 이 두 명의 영웅에 뒤지지않는 존재로서 등장하는 주연 캐릭터가 라인하르트의 충실한 부관이자 어린 시절부터의 친우 키르히아이스이다.
키르히아이스는 라인하르트의 어린시절의 추억, 꿈, 순수한 동기, 선량한 성질 등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제1부 막판에 라인하르트로부터 불신임 당하고 암살당했다는 것은 라인하르트가 잔인한 독재자로서의 마각을 드러내는 주요 동기로서 작용하게 된다.
이에 따라 라인하르트의 잔인한 일면을 상징하는 부관 오벨슈타인만이 라인하르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어쩌면 라인하르트, 키르히아이스, 오벨슈타인은 원래 한 캐릭터의 다른 측면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3형제가 한 인간의 성스러운 측면, 현실적인 측면과 본능적인 측면을 상징하고있듯이 이들 3인도 한 인간의 초자아, 자아, 그리고 이드(Id)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키르히아이스는 하나의 분리된 캐릭터가 아니라 라인하르트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키르히아이스의 죽음 후에 절망하는 라인하르트에게 충고하는 오벨슈타인의 목소리는 마치 라인하르트 자신의 독백, 또는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이 느껴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