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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my travel)
이상수 즐거운 날
내가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나의 생각을 적어본 것이다.
인생의 여행은 사람이 사라가는 기나긴 인생의 여행길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여정의 여행길이 있으며, 삶의 질을 높이고 심신의 피로를 풀면서 미지와 새로운 세계의 문화를 찾아보는 즐거운 여행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려서 생각하는 여행문화는 가진 자들의 소유물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보편화되어서 누구나 한번쯤 여행을 했을 것이다. 그것도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의 여행을 말이다. 상상을 초월한 여행이다.
내가 어려서는 여행이라기보다 소풍이다. 어쩐지 소풍하면 아기자기한 느낌이 든다.
평일에는 상상도 못하고 명절이면 근교에 있는 사찰구경이 전부였다.
명절 이라하면 계절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추석 명절뿐이다. 설 명절은 추워서 놀지를 못하니까. 명절 놀이문화는 어린애들이 노는데 산에 올라갈 정도의 애들은 추석명절기의 계절은 산에 과일들이라야, 파리똥 꾸지뽕 다래 어름 머루 가 전부다. 과일이라 할 수 없고 나무열매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따먹으려고 산에 오른다.
그리고 부모님들의 화전놀이 문화는 봄이면 딸기밭에 가시는데 나는 어머니 손잡고 따라간다. 돈들이 없어 딸기는 못 사먹고 밭 언저리에 넓은 자리를 잡고 노신다. 개인적인 놀이가 안이라 동내에서 단체적으로 음식준비해가지고 아침에 출발하여 종일 장고치고 노래 불으며 노는데 유행가는 있어도 적당히 따라 부를 노래가 없던 시절이다.
술에 취해 자기 흥에 겨워 아무렇게나 신세타령조로 장고소리에 맞추면 흥겨운 놀이다.
나도 사춘기에는 친구들과 시간 내여 유원지에 가며는 많은 관광객들이 흥겨운 장고소리에 노래를 부르면 끼어들어 놀아주고 밥 얻어먹고 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부모님들과 같은 보통사람들의 놀이문화였다.
당시는 여행이란 문화는 상상을 초월한 그런 문화면서 여행이란 용어자체도 귀족의 위치에 있었다.
우리는 대륙에 붙어있는 땅이면서 섬의 느낌보다 더 멀리 떨어져있는 땅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우리 땅은 삼면이 바다고 북쪽은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고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이 땅을 벗어나려면 특권층들의 나드리었다. 보통사람들은 상상의 꿈의 세계였다. 나는 군대에 입대 한 덕으로 광주 고향을 떠날 수 있어 타향을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새장에 가두어진 세월을 살다가 다른 고장을 보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고향땅과 차이는 없었고 ,같은 사람들이 사는 동내였다.
그리고 군인의 몸으로 구경이라 흥미로운 여행이라 할 수 없다. 주인에 끌려가는 개의 신세라고 할까. 논산을 거쳐 처음 보는 서울 용산역을 거쳐 강원도 춘천을 거쳐 강원도 중부전선 사창리 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곳들이 내가 처음 보는 곳이 구나 특이하고 흥미로운 곳은 없었다.
여행이라는 것은 지인들과 어울러 다니면서 마음속에서 즐겁고 흥미로워야 모든 경치들도 좋게 보인가 싶었다. 그리고 다시 일동으로 넘어가는 캐러멜 고개, 금화 와수리 로 넘어가는 복 고개가 있고, 휴가 때면 강원도 철원군 화지 리 에 나의 큰집 작은집을 거쳐 한탄강을 거쳐 일동 이동 가평 지나가면서 보는 타관 땅이라 할지라도 휴가 중에는 즐거웠던 구경거리였다.
또한 부대가 이동하여 화천댐 상류 오음리 를 거쳐 103 (작전도로 명) 고개를 넘어 홍천에 군인의 신분에서 구경은 끝이 났다.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언제나 자유로운 시간 속에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볼 것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직업이 억매인 직업이라 시외버스를 타 보며 는 며칠이고 끝없이 달려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한번은 내 마음이 혼란스럽고 정리가 되지를 안 해서 부모님께 상의도 없이 친구 한 사람에게만 이야기하고 무작정 광주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서 춘천으로 가서 설악산 울산바위를 오르는데 조계종에 속하는 신흥사 사찰이 있어 문득 중이 되며 는 세상 무거운 짐을 덜어버리고 바랑하나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탁발을 하면서 내 인생을 바랑에 짊어지고 시주하면 바랑에 담아주면 좋고 아니 주면 다음 집에 들러서 주면 받고 아니 주면 그냥가고 가다지치면 돌 바위에 궁둥이 붙이고 쉬어가다 해저물면 아무사찰에나 들려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하고, 쉬면서 아침햇살 받아가며 정처 없는 탁발 길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자유스럽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라 신흥사 주지스님을 면담했다. 중이 되려고 결심한 것이다.
“주지스님 내가 중이 되려고 하는데 절차가 어떠합니까?”
“어디서 오셨소!”
“나는 전라도 광주에서 왔습니다.”
“전라도에는 큰 사찰이 많이 있는데 왜! 이곳까지 오셨소!”
“오다보니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몇째 아들이요?”
“내, 둘째입니다.”
“우리 스님들 중 둘째 아들이 많답니다. 약간의 서류가 필요합니다. 신원증면서하고 부모 동의서를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내가 입적해서 중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 해주시겠습니까?”
“내! 그러지요. 중이 되려면 행자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약 6개월 정도인데 임무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와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많은 인내와 고생을 할 것이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속세에서의 잡심을 빨리 버려야 할 것이요. 속세에서의 잡심을 버리지 못하면 주지스님의 권한으로 추방합니다.”
“내! 그래요! 내가 말 듣기로는 약간의 지참금을 지불 하며는 빠른 시일에 중이 된다던데 어떠합니까?”
“옛날에는 그렇게들 했답니다. 절들이 가난하여 탁발을 해서 절을 운영해야하니까요. 지금은 절들도 재정이 그런 데로 여유가 있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탁발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중들은 부처님의 공덕을 배웁니다.“
“그러면 탁발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까?”
“예! 있지요. 절에 큰 행사가 있을 적에는 할 수 있습니다.”
“예! 잘 알았습니다. 고향에 내려가 서류를 해가지고 오겠습니다.“
신흥사에다 입적을 해놓고 다음 여행지로 떠났다..
설악산 흔들바위를 거쳐 울산바위를 오르는데 푸른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서 내가 새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음대로 날을 수 있고 날다가 먹이만나면 배 채우고 배부르면 쉬어가고 날다날다 지치면 나무 가지그늘에서 쉬면서 노래하고 싶으면 지저귀다가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새들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또한 무슨 시름이 있겠는가. 부럽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왜! 저런 날짐승에게 호기심이 들까?
내 마음은 황폐 할대로 거치러 의지 할 곳이 절실하게 느껴져 신흥사 절을 보니 내가 쉴 곳은 저기구나 전광석처럼 내 머릿속에서 맴돌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이 되기로 결심한 것일까?
울산바위를 오르는데 양복에다 넥타이까지 또 구두신고 정상에 오르니 등산복차림의 관광객이 나를 보고 웃어 댄다. 나는 남을 의식할 그런 기분이 아니다.
내 인생의 길이 바뀌어 지는 시간들이다.
정상에서 산하를 보는 감동을 표현하려면 옆에 지인들이 있다면 경치 좋은 감탄도 할 것이나 우울한 심정에다 홀 홀 단신 이다. 그러니 한 바퀴 돌면서 마음속으로 아! 참 경치가 좋구나 하면 그뿐이다. 오라는데 없어도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강원도 강릉시를 거쳐 낙산사에서 확 트인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잠시나마 긴 호흡을 해보면서 내 마음은 언제나 저 넓은 태평양처럼 확 트일 것인가 답답하기만 하다. 인생이 가는 길은 왜 이리 험난한고. 인생의 가는 길에는 희비가 있다는데, 내가 가는 인생길은 험난하며 힘이 드는지, 앞날을 생각 할 적에 이사회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 가시밭길을 해쳐나가는 컴컴한 긴 터널을 지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하면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술 한 잔에 풀어 볼만도 하는데 술을 한잔도 안한 것을 생각해보면 결핵을 어렵게 퇴치하는데 금주를 지키는 것은 마음 한 구석에 살고 싶은 욕망의 끈이 있었나싶다. 다음 버스를 타고 동해안 도로를 장시간을 가는데 비포장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안했다.
중이 되어서 바랑 짊어지고 두발로 이 길을 탁발하면서 꼭 한번가리라 하고 생각했다. 당시의 내 모습은 피골이 상접하여 말 그대로 뼈만 앙상한 몰골이었다.
폐결핵 병을 완치하고 회복하는 과정 이였다.병마와 싸워 이겼으니 자축이라도 해야 하는데 어찌 내 마음은 무겁고 혼란스러웠든지. 혼자의 몸이었으면서 이 세상을 나 혼자 짊어지고 가는 느낌 살아가는 것이 참 힘겨웠다. 모든 것이 다 싫었다.
내 머리 속에 잡념이 가득 찬 것을 이리저리 정리하다보니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도심도 세속인으로서는 마지막 보는 풍경이라 감탄은 없다.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내 삶을 포기한지도 모른다.
대구를 떠나 경주에 도착하여 고도의 유적지를 이곳저곳 돌아보는데 의미가 없다 하면서도 무슨 감정을 담으려고 열심히 관찰했는지?
한편 즐거운 여행이라면 경주에서 생활문화의 터전을 잡았을 것이다.
여관에 투숙을 하였는데 주인이 여자였으며 본인의 신상과 현제의 처지를 말해준 것이다. 내 심난한 마음은 말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자기 남편에 첩이란다 그것도 일주일정도에서 들린다고 그런 사람이 남편이냐고 노골적으로 푸념한다. 그러면서 방값도 밥값도 안 받은 단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오늘저녁에는 손님이 많이 오시는 날이라 내방을 비우고 자기 방으로 옮기라고 한다.
난처했지만 그렇게 6 일정도 투숙했는데 내 마음은 전혀 동요 되지 않고 오직 중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그래서 내일새벽에 떠나기로 마음먹고,
“나 내일 아침 일찍 남은 유적지를 돌아 보고 올 터이니 저녁밥이나 준비 해 두시오.”
“돌아 다녀봤자 다리만 아프고 고생만하니 오늘은 쉬십시오. 내가 맛있는 음식 사 드릴게요.”
“대충 구경하고 이른 시간에 돌아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저씨 아주 갈 사람같이 인사를 하십니까?”
“아! 그렇게 들으셨나요. 미안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나의 소지품은 칫솔하나 주머니에 넣어버리면 짐은 없다.
베개 밑에다 숙박비 하고 밥값을 넣어두고 나와 버렸다. 그리고 부산으로 출발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부인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
내가 부산에 제일부두에서 제주행 목선 여객선이 오후5시에 출발이다.
영도다리 까딱까딱 하는 것을 보려고 했는데 못 보고 승선했다. 여객선 속력이 7노트란다.
그렇게 큰 배는 처음 보면서 타는 것도 처음이다. 배안에 객실이 방같이 평평하고 모두가 겉옷을 벗어버리고 누워버린다. 나는 양복차림으로 앉아있는데 내 옆에 처녀들 네 명 이서 겉옷을 벗어버리니 스미스 차림이다 60년대이니 내 시선을 어대다 돌릴지 난감했다.
그날 밤 바람이 배 머리에서 불어 정상적인 속력을 못 내고 17시간 만에 처음 보는 제주항에 도착하니 9 월인데도 얼마나 춥던지 사시나무 떨듯 했다.
여행이라고 처음 가는 길이라 또 내 마음 분위기가 여유롭고 기분 좋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발길 가는 데로 걸어갔다.
먹을거리고 볼거리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오직 내 머리 속에는 중이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여행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하여 서류 만들어서 강원도 신흥사절로 가는 것이 나의 생각 이였다.
당시는 서귀포로 가는 길이 군사정부에서 내준 새길 5.16 도로가 제주사람들의 자부심 이였다. 그 길을 버스를 타고 서귀포로 갔는데 개발이 안 되어서 사오십체정도의 어촌에 불과했다. 제주도를 일주하는 버스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이길 또한 중이 되어 바랑 짊어지고 탁발하러 꼭 한번오리라 하고 마음먹었다. 제주도의 구성이 관광지라는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사람 사는 동내라고 할까? 지금에 와서 이렇게 변할지는 상상도 못했다.
이틀 후에 제주항에서 목포를 가는 안성 호를 타고 네 시간 반 정도에 목포항에 도착했다.
목포시도 처음 보는 것이다. 유달산을 올라가 시가지와 먼 바다 구경하는데 내 몸 하나 한 바퀴 휘 잡아 돌면 구경은 끝이다. 목포터미널에서 광주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부모님께서 부모 동의서를 해주실 것인가? 걱정이었다. 광주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가니 어머님께서,
“왜! 그런 행동을 부모와 상의도 없이 했느냐?”
“어머니 다시 올라가렵니다.”
“이놈아 무엇이 괴로워서 말도 없이 집을 떠났느냐?”
“어머니 살아가기가 참 힘드네요.”
“아! 이놈아 무엇이 힘이 드느냐? 어머니랑 같이 사라가면 될 것 아니냐?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 잘 사라보자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지 않냐!”
“어머니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무거워요”
“오냐! 이 어미가 잘 알았다. 무거우면 조금 내려놓고 같이 나눠지자 네가 그렇게 힘 든 줄을 몰랐구나. 우리 힘들어도 같이 살아가자”
“어머니 나 중이 될래요. 시름없이 살고 싶습니다.”
“뭣이야? 뭣이라고 했냐? 중이 된 다고야 안 된다 자식 중대란 부모가 있더냐? 안 된다 안 돼”
증명서를 가지고 서해로 돌아가면서 중이 되어 탁발할 지리를 알아두려고 했는데 어머님이 극구 만류하셔서 중이 되는 것은 포기를 해버리고 어머님 말씀대로 마음 추슬러 열심히 일해서 돈 모아 결혼도 하여 가정을 가져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으로 유형의 여행은 끝이 나고, 무형의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결혼이란 힘들고 어려운 긴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결혼이란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즐겁게 떠나보자 마음을 단단히 하고 처음 신혼살림에는 그런 데로 순탄한 것은 마누라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헌신으로 서로 보필하니 부인의 성의에 감사 하면서 살아가는데 우리부부가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왔다.
인생의 여행길은 정거장이 없으며 종착역까지 같이 갈 사람도 없다.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길은 꼭 가야할 길이다. 중간의 역에서 누가먼저 내릴지? 내가먼저 내리면 홀로 가는 마누라가 외로워서 어떻게 보낼 것인가 홀로 가는 모습 어떻게 볼 것인가.
나의 고난과 역경의 여행은 힘이들었지만 동반자가있어 희비가 교차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마누라에게 고맙다.
지금의 우리 시대에 해외여행 하기가 쉬어져서 친구들과 호주여행을 떠날 적에는 즐거운 부부동반 여행이라 삶에 보람 있는 여행 이였다.
우리나라도 발전하고 내 살림살이도 전보다는 윤택해져서 여유로운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장거리 비행기도 타보는 마음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처럼 내 마음도 같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각 나라마다 삶의 문화와 규칙이 있어, 처음가보는 곳이라 물어볼 것이 많아 가이드에게 많은 질문을 해서 간단한 그 나라의 유형무형의 형태를 짧게 알 수 있었다.
그 나라는 지하자원이 많아 복지국가로서 부족함이 없이 보였다.
나는 짧은 생각으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우선 국민들이 복지가 잘 되어서 살기 편해야 정치하기도 쉬어 질 것이다. 살기가 어려워 보통사람들의 요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모든 문제가 꼬이고 꼬여서 더욱더 살기가 어려워 진 것 같다.
호주란 나라는 가는 곳 마다 자동차 길을 재외하고 어디를 가나 잔디가 깔려있다. 대기환경이 깨끗했다. 또 신호등의 횡단보도는 보행자 우선이었다. 정지선에 정확히 정지를 해서 보기가 좋았다.
잠깐의 소나기비가 내렸는데 자동차가 깨끗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세차를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대기에 오염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상체는 커 보인데 하체가 가늘게 보였다.
역시 다른 나라를 보는 것은 모두가 새로웠다.
여행사에서 보내는 여행은 가이드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자유가 없고 그자들의 리베이트에 치중하여 움직이니 여행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소풍의 계념이다.
그 나라의 문화를 느껴 보려면 재래시장 통을 가봐야 하는데 그런 곳은 리베이트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하여 가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행위들이 여행사를 통해야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여행사나 가이드가 최대한 활용해서 그들의 수입을 올리지만 관광객들은 즐거운 여행이 반감되어 버린다. 그러나 당시에는 처음 보는 관광이라 즐거웠고 보람이 있었다.
귀국하는 날 친구 부인의 기일이 되어서 이국땅 시드니 공항내에서 제례상을 차려놓고 제례를 올리니 이국인들이 구경거리가 되었다. 뜻 깊은 행사였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대번에 시야가 달리보이는 것은 우리 공항에 인파들이 깨끗하고 키가 크고 해서 아! 우리국민들도 적은 체구가 아니구나. 했고 옷의 컬러가 밝고 활기차있었다. 내 나라사람이라 그런 느낌 이였을까?
여행이라는 것이 일상생활에 활력소가 된 것을 실감하고 한동안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인생의 여행은 계속 되면서 어떻게 좋은 날만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지도자를 비롯해서 정치하는 자들이 나라를 부도처리 한 바람에 (1997.12.0.)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국민들은 힘든 시대를 살면서 내일의 꿈과 희망이 보이지 안했다. 그 어려운 시대에 중국으로 여행을 가는데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문화의 위상과 경제적으로는 환화 천원권의 위력이 그렇게 큰 줄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조선족들 말이 모국이 잘 살아주어서 고맙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아! 지금 우리는 못사는 것이 아니고 어려울 뿐이구나. 하는 자부심 같은 것이 마음한구석에 남아있었다. 뿌듯했다.
각국마다. 생활의 문화는 차이가 있어도 도시에 음식문화는 관광객들의 교류로 거의 평범해서 음식 맛은 거부감은 없었다.
또 한 가지 느낀 것은 관광지 개발이다. 사회주의 국가여서 개발했지 자본주의 국가는 그런 개발은 꿈도 못 꿀 것이다. 왜냐면? 자본주의 사고는 부가가치가 앞서야한다.
자연환경 훼손이 아니라 부가가치다. 이런 공사를 할 적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사업을 할 수 없다. 자본주의 나라가 그런 시설을 하려면 기술은 있어도 비용문제로 못할 것이다. 경치도 놀랐지만 그런 시설들이 놀라게 했다.
관광지의 교통이 아주 편리하고 전혀 불편이 없었다. 우리의 관광은 집에서부터 내가 필요한 음식 버스 대절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주 불편하여 우리관광도 개선 할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지에서 음식을 먹음에 있어 바가지요금을 쓰는 느낌이 들어 번거로워도 집에서 모두 준비하지 않는가. 우리의 관광지 상인들은 관광객을 돈쓰는 봉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사철관광객을 맞이하는 자세로 정직한 상도의를 발휘한다면 현지에서 모든 것을 구입할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려운 현실일 것이다.
색다른 이국의 관광은 느낀 것이 많았다.
즐거운 관광을 마치고 또 언제 이런 뜻있는 여행이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어떠한 여행을 할지모르니 첫째는 돈이 있어야하고 건강해야 하는데 시력이 좋아야 좋은 곳을 많이 볼 것이고 다리가 튼튼해야 걸어 다닐 것이고 이가 튼튼해야 입맛이 있어 산해진미를 맛 볼 것이고 귀가 밝아야 이리모여 저리모여 하며는 따라다닐 것 안인가.
우리 친구들 운동을 열심히 하여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금년 여름에 제주도 여행가기로 해서 친구들은 마음이 들떠 있을 것이다.
2009.8.3~5 일까지 관광여행 기간이다.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막내아들 신혼살림 집들이를 하는데 신혼의 새로운 생활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누구나 피해 갈수 없는 한번쯤은 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부모형제들을 초대한 것이 인생의 여정의 일부분에 속하는지, 아니면 이벤트식의 즐거운 신혼생활을 보여주는 초대받은 여행인지, 혼돈의 여행길이 되지만 나는 이 여행은 이벤트도 아니고 계획된 여행도 아닌 인생의 여정의 여행이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이냐, 갑작스런 비보가 왔다. 잉태한 그녀석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 보기 싫어서 저세상으로 가버렸단다. 늦은 신혼에 꿈이 부풀어있는 가운데 첫 잉태라니 희망과 꿈이 컷을 것이다.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일단 우리부부만 방문하여 위로를 하기로 했다.
낫선 타관 땅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웠겠는가. 이럴 때 부모형제가 그립고 마음의 위로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신혼의 꿈들이 빠른 시간에 정리가 됐으면 한다.
역시 인생의 여정의 여행길은 즐겁기만 한 것이 안인가 싶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날 친구들과 부부 동반하여 제주여행을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새둥지를 틀고 희망에 부풀어 있을 신혼에게 위로의 한마디 남기고 떠나면서,
"자식은 다시 얻으면 되는 것이고 산모가 건강하니 우선 안심해라. 너희의 몸이 건강해야 차후에 자식은 또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계획하고 떠난 여행은 즐거운 여행이었으면 한다.
나는 우리나라 여행과 다른 나라의 여행은 어떻게 다른지 모르지만 우리내의 관광문화는 바뀌었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상기 해본다. 우리 내 관광현지 상인들은 관광객을 돈쓰는 봉으로 아는 이런 몹쓸 문화는 언제 개선될지.?
지금은 여행문화가 보편화이기 때문에 한철의 관광문화가 아니므로 사철 관광문화라 할 것이다. 우리가 여행지를 갔을 적에, 안 좋은 점과 좋은 점을 비교해서 좋은 점이 많으면 좋은 쪽으로 생각이 변하여 즐겁고 보람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행사에 의탁해서 가는 여행은 선물을 구입하는데 지정장소의 점포에서 구입 하라고한다. 그런 점포에는 값이 비싸다. 가이드가 그런 줄 알고 사라고 한다.
이러한 관광문화는 소수의 생각으로는 개선하기 어렵다기보다 불가능하다.
여행을 다니면서 생각하는 것은 젊어서 여행을 다녀야 하는 데는 공감하지만 젊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가겠는가. 그러나 늙어서 여행은 고행길이다. 추억거리를 어디에다 담을 것인가. 담아서 어디에다 쓸 것인가. 지금에 늙은이들은 다리 힘 있을 적에 거의 구경을 다하고 지금은 관광지에서 늙은이들을 보기어렵지만 드물게 지금도 자식들 손잡고 구경 다니는 늙은이가 있다. 삼자의 시선은 답답하게 보인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의 여생에서 여행이 내게 필요할까?
추억을 담기위한 여행은 그만 할 것이다. 여행이란 그곳의 문화를 장단점을 보고 내 삶에 접목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일 것이다. 그러나 70평생 내방식대로 살아온 것에 조금도 후회는 없다. 지금에 와서 그곳의 문화를 접목하기란 의미가 없다.
앞으로의 여행은 내게 의미가 없는 여행이라 할 것이다.
그 많은 여행 경비를 드리면서 무엇을 얻어 내 마음에 담으려고, 담아서 어디에다 필요하게 접목 할 것인가. 여유 있는 생활이라면 낭비하기 위해서?, 아니다 여유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나이70이면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이 마지막 고비가 아니던가. 현대의학이 발달하고 인간수명이 연장되었다 할지라도 이 나이가 한계일 것 같다.
이번여행은 절친한 벗들의 부부동반 하여 같은 뜻으로 같다오는 여행은 정말 소중하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친구들이 지금처럼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운동을 필히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첫댓글 새로운 삶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여행이여을 것입니다
이상수님은 소설가이신가요
나는 젼혀 가추워진 공부를 못했습니다. 가난해서 학교를 못다니고 야학으로 검정고시로 동강대학교 10학번에 등록
했습니다. 배우지못함에 한풀이 겠지요. 내가쓴글들이 엉성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수씨 힘내세요 그리고 건강하세요 인생에글 잘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