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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하나 스크랩 [아프리카] 뒤죽박죽 이집트 여행 22(이시스 신전)
┏☆뜀도령™☆┛ 추천 0 조회 100 08.02.19 10: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뒤죽박죽 이집트 여행 22(이시스 신전)

 

2008.01.03 12:10

 

11시 55분 하이댐을 출발해서 12시 10분쯤 필라이에 도착했다. 나일강 유역의 전체 면적은 100만km2에 불과하고 20세기 들어와 급증하는 식량수요를 확보하기 위해서 댐 건설이 제기 되었고  아스완 댐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그로인해 필라이 섬에 있던 이시스 신전, 트라얀 황제 별궁 등이 수몰되었다. 그래서 이들 신전을 여기보다 높은 지금의 아기르키아 섬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물에 잠겼던 이시스 신전을 주위에 2줄의 쉬트 파일(sheet pile)을 박고 그 사이에 있는 물을 펌프로 배수했으며, 이시스 신전을 약 4만 개 조각으로 절단해서 고지대인 아기르키아 섬으로 옮겼고 이렇게 복원하는데 2년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시스 신전으로 가기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이곳에서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역시나 만만찮은 가격의 티켓

 

 자, 이젠 이시스 신전으로 가보자구...

어랍쇼? 또다른 관문이 있었네...우린 이 곳에서 보트를 섭외해서 타야만 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별로좋지 않은것을 보니 또다시 이집션과 한 판한듯...

 

 보트에서 바라본 이시스 신전

 

 애 낳는것도 아닌데 봉은 왜그렇게 꽉잡고 있는지...

 

 아마도 신전을 따라서  왼쪽  방향으로 이동해서

 

 우리가 내렸던 보트 선착장이다.

 

2008.01.03 12:40 이시스 신전

 

아래의 사진들을 보면 이시스 신전 1, 2탑문 사이의 회랑 열주 등을 볼 수 있었다. 첫 째 탑문 상부 벽에 음각된 6신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비록한 이시스, 하토르, 호루스 신 등이며, 제 2탑문 벽에 음각된 부조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이시스 신에게 제물을 봉헌하는 장면이라고 한다.또한, 둘째 탑문은 본래 있던 큰 자연석을 그대로 탑문에 끼워 넣었는데 자세히 보지않으면 모른다고한다. 외따로 서 있는 트라얀 황제 별궁은 신전에 의식행렬이 있을때 처음 접대하던 곳이었다고 하는데 왜 몰랐을까?

어쨌든 탑문을 나오다 보면, 탑문 측면에 프랑스어로 1799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가 필라에섬을 방문하였노라 라고 적어놓았다고 하는데 뭔 지랄인지...

 

 

 

 

 

 

 

 

 

 

 

 

 

 

 

 

 

필라이 (Philae)


(아)Jazrat Flah.나일 강 제1폭포와 옛 아스완 댐 바로 위에 있는 섬.


이집트 아스완 주의 아스완 시에서 남남서쪽으로 11㎞ 떨어져 있다. 이곳의 옛 이집트 이름은 프알레크였고, 콥트어에서 유래한 필라크('끝' 또는 '먼 곳'이라는 뜻)라는 이름은 이 섬이 누비아와 경계를 이루는 섬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관례적으로 쓰는 이름은 그리스어이지만 이 지방 사람들은 〈천일야화 The Thousand and One Nights〉에 나오는 영웅의 이름을 따 크사르아나스알우주드라고도 했다. 크기가 460×150㎞인 충적층으로 덮인 필라이의 화강암 암반은 나일 강이 최고 수위로 범람할 때도 그 위로 솟아 있었으나 1902, 1907년에 아스완 댐이 들어서면서 저수지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침수되기 전에 이곳을 보려고 옛 신전과 제단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현재 지명인 자지라트알비르바('신전의 섬'이라는 뜻)라는 이름도 얻었다.

초기 이집트 시대부터 이 섬은 이시스 여신에게 바쳐졌는데, 알려진 최초의 건축물은 쿠시 왕조 25대 파라오인 타하르카(BC 689~664 재위)가 지은 것이다. 알려진 최초의 신전은 사이테스(BC 664~525)가 건축한 것으로서 허물어진 채 발견되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건물로 재사용되었다. 30대조 마지막 파라오였던 넥타네보 2세(BC 360~343 재위)가 지금의 주랑(柱廊)을 증축했다. 이 파라오는 이후 1952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던 통치자 중에서 유일한 본토 출신의 통치자였다. 이시스 신전 복합 건조물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와 그의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완성했다. 그러나 그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BC 27~AD 37) 때 시작한 내부 장식들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는 이 신전들의 서쪽에 간이 건조물을, 동쪽에 문을 증축했다. 이집트 신들에게 헌사된 또다른 건축물로는 임호테프에 바쳐진 신전과 하토르에게 바쳐진 신전, 그리고 오시리스·호루스·넵티스에게 바쳐진 예배당 등이 있다.

신전은 로마 시대에 계속 번영했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378년부터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통치기(527~565)에는 문을 닫지 않았다. 이시스 여신을 섬기던 사제들은 상(上)이집트에서 막강한 권력을 얻었는데 이는 그들이 와디알라키 근처의 금광을 차지하고 있었고 쿠반에 있는 대상로(隊商路) 종착지를 관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노바다에 부족과 블레미에 부족이 계속해서 이시스를 섬겼기 때문에 누비아에서 이들이 미친 영향력은 이집트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한편 이집트를 다스린 로마와 비잔틴 통치자들은 연례의식 때 여신의 형상을 빌려주어 이집트 본토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괴롭힌 이들 부족을 관리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재임 후기에 이시스 신전은 교회로 바뀌었고, 융성하던 도시 안에 다른 2개의 콥트 교회도 세워졌다. 이 모든 건조물은 옛 아스완 댐 뒤쪽이 부분적으로 침수되기 전에 탐사되고, 증축되었다(1895~96). 그후 1907년 세밀한 검사 결과 장식물의 채색 부분이 염분에 의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1970년 상류 쪽의 아스완 하이 댐 완성과 함께 신전들이 물 위로 다시 드러났을 때는 제단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이 발견되어 이것들을 근처의 더 높은 곳인 아길키아 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섬은 필라이의 본모습과 같이 평평하게 다듬어졌으며, 신전들은 어느 정도 본래의 아름다움을 살려 1980년에 재건되었다.

[에듀넷 브리태니커학습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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