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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화가가 구름 붓으로 저 너른 들판에
멋진 그림을 그리는구나!
구 본 황
2010년 여름 <남도 답사 여행>의 자취를 좇아서,
두 번째 펜을 잡으며
2010년 7월 19일(월)~7월 24일(토)에 5박 6일 동안 임경유, 기우현 선생님과 함께 한 우리산악회의 <남도 답사 여행>은, 폭염 속에서도 등산과 문화체험을 함께 달성하여, 다시 해낼 수 있을까 지금도 고개가 갸웃거려질 만큼 힘겨웠지만 또 그만큼 보람을 찾을 수 있어서, 되돌아보면 삶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게으른데다가 살아가는 여정에 쫓겨서, 그날의 향기를 묻어둔 채, 어느새 2년이란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남도 답사 여행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첫째 날 김옥균 생가, 마곡사, 추사고택,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들른 다음, 점심 식사를 하고수덕사 가는 길목의 정경까지는, 2011년 6월 8일에 적은 <덕산 온천에서 몸을 씻고, 수덕사에서 마음을 씻은 다음, 서울에 올라와서 다시 싸운다>에 담아놓아서, 여기서는 그 뒤 자취를 조금이라도 되돌아보고자 한다.
폭염 속에서, 신여성의 눈물이 배인,
수덕여관과 수덕사를 향해 걷다
7월 19일(월) 오후 2시, 기록적인 더위가 넘실대는 날씨인데도 수덕사 입구로 몰려가는 관광객 물결에 휩싸여 터덜터덜 걷다보니, 좌우에 많은 상가가 밀집되어 있고, 수덕사 입구 일주문 가까이에서, <수덕여관>이 손짓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페미니스트이었던 나혜석이 김일엽 스님과 교류하며 출가를 준비했던 곳인데, 뒤에 나혜석을 존경하였던 동양화가 이응노가 사들여서 6.25때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었다.
김일엽은 본명이 김원주(1896-1971)로, 평남 용강 출신이고 목사 김용겸의 장녀인데, 일본 도쿄에 유학한 재원이었다.
신문학에 심취하여 귀국 후 <신여성>을 출간하였고, 여류시인으로서 활약하자, 이광수가 <김일엽>이란 예명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일본인 대학생 오다 세이죠와 연애하다가 오다 마사오(서양화가 김태신)를 출산하게 되는데, 결국 결혼에 실패하게 되자 세속에 미련을 끊고, 수덕사에 와서 여승이 되어 수덕사 환희대에서 수도하다가 입적한 전설적인 신여성이었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나혜석(1896-1948)은 한말에 사법관을 거쳐 군수를 지낸 나기정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역시 일본 도쿄에 유학한 재원으로, 정신여학교 미술 교사를 지내다가,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과 특선을 거듭하였고, 1931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도 입선할만큼 재능을 인정받았었다.
그러나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게 되고, 남편의 친구인 최린에게도 버림을 받자, 1934년 <신세계>에 유명한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면서, 여권신장을 역설하였다.
‘조선 남성의 마음은 이상합니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중략)
하지만, 여자도 사람입니다.
한 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흐트러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입니다.
(중략)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 안아주면,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가 되기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서,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혼고백서]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
1935년 이혼의 아픔과 큰 아들을 폐렴으로 잃은 슬픔을 안고, 친구 김일엽이 귀의한 수덕사에 찾아와 승려가 되려하였으나, 일엽은 <수덕여관>에서 혜석과 대화를 나눈 뒤, ‘너는 안 돼.’라고 만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가 거듭 부탁하자, 일엽은 수덕사 조실 스님(만공)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였지만, 만공선사에게서도,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혜석이 중이 되겠다고 수덕여관에서 시위하고 있을 때, 현해탄을 건너 일엽의 열네 살 앳된 아들이 찾아왔는데, 일엽은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고 냉정하게 말하였으나,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소년을 위하여, 잠자리에서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주었다고 하니, 혜석은 중노릇할 그릇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결국 속세에서 불행한 생을 마치게 된다.
관세음보살이 건네주는 감로수로 타는 목마름을 잠재우다
수덕사는 덕숭총림의 본거지로서(총림은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에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등 5대 총림이 있다.), 경허, 만공 등 근현대의 전설적인 선사를 배출한 대찰인데도, 김일엽 스님으로 인하여, 여승들만 사는 비구니 사찰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다.
(덕숭산 서쪽 산줄기에 비구니 제일선원인 견성암과 김일엽 스님이 주석하였던 환희대 등 비구니 암자들이 따로 있기는 하다)
사천왕문, 박물관 건물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니, 멋들어지게 푸른 가지를 늘어뜨린 느티나무가 더위에 지친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는 것이었다.
절 중앙에서 당당하게 뭍 가람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은,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 중 오래된 주심포, 맞배지붕을 한 형태로, 편년의 기준이 되는 기념비적 건물이다.(국보 49호, 1308년 고려 충렬왕 때 건립)
물론 고려 시대에는 많은 벽화를 그려 넣었고, 그 자취는 일제 강점기까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이 절에 와서는 살펴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모사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이름 모를 어느 관광객이 역시 아쉬움을 느꼈는지, 임 선생님께 새롭게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완벽한 복원이 아니라면, 덧칠을 하는 것은 문화재 파괴 행위이다)
대웅전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옛 추억을 되살려 덕숭산 등산을 제의하니, 임 선생님이 흔쾌히 동의하시는 데 비하여, 기 선생님은 소극적으로 반대하여, 산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삼복더위 철이고 가장 따가운 2시가 지난 시각에 산에 오르니, 땀이 비 오듯 온몸에 흘러내렸는데, 향운각 근처 관세음보살상 옆에서 보살님이 건네주시는 감로수로 목을 축이니, 살 것만 같았다.
남연군묘를 손짓하다가, 덕숭산 산신령의 장난에 넘어가다
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기둥 위에 지구를 올려놓은 것 같은 만공탑이 팔을 벌려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왜색불교에 맞서서 불교의 자주성을 수호하기 위한 대사의 법문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스님의 친필로 새겨진 <세계일화(世界一花: 온 인류는 꽃 한 송이와 같이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백초시불모(百草是佛母: 대자연이야 말로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다)>가 뭉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지난날 덕숭산 등정 길에 잠시 들렀던 정혜사는 선원의 중심 건물이어서인지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런데 기 선생님은 정혜사 담 그늘 아래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겠다고 사양하여, 임 선생님과 인적이 끊긴 숲길을 헤치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르다 보니 어느덧 495m 정상에 발길을 내딛게 되었고, 서해 바다와 오서산, 예당평야가 한눈에 들어와서 보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북쪽에는 바로 코앞에 3산관을 쓴 가야산(해발 678m)이 반기고 있는데, 임 선생님 가족과 함께 그 산 아래 남연군묘를 둘러보고 등정하였다가, 너덜바위 지대에 갇혀서 힘겨운 탈출 작전을 전개하였던 지난 날이, 손에 잡힐 듯 그립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추억에 잠겨서 오후 3시 30분쯤 정혜사에 내려오니, 아뿔싸, 기 선생님이 보이지 않지 않는가.
한동안 휴대폰 통화도 이어지지 않아서 어안이 벙벙하였는데, 산 위에서 홀연 기 선생님이 내려오는 것이었다.
길은 외길이고 뻔한데 서로 보지 못하였으니, 덕숭산 산신령의 장난이 아니었을까?
대나무 밭 초가집에서 선열의 향기가 느껴지다
예산 지역 답사 여행을 보람 있게 마치고, 우리 일행은, 주마가편, 더위를 잊은 채 홍성 지역 탐방에 나섰다.
먼저 일제 강점기 독립군 대장으로서 민족의 영웅이었던 김좌진 장군 기념관(사당, 생가지가 같이 있음)을 찾아 갈산면을 찾아갔으나, 하필 오늘이 월요휴무일이라서 문전축객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무더위를 무릅쓰고 시골 길을 달려간 결과가 빛을 잃게 되니, 인접한 예산군과 비교하면서, 아쉬움을 서로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학여행 보다 더 철저한> 문화유산 답사를 강행하는 우리산악회가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다시 굽이굽이 마을길을 내달려서 결성면에 있는, 임 선생님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이었던, 한용운 선생 생가지를 찾아 적토마를 내달렸다.
가도 가도 축산 농가 분뇨 냄새가 진동하는 농로 길을 달리노라니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는데, 바로 다음 해(2011년) 초 이 지역에 구제역 파동이 심하게 몰아닥쳐서 많은 농가가 피해를 입었었다.
그런데 남당읍 쪽 오솔길로 잘못 들어가다가 적토마 앞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리자 임 선생님은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애마를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한용운 선생 생가지는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하여 있었는데, 뒤편은 대나무 밭, 앞은 싸리 울타리로 조성되어 있고 달랑 방 2칸짜리 시골 초가이어서, 설화에 나오는 나무꾼 집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기 선생님도 믿기지 않는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고 혀를 내두르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이곳까지 찾아온 데 감격하여 다투어 방명록 앞에 섰는데, 가슴을 흔드는 대나무 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선열의 향기를 느끼고 갑니다.’
라고 적고 적토마 위에 올라탔다.
폭염주의보에도 선크림 하나 바르지 않고 답사를 강행하다
한용운 선생 생가지까지 다녀오니, 어느덧 저녁 7시가 넘어가고 이제는 심신이 탈진 상태가 되어서, 오늘 답사 여정은 김좌진, 한용운 선생을 배출한 <역사의 고장> 홍성에서 숙박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홍성읍에 들어와서 88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비교적 싼 가격으로 계약하고(3만원), 읍내가 한 눈에 보이는 좋은 전망이 장점이었으나, 시설이 낡아서 구멍 난 망창 때문에 밤새 모기 공습을 받아야 했고, 화장실 변기 물이 제대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임 선생님은 수제비 요리 준비를 하고, 기 선생님과 나는 시내에 나와 쌀과 부탄가스를 구입하였는데, 기 선생님은 반찬 가게를 둘러보다가 재빨리 <김치가 빠져서는 안 되지>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숙소 안에서 알뜰한 식사를 하며 TV 시청을 하는데, 전국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는 소식과, 외출자제와 피부화상 주의를 권유하는 안내 방송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임 선생님은 10일 동안, 기 선생님은 7일 동안 예상하면서도, 선크림 하나 준비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선언하여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꾀꼬리 소리 따라 밀림 같은 참나무 군락 속을 헤쳐 나가다
다음 날(7월 20일, 화요일) 알람 소리에 맞춰 아침 5시 쯤 기상하였는데, 창밖의 홍성 시가지도 여명의 이불을 걷어 젖히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밤새도록 모기와 사투를 벌인 기 선생님이 기상하기를 기다려서, 임 선생님이 지은 밥과 준비해온 된장찌개, 김치로 오붓한 식사를 하고 숙소를 나왔는데, 벌써 더위가 느껴져서 러닝셔츠는 벗고 T-셔츠만 입게 되니, 8벌이나 가져온 러닝셔츠가 무색하게 되고 말았다.
토굴 젓갈로 유명한 광천읍을 통과하여, 상담마을 쪽에서 7시 40분쯤 오서산 등산을 시작하였다.
장항선 기차를 타면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항상 우러러 보며 오르고 싶어 했던 산이라 감개가 무량하였는데, 실상 오늘 산행은 바다 쪽에서 보면 뒤편에서 오르는 것이라서, 다소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임 선생님은 멀리서보는 후덕한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이 산은 산세가 급경사라 등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대로 처음에는 임도를 걷다 보니 수월하였으나, 숲길로 들어서니 가파른 된비알이 이어져서 <설악산 마등령 오르는 것 같다>고 이구동성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바람도 벼랑길이 무서운지 불어오지 않으니 온몸은 이내 땀으로 목욕하곤 하는데, 임 선생님은 <쉰길 바위>이정표가 나타나자 40년 동안 인도하는 사람을 못 만나서 설악산 쉰길 바위 코스를 못 가본 것을 한탄하는 것이었다.
급경사길 1.3km 구간을 1시간가량 강행군 하고, 꾀꼬리 소리 따라 밀림 같은 참나무 군락 속을 헤쳐 나가자, 그간의 고생을 보상해주려는 듯, 머리 위로 산뜻한 파란 하늘과 거인의 너른 가슴 같은 산등성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바람 화가가 구름 붓으로
저 너른 벌판에 멋진 그림을 그리는구나
힘겹게 올라온 비탈길과는 정반대로 능선 길은 평지 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오서산 산등성이가 전체적으로 테이블 모양의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능선에 올라서자, 한달음 거리에, 날아갈 듯, 오서정 정자가 팔을 벌려 우리 일행을 반겨 주었다.
정자에 오르니, 우리 일행을 위한 맞춤 서비스인지, 3개의 의자가 웃고 있지 않은가.
된비알에서는 그토록 인색했던 바람 소리가 휭휭 귓전을 울리고, 구름 떼는 정자를 박살낼 듯 세차게 몰려오는 것이었다.
제우스가 태양 수레를 인간 아들에게 맡긴 아폴로를 향해 매섭게 호통 치는 듯, 필마단창을 꼬나 든 장비가 고리눈을 부릅뜨고 100만 대군을 향해 사자후를 내뿜는 듯,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저절로 느껴졌다.
<아득하게 펼쳐진 벌판과 산골짜기는 바다, 세차게 달려오는 구름 그림자는 파도>라고 임 선생님이 말씀하자,
<바람은 화가, 구름은 붓, 논밭과 구릉은 도화지>라고 냉큼 기 선생님이 받아 넘기는 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 시인이 된 흥겨움을 느끼면서 좌우를 돌아보니, 남동쪽으로는 차령산맥이, 북으로는 가야산과 덕숭산이, 서해바다를 향해서는 보령호와 천수만, 안면도가, 손에 잡힐 듯, 서로 그리워 부르고 있었다.
오서정을 내려 와서 걷는 산등성이 길은 들판 같이 평평하여, 마치 소백산 정상 능선을 걷는 듯하였다.
샛노란 원추리 꽃과 분홍색 패랭이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서 동화 세계에 올라온 것 같기도 하고, 황토색 잠자리들이 너울거려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도 하였다.
웃음과 인사는 관광객 유치의 제1조건
정상은 정자에서 두 봉우리 건너 1.3km 거리(30분 소요)에 있는데, 해발 791m 표지석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주변과 고도차가 느껴지지 않았다.
온 길을 되짚어 하산하는데, 피부가 새까만 이 고장 아주머니가 올라오면서, 보일 듯 말 듯 웃음을 머금은 채 90도로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답례 인사를 하면서도, 반가움 반 미안함 반이 느껴졌다.
웃음과 인사야말로 관광객 유치의 제1조건이 아닐까?
내포지역 우두머리 영주를 만나고 온 보람에, 훈훈한 인정을 가슴에 담은 기쁨이 더해지니, 1시간 전에 땀으로 목욕시킨 된비알이 다시 앞길을 막아섰지만, 발길은 한없이 가볍기만 하였다.
( 2012년 8월 21일 적음 )
※ 직접 찍은 사진 자료가 없어서, 이 여행기에 실은 그림은 네이버 블로거님들 것입니다.
네이버 블로거님들에게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첫댓글 정말 오랜 만에 보는 글입니다. 속된 말로 목빠지게 기다리다 이제는 글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못했는데. 글을 계속 꾸준히 이어주세요. 금년 여릅방학에는 바쁘기도 했고 개인 사정으로 여행도 하지 못했는데 이 글이 그 아쉬움을 대신해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 봅니다.
2학기 개학하고 나서, 잠시 여유가 있어서 글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올 여름 폭염을 겪고 나니, 앞으로 정년하기까지 여름 방학을 이용한 답사여행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 면에서 2010년 여름의 <남도 답사 여행>은 값진 체험이었습니다.^^*
문화답사와 산행을 겸한 여름여행을 하고 오셨군요.
고단한 여행을 합의한 세 분의 열정이 감동적이고 실천에 옮겨 답사기까지 써놓은 과정이 존경스럽습니다.
살아있다는 실감이 저절로나는 글을 참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특히 예산의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이야기는 개화기 여성들의 너른 세계에 대한 선망과 그를 뜯어 말리는 전통적 관행의 무지가 충돌된 비극들이어서 안타까운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미숙하기만한 글이어서 부끄럽습니다. 유적지에는 수천년 우리 역사의 빛과 소리, 향기가 숨어있어서 감동을 줍니다^^* 아름답기만한 우리 자연까지 같이 호흡할 수 있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