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좌우명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일일학 일일신(日日學 日日新); 매일매일 공부해서 매일매일
새로워지자.
②꿈도사; 꿈을 높게 갖고,
열정을 갖고 도전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자.
2.
출생지는?
경남 의령군 부림면 지리산 자락의 여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야말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지요.
3.
자녀는?
1남 2녀입니다. 최근 첫 손녀를 얻었으니 저도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네요.^^
4.
혈액형?
B형입니다. 작년에 ‘B형 남자친구’라는 영화
때문에 B형 남자들은 성격이 안 좋을 거라는 인식이 있는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 가서도 성격 안 좋다는 소리는 듣지 않고
살았거든요. 이 점은 제 집사람이 보증합니다.^^
5.
군대는 다녀왔는지?
제가 외국생활을 오래해 군대에 안 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해군을 나와 예비군 훈련 한번 빠지지 않은
대한민국 남자입니다.
6. 진대제는 부잣집 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제 얼굴에 가난에 찌든 표가 없는지
의외로 제가 부잣집 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억하기도 싫을 정도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모님께서 막일과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갔지만 그래도 끼니를 떼우기가 힘들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기도 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철이 들면서 내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되물림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죽자살자 공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고를 가라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가까스로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살 곳이 없어
동부이천동의 철거민촌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남들처럼 도시락 두 개를 싸다닐 수 없어 배를
곯았는데 그걸 보시고 담임 선생님께서 장학금을 주선해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도시락 두 개를 싸다닐 수 있었는데 그 때 10원짜리 우동 국물에
말아먹던 찬밥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제가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장학금 덕분이었습니다. 반도체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가야했는데 유학 비용이 없어 좌절해 있을 때 나라에서 장학금을 대 주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국비 장학생
제도가 생겼는데 제가 우리나라 ‘국비 장학생 1호’입니다.
남들처럼 부잣집에서 태어나 유학까지 간 재원이 아니라 어렵게
어렵게 공부를 한 고학생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늘 ‘돈 많은 장관’ 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닙니다.
제가 가진 재산은 모두 회사에서 받은 연봉과 퇴직금을 모은 것입니다.
삼성전자의 임원이 되고부터 연봉이 후했기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저처럼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7. 왠지 차갑고 냉정한 성격일 것
같은데?
제가 좀 차갑게 생겼나요?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데 아마도 이공계
기술자 출신이어서 나온 말이 아닐까 합니다. 또 큰 기업의 임원과 고위 공무원으로 있다 보니 부하 직원들에게 왠지 먼 사람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요.
사실 업무에 관해서는 양보가 없고, 공사가 분명하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일적인 부분을 떠나면 누구와도 허물없이 지내는 옆집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저와 가까이 지낸
분들은 저의 이런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해외 출장을 가면 직원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가족들과는 정답게
문자메시지도 주고받는 정 많은 면모도 있습니다.
얼마 전 정통부장관 이임식에서 울먹이던 제 모습을 보셨으면 이런 얘기는
안 하실 텐데…^^. 저, 알고 보면 여리고 착한
사람입니다.
8.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저는 우리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서 낳은 늦둥이
막내아들입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엄마 등에 업혀 다닐 정도로 응석이 심했는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인부들이 모래를 채취하기 위해 체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 뭐하는 거냐고 물었죠.
돈을 벌기 위해 모래를 채취하는 거라는
어머니의 대답에 어린 나는 “엄마 나도 나중에 모래 팔아서 돈 많이 벌어 줄게.” 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늘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안 되어서 한 말인데 나중에 이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반도체의 주원료인 실리콘은 모래의 일종인데 제가 반도체로 성공했으니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죠. 다행히 어머니는 제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살아계셔서 조금은 호강을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9.
아내를 만나게 된 동기는?
1976년 돈이 없어 유학 재수를 하던 시절에 선배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 역시 나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다독거려주며 정을 키울 수
있었지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늘 나를 믿고 묵묵히 헌신하며 따라준 아내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제가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0.
집에서는 어떤 남편, 어떤 아버지?
사실 경상도 남자들이
다 그렇듯 신혼 초에는 무뚝뚝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저도 모르게 조금씩 다정한 남편, 다정한 아빠가 되어갔지요.
하지만 회사를 다닐 때는 워낙 바빠서 가족들과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갈 정도로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늘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중요한 결정 사항은 제가 내리도록 남겨두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아이들 모두 저를 좋은 아빠로 생각하게 되었고요. 특히 애교
많은 딸들과는 무척 친밀하게 지냅니다. 퇴근 시간이면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문자를 보내서 안부를 묻고 특히 막내딸과는 핸드폰 통화를 하며 “쪽
”하고 뽀뽀도 하지요.
11. 보물
1호는?
제가 만든 반도체 기념패입니다. 1999년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삼성전자에서 1G D램과 1GHz 알파칩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자랑스러워서 그것들을 넣은 기념패를 만들고
뭔가 의식을 치르고 싶었습니다.
마침 중국에 갈 일이 있어서 백두산 천지에 이 기념패를 던지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날씨 탓으로 근처까지 갔다고 그냥 돌아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죽을 때 무덤에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입니다.
12.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인텔의 그로브 회장입니다. 그로브 회장은 인텔의 창업자로 인텔을
세계적 반도체업체로 키운 장본인입니다. 또한 제가 서울대에서 석사 논문을 쓰면서 거의 외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던 『반도체물리학』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인텔이 세계 최고의 반도체회사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은
그가 편집광처럼 위기의 신호에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내부와 주변을 돌아보면서 기업에 어떤 위기가 닥쳤는지를 예민하게 관찰하면서
결정을 내려왔다는 것이지요.
저는 회사에 있을 때나 공직 사회에 있을 때나 윗사람답지 않게
매사를 꼼꼼하게 챙기기로 소문이 나있습니다. 저의 이런 성격은 모두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로브 회장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13.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즐기는 것이 있다면?
영화 감상과 독서를 즐깁니다. 영화를
통해 미래세계가 어떻게 변화할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일은 즐겁습니다.
또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사업과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책은 주로 추리소설류를
좋아합니다.
14.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일생에 관한『덕의 기술』이란 책입니다. 몇 년 전에
스탠포드대학의 제 은사님께서 읽어보라고 주신 책인데 잔잔하고 현명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15. 종교가 있다면 무엇이며, 믿음의
동기는?
우리 집은 대대로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는데 저는 학창 시절
간간히 교회를 다녔고 지금은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있습니다.
학창 시절 제가 교회에 나간 동기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혼자 서울에 떨어져 지내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또 점심을 얻어먹기 위해 다녔지요. 그 때는 특별히 믿음이 있었다기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미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이후였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왠지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끝까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IBM이라는 큰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문득 성경책이 눈에 들어왔고 제가
감사할 대상이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한 선배의 소개로 성당에 나가게 되었고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6.
실패 혹은 좌절의 경험은?
상사에게 문책을 받을 정도의 실수를 하거나 인생에 회의를 느낄
만큼 좌절한 적은 없지만 개별적인 실패 경험은 많습니다.
반도체를 개발할 때 불량의 원인을 찾지 못해 회사 전체가 피를
말리는 일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나의 책임으로 불량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또 인텔에 도전하고자 내가 직접 미국에 설립했던 벤처회사가 경영 부진을
면치 못해 매각해야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역시 큰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뒤돌아보면 그런 실패의 경험이 소중한 자산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17.
스트레스 해소법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을 때 그 일에 대해서 같은 생각만
반복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스트레스 받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노트에 적어보면서 근본원인을 찾아보세요. 그렇게 하다보면
의외로 문제가 순순히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마음 맞는 사람과 터놓고 얘기를 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18.
체력관리 비법은?
매일 하루 한 시간 정도 걷기 운동을 합니다. 특히
잠자기 전의 운동은 수면에도 도움이 되고 과하게 축적되어 있는 칼로리를 제거함으로써 체중유지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19.
주량은 어느 정도?
맥주 1병입니다만 기분이 좋으면 좀 더 마시기도 합니다.
16M D램 반도체를 개발했을 때 직원들과 함께 마셨던 맥주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그 반도체가 세계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해서 미국
기업에게 얻어먹은 맥주도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그 때 주량은 기분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살면서 축하할 일이 많으면 주량이 조금 늘어도 나쁘지 않겠지요?
20.
사타구니에 습진이 날 정도로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했다고?
학창 시절 가난해도 공부만큼은 남에게 뒤지고 싶지 않아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제가 다닌 경기고등학교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많아서 모두들 방학 동안 과외도 받고 학원도 다니는 등
저보다 유리한 조건의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등수가 오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이 ‘오뚝이공부법’이었습니다. 오뚝이공부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워 자고,
다시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서 공부하는 방식이지요.
그렇게 독하게 공부를 했더니 반갑지 않은 친구가 하나
생겼습니다. 바로 사타구니의 습진이었죠. 이후 40여 년을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다가 얼마 전 부하 직원의 부인이 추천해 준 연고를 바르고는
감쪽같이 나았습니다.
그 때 앉은뱅이책상에서 공부하던 습관은 지금까지
남아있어서 지금도 집에서는 의자 딸린 책상이 아닌 낮은 테이블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21.
70년대 중반에 이미 반도체의 중요성을 알고 연구하게 된 계기는?
1970년대 초반 당시 이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는
물리학과와 전자공학과였습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께서 제게 전자공학과를 권유하셔서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지요. 제가 반도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학창시절 물리와 수학을 가장 좋아했던 나는 전자공학 중에서도 물리,
수학과 가장 관련이 많은 분야가 반도체라는 것을 알고 반도체 공부를 해보기로 결심했지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반도체관련 학문은 불모지와 같아서 서울대
공대마저도 ‘반도체’라는 이름이 들어간 전공과목은 하나도 개설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반도체를 공부하는 학생도 거의
없었지요.
하지만 저는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내 인생을 반도체에 걸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반도체는 나의 적성에도 맞는 분야였지만 모두가 기피할 정도로 어려운 학문이라는 점에서 나의 도전정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반도체의 무한한 잠재력과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 그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고 오로지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매력에 매료되어 밤잠을 설치며 공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22. 첫
직장이 IBM이었다고?
제가 IBM에 취직하던 당시 한국 반도체 산업은 그야말로 걸음마
단계였습니다. 그 때 저는 IBM에서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술을 섭렵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겠다는 굳은 각오로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반도체 이론은 물론 공정기술 분야와 설계 분야, 제조
분야를 두루 익힌 후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IBM은 직원들이 회사를 나가겠다고 하면 퇴직 인터뷰를 합니다.
그 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 조국의 반도체 산업에 기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습니다. 그러자 IBM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일본이
반도체 산업을 독점해가는 것 같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한국 반도체가 발전한다면 IBM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다.”라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몇 달치 보너스를 주면서 언제라도 IBM에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지요.
이후 저는 “조국에 돌아가 반도체 산업을 일으켜 일본을
삼켜버리겠다” 라는 각오로 당시 우리나라 반도체기업 중 그나마 사정이 제일 나은 삼성으로 옮겼습니다.
1993년 삼성은 반도체메모리 사업에서 세계 1등이 된 후 지금까지 줄곧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제 꿈이 실현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셈이죠. 제가
삼성에 와서 경쟁사들보다 더 빠른 초고속 동작칩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IBM에서 배우고 익힌 기술이 큰 기반이 되었습니다.
23.
삼성전자라는 큰 기업의 CEO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느 회사든 평범한 직원이 CEO의 자리에 오르려면 회사를 위해
기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저는 삼성전자 시절 세계 최초로 16M D램 반도체를 개발해서 삼성전자가 이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제패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또 디지털미디어사업부로 옮긴 후에는 일본의 소니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요. 삼성이 TV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소니를 누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런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또 삼성의 노트북 ‘센스Q’가 소니의 노트북보다 앞서 국내 시장을
선점한 것도 ‘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제품’을 만들겠다던 그 시절의 각오가 밑바탕이 된 것입니다.
저의 이런 도전 정신과 추진력을 회사에서 인정해주었고 결국 저는 초특급
승진을 거듭하며 삼성전자 CEO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4. 연봉 수십억의 삼성전자 CEO에서
장관으로 임명될 때의 상황은?
저는 정치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얼떨떨한 기분으로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제가 장관 후보에 올랐다는 것을 간간히 신문 기사로 본
적은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직접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소문이려니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습니다.
“10년, 15년 뒤에 우리나라 국민이 먹고 살 거리를 만들기 위해 나라에 봉사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지요. 그 말은 제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나랏돈으로 공부를 해온 제게 “나라를 위해 봉사하라”는 말은 피할 수 없는 그물
같았죠.
아마도 “장관이라는 자리가 대단한데 한번
해보겠냐?”라고 제안했다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성전자 CEO라는 자리는 연봉에서만 봐도 장관 자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괜찮은 자리였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저는 운명처럼 정통부 장관직을 받아들였고
3년 동안 ‘공익요원’이라는 생각으로 장관직에 임했습니다.
25.
수십억 연봉을 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실제 정통부 장관의 연봉은 삼성전자 CEO로 있을 때의 보름치
월급밖에 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 손해 보는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저는 삼성전자에서 준 7만주의 스톡옵션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스톡옵션의 시세는 300억으로 자자손손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지요.
하지만 제가 정통부 장관직을 수락하면 그 스톡옵션은 휴지조각이
되고 그 돈은 영원히 날아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손실이지만 정통부 장관 임명장을 받고
취임사를 낭독하는 순간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에 봉사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죠.
그러나 저도 인간인지라 가끔 그 돈이 참 아깝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정통부 장관이 되어서 우리나라 IT 산업을 발전시키면 300억이 아니라 300조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며 더욱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26.
정통부 장관 취임 당시 자녀들의 국적 문제가 제기 됐었는데?
우리 아이들 모두 미국 유학 시절에 태어났는데 한국에도 출생
신고를 했기 때문에 이중 국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국적법에 의하면 이중 국적자가 만 22세가 된 후 외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선택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한국 국적이 소멸되도록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이런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행정기관에서 미리 통지를 해주는 것도 아니니 알 수 없었던 것이었지요. 게다가 우리 딸은 만 22세 때 한국여권을 받아 외국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 아이들이 이중 국적자라고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제가 정통부 장관이 되면서 아이들의 국적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국적이 미국인데 제가 이중 국적자라고 얘기한 것이 문제가 되었지요.
일부러 미국에 가서 원정 출산을 한 것도 아니고 유학 중에
자연스레 아이들을 갖게 된 것인데 저는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입장이 곤란해졌습니다.
물론 관련 법규를 확인하지 않은 저의 불찰이 컸지요. 나중에 제가
의도적으로 아이들의 미국 국적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오해도 풀리게 되었습니다.
27.
생애 최대의 시련기가 있었다면?
정통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 아이들 국적 문제 때문에 제가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몰릴 때였습니다. 일주일 정도 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가 신문을 오르내리면서 이러다가 최단기 장관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곧 많은 네티즌들의 지지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었고 이후 저는
최단기 장관이 아닌 최장수 장관이라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28.
최근, 아들이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군대에 가기로 했다고?
유학 시절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직장
생활을 해오다가 한국에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해왔다고 합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국적을 회복하고 군대를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일부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인 제 입장을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말하는데 제가 선거 출마를 결심한 것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습니다. 아들의 결심이 훨씬 전의 일이지요. 아들은 현재 28살이고
결혼해서 100일 된 딸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결정을 내린 데는 많은 고민이 있었을 줄 압니다.
그간 아들이 병역을 면제 받은 것에 대해 국민들께 죄송한 마음이
컸었던 것이 사실인데 지금이나마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게 되어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29.
공직에 와서 가장 먼저 한 혁신사례는?
업무 보고 형식을 워드프로세서에서 파워포인트로 바꾼 것입니다.
텍스트 중심의 워드프로세서 문서는 필요 이상 구구절절이 길기만 하고 어떻게 하자는 구체적인 대안 제시가 없어 탁상 행정을 불러올 소지가
많았습니다.
반면 파워포인트 문서는 핵심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책임
소재도 분명해서 공무원들이 더욱 긴장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습니다. 또한 파워포인트는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도 아주 유용했습니다.
2003년 대통령 정책 보고 때 정통부에서는 파워포인트 문서로
프리젠테이션을 했습니다. 거기다 예상 질문의 답변까지 슬라이드로 담아두었지요. 당시 다른 부서들은 모두 “친애하는 대통령님”으로 시작하는
미사여구의 텍스트 문서를 읽는 것으로 보고를 대신할 때였습니다.
정통부의 프리젠테이션에 몹시 만족하신 대통령께서 타 부처도 정통부만큼만
하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에 다른 부처에서 “정통부 때문에 못 살겠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죠.^^
30.
브리핑의 달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저는 브리핑을 할 때 듣는 사람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핵심적으로
요약해 줍니다. 즉,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궁금점을 해소해주는 데 주력을 하지요. 그렇다보니 늘 좋은 반응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반도체를 세계 시장에 판매할 때도 영어 발음이 완벽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궁금해하는 것을 잘 요약해서 말했기 때문에 모두들 제 영어 실력이 좋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브리핑에서 중요한 것은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입니다. 이 점만 명심하면 누구라도 브리핑의 달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31. 최장수 장관으로 지낼 만큼 장관직도 잘
수행했는데 장관 시절이 삼성전자 CEO 때보다 좋았다면?
비록 연봉 등에서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기업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에서는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그것에만 집중했지만 정통부
장관이 되고 나서는 정보통신사업 전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회사는 상업적 가치만을 추구하지만 공직 사회는 민생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중요한 가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삶의 폭이 넓어졌고 그만큼 보람도 많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제 민생을 구체적으로 직접 접할 수 있는 경기지사에 도전하게
되었으니 무척이나 기대가 큽니다.
32.
정통부가 청렴도 평가에서 2년 연속으로 1위를 차지했다고?
그렇습니다. 국가청렴위원회에서 대국민 업무비중이 높은 공공기관
325개를 대상으로 평가한 ‘청렴도 평가’에서 정통부가 2년 연속 중앙행정기관 중 1위를 달성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장관의 연봉은 삼성전자 CEO 연봉의 보름치도
안 됩니다. 인센티브까지 합하면 더 안 될 수도 있겠네요. 게다가 장관 임용이 되면서 포기한 주식의 가액이 300억이나 됩니다.
그런 제가 장관직에 오른 후 돈 욕심을 냈을까요? 절대 그럴
리가 없지요. 제게는 그 누구의 청탁도 통하지 않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생각으로 저는 누구보다도 공직수행을 투명하게 해왔습니다.
저의 그런 정신이 정통부 직원 모두에게 전해져 정통부가 청렴도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제도적으로 비리를 방지하기 위한 감사 기능을 강화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33. ‘작명의 전문가’라는 말이 있던데?
‘작명의 전문가’라는 말은 정통부
출입기자들이 저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실제로 저는 여러 가지 기술, 시설, 정책 등에 이름 붙이는 걸 즐겨합니다. 제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업의 관심과 흥미를 일깨우고 핵심내용을 쉽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통부의 굵직한 사업인 ‘IT839’ 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와이브로(WiBro)’입니다. 또 정보통신부가 추진하는 중소기업 정책인 ‘IT스머프’, 현재 상암동에 지어지고 있는 대규모
소프트웨어 단지 ‘누리꿈 스퀘어’도 제가 지은 이름입니다.
이들은 모두 향후 우리나라 IT 산업을 이끌어 갈 소중한 산업들인데
이들 산업이 찬란히 빛나기를 부모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34.
와이브로와 DMB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와이브로와 DMB는 우리나라가 세계를 상대로 쳐낸 두 방의
홈런과도 같습니다. 단군 할아버지 이래로 변방에만 위치했던 우리나라에서 IT의 가장 중요한 통신과 방송의 표준을 만들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요.
와이브로와 DMB는 지금까지 유선으로만 가능했던 것들을 공간의 구애
없이 무선으로 즐길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혁명입니다. 전 세계가 인정한 기술이지요.
‘내 손안의 디지털 TV’라고 불리고 있는 DMB는 휴대폰으로
TV를 시청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서울의 관악산에 설치한 안테나 하나로 천안과 파주에서까지 TV를 시청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기술이지요.
DMB는 각종단말기, 기기, 콘텐츠 산업에도 지대한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와이브로는 무선으로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달리는 자동차에서도 화상회의가 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자랑합니다.
대단하지 않은가요? ^^
35.
대학생들에게 꽤 인기 있는 강사라고?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것은 제 스트레스 해소법 중
하나입니다. 일에 지쳐 힘들다가도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 새로운 에너지가 솟구쳐 오릅니다. 제 강연에 집중하고 질문을 해대는 젊은이들
앞에 서다 보면 때론 오버를 할 정도로 열심히 임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학생들이 탄성과 박수를 쳐줘서 저도 모르게 으슥해지기 때문이겠죠?
36.
‘100점짜리 인생의 조건’ 이라는 강연 주제로 인기를 끌었다고?
어느 조찬 간담회 때 소개해 유명해진 것인데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우선 알파벳에 순서대로 숫자를 붙여줍니다. A는 1, B는 2, C는 3, 이런 식으로 Z(26)까지 붙이면 됩니다. 그 다음,
알파벳에 붙여진 숫자를 모두 더해 100점이 되는 단어를 찾아봅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의 ‘hard work’는 98점,
‘love’는 54점, ‘knowledge’는 96점이죠. 모두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이지만 100점은 안 나옵니다. 그럼 어떤 단어가
100점짜리 단어일까요? 정답은 바로 ‘attitude’입니다.
이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삶에 임하는 태도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럴싸한 계산식 아닌가요? ^^
37.
CEO가 되려면?
많은 젊은이들이 제게 이 질문을 합니다. 그 때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CEO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는 것은 좋지만 CEO가 되겠다는 것 자체를 목표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의 사장이 되기 위해선 우선, 유능한 직원이 되어야
합니다. 유능한 직원이란 회사에서 꼭 필요한 직원을 말합니다.
어려운 문제도 척척 해결해 내고 회사의 이익에 기여도 많이 해야겠지요.
CEO가 되기 위해서는 승진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이런 직원들이 1차 승진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그럼 유능한 직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위해 경영 능력이나 영어 실력을 쌓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리에서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 때 자신의 전공을 열심히 공부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지식과 기술을 갖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설득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CEO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삶이 누적되다 보면 어느새 CEO의 자리에 올라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CEO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적은 없지만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다보니 계속 기회가 주어졌고 마침내 삼성전자라는 커다란 기업의 CEO가 될 수 있었습니다.
38.
싫어하는 직원 유형은?
저는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지레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싫어하지요.
또 늘 남의 탓을 하는 사람, 핑계가 많은 사람도 싫어합니다.
39.
좋아하는 직원 유형은?
아주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에 임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일을
하다보면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실수를 하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실패를 많이 해 본 사람은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하들을 평가할 때 시킨 일을 잘 한 사람에게는 A를
줍니다. 그러나 제가 시키지도 않은 기대 이상의 일을 한 사람, 제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해 와서 저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에게는 A+를
줍니다.
40.
공부를 잘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동기 부여가 되어야만 공부 효과를 높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계획을 잘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힘입니다. 제 경우 학창
시절 시험이 다가오면 2주 전부터 치밀하게 공부 계획을 세우고 독하게 지켜나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집중력입니다. 10시간 책상에 앉아서 딴 짓을 하는 것보다
1시간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바둑이나 탁구, 테니스, 머리를 많이 쓰는
게임 등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41.
특별히 추천해주고 싶은 습관이 있다면?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는데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는 평소
삼색펜을 가지고 다니는데 그 펜을 이용해서 원칙을 정해두고 메모를 합니다. 우선 급하고 중요한 일은 빨간색으로 적어둡니다.
그리고 상사의 지시 같은 것은 파란색으로 적어두지요. 정통부 장관 시절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파란색으로 적어두고 잊지 않도록 체크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외 문득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할 일들은 검정색으로 메모합니다.
이렇게 할 일들을 메모해두면 놓치는 일이 없고 좋은 아이디어들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특히 바쁠 때는 빨간색으로 메모된 것을 우선순위로 처리할 수 있어 매우 효율적입니다.
42.
카우보이 모자를 쓴 모습을 가끔 봤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카우보이 모자는 새로운 도전을
상징합니다. 새로운 땅을 개척한 카우보이처럼 남들이 가지 않는 곳을 가보려고 하고,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먼저 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삼성전자에 있을 때나 정통부 장관으로 있을 때 새로운 변화나 혁신이
필요하면 직접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직원들을 격려하곤 했습니다.
21세기는 남들이 하는 것만 해서는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과 다른, 때로는 엉뚱한 상상이라도, 설령 누가 나를 이상하게 보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추진하는 습관이야 말로 꿈에 다가서는
성공의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43.
생애 최고의 순간은?
몇 번의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지만, 2002년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ICES(디지털전자산업의 최대 비즈니스쇼)행사 때 동양인 최초로 기조연설을 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단골연사인 빌게이츠를 누르고, 우리나라 삼성전자의 대표로 그 무대에
올랐는데 매우 성공적인 연설이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그 연설을 계기로 삼성은 세계 디지털전자업계의 메이저그룹 대열에 오를 수 있었고, 저 또한
기업의 이미지를 대변할 세계적 얼굴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또, 최근 부산 APEC 행사에서 세계 각 국 정상과
경제인들에게 우리의 독자적인 기술을 토대로 이루어 낸 DMB와 와이브로를 선보였을 때도 무척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웠습니다.
44. 최근 자서전 『열정을 경영하라』라는 책을 냈는데,
동기는?
제가 이공계 연구원
출신으로 삼성전자의 CEO가 되고 또 정통부 장관이 되면서 저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제게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하느냐?”, “어떻게 하면 CEO가 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해왔었지요.
하지만 짧은 강연 시간에 제 경험을 다 들려줄 수는 없었기에 늘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비행기 안에서 짬짬이 제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써내려갔지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요.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 제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늘 새벽에 출근해서 야근을 하고, 휴일에도 출근하기
바빴기 때문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1년, 저도 늙었는지 새삼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들려주게 되었고 그 얘기들에 살을 보태서 책으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참, 제가 학창시절에는 책도 많이 읽고 시도 쓰고 수필도 쓸 정도로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45.
선진한국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국민과 정부, 소비자와
기업, 노와 사, 언론과 공공기관 모두가 서로 신뢰하고 조금씩 양보하면서 국익을 위해 한 방향으로 같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빠른 시간
내에 신뢰가 기반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불신하고 자신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만 내세우면 사회적인 갈등만
증폭될 뿐일 것입니다.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적인 에너지를 한곳으로 모으고 선진한국을 만들자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46.
경기도지사 출마 계기는?
많은 사람들이 제가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이유를
궁금해 합니다. 정통부 장관 자리에 계속 있어줄 것을 요구하며 출마를 만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생활정치로 경기도민에게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저는 35살부터 51살까지 16년 동안 경기도에서 일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제가 젊음을 바친 곳입니다. 서울 시장, 대구시장, 경남지사 등 여러 얘기가 나왔지만 제 스스로 경기도에 가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7. 일반 국민에게 인지도가 높지 않은 편인데?
일반국민에게 인지도가 높은 사람은 정치인입니다. 저는 정치인이
아니라 기업인, 그리고 공직자였죠. 때문에 경제나 IT 분야에 관심 있는 젊은 층에서는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진대제’라는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겠지요.
48.
열린우리당 입당식 때 로봇이 함께 등장했던데?
앞으로 로봇 산업은 우리나라 IT 산업을
이끄는 커다란 축이 될 것입니다. 또한 국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복지 국가를 만드는데 이바지할 중요한 산업입니다. 예를 들어 가사 로봇이
주부들의 가사를 도와주고 실버 로봇이 어르신들을 보살펴 준다면 무척 편리한 삶이 영위되겠지요.
베이비 로봇이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동화책을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IT전문가 출신이다 보니 로봇을 좋아하고 또 로봇 산업이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함께 등장해보았습니다.
49. ‘반도체 정치’를 표방한 걸로 아는데 그 의미는?
반도체는 무결점 청정실에서 개발되는
산업입니다. 때문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균복을 입고 일하지요. 여직원들은 분가루가 날릴까봐 화장도 못합니다.
‘반도체 정치’는 먼지 하나 없는 반도체처럼 깨끗한 정치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50. 정치 새내기인데 비장의 무기가 있는지?
이제 우리나라도 3세대 정치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6.25전쟁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산업화를 주도해온 세력이 1세대, 88년 올림픽 이후 등장해 민주화를 이끌어온 세력이 2세대라면,
이제는 창조성을 지닌 전문가 세력이 3세대 지도자로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의 경우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가 대표적인 3세대 지도자라고
할 수 있고 저 또한 3세대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