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천 시인이 시업 40년을 맞아 다섯 권이라는 엄청난 분량의 전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낱권 낱권이 팔힘 없는 사람은 한 손으로도 들기 힘든, 두껍고 무거운 다섯 권의 전집. 이들 전집 중 세 권은 박제천 시인이 40년 동안 써서 세상에 내놓은 시작품들이 된다. 또 권4는 박제천이 쓴 일종의 산문들인데, 이들 산문들이 모두 시에 관한 것, 또는 자신의 시에 대한 해설, 또는 시로 인하여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등, ‘시’가 아니면 이야기될 수 없는 것들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권5는 시인 또는 평론가들이 박제천의 시에 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적은 글들이 된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박제천의 전집은 ‘시가, 시를, 시에, 시와…’ 등등 온통 시에 관한 것들로 되어 있다고 하겠다. 물론 시인이, 그것도 시업 40년을 생각하며 만든 전집이 ‘시나 시에 관한 것’ 아니면, 또 무얼 싣겠는가마는, 그래도 이 전집을 보면서 박제천은 한 생애 동안 오로지 시만 생각하고, 시로 밥을 먹고, 시로 술 먹고, 시로 숨쉬고, 시로 잠자며 살던, 그런 사람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삶을 살아온 박제천은 행복한 사람인가, 아니면 불행한 사람인가? 알 수가 없다. 시인이 시만 생각하고, 시로 숨쉬고, 시로 술 먹고, 시로 밥 먹으며 살았으니 행복함이 의당한 것인데, 그래도 모르겠다. 시 말고는 다른 짓거리를 못했음직 하니, 이 또한 행복한 삶인지 아니면 불행한 삶인지 알 수가 없다.
실상 우리의 삶에서 행불행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된다. 행불행보다는 얼마만큼이나 열심히 살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견해에서 본다면, 한 생애를 보여주는 전집이란 곧 이 전집의 주인인 박제천의 삶에 대한 모습과 또 그 마음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즉 한 순간도 그저 허술하게 보내지 않으려는, 한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모습을 우리는 바로 이 전집에서 읽을 수가 있고, 그리고 그가 한 순간도 허술하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을 이 전집에서 읽을 수가 있다.
박제천도 전집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로부터 전집은 그 사람의 사후(死後)에, 그 사람의 학문이나 문학을 높이 생각하여 제자들이나 또는 관련이 있는 후인들이 만드는 것이 일반이다. 따라서 대부분 옛 분들의 전집은 그 사람 사후, 어떤 경우에는 사후 100년이 훨씬 지난 후에 나오는 경우도 왕왕 있다. 고려조의 문신 이규보(李奎報)는 수많은 시와 글을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평소 자신이 쓴 시나 글들을 잘 보관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이 74세에 이르러 병을 얻게 되어 자리에 눕게 되자, 평소 이규보를 아끼던 당시의 무신 권력자 최이(崔怡)가 이를 안타까이 여겨, 이규보의 시와 글들을 아들에게 모으게 하여 서둘러 판각하도록 지시를 하였다. 문집을 이규보 살아생전에 간행하여, 한번 보게 하는 기쁨을 이규보에게 안겨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병을 얻은 지 두 달이 못 되어 이규보는 그만 눈을 감게 되고, 끝내 자신의 문집을 자신의 눈으로 보는 기쁨을 얻지 못하였다. 또한 최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규보가 자신의 문집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전집은 바로 이와 같이 그 사람의 값진 전생이며, 또 그 사람의 모두가 담긴 기쁨이기도 하다. 박제천의 전집 역시 이와 같은 면에서 참으로 축하를 해야 할 경사라고 하겠다.
2
1960년대에 등단하여, 70년대에 『장자시(莊子詩)』를 발표하며, 박제천은 사람들로부터 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60년, 70년대 초반은 아직 우리의 것에 대한, 또는 동양에 것에 대한 그 인식의 도가 그리 높지 않을 때였다. 인식이 높지 않다기보다는, 오랫동안 우리를 침식하고 또 억눌렀던 서양의 철학이나 유행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것이 혹은 동양적인 것이 조금씩 보이지 않게 그 인식의 눈을 뜨기 시작하던 때였었다. 이러한 시대에 동양적인 깊이와 사유를 지닌 ‘장자’를 시의 제목으로 올린다는 사실 자체가 남다르고 또 새로운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장자시’를 발표하면서, 이와 같은 새로운 시적 대상을 취했다는 면만 가지고도 박제천의 『장자시(莊子詩)』는 당시로는 세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정한모의 술회는 바로 이와 같은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장자시는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을 현대시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쉬르에 가까운 표현기법을 주로 하여 매편마다 독립된 한 편으로서의 통일과 조화에 흐트러짐이 없다.…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감각들이 신선하고, 쌓아 올리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봐리에떼도 다양하다. 상상의 세계로 터무니없이 비약하지 않고, 필연적인 확대와 비약을 하고 있다. 감각과 상상과 언어 구사, 이 세 가지가 모두 든든한 바탕 위에 자리하고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잃지 않고 하나의 표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 박제천의 시는 구문이 정확하고 메타포에 의한 이미지들이 劾明하여 그 전달성이 강하다. 불투명한 이미지, 그것을 은폐하려는 구문의 不具性, 이런 것으로 현대시의 난해성에 편승하려는 사이비 시와 대조해보면 박제천의 시가 지니고 있는 安定性과 堅固性이 이해될 것이다.
정한모가 이야기하듯이 ‘장자시는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이다. 실상 당시의 시대적 현상은 우리의 ‘근·현대’에 관하여 나름대로의 반성과 개진이 대두되던 때였다. 즉 근대시 이후 대두된 ‘근·현대’라는 개념에 관하여, 이가 서양의 충격에 의하여 등장하였다고 보는 견해에 대하여 심각하게 이의를 내세우던 때였다. 다시 말해서 서양적인 근·현대가 아닌, 동양적인, 또는 한국적인 ‘근·현대’, 즉 자생적인 근·현대를 찾아가던 시대가 60년대, 70년대였다. 이와 같은 시대에 박제천의 『장자시(莊子詩)』, 즉 동양적인 것, 또는 한국적인 것인 대상을 시적인 제재로 삼은 작품이 등장하자 세인들의 관심이 높아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만 동양적인 것이기 때문에 박제천의 『장자시(莊子詩)』는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즉 신선한 감각,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언어 구사 등이 장자라는 동양적 사유가 지니고 있는 폭넓은 상상의 세계를 시적으로 잘 드러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제천은 그가 지니고 있는, 시인으로서의 감성과 언어적 구사로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를 莊子的 상상력을 통해 시화하는 데에 성공시켰기 때문에, 그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박제천은 ‘장자를 노래한 것도, 또 장자의 가르침을 노래한 것도 아닌’ 다만 ‘장자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밀도 있게 노래한 것’이라고 하겠다. 즉 장자적 상상력, 또는 장자를 필두로 하는 노장적 상상력을 박제천은 자신의 시에 자유럽게 구사하므로 시적인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장자적 상상력을 얻는 과정을 다음과 같은 박제천의 회고에서 만날 볼 수 있다.
남독형 독서에 빠져 대본집의 꽂혀 있던 1, 2백 권의 책을 독파하면 다른 집으로 옮겨가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책을 사 모으는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으며, 어느덧 책을 분별하는 시력이 길러지게 되어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내 생애에 있어 잊을 수 없는 두 권의 책과 만났다. 그것은 아마 15,6세 때로 『장자』와 『한비자』였다. 한자와 일본어 번역판으로 된 그 책들은 한문 공부를 따로 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장님 파밭 들어가는 격이었지만, 일본어 번역판이 의지해 한두 줄씩 읽어 내려갔다. 나는 마치 불가해한 비밀결사의 주인공처럼 남몰래 그것을 읽고 또 읽어나갔다. 그러나 이삼 년이 지난 다음 우리말 번역책을 대하고 원뜻과는 달리 오독했나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한동안 뻔뻔스럽게도 내 나름의 책읽기가 더 정확했다는 자부심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내 자신의 상상력으로 뛰어넘었는데, 그러한 내 독법을 ‘상상력 읽기’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박제천은 십대 소년의 시절, 다양한 독서의 과정 속에서 만난 장자, 한비자 등 동양의 고전을 통해 나름대로 동양적인 상상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오묘한 동양의 고전인 장자가 지니고 있는 상상의 세계에다가, 자신이 해석하기 위하여 펼친 나름대로의 상상력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박제천의 문학소년 시절은 상상의 세계 속에서 다양한 사유를 만나기 위하여 헤엄을 치던 사람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상을 통한 정신에의 천착과 이로부터 형성된 세계가 성년에 이른 박제천으로 하여금 『장자시(莊子詩)』와 같은 풍부한 상상을 통한 다양한 정신의 깊이를 지닌 시들을 쓰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는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을 변형시키고, 나아가 다양한 이미지들을 자신의 시 속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무렵 박제천은 장자시를 비롯하여 다양한 제목의 연작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연작시 형태는 그 이후에도 간간히 지속되지만, 특히 초기 박제천은 연작시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허수아비가』 『과녁』 『오구대왕의 산문』 『풍어제』 『토기사냥』 『무무행(無無行)』 『허사(虛辭)』 『십이동판법(十二銅版法)』 등이 그것이다. 우리 서사무가(敍事巫歌)에 등장하는 바리데기 공주의 아버지인 오구대왕, 동해안 등지의 바닷마을에서 풍어(豊漁)와 무사고(無事故)를 용왕께 비는 전래적 제의(祭儀)의 하나인 풍어제, 도가적, 또는 불가적 의미를 담고 있는 무무행, 로마의 성문법인 십이동판법 등.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박제천은 매우 의미심장한, 그래서 이야기를 꺼내면 몇 날 며칠을 풀어나도 끝나지 않을 듯한 제재들을 가지고 연작시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연작의 시작품마다에서 역시 자유분방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연작시란 한 사물이나 사건이 지니고 있는 면모를 다양하게 보여주려는, 나름대로의 의도를 지닌 작품의 형태이다. 본래 시라는 서정 양식은 어떤 줄거리나 배경을 담기에는 적합한 양식이 아니다. 또한 이와 같은 것이 바로 서정 양식의 특징적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이 연작의 형태를 띠게 되면, 자연 그 연작을 통한 나름대로의 줄거리, 또는 그 제재가 지니고 있는 배경 등이 은연중에 작품 속에 드러날 수가 있다. 바로 연작시는 서정 고유의 양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추구이기도 하다. 바로 박제천은 이와 같은 연작시가 지니고 있는 특성을 살려, 선택한 제재를 자신이 지닌 다양한 상상력을 통해 끝없이 펼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박제천의 『장자시(莊子詩)』 등의 연작시에 관하여 김준오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장자시는 모두 33편으로 구성된 연작시다. 여기서 우리의 시적 체험은 두 가지 놀랄 만한 현상을 목격하는 데서 시작된다. 첫째로 이 작품에서 행은 구분되어 있지만 의도적으로 띄어쓰기가 전연 되어 있지 않으며 구두점도 마지막 시행 끝에 마침표만 찍혀 있을 뿐 전혀 사용되고 있지를 않다. 30년대 이상 시를 상기시킨다. 둘째로 이미지들의 연결이 좀처럼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 체계로 되어 있다. 흔히 기상이나 철연이라 불리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33편의 전체에 일관되고 있는 현상이다. ‘~네’라는, 함축적 청자나 실제의 독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종결 의미를 두드러지게 많이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현상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의 성급한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띄어쓰기와 구두점 무시는 우리의 의미론적 접근을 혼란시킨다. 그러나 이 혼란은 시인이 깔아놓은 미적 장치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언어의 잠재적인 능력을 다양하게 발휘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를 주술적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시에서 언어의 주술적 기능은 소리로써 우리의 영혼을 구애되지 않고 그대로 읽어 버리면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이 된다. 이것은 무가 형식의 연작시 오구대왕의 산문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전통의 인위적 리듬을 철저히 파괴하고 자연스러운 리듬을 노렸는지 모른다. 이런 비문법적 장치는 이미지의 결합 양식에서 더욱 교묘하게 나타난다.
김준오의 지적과 같이 박제천의 연작시들은 서정적 양식을 벗어나려는 의도만이 아니라, 띄어쓰기의 거부와 구두점의 무시, 나아가 상상력을 통한 변형된 이미지의 결합 등을 통해 언어가 지닌 주술적인 기능까지 시에 접목시키고자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나아가 주술적인 장치를 통해 자연스러운 리듬을 획득하였고, 비문법적인 장치를 통해 교묘한 이미지의 결합을 박제천은 연작시를 통해 시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초기 박제천이 보였던 시에의 모습은, 결국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독자적인 세계와 스타일을 지니려는 노력의 한 단면이라고 하겠다. 시인으로 살아가며, 한 사람의 예술가로 살아가며 자신의 독자적인 포즈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이면서도,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박제천은 젊은 시절 이미 만만치 않은 포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독자적인 모습을 이루고 또 획득하고자, 『장자시(莊子詩)』를 통해 그 스스로 칼날을 갈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75년 『장자시(莊子詩)』를 세상에 내놓은 이후 박제천은 『심법』 『율』 『달은 즈믄 가람에』 『어둠보다 멀리』 『노자 시편』 『너의 이름 나의 시』 『푸른 별의 열두 가지 지옥에서』 『나무 사리』 『SF―교감』 등 10권의 시집을 내놓는다.
위에서 잠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장자시』에서 장자적 상상력과 현대적 시의 기법이 교직된 시작품을 보였다며는, 『심법』에 이르러, 박제천은 그 연작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마음의 궁리를 시로 노래하고자 한다. 그 연작에 매겨진 이름과 같이 즉 재주와 이 재주로 인해 얻어지는 고칠 수 없는 마음의 병과 예술에 관한 궁리를 노래한 ‘재(才)와 치(痴), 화(畵)’, 그리고 내편, 외편, 잡편을 하나의 틀로 삼았던 고인들의 마음을 궁리한 ‘내(內), 외(外), 잡(雜)’의 시편들, 음계를 이르는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 성현의 노작인 ‘경(經), 사(史), 자(子), 집(集)’ 등은 참으로 박제천이 과연 그 마음의 궁리가 어디에 가 있는가를 알게 하는 것들이라고 하겠다. 또한 박제천 스스로 자서에서 “자연과 나의 습합을 꾀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시집 『율』에서도 이와 같은 노력이 계속됨을 볼 수가 있다. ‘산정(山頂), 허두(虛頭), 역려(逆旅), 괴석(怪石), 춘설(春雪), 대인(對人), 몽생(夢生), 방생(放生), 천지(天時), 유수(流水)’ 등의 자연과 인사와 세상만사인 여러 물상, 일 등등을 제재로 삼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박제천이 사용하고 있는 이들 자연, 인사 등에 해당되는 어휘들은 매우 고졸(古拙)한 것들로 가히 지금까지 박제천이 천착해온 세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는 것들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동양의 별자리를 이르는 이십팔수(二十八宿)를 매재로 노래한 심천(心天) 연작은 ‘인사(人事)가 곧 천리(天理)요, 마음이 바로 하늘’이라는 동양적 사유를 그 근간으로 한 시편들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오랫동안 동양, 또는 우리의 것이 지닌 고졸한 맛과 이에 대한 궁리와 사유를 바탕으로 시를 써온 박제천은 다시금 『노자시편』에 이르러 그 노장적(老莊的) 사유와 상상의 깊이를 더 해가더니, 『달은 즈믄 가람에』에 이르러 ‘삼봉(三峰), 고산(古山), 자산(玆山), 매월(梅月), 백호(白湖), 서산(西山), 정암(靜菴), 미수(眉풚), 화담(花潭)’ 등 우리의 혁혁한 인물들의 생각을 헤집어 노래하고 있는가 하면, ‘기이(奇異), 처용(妻容), 수로(水路), 월명(月明)’ 등등 삼국유사에 담겨진 여러 일들을 헤집어 노래하고 있다. 욕심도 많고 많은 박제천은 이렇듯 동양과 우리나라의 정신의 정수만을 뽑아 이들을 자신의 정신의 의지처로 삼아,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끝까지 헤쳐 가는 마음을 열어, 이를 시로써 노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박제천은 SF 같은 이상한, 박제천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연작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장자나 노자나 모두가 그 시대의 SF, 과학적 허구, 곧 공상과학의 대가(大家)들이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이러한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곧 동양의 정신을, 그 무궁한 궁리를 이루어 매월당도 내고, 처용도 내고, 또 천상의 이십팔수를 읽어내기도 한 것이라는 것이 바로 박제천의 생각이 아닌가 생각된다. 박제천 전집는 그간 박제천이 40년 간 쓰고 발표하고 또 시집으로 묶어, 세상에 보여왔던 세계를 하나로 묶어서 보여준, 그러므로 그가 과연 40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시를 썼는가를 알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한 시인에게, 시에 대한 주견, 쉽게 이야기해서 ‘시론’이 없다면, 어쩌면 그 시인은 시인으로서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겠다. 즉 ‘나에게 있어 시란 어떠한 것이다.’라는 시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태도를 지닐 때 그는 비로소 시인으로서 설 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누가 무어라고 해도, 어느 평론가가 열 입을 모아 떠들어도, ‘나에게는 이러한 것이 바로 시요’라고 외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한 사람의 일가를 이룬 시인이다. 박제천의 전집 권4를 읽어보면 몇 편의 산문 속에 자신의 시론을 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즉 권4에서 박제천은 자신의 시에 관한 견해이거나 또는 자신의 시에 대한 해설, 또는 작시를 위한 강의 등을 통하여 자신의 시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박제천이 펼친 시론을 살펴보면, 대략 ‘첫째, 시란, 혹은 예술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자신의 예술관, ‘둘째, 시인으로서의 삶과 사물에 대한 인식 태도’, ‘셋째, 시인으로서의 언어관’ 등으로 나뉘어 질 수가 있다.
「노장시학」은 같은 예술의 길을 가는 오수환 화백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은 박제천 스스로 시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가를 드러낸 글이라고 하겠다. 즉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곧 박제천의 시관(詩觀), 혹은 예술관이라고 하겠다. 오수환 화백이 자신의 그림에서 내놓은 표제인 ‘곡신(谷神)과 적막(寂寞)’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글은, 시인 스스로 지어준 호인 ‘산청(山靑)’을 노안(老眼) 때문에 잘못 읽어, ‘북청(北靑)’으로 읽으므로 해서 빚어진 에피소드에 이르러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언젠가 나는 그의 호를 산청(山靑)으로 지었다. 그 뒤에 다시 화실을 찾았을 때 나는 돋보기를 쓰지 않은 채 문패에 붙어 있는 글씨를 북청(北靑)으로 잘못 읽었다. 술자리에서 나는 그의 새로운 호에 대해 말을 꺼냈다. 북은 임금의 자리이고, 오행으로는 동으로 가는 방향이니, 물에서 나무가 자라듯 왕성하리라는 치하였다. 산과 북은 전문(篆文)의 글자로 보면 서로 뒤집어놓은 형상이다. 이제까지의 오수환에 대한 나의 글은 이처럼 그의 그림을 뒤집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떤가. 산이 북에 있듯이 그의 그림은 곡신에도 있고 적막에도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새로운 그림 한쪽에서 곡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다른 한쪽은 적막의 몸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그가 찾아낸 우리네 삶의 본원이고 그 전개이다. 사람의 삶이란 실은 도깨비가 보여주는 우리네 마음의 형태가 아니든가. 그 형태를 지우고 다시 지워냄으로써 삶의 본원이 홀연히 우리 앞에 그 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수환과 나만은 아닐 터이다. 도깨비란 곧 예술가의 도이고, 그 도의 환에 다름 아닐진저! ―「노장시학」에서
‘도깨비들의 삶’으로 요약되는 ‘예술’, 또는 ‘예술가의 도’는 곧 박제천이 지닌 예술에의 정신이며, 이 정신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이며, 동시에 예술관이기도 하다. 즉 ‘곡신과 적막’을 모두 지닌, 그래서 어찌 보면 ‘산’으로, 어찌 보면 ‘북’으로 보이는, 그 자리에 바로 예술이 자리하고 있다고 박제천은 말하고 있다. 결국 예술이란, 또는 시란 어떠한 이름으로도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도깨비가 보여주는 수많은 마음의 형태, 또는 삶의 형태 속에 예술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박제천이 말하고 있는 예술관이요, 시관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산문 「심우도(尋牛圖)」와 「사물의 이치를 따라 쓴다」를 읽다보면, 박제천이 시인으로서 어떠한 사유를 하고, 또 이 사유를 통해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된다.
마음 먹기에 따라 세상이 바뀐다. 불교에서는 아예 일체유심조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마음을 먹어야 나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것인가. 그 실마리의 하나를 나는 문득 12지(支)에서 본다. 우리가 흔히 ‘띠’라고 하는 12지의 열 두 가지 동물은 기실 우리네 마음의 얼굴이 아니든가. 그래서 한자에서는 12동물을 12속상이라고도 한다. 우리들 마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인면 수심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의 본성에는 12 동물의 수심이 다 깃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우도」에서
동양의 12지(支)를 이루는 열두 동물을 ‘마음의 얼굴’로 생각하고, 나아가 사람의 깊은 속내에는 열두 동물의 수심(獸心)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다름 아닌 박제천이 시인으로서 사물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눈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마음의 눈’, 이 마음의 눈을 통하여 마음에 숨어 있는 열두 동물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시인의 마음을, 시인의 눈을 지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어느 옛사람은 바람 소리를 나누어 몇 십 가지로 열거하였지만, 사실 바람 소리가 그러한 세목으로만 끝난다면 세상의 사물이나 이치가 무엇에 필요하랴. 다시 말해 옛사람들이 이름 짓고 가름하고 버리는 것이 완벽하다면 뒷사람의 할 일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세상의 사물이나 이치란 참으로 무궁하고 오묘하여 사람마다 다 주어진 몫이 있게 마련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 아래 시를 쓴다고 감히 장담하는 바다. ―「사물의 이치를 따라 쓴다」에서
위에 인용된 글 역시 박제천이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결국 그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삶의 태도에 따라 무궁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박제천이 사물에 지닌 인식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박제천은 “세상의 사물이나 이치란 참으로 무궁하고 오묘하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 역시 “사람마다 주어진 몫”, 즉 그 사람의 삶의 양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물에의 인식 위에 박제천은 수많은 역사상의 인물, 사물, 일들을 오늘에 다시 불러들여 시로 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박제천은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보다 투철하게 언어에 대한 생각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즉 박제천은 모든 낱말을 삶의 상징어이며 그 삶의 양태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은유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시인으로서 응당히 깨달아야 할 언어에 대한 인식이지만, 박제천은 이러한 시어에 관한 생각, 언어관을 자신의 삶과 시쓰기에서 체득하고 있으므로, 이를 자신의 시론으로 삼고 있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내 시에 쓰이는 모든 낱말들은 삶의 상징어이자 그 삶의 양태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은유의 기능을 갖고 있다. 나는 본시 나라는 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고, 삶의 의미와 구조, 그 삶의 축적과 지향, 그 삶의 진솔성과 타락, 그 삶의 나눔과 하나됨을 기록하는 걸 시라고 생각하는 자이다. 이것은 허망한 분별심으로 나와 남을 가름이 아니다. 나를 통해 내가 살려는 길이다. 내가 나를 모르고, 또 저를 모르는데 어찌 나를 알고 저를 알 수 있는가. 시냇물 소리로 혀를 삼고, 산의 빛깔로 몸을 삼고, 이 산과 강, 저 땅을 모두 적멸도량으로 삼는 매월당(梅月堂) 류의 발상이 아니다. 내가 물이 되고 산의 빛깔이 되고 자연이 되며, 그것들이 또한 내가 되는 동일성의 원리를 내게 적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삶의 상징과 존재의 은유에 대하여」에서
‘내가 물도 되고, 또 땅도 되고 자연이 되므로, 나의 시어 모두는 삶의 상징어이며 은유의 기능을 지닌 것’이라고 천명하는 박제천에게, 다름 아닌 시어는 곧 자신의 삶이라는 내면성과 사물이라는 외적 존재가 합일되는 경지에서 얻어진 무엇이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박제천의 ‘사물과 나’와의 동일성의 원리는 곧 사물에 대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언어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언어는 그냥 언어가 아니라, 사물이고 또 일이고 또 만유(萬有)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박제천은 한 편의 시를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오래오래 지니고 있다가 스스로 꽃이 떨어지고 또 열매가 익어가듯,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작품으로 내놓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 쓰는 일이 30년을 넘어가면서부터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속에서는 시가 늘 끓어넘치는데도, 그걸 종이에 옮기지 않는다. 안에 넣고 푹 삭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잊어버리거나 내버려 두는 게다. ―「시의 완성을 위하여」에서
박제천은 바로 이렇듯 사물이나 인물 등등의 제재에서 깨달은 무엇을 오랫동안, 아주 잊어버릴 지경으로 자신의 안에 두고 있다가, 이것이 ‘사리’가 되었을 때 다시 꺼내어 “자신의 삶의 축적과 지향, 삶의 진솔성과 타락, 삶의 나눔과 하나됨”이 담긴 삶의 상징어인 낱말, 삶의 은유인 언어를 통해 시로 빚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음의 자’ 하나를 지니고, 이 잣대를 정신의 힘에 의지하여, 문학이라는 ‘거짓말로 씌어진 진실’을 박제천은 40여 년간 해왔던 것이다. 즉 박제천은 이렇듯 예술관, 시관, 나아가 사물에의 인식, 또는 언어관을 확고히 지니고,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삶 깊은 곳에 묻어두고, 이를 근저로 자신의 시론을 세워 40년간 시업에 굳건히 임해왔던 시인이다.
4
박제천 전집 마지막 권인 권5에 이르면, 박제천 시인의 초기 작품에서 최근작에 이르는 모든 작품을 아우르는 주제별 글들이 실려 있다. 이 부분을 ‘개관’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박제천 시작품의 개관을 아우른다는 뜻에서 이렇듯 이름을 부친 듯하다. 또한 이러한 글들과 함께 박제천의 시선집 및 개별 시집을 주제로 삼은 평설이나 감상문을 싣고 있고, 박제천을 인터뷰한 기사, 또는 박제천 시작품에 대한 단평들인 월평, 서평들을 싣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박제천의 시작품을 어떻게 보았으며, 또 박제천을 어떻게 보았느냐 등의 글들이 된다. 개관에서 필자들은 대체로 박제천의 시세계를 ‘동양정신의 현대적 승화’로 보고 있는 듯하다. 김용범은 노자와 장자의 경전을 중심으로 이들의 사유나 상상력이 어떻게 박제천에 이르러 문학적으로 또는 시적으로 수용되고 형상화 되었는가에 집중하였다. 이와 같은 경우는 고영섭, 송정란, 최동호 등 대부분의 필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박제천 작품을 관류하는 기호로 도가적 상징인 ‘곡신(谷神)’과 불가적 결정체인 ‘사리(舍利)’로 상정하고, 정신의 깊은 고뇌를 통해 건져 올린 시편들로 평가하고 있는가 하면, 삼국유사 소재의 설화라는 서사적 고전들이 어떻게 현대시로 육화되었는가에 그 관점이 모아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 외에 단평이나 서평에서도 실은 상기와 매우 유사한 관점에서 박제천의 시작품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박제천의 시를 “동양과 서양이 만나 치열한 내전을 벌인 전쟁터” 등등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박제천 전집 5권, 무더위 속에서 이 서평을 쓰기 위하여, 이 책상에서 저 책상으로 옮기다 보니, 그 책들이 얼마나 무거운지, 동양의 정신이 박제천을 만나 이렇듯 다시 무거워졌음을 이 여름 나는 정말 심심치 않게 느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의 서평, 박제천 형에게 참으로 미안하기만 하다. 그러나 실체인 전집이 중요하지, 서평은 하나의 요식일 뿐이 아니겠는가. 그것으로 부족한 글의 위안을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