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함평 용천사 꽃무릇 / 박강순

[김명아]

기획연재 │ 시가 있는 풍경 / �

함평 용천사 꽃무릇

박강순

인어공주는 칼을 멀리 파도 속으로 던져 버렸다. 공주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겨우 뜨고 다시 한번 왕자를 바라보다가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인어공주는 자신의 몸이 녹아 물거품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 해님이 떠올라서 죽음처럼 차가운 물거품 위를 따뜻하게 비춰주었다.

──안데르센 동화집 『인어공주』 중에서

정말 긴 장마를 보냈다. 올해는 유난한 가뭄으로 남녘의 저수지들이 거의 마르고, 식수가 모자랄 지경이어서 처음에는 오는 비가 반갑게만 느껴 졌지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쉬지 않고 비가 내리니 또 다시 오는 비에 원망이 붙는다. 비가 많이 오시네 하다가 비가 많이 오네 그러다가 이놈의 비 그만 그치지로 비의 가치가 자꾸 하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숲은 모처럼 활기를 띄고 그 동안 모자랐던 물기를 충만하게 받아들여 짙은 초록의 나무들이 눈부시다.

내가 늘 걸어다니는 숲도 이번 비에 호사를 하였다. 산은 꽤 큰 편이지만 우리 집 뒷산인 금정산에는 멋진 계곡이 없다. 비가 오면 물이 바로 땅속에 스며들어서 금새 마르고 만다. 하지만 올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날마다 오는 바람에 늘 말라있던 계곡에 물이 콸콸 넘쳐서 정말 멋진 계곡이 곳곳에 만들어졌다.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징검다리를 딛고 개울도 건너면서 걷는 여름 산길은 더욱 운치가 있다. 비가 잠깐 그치면 개울물 바라보는데 재미를 붙여 올 여름에는 매일 산에 올라간 것 같다.

매일 산을 오르다 보니 산의 식생을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외래종의 넝쿨이 산을 자꾸 잠식해서 댕댕이덩굴 같은 토종 덩굴이 자꾸 사라지는 것도 보이고 비가 많이 오니 빛깔 고운 버섯들이 활개를 치는 것도 보인다. 어제는 나무 밑에 희고 고운 함박꽃 같은 꽃이 떨어져 있어서 누가 함박꽃을 흘렸나 하고 주워들어 보았다. 하얀 꽃잎에 노란 꽃술이 있는 제법 소담한 꽃인데 함박꽃도 아니고, 치자꽃도 아니었다. 누가 가지고 와서 버린 것은 아니고 주변에 많이 떨어진 것을 보니 나무에 피는 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주 미끈한 줄기를 가진 나무에 아직도 꽃이 몇 개 달려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꽃과 잎을 들고 와서 책을 찾아 보니 ‘노각나무’라고 불리는 나무였다.

참 이상하였다. 날마다 다니는 길이니 꽃이 떨어지기 전에 꽃이 보였어야 하는데 왜 꽃이 핀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였다. 꽃에 향기가 없었다. 어차피 나무에 피는 꽃이니 키가 커서 내 눈에 띄기에는 너무 높게 있었다.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향기가 없으니 보이지 않는 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다 지고 나서 땅에 떨어져 있으니 그 때서야 알게 된 것이다. 새삼스러웠다. 꽃의 향기라!

향기가 없다면 아름다운 꽃도 그림에 불과하다. 향기 있는 꽃이어야 살아있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향기가 있는 사람이어야 주변에 좋은 기운을 느끼게 한다. 지분으로 찍어 바른 향기가 아니라 진정한 사람의 향기가 있어야 한다. 이번 장마에 한 수 배운 것이다.

■함평 용천사 꽃무릇

꽃무릇은 독특한 꽃이다. 봄에 두툼한 잎이 나서 꽃이 피어나는가 싶으면 잎이 시들어버리고, 초가을에 꽃대를 올려 구월 중순 경이면 꽃만 외롭게 피어난다. 그래서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 꽃무릇을 보고 상사화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보통 분홍빛으로 절집에 많이 피는 상사화는 다른 꽃이다. 꽃무릇은 석산이라고도 하고 빨강색으로 핀다. 팔월에 피어나는 상사화보다 늦게 피고 한두 송이 피는 것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 피어서 아름답다. 하지만 꽃무릇 역시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처럼 사랑 운운 하면서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상사화와 다를 바 없는 이별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꽃이다.

함평군 해보면에는 용천사라는 절집이 있다. 구월 중순경이면 이곳에서 꽃무릇 축제를 하는데 정말 장관이다. 절집에 들어가기 전 길가에서부터 군데군데 꽃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저수지를 끼고 도는 숲 속에서 산이 벌겋게 꽃을 피워내고 있다. 꽃무릇은 가까이에서 보면 꽃잎이 너무 가늘고 수술이 길어서 쉽게 예쁘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숲 속의 짙은 초록을 상상하고 거기에 끝없이 무리 지어 핀 진홍의 꽃을 상상해 보라, 탄성이 절로 나오게 아름답다.

몇 년 전 추석날 차례를 지내자마자 용천사로 달려갔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시절을 놓치면 꽃은 사라지니까 용감하게 달려갔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불어 오는데 절집을 둘러싸고 있는 온 숲에 꽃무릇이 피어 있었다. 빨강색은 날씨가 밝고 화창한 날에는 제 빛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폭풍전야의 웅크러진 회색 하늘 아래 펼쳐 진 진홍의 꽃 빛깔은 내가 본 빨강 중에 가장 요염한 빛을 발하면서 선명하게 기억 속에 각인 되었다. 숲은 어두웠지만 꽃무릇이 숲 아래 그늘에 피어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연이 가지고 있는 보색의 조화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엄한 아름다움이었다.

어떤 식물학자가 말하기를 식물은 암술과 수술에 의해서 수정이 되기 때문에 잎과 꽃이 못 만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였지만 꽃무릇이 주는 가장 큰 상징은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데 있다. 사랑하는 남녀가 헤어져서 한 사람은 잎이 되고 한 사람은 꽃이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가, 잎이 지고 나서야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나서야 잎이 핀다. 이 얼마나 애꿎은가. 전설이 없어도 전설을 만들고 싶다.

초등학교 시절에 안데르센 동화집을 읽었다. 다 재미 있었지만 유독 인어공주 때문에 가슴이 아펐다. 왜 다른 동화처럼 인어공주는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가, 말을 못하면 글을 써서 자기가 왕자를 구했다고 전하면 되는데 안데르센은 왜 공주를 불행하게 만드는가, 정말 며칠 동안 인어공주 때문에 슬픈 날을 보냈다. 철이 들고 사랑이 제법 무엇인가 한참 생각을 하고 나서야 인어공주는 동화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오래도록 살았습니다.”라고 끝나는 것은 동화지만 인어 공주는 동화형식을 빌린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오래도록 행복하게라는 명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지 않는다면, 견우와 직녀가 일년에 한번이 아니고 매일 만난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사랑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별이 있어야 사랑이 존재한다. 물거품이 되어 삼백 년 동안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인어공주는 왕자를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랑을 할 것이다. 함께 살았다면 수년 안에 사라질 사랑이 삼백 년 동안 계속되게 만든 것이 이별이다.

갖지 못하는 것은 소중하다. 내 것이면 좋겠는데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정말 보기만 해도 간절하다. 더욱이 정말 사랑하는 남녀라면 얼마나 함께 있고 싶겠는가! 그런데 만나지 못 한다. 안타깝고 애달파 마음이 찢어지겠지만, 그러나 이별이야말로 사랑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가 더욱 애틋하고 인어공주가 더 영원한 것이다.

아마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배우고 되새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옆에 있는 것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정말 어려운 일이고 너무 어려워서 날마다 잊고 살고 있지만 참으로 사랑해야 될 것은 가까운 곳에 있다. 멀리 헤어져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니 가까이 있어서 내 주변의 것들이 그저 그렇고 별 볼일 없이 느껴 질 때는 한 번 멀리 떠나서 헤어져 있어 보면 안다. 한 번쯤 떨어져 간격을 두고 차근차근 하나씩 되집어 보면 그 동안 소홀하게 잊어버리고 지낸 것들이 나에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올 가을에도 여기저기 꽃무릇이 피어날 것이다. 용천사에도 피고 고창 선운사에도 피고 함양 상림에도 피어날 것이다. 가능하면 가까운 곳에 사랑하는 사람과 찾아가서 만나지 못하는 인연보다는 함께 있는 인연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손을 꼭 한번 잡아 볼 일이다.

지극한 그리움이 있다면

강가에서

산 허리에서 만나고 싶다

그렇게 간단히 돌아서는 것이라면

아름다움이 있을 때

이승에 살아있을 때 만나고 싶다.

슬픔으로 이름지어

빈 숲 속을 지나갈 때

눈물 머금은 사랑이라면

한껏 높아진 빈가지 흔들면서라도

대답을 듣고 싶다.

여기 저기 숨어

눈 둘 데 없는 사랑이라면

그대 온 숲을 헤매더라도

살아서

만나고 싶다.

──졸시 「어떤 그리움」 전문

  박강순 /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순한 진리』외 3권이 있고 제6회 서울시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