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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41)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사전 답사 (합천→양산) ② 의령→ 창녕 소우정
2020년 11월 02일 (월요일) [카니발&미니벨로]▶ 대원 동행
* [합천 제우스모텔]→ 합천댐→ 합천임란창의사→ 합천 황강→ [의령] ▶ 의병장 곽재우 장군 생가→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정암나루 이야기→ 의령읍 전통시장→ 의령 소고기국밥→ 충익사→ 20번 국도→ [낙동강] 낙서면 강변→ 진등산 박진고개(낙동강 조망)→ 1008번 지방도로→ 박진교(낙동강)→ [창녕] 남지읍 칠현리 1022번 도로→ [남지시장]→ 남지대교(도강)→ 함안군 칠서면→ 칠서수변생태공원(미니벨로 라이딩)→ 강둑길→ 덕촌마을→ 밀포교(이령천)→ 창녕함안보→ 노고지리수변공원길→ (임해진)소우정→ [강나루민박]
* [합천군 청덕면 삼학리] ← 서쪽에서 황강 합류(수도산/남덕유산 발원, 거창, 합천호, 합천 경유)
*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서남쪽에서 남강 합류(남덕유산, 뱀사골 발원 / 경호강-진양호 경유)
* [창녕군 유어면 가항리] ← 동쪽에서 창녕(우포늪) 토평천 합류 / ← 서쪽에서 신반천 합류
의령으로 가는 길
황강에서 합천의 풍경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다음의 행선지인 의령(宜靈)을 향해 출발했다. 의령의 첫 방문지는 의병장 곽재우 장군 생가이다. 황강의 지류인 ‘아천’을 따라 가는 국도 33번 도로를 타고 합천군 대양(면)에서 1011번 지방도로에 들어섰다. 거기서부터 길은 좌우의 산들 사이에 난 한적한 시골 길, 누릇누릇 가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풍경이 무연히 한가롭다. 신반천을 넘나들며 이어가는 길은 의령군 봉수(면)를 지나고 부림(면)을 경유하여, 20번 도로에 들어섰다. 얼마가지 않아 세간교(유곡천) 앞, 거기서 우회전하면 바로 곽재우 장군 생가의 주차장이다. 세간교 앞에서 좌회전하여 유곡천을 따라가면 독립지사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가 있는 입산마을이다. 유곡천은 신반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의령(宜靈)
의령(宜靈)은 경상남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북으로는 황강 유역의 합천(陜川)이요, 남쪽으로는 남강을 경계로 함안(咸安)과 진주(晉州)가 있으며,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寧)이 있고, 서쪽은 자굴산 너머 경호강(남강) 유역의 산청(山淸)과 연해 있다. 예부터 의령(宜靈)은 낙동강과 남강 유역의 기름진 농토가 있어 물산이 풍부하여 부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예로부터 의기가 고절한 선비의 고장으로 불린다. 특히 의령이 낳은 유명한 인물인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지사,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장군, 호암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생가가 있다. 백산은 일제시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모아 보내고 구국의 일념으로 산 항일지사이다.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安浩相) 박사도 이곳 의령의 입산마을 출신이다.
의령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네 그루 있다. 유곡면 망우당 곽재우 생가 앞 은행나무(302호)를 비롯해 1592년 4월 22일 임진왜란 당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곽재우 장군이 느티나무(493호)에 북을 매달아 의병을 모았던 현고수다. 천연기념물 359호인 정곡면 성황리 소나무는 민속학적·생물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곡리 감나무는 천연기념물 492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감나무로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나무의 나이를 은행나무와 현고수는 600년, 소나무는 300년, 감나무는 5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 생가
오늘, 의령의 첫 번째 방문지는 곽재우(郭再祐, 1552년(명종 7)∼1617년(광해군 9)) 장군 생가(生家)이다.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유곡천 앞에 있다. 유곡천은 신반에서 신반천에 합류하는 황강의 지류이다. 곽재우 장군 생가 앞의 마당은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곽재우 장군이 주축이 되어 의병을 창의한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의령군에서는 ‘곽재우 장군 생가’ 주위는 ‘의병광장’이라 하고 의령의 ‘랜드마크’로 조성해 놓았다. 너른 주차장, 너른 광장의 우측에는 곽재우장군 문화공원을 조성해 놓았고, 광장의 좌측에는 거대한 노거수 은행나무가 서 있고 그 뒤로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너른 마당 문화공원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북이 있는 북루가 있고, 광장 한 가운데 백마를 타고 적을 호령하는 홍의장군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연못, 쉼터, 전통놀이 체험장 등 아름다운 문화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생가 앞 세간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제302호)로 지정된 귀목이다. 오늘 따라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목의 품새가 장엄하다. 세간리 마을에서는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493호)와 함께 이 마을을 지키는 당산목(堂山木)으로 삼고 있다. 은행나무의 높이는 21m, 가슴높이 둘레는 10.3m이다. 수령은 550년 정도로 추정되며, 가지 동서로 26m, 남북으로 26.2m 정도 퍼져 있다. 특히, 은행나무의 남쪽가지에서 자란 두개의 짧은 돌기는 여인의 젖가슴같이 생겼다고 하여 산후의 여인들이 젖이 잘 나오도록 많이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세간리 ‘느티나무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가 북을 달고 젊은이들을 모아서 훈련시켰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래서 현고수(懸鼓樹,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라고 불린다.
의병을 발진한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생가는 조선 중기 남부지방 사대부의 전형적인 가옥구조를 가지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5년에 복원 정비된 것이다.
생가(生家)에서 바라본 곽재우의 생애
곽재우의 아버지 정암공(定岩公) 곽월(郭越, 1518~1586)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목사,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일찍이 곽월(郭越)은 본관인 현풍(玄風) 솔례촌에 살았는데, 이곳 의령현 세간리 진주 강씨와 혼인하여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슬하에 재희(再禧), 재록(再祿), 재우(再祐) 등 3남 1녀를 낳고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둘째 부인 허씨를 맞아 재지(再祉), 재기(再祺) 등 2남 1녀를 두었다. 곽재우는 1552년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 바로 이 집에서 태어났다. 정암공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다. 1559년 의령 세간리 유곡천에 용연정(龍淵亭)을 짓고 아들들로 하여금 학문과 심신을 연마하게 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친어머니 강씨(姜氏)가 3남 곽재우 3살 때 세상을 떠나고, 어린 곽재우는 계모 허씨(許氏)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허씨는 자신이 낳은 세 자녀[2남1녀]는 물론 전처 소생의 네 자녀[3남1녀]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쏟았고 곽재우는 이런 의붓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곽재우는 10대 중반에 의령과 가까운 경남 산음[山淸 山天齋]에 정착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16세 때 창원과 단성에서 막강한 재지기반을 가진 상주 김씨(金氏) 집안 따님과 혼인했다. 부인 김씨는 만호 김행의 딸로 남명 조식의 외손녀이기도 했으며 이 혼인 역시 조식의 주선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역시 조식의 손녀와 혼인한 대제학을 지낸 동강(東岡) 김우옹과는 외사촌 동서지간이다. 그 덕분에 곽재우는 경상우도 사대부들과 쉽게 연계할 수 있었다.
기록(記錄)에 의하면 곽재우는 19세 때부터 무예(武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장인 김행이 무관 출신이어서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 뒤 향촌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거주하고 있던 중 1586년 부친 곽월(郭越)이 사망해 3년상을 치렀으며,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의령 생가에서 심신을 단련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그는 농업경영에 힘써 매우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임진년에 애써 의병에 끌어들인 매제 허언심(許彦深)도 상당히 부호였고, 곽재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조정에 천거한 초유사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그를 비판한 경상감사 김수(金晬)의 장계에도 곽재우의 재산이 많았다고 언급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는 자신의 재산(財産)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전쟁 발발 9일만인 4월 22일 세간마을 집 앞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 집안의 젊은이 10여 명으로 시작한 그의 의병부대는, 첫 전투인 5월 4일 ‘기강전투’와 5월 하순의 ‘정암진전투’에 승리하면서, 이후 군세가 급격하게 늘어나 2,000여 명에 달했다.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붉은 옷을 입은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92년 5월 의령의 남강(南江) 정암진(鼎巖津)을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고, 일본군이 호남(湖南)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거름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의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에 올랐고, 10월에는 절충장군 겸 조방장이 되었다.
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었고, 삼가의 악견산성을 쌓았다.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賊)을 막았다. 그해 8월 계모 허씨가 죽자 장례를 극진히 지냈다.
전후,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喪中)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경주·울산의 전투 경험이 많은 군사 2,000명을 수성군으로 삼고, 내륙에 있는 잡병 6,000명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 갔다가 1년만에 풀려났다. 그 뒤에는 현풍의 비슬산에 살면서 창녕 영산의 창암진에 망우정(忘憂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1604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찰리사·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 등에 임명되고, 광해군 즉위 뒤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호분위부호군,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사양하거나 곧 사퇴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617(광해군 9)에 사망했다.
곽재우 장군은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1618년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忠賢祠)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그 예연서원에 사액이 내려졌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망우당집(忘憂堂集)』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의령읍에 충익사(忠翼祠)에 모셔져 있다.
의령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8km 가면, 삼성그룹의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의 생가가 있다.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이다. 워낙 이름난 재벌의 고향이니 방문객이 많은 모양이다. 작은 마을에 주차장이 아주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저곳에 온통 ‘부자’라는 말이 붙어 있다, ‘부자의 기운을 받는 길’ 안내판을 비롯하여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부자 마을에 대한 종합게시판이 있었다. <안내판>은 이렇다.
“의령은 예로부터 부자 마을이 많고 인심까지 넉넉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의령에 알부자가 많은 이유는 남강의 솥바위, 즉 정암(鼎巖)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 지방 사람들은 이 바위를 보물로 여기고 신성시한다. 솥은 예로부터 곡식 즉 재물을 뜻하고 솥바위 아래 세 개의 큰 기둥은 삼정승을 뜻하여 사방 20리 안쪽에 정승에 버금가는 큰 부자가 날 것이라는 전설이 이 지방에 전해온다, 솥바위에서 8km 떨어진 이곳 중교리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태어나 성장했고, LG그룹 구인회 회장은 7km 떨어진 진주에, 효성그룹을 창업자 조홍제 회장은 5km 정도 떨어진 함안에서 태어났다.”
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리니, 주차장 가장 자리에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님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등 지난 10월 25일 타계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 대한 추모(追慕)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의령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생가가 있는 고향이기도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1947년 상경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 이전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이라고 했다. 이건희 회장은 1942년 대구에서 선친 호암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박두을 여사는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다.) 이건회 회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이후 28일까지 의령군 정곡면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입구를 비롯하여 의령의 곳곳에 ‘이건희 회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문구가 적힌 현수막 30여 개가 내걸렸다고 한다.
‘호암 이병철 회장의 생가’가 있는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골목길은 ‘부잣길’로 불린다. 삼성그룹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며 마을은 부자의 상징이라도 된 듯 곳곳에 ‘부자’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부자슈퍼’부터 ‘부자매점’에서는 ‘부자 콩국수’와 ‘부자 팥빙수’를 팔고 있다. 마을 골목길에는 차량 진입이 되지 않음으로 방문객은 공중화장실이 있는 입구에서부터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오늘 따라, 생가의 솟을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코로나 19 방역을 위한 2.0단계 시행에 따른 조치였다. 그래도 애써 발돋움을 하여 그리 높지 않은 담장 너머 집안을 살펴 볼 수 있었다.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
삼성그룹의 창립자인 이병철이 태어난 집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호암(湖巖)이다. 아버지 이찬우(李纘雨)와 어머니 권재림(權在林)의 2남 2녀 중 막내아들이다. 이 집은 1851년 이병철의 조부가 대지면적 1,907㎡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건축하였다. 이병철이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내며, 결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 이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생가(生家)는 대문채, 사랑채, 안채, 광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담한 토석담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구분되고, 집의 뒤쪽의 산록에는 울창한 대숲이 조성되어 운치 있는 경관이다. 커다란 ‘솟을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일자형 평면 형태로 지어진 ‘사랑채’가 널따란 마당 안쪽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몇 차례의 증·개축을 통하여 은은하고 고고한 멋을 풍긴다. 마당 한 가운데 ‘우물’이 있다. 사랑채 오른 쪽을 돌아들면 ‘안채’ 있는데 안마당에도 또 하나의 우물이 있다. 한 집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담이 따로 없는 뒷산의 푸른 대나무 숲 아래 가지런히 장독대가 있고 마당 안쪽에 광이 있다.
이 집은 명당 중의 명당(明堂)이라고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 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氣)가 내려온 산자락의 끝에 위치해 있다. 생가 터가 혈(穴)이 되어 생명의 보금자리를 이루고 그 지세가 조화롭게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이라고 한다. … 요즈음은 람들이 이 부자의 기(氣)를 받기 위해서 많이 방문한다고 한다.
마을 뒷산[鎭山]이 호암산(湖巖山)이다. 내가 보기에도 부드러운 복스러운 호암산의 산줄기가 양 갈래를 이루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으며 그 한 가운데로 정곡천이 흘러내리는데 이병철 회장의 생가는 그 한 가운데 지점에 있다. 보혈(寶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생가 마을 앞에는 북쪽 왕봉산에서 발원한 월현천이 남쪽의 남강으로 흘러든다. 이병철 회장의 호가 호암(湖巖)인 것은 이곳 마을의 진산인 호암산에 근본을 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업가 ★ 이병철
이병철 회장은 한국의 최고의 기업, 세계적인 일류 기업인 삼성그룹을 창업·육성함으로써, 한국의 경체 발전의 중심을 이룬 사업가이다. 이병철 회장은 1910년 이곳 의령에서 태어났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한 이래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65년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우리의 정신적 자산을 풍족하게 하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고, 1980년대에는 특유의 통찰력과 선견력으로 반도체산업에 진출하여, 우리나라 첨단산업의 발전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호암 선생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하였다. 또한, 선생은 중동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 인수·운영하면서 인재육성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문화, 예술,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의 발전에 많은 업적과 기여를 했다.
지금의 삼성그룹은 삼성물산을 모기업으로 하는 기업집단이다. 그룹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회사는 1938년 3월 삼성상회(三星商會)로 출발한 삼성물산이며, 주력 계열사는 삼성전자다. 그룹의 주요 사업은 전자, 바이오, 중공업, 건설, 금융, 서비스다. 지금은 3대 이재용이 그룹을 경영하고 있다. 삼성의 지배구조는 이재용→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진다. 삼성그룹은 국내 재계 순위 1위(2020년)이며, 삼성전자는 한국 기업 중 유일하게 ‘세계 100대 기업’에 이름을 올린 회사다.
그런데, 지금 삼성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 문재인 정권 아래 삼성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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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기업 삼성전자에 날아든 ‘3개의 화살’
— 송의달 선임기자의 Special Report —
① 스마트폰 점유율 10년래 최저 : 프리미엄폰은 애플에 밀리고 중저가 시장은 중국이 우위
② 경쟁 치열한 메모리 반도체 ; 삼성, 인수합병 4년간 없고 176단 낸드플래시 한발 늦어
③ 이재용 회장 수감으로 오너 공백 : 文정부 내내 압수수색·소환… 전문경영인으로는 한계 뚜렷
삼성전자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대 기업이다. 회사의 시가총액(주가에다 주식 수를 곱한 금액)은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두 배가 넘는다. 세계적 브랜드 컨설팅 전문기업 인터브랜드(Interbrand)가 실시한 2020년 글로벌 브랜드 평가에선 애플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에 이어 세계 5위에 올랐다.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제품 11개에 국내 총 연구개발(R&D) 투자의 47%, 법인세의 15%를 혼자 내는 한국의 ‘대들보’ 기업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이후 삼성전자의 활력과 스피드가 크게 떨어지고 세계무대에서도 고립되고 있다”며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앞날이 어둡다”고 말했다.
◇ 美·日·대만 반도체 삼각 동맹
세계 반도체 시장(2020년 기준 4331억달러)의 70%를 차지하는 시스템 반도체에서 삼성전자는 ’2030년 1위 달성'을 목표로 10년간 133조 투자를 2019년 선언했다. 그러면서 대대적인 파운드리 부문 강화에 나섰다. 그러나 이 분야 1위인 TSMC와의 세계 시장 점유율 격차는 2019년 1분기 29.0%포인트에서 작년 4분기 39.2%포인트로 더 벌어져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시스템 반도체의 핵심인 팹리스(설계)와 후(後)공정인 패키징 부문에서 삼성의 존재감은 찾기 힘들다. 김양팽 산업연구원(KIET) 전문연구원은 “반도체 연구 인력 대폭 증원 같은 획기적 지원이 없는 한 삼성의 시스템 반도체는 당분간 성과를 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리커창 중국 총리가 2021년 3월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전체 회의에서 “10년 동안 단 하나의 칼을 가는 심정으로 매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기술 봉쇄'에 맞서 산업·과학기술 자립을 필사적으로 이루겠다는 선언이다./연합뉴스
미국과 대만, 일본 3국 간 ‘반도체 동맹’이 급물살을 타며 지정학(地政學) 판도가 바뀌는 것도 부담이다. 그 선봉장인 대만 TSMC는 일본 쓰쿠바시에 200억엔(약 2100억원)을 들여 반도체 R&D 합작법인을 세우고, 미국 애리조나 등에 360억달러(약 40조6000억원)를 투자해 6개의 생산 거점을 짓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설계는 미국, 제조는 대만, 소재·장비는 일본이 맡는 세계 반도체 분업(分業) 구조가 굳어져 삼성전자의 입지가 더 좁아진다.
“10년간 단 하나의 칼을 가는 심정”(리커창 총리)으로 2014년부터 반도체 산업에 1조위안(약 170조원)을 쏟아부은 중국은 올 들어 파운드리 기업 SMIC에 5조원을 투자하는 등 지원을 더 늘리고 있다. 이병태 KAIST 교수는 “미·중 패권 전쟁으로 중국의 기술 독립이 앞당겨질 것”이라며 “이 경우 삼성전자의 최대 주력 제품인 메모리 반도체가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흔들리는 세계 1위… 수성(守成)에 최선
단적으로 세계 반도체 인수합병(M&A) 무대에서 삼성은 4년 넘게 ‘구경꾼’ 신세이다. 2016년 11월 미국 자동차 전장 기업 하만을 80억달러(약 9조원)에 인수한 후 삼성전자는 ’16분기 연속 M&A 0건'이다. 작년 한 해 세계 반도체 M&A 거래액(1180억달러·약 130조원)을 감안하면 세계 2위 반도체 기업(매출액 기준) 삼성전자로선 아쉬운 대목이다. …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은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수십조원을 들여 혁신과 도전을 시도하는 경쟁사들과 달리 삼성전자는 안팎의 여러 이유로 수성(守成)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 세계 시장 점유율
‘세계 1위’ 균열 조짐도 보인다. 2013년 32%대였던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19%대로 10년 만에 가장 낮았다. 작년 4분기와 올 1월 스마트폰 세계 1위는 애플이 차지했다. 지난해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상위 10사 가운데 7개를 차지한 중국 기업들의 점유율 합계(60%)는 삼성전자(19%)를 압도한다. 프리미엄급은 애플에, 중저가 제품은 중국에 협공당하며 점유율이 쪼그라들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미국 마이크론은 삼성을 제치고 작년 11월 업계 최고난도 기술인 176단 낸드플래시 제품을 출시했고, 올 1월엔 10나노급 4세대 D램 상용화에 성공했다.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삼성이 제한된 연구 인력과 자원으로 파운드리와 시스템 반도체 개발에 역량을 분산한 결과,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기술 우위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 ‘총수 부재(不在)' ... 손·발 묶인 삼성(三星)
삼성전자는 오너의 과감한 투자와 혁신으로 반세기 만에 세계적 IT(정보기술) 기업으로 성장했다. 고(故) 이병철(왼쪽) 창업주는 반도체 산업 진출이라는 결단을 내렸고 이건희(가운데)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으로 품질경영 시대를 열었다.
성전자는 ‘반도체 진출 선언’(198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1993년), ‘스마트폰 진출’(2008년)처럼 고비 때마다 오너의 결단으로 위기를 돌파해 왔다.
기업분석 연구소인 ‘CEO스코어’의 박주근 대표는 “지금은 대형 장치 제조업인 삼성전자가 애플처럼 글로벌 서비스 플랫폼 기업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하고 체질을 더 강하게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를 위한 수십 조원 짜리 투자 결정과 대형 M&A 등은 전문 경영인들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게 삼성 안팎의 일치된 진단이다. 더욱이 최근 4년간 삼성에 이뤄진 먼지털이식 50여 차례 압수수색과 430여 차례 임직원 소환 조사로 삼성 임직원들의 사기(士氣)는 크게 떨어졌다. 올 1월 법정 구속된 이 부회장은 1년 6개월 형을 더 살아야 한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1년 1월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날 법정에서 구속됐다./연합뉴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전무는 “총수 부재와 사법 리스크, 그리고 정치 권력의 발목 잡기가 계속된다면 삼성전자의 글로벌 톱 대열 탈락은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 [조선일보] 송의달 선임기자 입력 2021.03.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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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전통시장 ☞ 의령의 삼대 명물
정곡 중교리의 이병철 회장의 생가를 둘러보고 난 후, 20번 도로를 타고 의령읍으로 향했다. 의령은, 함안과경계를 이루는 남강에 임해 있으며 남강에 유입되는 의령천이 흐른다. 의령읍은 전통시장이 유명한데 거기에는 의령을 대표하는 음식이 있다. 첫째 의령의 명품 ‘망개떡’이요, 둘째는 의령 ‘소바국수’요, 셋째는 ‘소고기국밥’이다. ‘ 의령 망개떡’은 6~8월 한여름 신선한 망개잎을 삶아, 맵쌀로 빚은 떡에 팥소를 넣어 만든 떡을 망개잎으로 포장한 의령의 특산품이다. 일제시대 백산 안희제 선생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낼 때 망개떡 도시락에 자금을 숨겨서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의령소바’는 의령의 메밀국수이다. 쫄깃쫄깃한 커피색 면발에 쇠고기 장조림을 얹은 향토음식으로 얼큰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특유의 맛으로 미식가를 유혹하기도 하지만 애주가가 속풀이에 아주 좋다. ‘의령 소고기국밥’ 은 구수하고 담백한 소고기 국물 맛이 일품이다. 옛날 시골장터에서 가마솥에 끓여내는 마로 그 맛, 이 국밥에 맛깔스런 김치와 수육 한 접시, 거기에 의령 ‘화정쌀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어진다.
요즘 세상이 코로나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거리두기가 무색하게 의령의 전통시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시장 안에 있는 이름난 ‘소바국수집’과 ‘망개떡집’은 넓은 식당 안에도 사람들이 가득하고 좁은 골목에도 차례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따로 대기실도 있었다.
별미 오서방 소고기국밥
우리는 시장을 벗어나 중앙로 사거리에서 의령군청 쪽의 길 안에 있는 소고기국밥집으로 갔다. 이상배 대장이 잘 알아서 향도하는 식당인데, 식당 입구의 가장자리에 큰 가마솥이 걸려있고 거기에 구수한 소고기 국물이 설설 끓고 있었다. 자리를 잡아 국밥을 시키고 수육과 쌀막걸리도 주문했다. … 과연 의령의 소고기국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거지와 국물은 무한리필이다. 따뜻한 국밥만큼이나 인심 또한 넉넉하다. 국밥 한 그릇에 몸과 마음이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집이 오서방 국밥이라고 하여 물어보았더니 사장이 나와 동성인 해주 오씨였다. 함자를 따져보니 환(煥) 자 항렬, 나에게는 숙항(叔行)이 된다. 막걸리 두 병을 서비스로 제공했다. 그래서 내가 '의령 아재'라고 불렀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내외분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집에서 운영하는 망개떡집에 길 건너편에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난 후, 간식거리로 오서방 맹개떡을 사기도 했다.
남강 정암나루 이야기 (1) 솥바위
효성그룹 창업자 만우 조홍제 생가 개방
2019년 작년 11월 14일, 효성그룹은 경상남도 함안군과 함께 창업주 ‘만우 조홍제 회장의 생가’ 개방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효성 조현준 회장과 조현상 총괄사장을 비롯해 함안 향우회, 조근제 군수 등 함안군 관계자와 지역주민들이 참석했다. 조홍제 회장 생가는 2017년부터 복원공사를 진행했다. 대지 면적만 총 1225평으로 실용적 건물배치와 장식을 배제한 담백함이 특징인 조선 후기 한옥이다.
“몸에 지닌 작은 기술이 천만금의 재산보다 낫다”는 말로 유명한 조홍제 회장은 함안에서 터를 잡은 조선시대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인 어계(漁溪) 조려(趙旅) 선생의 후손이다. 조 회장은 1906년에 출생했다. 1926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일어난 6∙10 만세운동에 참가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2년 효성물산을 시작으로 1966년 동양나이론을 설립했다. 1971년 민간 기업으로는 국내 최초 부설연구소인 ‘효성기술원’을 세워 글로벌 넘버원 소재기업 효성(曉星)의 토대를 마련했다.
효성기술연구소는 1978년 11월 정부가 나서 기업에게 연구소 설립을 권장할 때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효성과 한국타이어(조양래 회장)를 일군 만우 조홍제는 한국 기업의 선진화와 수출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 등 여러 차례 수훈했다. 한국타이어 조양래 회장은 조홍제 회장의 차남이다.
솥바위[鼎巖]
경남 의령의 관문이자 함안의 경계인 남강(南江)에는 솥 모양의 바위 '솥바위[鼎巖]'가 고요한 강물 위에 솟아있다. 특히 강물 속에는 솥의 발을 닮은 형상이 세 개가 숨겨져 있어 더욱 솥바위임을 드러내고 있다. 한자로 정(鼎)이 솥이란 뜻이다. 이 바위 수면 아래 세 개의 발이 가리키는 주변 20리(약 8km) 이내에서 삼정승이나 큰 부자가 난다는 얘기가 예로부터 전해진다. 그래서 특히 부자바위로 더 알려져 있다.
전설(傳說)은 현실이 됐다. 솥바위[鼎巖]를 중심으로 북쪽 의령군 정곡면에 삼성(三星)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생가가 있고, 동남쪽 함안 군북면 동촌리에 효성(曉星) 창업주 조홍제 회장의 생가가 있으며, 남쪽 진주 지수면 승산리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생가가 있다. 솥바위의 기운이 재벌 세 가문에 영향을 준 것일까.
의령과 인근 지수면 승산마을 등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많은 재벌들이 나왔다. 이병철 회장, 구인회 회장, 조홍제 회장, 허준구 회장은 모두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아직도 솥바위에는 부귀(富貴)의 기운이 남아 있다고 하니 한번 가서 기를 받아보는 건 어떨까. 의령이 조용한 곳이지만 숨은 볼거리가 많이 있는 곳이다.
진주시와 함안군, 의령군은 남강의 솥바위를 중심으로 기업가의 창업과 도전정신을 관광상품화하는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함안군에서는 효성 조홍제 회장의 생가를 작년에 복원 개방하였고, 진주시는 LG, GS 창업주 생가가 모여 있는 지수면에 한옥스테이를 조성하고, 의령군은 이병철 회장 생가를 비롯하여 솥바위와 봉황대 등을 엮은 관광코스를 운영할 예정이다.
남강 정암나루 이야기 (2) 임진왜란 때 ‘정암진전투' 현장
정암나루는 그 옛날 선인들이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던 나루터지만, 임진왜란 때는 이 나루에서 곽재우 장군이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恵瓊)가 이끈 수만의 왜적을 잠복 끝에 몰살시킨 승전지로도 유명하다. ‘정암진 전투’ 지금도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더욱이 이곳 언덕 위에는 정암루(鼎巖樓))가 있어 정암루에 올라보면 남강(南江)의 절경을 관망할 수 있다.
정암진전투는 1592년 음력 5월 24일부터 7월 5일까지 남강(南江) 유역인 경상남도 의령(宜寧)의 정암진(鼎巖津)에서 곽재우(郭再祐)가 이끈 의병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이다. ‘정진강(鼎津江)전투’라고도 하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의병이 최초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둔 전투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현재 의령읍에 곽재우 장군을 비롯해 전투에서 활약한 의병들을 기리기 위한 충익사(忠翼祠)와 의병박물관,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1592년 5월 23일 부산진·다대포·서생포를 동시에 공격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5월 25일 동래성을 점령해 부산 지역을 침략 교두보로 확보했다. 그 뒤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북진에 나서 제1번대는 밀양·상주 등을 거쳐 북상했고, 제2번대는 경주·영천 등을 거쳐 한양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제3번대는 김해·창원·창녕·현풍·성주 등을 거쳐 북진했다. 결국 6월 11일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했고, 6월 26일에는 임진강 방어선을 뚫고 평안도와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해갔다.
이처럼 일본군의 북상이 빠르게 이루어진 것은 조선군의 초기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일본군이 침략해오자 관군들은 싸우지 않고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그러자 흩어진 관군을 대신해서 각지에서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이 일어나 왜적과 싸웠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일본군 제6번대는 5월 29일 부산에 상륙해 6월 중순까지 병력이 집결하기를 기다리며 동래성 부근에 머물렀다. 그리고 6월 19일 현풍으로 이동한 뒤에 부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후방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성주·선산·김천 등 경상우도의 각지로 부대를 진출시켰다. 6월 26일 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양에서 지휘관들의 회의를 열어 조선의 팔도(八道)를 장악하는 임무를 나누어 정했는데, 제6번대는 전라도 지역의 공략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하장수인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恵瓊)가 우선 별동대를 이끌고 의령 방면으로 서진하였다.
일본군은 7월 4일 함안과 의령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곳 남강 유역의 정암진(鼎巖津)에 도착했다. 남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는 정암진 인근에는 갈대와 수풀로 덮여 있는 습지와 모래톱이 넓게 분포해 있을 뿐 아니라, 하천의 양안에도 높은 둔덕과 절벽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강을 건너기 전에 정찰대를 보내서 말이나 무거운 장비를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 있는 길을 푯말로 미리 표시해 두었다.
곽재우의 의병은 밤에 일본군 정찰대가 표시해 두었던 푯말의 위치를 옮겨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좋은 지점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7월 5일 새벽에 남강을 건너온 일본군을 기습했다. 푯말을 따라 이동하다가 강변의 습지에 발이 묶인 일본군은 화살을 쏘아대는 의병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곽재우의 의병 부대가 일본군을 물리치자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은 가덕첨사(加德僉使) 전응린(田應麟) 등이 이끄는 관군도 곽재우 장군의 지휘를 받아 함께 의령 일대를 지키게 했다. 그래서 곽재우의 병력은 1천여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곽재우의 의병은 경상우도의 각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의 진출을 저지했다.
일본군 제6번대는 호남(湖南)을 공략하기 위해 1592년 7월 31일 충청남도 금산(錦山)을 점령한 뒤에 부대를 두 방향으로 나누어 전주성으로 진격시켰다. 하지만 8월 13일부터 8월 14일까지 벌어진 권율 장군이 이끄는 웅치전투·이치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8월 16일에 벌어진 김면(金沔) 의병대장이 지휘하는 ‘우척현전투’에서도 고령·거창 지방의 의병에 패하면서 호남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처럼 조선은 의병과 이순신(李舜臣)이 이끈 전라도 수군의 활약으로 곡창 지대인 호남 지역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일본군에 대해 장기 항전을 벌일 물질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의령 충익사(忠翼祠)
의령 전통시장에서 의령천 다리를 건너면 충익사가 있다. 충익(忠翼)은 곽재우 장군의 시호이다. 정암나루는 이 의령천 바로 남강에 유입되는 곳에 있다. 의령읍 남산 밑에 위치한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그 휘하 장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祠堂)이다. 충익사의 규모는 면적 23,600m2이며, 건물 9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552년 8월 28일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난 곽재우(郭再祐)는 문무(文武)에 뛰어났다. 일찍이 곽재우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85년에는 과거에 급제했으나 글의 내용이 임금의 시정을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선조 임금이 곽재우를 파방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별다른 저항 없이 서울로 진격해가자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의병장 곽재우 ‘홍의장군(紅衣將軍)’은 붉은 옷에 백마를 타고 휘하에 17명의 장수와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정암진, 기강, 현풍, 창녕, 화왕산성, 진주성 등의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름으로써 일본군의 전라도 지방 진격을 저지했다.
충익사(忠翼祠)에는 곽재우 장군의 의병활동을 자상하게 소개해 놓았다. 1592년 4월 22일 자기의 가산(家産)을 털어 조선 최초로 의병 모집 시작하여, 5월 4일~6일 기강(岐江)을 거슬러 올라오는 일본전함 격파하고, 5월 말 정암(鼎巖)을 건너려는 일본군을 늪으로 유인하여 대파했다. 6월말에는 현풍·창녕·연산성 등 탈환했다. 이 전공으로 선조 임금이 형조정랑의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1593년 12월 성주목사 겸 조방장에 임명되고, 1595년 봄에 진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가을에 사직했다.
1597년 7월 7일 정유재란 때 창녕 화왕산성(火王山城)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1599년 10월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부임하였다. 1600년 관직 사퇴의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탄핵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었다. 1602년 창녕군 창암 강변에 망우정을 짓고 조용히 지냈는데 1604년 선산부사,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605 찰리사,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기도 했다. 1608~1610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삼도통제사, 한성부 좌윤,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일시 재직했거나 부임치 않았다. 1617년 예장(禮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6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677년 숙종이 ‘예연서원’의 사액을 내렸다. 1709년 숙종이 ‘충익공(忠翼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를 추증했다.
별채 충의사(忠義祠)에 모신 곽재우 의병부대 18위 제장
별채 사당 충의사(忠義祠)에는 모두 20위의 의병장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이중 2위는 무명 의병 신위이다. 나머지 18신위 중 앞에서 소개가 된 곽재우를 제외한 17장령의 신위를 모셨다.
* [영장(領將) 윤탁(尹鐸) 1554~1593]▶ 합천 삼가현 구평에서 거주했으며, 훈련원의 봉사로 재직했다. 1592년 삼가에서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여 거느리고 와서 곽재우 휘하에서 활동했다. 삼가대장(三嘉代將)을 맡았다.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했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고 병조참판의 직위를 받았다. 삼가의 귀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 [도총(都摠) 박사제(朴思齊) 1549~? ]▶ 합천 삼가에서 살았다. 임진왜란 발발 전에 성균관의 학유(學諭)였다. 곽재우 장군이 경상도의 김사 김수(金睟)로부터 반격을 받아 심히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를 구원하자는 격문을 만들어 적극적인 구명활동을 했다. 일본군이 함안지방을 노략질하고 낙동강을 건너 의령지방으로 침입하려 할 때 곽재우 휘하 의병부대의 도총이라는 중책을 맡아 삼가지방을 지켰다. 사후에 이조참의 직위를 받았다.
* [수병장(收兵將) 오운(吳澐) 1540~1617]▶ 영주 출신으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밑에서 수학했으며, 1566년 충주목사, 사성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그는 주로 의병 모집을 담당했는데, 백령(白嶺) 등지에서 모집한 의병의 수가 2,000명에 달했다. 경주부윤과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으며, 1594년(선조 27)에는 명나라 장수 진린의 접반사로 활동했다.
* [수병장(收兵將) 이운장(李雲長) 1541~1592]▶ 의령에서 거주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1568년에 좌부장(左副將)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전 목사 오운과 함께 곽재우 의병부대의 수병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이 의병부대가 정암진, 즉 솥바위 나루를 수비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침입하자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했다. 사후에 병조참의의 직위를 받았다.
* [선봉장(先鋒將) 배맹신(裵孟伸) 1560~? ]▶ 의령 출신이다. 33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 훈련원 판관 심대승(沈大承)과 함께 곽재우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맡아 활약했다. 사후에 병조참의의 직위를 받았다.
* [선봉장(先鋒將) 심대승(心大承) 1556~1606]▶ 의령 출신으로 훈련원 판관과 군자감정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서 정진과 장현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사후에 좌승지의 직위를 받았다.
* [독후장(督後將) 정연(鄭演) ?~? ]▶ 합천 삼가현에 거주하던 중 의령에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참여해 의병부대의 독후장의 직책을 맡았다. 벼슬은 첨중추에 이르렀다.
* [돌격장(突擊將) 권란(權鸞) ?~? ]▶ 의령 출신으로 곽재우 부대의 돌격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선두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벼슬은 군위현감이었으며, 사후 선무원종공신 2등과 좌참찬의 직위를 받았다.
* [조군(調軍) 정질(鄭晊) ?~? ]▶ 합천 초계 출신이며 삼가현 육동에서 살았다.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량을 조달하는 직책을 맡았다. 지역 지리에 밝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전군(典軍) 허언심(許彦深) 1542~1603]▶ 의령현 가례에서 살았으며 곽재우의 매형이다. 의병부대에 자신의 많은 곡식과 가동(家僮)을 내놓았다. 의병부대의 군향(軍餉)을 관장했으며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 [전향(典餉) 노순(盧錞) 1551~1595]▶ 초계에서 살았으며 남명 조식의 문인이다.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궤(軍饋)를 관장했다. 1593년(선조 26)에 영변부사에 부임했다.
* [치병(治兵) 강언룡(姜彦龍) 1545~1613]▶ 의령 출신으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유곡찰방을 했으나 왜란 발발 후에는 의병부대의 병계 즉 병기와 기계 등을 담당했다. 사후에 좌승지의 직위를 받았다.
* [군기(軍器) 허자대(許子大) 1555~? ]▶ 삼가 출신으로 곽재우 의병부대에서 군기 제조를 책임지고 있었다.
* [기찰(譏察) 심기일(沈紀一) 1545~1610]▶ 의령 출신으로 곽재우 의병부대는 함안지방에서 의령으로 침입해오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정암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 그가 책임을 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정호(鼎湖)의 배를 지키고 있으면서 왕래하는 것을 기찰하는 직책을 맡았다. 사후에 병조참판의 직위를 받았다.
* [복병(伏兵) 안기종(安起宗) 1556~1633]▶ 의령 출신으로 그는 낙동강 연변인 유곡에서 매복해 있다가 전공을 세웠다. 그때부터 곽재우 의병부대의 복병은 그의 직책이 되었다. 사후에 이조참의의 직위를 받았다.
* [군관(軍官) 조사남(曺士南) 1560~1592]▶ 의령 출신으로 벼슬은 주부(主簿)를 역임했으며,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관을 지냈다. 그는 기강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고 좌승지의 직위를 받았다.
* [군관(軍官) 주몽룡(朱夢龍) 1561~1633]▶ 진주 출신으로 21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관을 맡아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김산군수(金山郡守)를 역임했다. 사후에 형조판서의 직위를 받았으며, 진주 평천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의병탑(義兵塔)
충익사는 1972년 4월 22일 의병기념사업회가 구성되고, 주민들이 성금을 거두어 의병탑을 건립했다. 의병탑은 곽재우 장군과 17인 장령의 위훈을 기리고 그들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탑이다. 탑의 높이는 27m이며, 가운데 둥근 18개의 백색 고리는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을 상징하며, 백색 고리 양옆의 팔자형 기둥은 의병이 든 횃불을 상징한다.
의령 ‘의병의 날’ 기념축제
의령군에서는 의병제전 및 군민의 날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의병들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받들기 위해 의령인의 화합과 자긍심을 모으는 군민의 날 행사와 함께 매년 4월 22일 의병 창의일에 개최하는 의령군민의 문화예술행사를 거행한다. 축제의 전야제는 4월 21일 곽재우 장군의 생가 앞 의병광장 유곡면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느티나무’에서 성화(聖火)를 채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11년 6월 1일이 ‘의병의 날’ 국가기념일로 제정, 시행됨에 따라 기존의 ‘의병제전’이 갖는 의미를 계승하여 행사를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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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의령군 낙서면 전화리)
[카니발 Canibal 투어]▶ 11월 2일(월요일) 오후, 의령에서 점심식사 후, 우리 일행은 기원섭의 카니발에 합승하여 낙동강으로 나아갔다. 우리가 지나왔던 20번 국도를 타고 북상, 정곡면 중교리-유곡면 세간리를 경유하여 박진고개를 넘어 의령군 낙서면 전화리 낙동강으로 나아갔다. 오전의 합천과 의령 일대의 유적 답사를 마치고 이제 낙동강으로 돌아온 것이다. 만추의 낙동강 강안의 갈대꽃, 하얀 백사장 부드러운 가을바람을 맞으며 강 건너 창녕 땅을 바라보며 망중한의 시간을 보냈다.
박진고개 전망대
가을 날씨가 참 좋다, 대한민국 특유의 맑고 신선한 날씨이다. 이후의 일정도 계속해서, 5명의 대원이 함께 하는 여정이다. 카니발의 네 바퀴는 설악산 한계령 길 같은 가파르고 경사가 심한 진등산 굽이 길을 돌고 돌아 고갯마루의 쉼터에 도착했다. 고도가 높은 박진고개 정상에는 낙동강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는 합천-창녕보에서 이곳 낙서의 강안에 이르기까지의 낙동강의 전경(全景)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강 건너 창녕의 풍경도 한눈에 들어온다. 낙서의 강변에서 이곳 박진고개에 오르는 길은 2차로의 일반도로에 곁들인 바이크로드이다. 바이커들에게 이 구간은 그야말로 마(魔)의 구간이다. 낙동강 종주의 자전거길 중에서 가장 힘든 길이다. 특별한 프로 선수가 아니면 정상적으로 라이딩을 할 수 없는 최악의 난(難) 코스이다. 오늘도 바이커 한 사람이 자전거를 끌고서 기진맥진 힘들게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의령의 관광안내도가 있는 나무테크 전망대에서 낙동강을 조망하며 한참동안 휴식을 취했다. 간식을 들며 환담했다.
의령 박진고개→ 박진교 → 창녕 1008 도로→ 1021 도로→ 창녕군 남지읍→ 함안 남지대교(남단)
* [ Carnibal 21km 여정 ]▶ 박진고개 구름재 쉼터에서 휴식을 끝내고 다시 카니발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루에서 내리막길을 지나 삼거리, 창녕 방향으로 가는 1008번 지방도로를 타고 내려가 낙동강 박진대교를 건넜다. (창녕의 박진교 앞에서 바이크로는 강둑을 따라 나 있다. 낙동강을 오른쪽에 두고 남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영아지 고개를 넘어 신전리를 지나 남지읍 강둑 길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오늘은 일반도로를 따라 질주하는 카니발 투어, 남지읍 고곡리 삼거리에서 1021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창녕군 남지읍 도착했다. 남지읍 장터에서 따뜻한 풍물을 돌아보며 저녁모임을 위해 장을 보았다.
함안 칠서수변생태공원
남지에서 남지대교를 건너면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중부내륙고속도로 다리 아래를 지나면 낙동강 둔치에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제 함안 땅에 들어선 것이다. 이른바 ‘함안칠서수변생태공원’이다. 수변공원에는 광활한 잔디광장에 여러 갈래의 산책길, 야외무대, 다목적 광장, 강나루오토캠핑장, 함안야구장 등 다양한 유락·운동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바이크 라이딩(Bike Riding)
[Minivelo 두 바퀴로 14km] ▶ 만추의 날씨가 아주 쾌청했다. 공원의 수목들이 은은한 가을색의 옷을 갈아입고 그윽한 서정의 풍경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 공원에서부터 Minivelo 미니벨로 라이딩을 시작했다. 카니발 네 바퀴는 기원섭이 운전하여 창녕-함한보까지 가기로 하고 나머지 대원은 미니벨로 두 바퀴를 굴리는 것이다. 나는 기원섭의 ‘자전거’를 이용했다. 바이크로드는 수변공원 한 가운데를 통과하며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따스하고 맑은 햇살이 내리는 낙동강 공원, 아담한 미니벨로의 바퀴가 신나게 질주한다. 속도감만큼이나 페달에 가하는 하체의 힘이 많이 들어간다. 이상배 대장에 선두에서 달리고 뒤를 이어 두 여성대원이 나란히 달린다. 깊어가는 강변의 가을풍경과 그 고즈넉한 공원 길을 달리는 대원들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 Minivelo 미니벨로 ― 영어로 '작다'는 뜻을 가진 미니(Mini)와 프랑스어로 '자전거'라는 뜻을 가진 벨로(velo)가 합쳐진 합성어로 '작은 자전거'를 말한다. 특히 요즘은 '접이식 작은 자전거'를 통칭하는 말이다.
광려천→ 덕촌마을→ 이령천
너른 둔치의 공원 길을 지나고 나서, 강둑의 길로 올라가서 1040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가는 길이다. 콘크리트 다리가 나온다. 함안군 칠원읍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광려천’ 교량이다. 다리를 건너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바이크로드는 좌측으로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칠북면 덕남리 덕촌마을으로 들어간다. 마을을 지나면 금방 강변의 길로 이어진다. 좌측의 강안에는 낙동강 무성한 습지가 있다. … 강변의 둑방 길, 한적하고 호수 같은 낙동강의 그윽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조금 나아가니 작은 다리[하천]을 건넜다. 이령저수지에서 발원하여 칠북면 이령리를 경유하여 내려오는 ‘이령천’ 다리다, 낙동강에 유입되는 작은 하천이다. 자전거 전용의 테크 다리를 건넌다. 왼쪽은 낙동강이요 오른쪽은 도로가 이어진다. 바이크로드는 강변을 따라 테크 시설로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저만큼 10시 방향으로 창녕-함안보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후 4시 20분, 통합관리센터가 있는 창녕-함안보에 도착했다. 보를 건너지 않고 직진하여 조금 내려가면 함안의 낙동강 광심정(廣心亭)이 있다.
창녕-함안보
창녕-함안보는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어시미산]와 창녕군 길곡면 증산리[뒷각산] 사이를 이은 낙동강 보이다. 창녕-함안보는 함안이 옛 '아라가야'의 땅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고, 낙동강을 품은 큰 고니의 날개를 모티브로 큰 고니의 비상과 녹색 성장의 날개를 형상화한 친환경 다기능보로 디자인 되었다.
보(洑)의 길이는 549.3m인데, 가동보 144m, 고정보 405.3m로 구성되어 있다. 보의 중간에 설치된 가동보 수문은 유량을 조절하는 보(洑)이고, 고정보는 수문이 없어 강물의 수위가 보의 상단보다 높으면 물이 흘러넘치는 보를 말한다. 가동보는 하천 표면의 물을 흘려보내 수위 조절이 용이하고 구조물 높이가 낮아 자연 경관성이 양호한 회전식 수문으로 지어졌다. 가동보 수문 규모는 통수단면을 확대한 회전식 수문(B40m x H9.58m×3문)을 설치하여 수질오염방지, 홍수 시 물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하천바닥에 쌓인 모래를 흘려보내 능력이 증대되도록 제작되었다.
보(洑)의 상단에는 ‘아라빛교’로 명명한 길이 644m의 2차로의 교량이 시설되어 있고 그 교량의 중간의 북쪽에 전망대를 시설해 놓았다. 함안을 옛날 아라가야가 있던 지역이다.
낙동강 광심정(廣心亭)
광심정(廣心亭)은 1569년 용성 송씨 문중에서 젊은 선비들에게 공부를 하도록 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정자 이름은 성리학자인 송지일 선생의 호에서 따왔다. 이 정자는 낙동강이 바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다. 정자에서 바라보면 창녕·함안보의 위용과 낙동강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함안군 칠북면에 위치한 광심정(廣心亭)은 건물 한 채가 고작이다. 풍류를 즐기는 유락 공간이 아닌, 오직 선비들이 공부하는 장소이다. 여름에 마루에 앉아 시원한 낙동강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으면 더위 걱정 없이 공부가 저절로 되었을 것이다. 정자 쪽에서 낙동강 전경을 바라보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넓어지는 듯하다. 송지일 선생이 정자 이름을 '넓은 마음'을 뜻하는 광심(廣心)이라고 지은 것은 학문 수양뿐 아니라 마음 수양도 열심히 해서 넓은 마음을 가지라는 뜻을 담았다.
창녕 노고지리 수변공원
오후 4시 25분, 창녕-함안보를 건넜다. 기원섭이 카니발이 미리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섭은 고맙게도 자신의 미니벨로를 나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홀로 카니발을 몰고 우리의 라이딩을 응원하며 동행하는 것이다. 남지대교를 지나서 함안의 칠서공원에서부터 혼자서 차를 몰고 내려와서 여기 길곡면 창녕-함안보(洑) 앞에서 만난 것이다. 떨어진 시간이 잠시지만 반갑게 만나 환담하며 휴식을 취했다. 오늘의 숙소인 ‘강나루팬션’(창녕군 부곡면 비리산 낙동강변)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상배 대장을 비롯한 4명의 바이커들은 두 바퀴의 은륜으로 다시 라이딩에 돌입했다. 우리는 둑방 길을 벗어나 낙동강 둔치의 공원으로 난 자전거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낙동강 좌안 창녕군 길곡면 강변은 ‘노고지리 수변공원’이라고 명명했다. 강둑으로는 도로가 이어진다. 창녕군 남지읍에서 낙동강을 건너지 않고 강의 좌안을 따라 이곳 창녕보를 경유하여 저 밀양강 하구(河口)까지 이어지는 1022번 지방도로이다.
수변공원의 바람을 가르는 라이딩(Riding)
[창녕군 길곡면] ▶ 보(洑)에서 노고지리수변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낙동강 이정표가 있다. ‘↑낙동강 하구둑 86.5km ↓안동댐 298.5km’, 낙동강 종주 마지막 종점까지 앞으로 200리 정도를 남겨 놓았다. 한 여름에 출발한 대장정 길, 지금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경상남도 창녕의 낙동강 수변공원에도 가을이 깊어간다. 참으로 따스하고 평화스럽다. 인근에 큰 도시가 없어서인지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고 바이커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잔디는 금빛으로 변해가고 간간이 서 있는 나무들은 노란색이나 고운 갈색으로 갈아입고 가을햇살을 받고 있다. 바이크로드는 수변공원 한 가운데 한 일자로 쫙 뻗어있다. 길목의 좌우에는 하얀 억새꽃이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직선의 주로에서 은륜의 두 바퀴는 거침없이 질주한다. 공원의 바이크로드는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기도 하지만 거의 일직선의 시원한 주로를 만들어 놓았다. 허벅지 안쪽의 근육이 굳어지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두 발로 걷기'와는 다르게 다른 부위에 근육통이 오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갈색의 잡초가 무성한 둔치 너머 낙동강 풍경이 환하게 열린다. 만추의 가을 햇살이 곱다. 은륜의 속도가 바람을 가른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공원의 막바지 길곡천을 지나고 둑방 길로 올라섰다. 그리고 1022번 도로와 만났다. 거기 기원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는 도로의 가파른 오르막길이있다.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경사가 급한 도로를 따라 자전거 타고 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오늘의 포인트인 강나루 마실은 고개 넘어 조금만 가면 있다고 했다. (이곳 1022 도로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8km 정도 가면 부곡온천이다.) 그런데 고개를 올라가기 전, 좌측의 높은 산록에 아담한 정자가 보인다. 소우정이다.
임해진 소우정(消憂亭)
이 정각(亭閣)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벽진 이씨 소우정(消憂亭) 이도일(李道一, 1581(선조14)~1667(현종8))의 유적이다. 소우정의 조부는 참판 이엄(李儼)이며 아버지는 공조참의에 추증된 덕암(德巖) 이석경(李碩慶)이다. 이도일은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제현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1592년(선조25) 12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강릉으로 피신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의병에 가담하여 화왕산성에서 곽재우(郭再祐) 장군을 도와 전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 태종 누루하치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창의하여 400석의 군량미를 보내고 의병을 모아 싸움터로 보냈다. 이후 척화파 김상헌(金尙憲)의 천거로 칠원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결국 왕이 항복한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면서 북벌책(北伐策)을 상소하여 설욕하고자 하였다. 후에 인조(仁祖)는 친필로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고 후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만년에 이곳 임해진(臨海津, 낙동강) 강가에 정자를 지어 소우정(消憂亭)이라 했다. 그 규모가 겨우 무릎을 용납할 만하다하여 ‘용슬헌(容膝軒)’이라고도 하고 산수(山水)와 더불어 유유자적하였다.
강나루팬션
소우정 앞에서 미니벨로를 접어서 차에 싣고 대원들 모두 카니발에 동승하여 비리산 산자락의 고개를 넘었다. 고개 넘어서 바로 오늘의 목적지(숙소)인 강나루팬션에 도착했다. 1022 지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낙동강을 바라보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청암리이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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