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兎死狗烹)
목 차(目次)
1. 중국의 역사
2. 토사구팽의 뜻
3. 토사구팽의 실례‥‥‥ 한신(韓信)
4. 토사구팽이 아니면서 이와 관련된 고사(故事)………군막(軍幕)속에서 계책을 짜내어 백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다. 자기 자신의 거취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토사구팽되지 않은 자………장량(張良)
상론(詳論)
1. 중국(中國)의 역사(歷史)
중국의 역사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夏)(B.C. 2000 년경), 은(殷)(혹은 상(商)이라고도 함)(B.C. 1500년 경), 주(周)(B.C1000 년경)나라를 지나서 주나라 말기부터 춘추시대(B.C 722 노(魯) 은공 원년~B,C, 481 노(魯) 애공 14년), 전국시대(춘추시대 이후~B.C. 221)를 거쳐서 진(秦)나라의 진시황은 B.C. 221년에 중국을 통일했다.
진나라가 통일을 한 뒤에 선정(善政)을 베풀지 못하고 백성들을 고통 속으로 끌고들어가자 민심이 술렁거렸다. 그런 와중에서 진승(陳勝)(~208 B.C)과 오광(吳廣)(~208 B.C)은 농민들을 이끌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진나라의 학정(虐政)에 대하여 민의(民意)를 반영하는 포문(砲門)을 연 셈이었다.
뒤이어 항우(項羽)와 유방(劉邦)등도 진나라에 대항해서 거병(擧兵)을 했다.
항우(項羽, 항적(項籍))는 그의 반(反) 진나라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때 한 고 조(高祖) 유방(劉邦)은 소하(蕭何), 조참(曹參)등과 함께 병력을 인솔하였다.
처음 출전할 때에는 오직 한마음 즉, ‘타도 진나라’였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서로간의 경쟁이 격화된 나머지 하나 둘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항우(項羽)와유방(劉邦)만이진나라와 대결하고 있었다.
항우는 숙부항량이 전사한 이후 자신이 주인이나 된 것처럼 거들먹거렸다. 항우는 홍문(鴻門)에서 패공(沛公,유방)을 제거할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B.C. 206년, 진(秦)나라가 항우와 유방의 연합군에게 멸망함. 항우는 자신을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고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했다.
B.C. 205년, 항우(초(楚)나라)와 유방(한(漢)나라)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항우와 유방은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攻防)을 끝없이 계속했다.
항우와 유방의 경쟁 구도 속에서 한신이 등장하게 되는데 한신이 유방의 막하에 들어감으로써 천하의 대세는 유방의 쪽으로 기울게 된다.
B.C 202년, 유방은 해하(垓下)(안휘성 사현 서쪽)에서 한신(韓信)의 지휘 하에 항우를 격파하고 한(漢)(전한(前漢))을 세웠다. 중국을 통일한 한고조 유방은 참모진 세 명의 도움이 컸다. 참모는, 한신(韓信), 장량(張良), 소하(蕭何)이다. 우선 한신의 생애(生涯)에 대하여 알아본다. 이어서 한신과는 달리—자기 자신이 퇴출될 것을 예상해서—장가계(張家界)로 자신의 종적(蹤迹)을 감춰버린 장량(張良)에 대하여 알아본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이었다. B.C. 195년에는 중국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고조선에 망명하였다. 1년 후 B.C. 194년, 위만은 조선을 공격하여 왕검성을 탈취하고 새 왕조를 세웠다.(위만 조선)
* B,C.‥‥기원 전을 뜻함. 즉 서력 원년(그리스도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하는 서력 원년) 이전.
2.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뜻
토(兎, 토끼 토 ), 사(死, 죽을 사)
구(狗, 개 구), 팽(烹, 삶을 팽)
즉, 토끼가 잡혀 죽고 나면 사냥개는 삶겨진다는 말. 곧 토끼 사냥이 다 끝나고 나면 그 사냥에 쓰였던 사냥개는 쓸모없게 되어 삶아 먹히고 만다는 말이다. 원말은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교활한 토끼가 잡히자 충실한 사냥개가 삶겨져 먹힌다.)으로 쓸모가 없어지자 언제 그랬나는 듯 없애버림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토사구팽이 적용(適用)된 예(例)를 찾는다면 우선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다.
한신은 스스로—병력을 이끌고 병법(兵法)을 써서—전투에서 승리하는데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고, 나야말로 ‘당대(當代) 최고(最高)의 군(軍)지휘관(指揮官)으로서 나는 병력이 많을수록 좋다.(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자부심(自負心)을 가질 정도로 용병술(用兵術)에는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인물이다.
반진세력(反秦勢力) 중에서도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가장 강대(强大)해서 점차 둘의 싸움으로 좁혀졌다. 팽팽하던 항우와 유방의 대결도 한신(韓信)이 유방에 가담함으로써 유방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항우와 유방이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攻防)을 거듭하던 중 한신은 삼진(三秦, 진의 옛땅)을 평정하고 함곡관을 나와 위나라 황하 이남의 땅을 점령했다. 계속해서 조나라를 공략하고 제나라를 정복했음. 제나라 왕이 됨. 해하(垓下)에서 한신을 도와 제후연합군과 더불어 항우를 패망시킴.(한신은 실제적인 총사령관이었음.) 이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교활한 토끼가 잡히자 충실한 사냥개가 삶겨져 먹힌다.)이라던가. 한신은 한고조 유방에게 모든 직함을 빼앗긴 채 실의(失意)에 빠져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역모를 꾸미다가 적발되어 자신과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3.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실례(實例)
한신(韓信)………토사구팽(兎死狗烹)의 예를 찾는다면 어찌 한신 뿐이겠는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의 ‘월세가(越世家)’에는 한신보다 앞서 월나라의 범려(范麗)가 월나라를 도망쳐 나올 때에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아라는 말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신(韓信)은 회음(강소성 회음현 남쪽) 출신이다.
한신은 언제 태어났는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태어나서 20세 전후까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에 대하여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당대(當代)에 전쟁병법(戰爭兵法)에 있어서 제 1인자라고 주장하는데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한신은 따로 노력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소양(素養)을 가지고 나왔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혼자서 독학(獨學)을 했을까? 이렇게 예상해볼 수 있다.
한신의 집은 매우 가난한 집이라서 개인교습을 시킬만한 여력(餘力)은 없었지만 부모님의 높은 교육열은 한신에게 특별지도를 시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뛰어난 전략병법의 전문가(專門家) 밑에서 전쟁병법(戰爭兵法)의 노하우(knowhow, 비결)를 전수받은 그는 20대 중반쯤에 병법(兵法) 연수를 마치고 고향의 집에서 쉬고 있었다. 스스로 자기 소개를 하지 않아도 자기를 알아보고 자기를 모셔갈 사람을 찾았지만 그게 수월치 않았다. 벼슬이 없었던 평민 시절에는 집안이 몹시 가난했던 데다가 이렇다 할 선행(善行)도 없었으므로 누구에게 추천되거나 선택되어 관리가 될 수도 없었다. 또 장사하여 생계를 꾸릴 능력조차 없어 항상 남에게 빌붙어 얻어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신은 그 중에서도 회음의 속현(회음에 딸린 조그만한 마을)인 하향이라는 시골 남창(고을 이름)의 정장(亭長, 지금으로 말하면 이장(里長)) 집에 자주 기식(寄食)(기식, 남의 집에 붙어서 밥을 얻어먹고 지냄.)한 적이 있었다.
수개월씩이나 얻어먹게 되자 정장의 아내는 한신을 귀찮게 여겼다. 새벽에 밥을 지어서는 이불 속에서 재빨리 밥을 먹어 버리고는 식사 때에 맞추어 찾아오는 한신에게는 밥을 내놓지 않았다.
한신도 그녀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대와 절교를 하고 떠날 수밖에 없겠네 그려.”
한신이 회음성 밑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빨래터의 아낙네들 중 한 여인이 한신이 굶주린 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밥을 주었다. 빨래가 모두 끝날 때까지 수십 일 동안이나 한신은 그녀에게서 밥을 얻어 먹었다.
한신은 그동안 신세진 것을 그녀에게 감사했다.
“반드시 성공하여 은혜를 크게 갚겠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화를 냈다.
“사내대장부가 제 손으로 입에 풀칠도 못 하는 게 불쌍해서 밥을 나눠 주었을 뿐이데 무슨 보답 같은 것까지 바라겠소.”
회음의 백정(白丁)촌 사내들은 몹시 거칠었다. 한신 정도는 완전히 거지 취급을 하고 있었다.
“야 몸둥이만 큰 놈 이리 오너라. 네놈이 칼은 차고 있다만 실상은 겁쟁이지.”
그들 중의 한 자가 말했다.
“겁쟁이는 아니다.
”그으래. 그렇다면 그 칼을 빼서 내 배를 질러 보아라.“
“싫은데.
”이자식이, 싫다니, 너 나한테 맞아 죽기 싫으면 엎드려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가라. 어서!”
한신은 잠깐 생각한 끝에 얼른 엎드려서 그 사내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갔다.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한신을 완전한 바보로 본 것이다.
한신은 어떤 기회에 항량의 수하에 있게 되었다. 항량이 전사하자 이번에는 그의 조카 항우에게 소속되었다. 항우는 한신을 낭중(郎中, 벼슬 이름)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신이 항우에게 여러 번 계책을 올렸지만 한번도 채택되지 않았다. 실망한 한신은 한왕 유방이 촉(蜀)으로 들어갈 때 초왕 항우에게서 도망하여 한나라에 귀속되었다.한신은 여전히 유명해지지 못했다. 연오(連敖)라는 보잘것 없는 벼슬 자리에 있었다. 어느 때 한신이 한고조의 일등 참모인 소하(蕭何)의 눈에 띄었다. 소하와 한왕 유방의 사이는 반진대장정(反秦大長征)에 들어서기 전부터 절대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자주 접하는 사이에 소하는 한신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았다. 그래서 소하가 한왕에게 한신을 크게 쓸 것을 권고했지만 한왕은 듣지 않았다. 결정적인 기회에 소하는 다시 한신을 천거했다.
“대왕께서 대국의 극히 일부분인 한중(漢中)의 왕으로 만족하시겠다면 몰라도, 천하를 다투려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는 의논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대 얼굴을 보아 장군으로 삼겠소.”
“장군직만으로는 그가 머물지 않습니다.”
“그럼 대장군이라야 되겠소?”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그를 당장 불러 오시오.”
“안 됩니다. 대장 임명을 마치 아이 부르듯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어떻게 그를 불러야 되오”
“길일(吉日)을 택하여 목욕재계하시고 식장을 만들어 장중한 의례로 그를 대장군에 임명 하십시오.”
“좋소, 그렇게 하리다.”
한신의 전술, 전략은 과연 신출귀몰(神出鬼沒)했다. 특히 많은 병력을 이끌고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하여 손쉽게 승리를 쟁취했다. 한신의 공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삼진(三秦, 진의 옛땅)을 평정했다.
둘째, 함곡관을 나와 위나라 황하 이남의 땅을 점령함.
셋째, 위(魏)나라를 평정하고 한(漢)의 하동군(河東郡)으로 편입시켰다.
넷째, 대(代)나라를 격파함.
다섯째, 조나라를 격파함. 성안군을 베고 조왕 헐을 사로잡음. 광무군을 생포함.
여섯째, 연(燕)나라를 복속(服屬)시키다
일곱째. 제(齊)나라를 공략함.
한 4년에 한신이 드디어 제나라를 모두 항복시켜 평정하고 사자를 보내어 한고조 유방에게
“제나라는 거짓이 많고 변절이 심하여 번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게다가 남쪽으로는 초나라와 변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가왕(假王)(거짓으로 세운 왕)을 세워서 진정시키지 않으면 정세가 안정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신을 가왕으로 삼아주시면 편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때 초나라가 급습하여 한왕을 형양에서 포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신의 편지를 보고 매우 성내어
“내가 여기서 곤경에 빠져 빨리 와서 도와 주기를 바라는데 저는 스스로 서서 왕이 되겠다는 말이냐?”라고 하며 꾸짖었다.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한왕의 발을 일부러 밟아 신호하고는, 귓가에 입을 대고
“한나라는 지금 불리한 처지에 있습니다. 어찌 한신이 왕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차라리 그대로 세워서 왕을 삼고 그를 잘 대우해서 자진햇 제나라를 지키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변이 납니다,”라고 말하였다. 한왕 유방은 한신의 요구에 따라 한신을 *제왕(齊王)으로 임명했다.
*최고의 정점(頂點)에 황제(皇帝)가 있고, 그 밑에 왕(王)이 존재하며 왕(王) 아래에 일반 신하와 장군이 있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조선조의 경우 사대주의(事大主義)(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를 받들어 섬김)에 의하여 조선조의 임금은 황제의 칭호를 못 쓰고 왕(王)으로 만족해야 했다.
제나라 사람 괴통(蒯通)이 천하 대권의 향방이 한신에게 달린 것을 알고, 기이한 계책으로 한신을 감동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관상을 보는 것으로써 한신에게 이르기를
“제가 일찍이 관상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신이
“선생이 관상을 보는 법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고귀하게 되느냐 비천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골상에 달려 있고, 걱정거리가 생기느냐 기쁜 일이 생기느냐 하는 것은 얼굴 모양과 얼굴 빛에 달렸으며. 성공과 실패는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참고하면 만에 하나라도 어긋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신이 말하기를
“좋소, 그러면 선생은 과인의 관상을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하니 괴통은
“잠시 틈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한신은
“다들 물러가라”라고 하였다. 괴통이
“장군의 상을 보니 제후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위태로워 안정된 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장군의 등을 보니, 고귀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한신은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물었다. 괴통이 말하기를
“천하가 처음 어지러워졌을 때 영웅 호걸들이 왕이라고 칭하고 한번 소리치자, 천하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물고가 비늘처럼 겹치고 불길이나 바람처럼 알어났습니다. 당시의 걱정은 오직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초나라(항우가 왕(王)으로 있는 나라)와 한나라(유방이 왕으로 있는 나라)가 서로 다투게 되자, 천하의 죄 없는 사람들의 간과 쓸개가 땅바닥에 내깔리게 되었고, 아비와 자식의 해골이 들판에 나뒹구는 것만 해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슬기로운 한왕도 용맹스러운 항왕도 다 함께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왕과 항왕의 운명은 족하(足下)(같은 또래에게 존칭으로 쓰는 말,)에게 달려 있습니다. 족하께서 한나라를 위하면 한나라가 이길 것이요, 초나라를 위하면 초나라가 이길 것입니다. 저는 한나라와 초나라의 두 임금을 존속시켜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족하께서는 강대한 제나라에 의지하여 덕으로써 제후들을 회유하십시오. 족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한신은
“한왕은 나를 후하게 대해줍니다. 자기의 수레로 나를 태워주며 자기의 옷으로 나를 입혀주며, 자기의 먹을 것으로 나를 먹여주었습니다. 내 어찌 이익을 바라고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괴통이
“족하께서는 스스로 한왕과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여 만세불멸의 공업을 세우려고 하시지만 신은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족하께서 한왕이 결코 족하를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역시 잘못이라고 여겨집니다. 족하께서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족하게서는 서하를 건너가서 위왕을 사로잡고 하열을 사로잡으셨으며, 군대를 이끌고 정형으로 내려와서 성안군을 베어 죽이고 조나라를 항복시키셨습니다. 연나라를 위협하고 제나라를 평정하셨으며, 남쪽으로 내려와 초나라의 20만 대군을 꺽으셨습니다. 족하께서는 ‘공로는 천하에 둘도 없고 지략은 불세출이다’라는 것입니다.”
며칠 뒤에 괴통이 다시 한신에게 설득하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맹호라도 머뭇거리고 있으면 벌이나 전갈만한 해도 끼치지 못하며, 아무리 준마라도 앞으로 나가지 않고 있으면 노둔한 말이 천천히 가는 것만 못하며, 비록 순(舜)임금이나 우(禹)임금과 같은 지헤가 있더라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면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손짓 발짓으로
말하는 것만도 못하다.’ 이것은 능히 실행하는 것이 귀하다는 말입니다. 좋은 때를 만나는 것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족하께서는 자세히 살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망설이면서 차마 한나라를 배반하지 못하였다. 도한 자신의 공이 많으니 한나라가 끝내 제나라를 빼앗지는 않을 젓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괴통의 말을 거절하였다. 괴통은 한신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무당이 되었다.
여덟째, 해하(垓下)(안휘성 사현 서쪽)에서 초(楚)•한(漢)간의 최후의 결전을 벌였음.
(해하성 전투에 앞서서 한고조 유방과 소패왕 항우는 앞으로 더 이상 전투를 하지 말자며 강화(講和)를 맺었다. 그러나 유방은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破棄)하고 군대를 몰아 항우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고릉(固陵)에서 항우에게 대패(大敗)하여 궁지(宮趾)에 몰렸는데—한고조 유방은 난국(難局)을 타결하기 위해서는 한신의 도움이 절실했으므로—장량이 계책(計策)을 내어 제왕 한신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진(陳)의 동쪽부터 바닷가의 지역을 한신(韓信), 그대에게 주겠노라. 대 항우의 전선에 투입할 것. )
B.C.202년, 유방(劉邦)은 한신(韓信), 팽월(彭越) 등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해하에서 항우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서
전의(戰意)를 잃고 홀로 도주하다가 오강(烏江, 안휘성 화현(和縣))에서 자살하였다.
해하성 전투 후에 고조는 제왕 한신을 습격하여 한신의 군사를 빼앗았다. 고조는 한의 5년 정월, 제왕 한신을 옮겨서 초왕(楚王)으로 삼고서 하비(下邳,강소성)에 도읍하게 했다.
한신은 자신의 근무지인 초(楚)나라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 즉시 일찍이 밥을 얻어먹은 빨래터 여인을 찾아 천금(千金)을 내렸다.
또 하향의 남창 정장에는 백전(百戰)을 내리면서 말했다.
“그대는 소인배다. 은덕을 베풀 때는 중간에서 그만두는 게 아니네.”
또 청년 시절, 자신을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가게 하면서 욕보인 건달을 불러놓고 여러 장군과 재상에게 설명했다.
“이 자는 장사(壯士)다. 나를 욕 보였을 때 나는 이 자를 죽일 수도 있었지.그러나 죽여도 명예는 커녕 죄수밖에 더 되었겠는가? 그래서 모욕을 꾹 참으며 인내(忍耐)를 배웠지. 그 때의 은인자중(隱忍自重)으로 오늘의 업적을 이룩한 걸세.”
그러면서 그를 초(楚) 나라의 수도 경비관에 임명했다.
그당시 한신에게는 예전에 항우의 밑에서 용맹을 떨쳤던 종리매(鍾離昧) 장군이—항우의 전사(戰死) 후에 도망하여—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한신과 종리매는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한고조 유방은 과거 종리매 장군과의 전투에서 고전했던 기억 때문에 종리매가 초에 있다는 말을 듣고 종리매를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한신은 명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겼다,
그런 중에 한신이 반심(叛心)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한고조 유방에게 올라왔다. 한고조 유방은 이참에 한신의 공직(公職)을 거두어 들이려고 했다. 그렇다고해서 한고조 유방의 마음대로 섣불리 손을 댈 일은 아니었다.
한고조 유방은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일에 대한 방책을 드림)에 따라 제후들에게 운몽호(雲夢湖) 지역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알리고, 모든 제후는
수행을 위해 초(楚) 땅의 진(陳)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실은 한신을 습격하려 한 것이지만 한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고조가 초나라에 도착할 무렵 한신이 군사를 일으켜 모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황상(皇上)(황제)을 뵐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로잡힐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파악한 가신(家臣)이 그에게 이렇게 은밀히 권했다.
“종리매의 목을 가져가신다면 한고조 유방께서도 노여움을 풀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 안위(安危)를 위해 어찌 친구를 배신한단 말인가. 한신은 고민하다가 종리매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종리매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분개해 말했다.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군. 고조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바로 내가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도 자네가 내 목을 가지고 가겠다면 지금 당장 내 손으로 죽어주지. 하지만 내가 죽으면 자네 역시 살아 남을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게.”
몸을 숨길 곳 없는 패장(敗將)으로서 우정을 배신당할 처지에 놓인 친구로서 분통해하던 종리매는 드디어 자결하고 말았다.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한고조 유방을 태평스럽게 뵈러 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는 역적으로 포박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한신은 분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며, 높이 나는 새를 다 잡고 나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모 많은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그 말 그대로구나. 천하통일이 된 지금에 와서 한고조 유방에게 죽게 되다니!”
한고조 유방이
“한신이 모반하였다고 어떤 사람이 고하였다.”라고 하며 드디어 한신에세 차꼬와 수갑을 채웠다. 낙양에 도착한 뒤에야 한신의 죄를 용서하고—초왕(王) 의 직책을 거두어들이고—군권(軍權)을 뺏은 다음 회음후(淮陰侯)로 좌천했다.
한신은 한고조 유방이 자기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늘 병을 핑계대고 조회하지도 않았으며 수행하지도 않았다.
한고조가 일찍이 한신과 마음 놓고 여러 장수들의 능력을 말하며 각자 등차(等差)를 매긴 적이 있었다.
한고조가 한신에게 물었다.
“나와 같은 사람은 몇 명의 군사를 이끌 수 있는 능력이 되겠소.”
“폐하는 그저 10만이면 족합니다.”
“그대는 어떻소?”
“저야 많을수록 더욱 좋지요.(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좋다는 사람이 어째서 나에게 사로잡혔소?”
“폐하께선 병사야 그 정도 밖에 이끌 수 없지만 장수들을 잘 거느리십니다. 바로 신이 페하에게 잡힌 까닭입니다. 더구나 황제의 지위는 하늘이 주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 뒤에 한신과 서로 신뢰(信賴)하며 지내는 진희(陳狶))가 거록군(지방의 지명) 태수로 임명되어 한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한신은 이번 기회에 유방을 제거하고 대권(大權)을 잡고자 계책을 세웠다. 한신이 진희에게 말했다.
“그대는 폐하께서 신임하는 총신이요. 그대가 모반했다고 하는 밀고가 들어와도 폐하께서는 믿지 않을 것이요. 세 번쯤 밀고가 들어오면 그땐 의심하여 진노해서 친정(親征)을 서두를 것이요.”
“그건‥‥‥?”
”내가 그대를 위하여 안에서 일어나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는데 어떻소?“
진희는 한신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추호의 의심도 없이 대답했다.·
“삼가 가르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한(漢)의 11년이었다.
진희가 과연 모반했다.
한고조 유방은 스스로 대장군이 되어 친정(親征)길에 나섰다.
“절호의 기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끝장이다.”
한신은 병을 칭탁해 종군치 않았다.
한편 진희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게 했다.
“그저 안심하고 군사만 일으켜라. 내가 여기서 그대를 돕겠다.”
한신은 그의 가신(家臣)들과 치밀하게 음모했다.
우선 밤중에 조칙(詔勅)이라고 속이고 각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들을 풀어놓고, 이들을 동원하여 여후(呂后, 한고조 유방의 아내, 여치(呂雉))와 황태자(皇太子, 한고조의 아들, 한 혜제(漢惠帝))를 습격하려는 작전을 수립했다.
부서는 이미 결정되었다. 이제 진희한테서 오는 통지만 기다리면 되었다.
바로 이 때였다. 가신(家臣) 중에서 한신에게 죄를 진 자가 있었는데 때마침 잡혀 왔으므로 그를 처형하려고 했다.
죄수의 아우가 생각해 보았다. 형을 살려 내려면 주인인 한신을 잡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황후에게로 달려가 모반의 상황을 자세히 고해 버렸다.
여후는 혼자 생각해 보았다. 한신을 소환하려 해도 결코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몹시 다급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여후는 상국(相國)(요즘의 국무총리에 해당함.) 소하와 의논할 수 밖에 없었다.
“상국께 부탁합니다. 이 난국을 잘 수습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소하는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서 알렸다.
“친정해 가신 소하께서는 진희를 사로잡아 벌써 사형에 처했습니다.”
“벌써!”
“열후와 뭇 신하들이 모두 참여해 축하하고 있습니다. ”
한신은 낙담했다.
여후와 소하는 한신이 어떤 변고를 일으킬지 불안해서 별수없이 소하가 한신을 찾아가 속여서 말했다.
“비록 병중이라 하더라도 잠깐 참래하여 축하의 듯을 표하고 가시지요.”
한신은 아니 갈 수가 없었다. 황태자가 있는 궁(장락궁(長樂宮))으로 멋모르고 들어섰다.
이때 여후의 명을 받은 무사들이 삽시에 달려들어 한신을 묶었다.
“이건 또 무언가!”
한신은 사태의 모든 진전을 깨달았다.
목베임을 당할 때 그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괴통의 계략을 쓰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다. 일개 아녀자에게 속았으니 이 또한 운명이겠지.”
한신은 장락궁에서 곧바로 죽었다. 그의 일족도 곧 몰죽임을 당했다.
한(漢)나라의 역사학자로서 사기(史記)를 집필한 사마천(司馬遷)은 ‘회음후 한신 열전’을 쓴 다음 한신에 대한 평(評)을 달았다. 평을 소개한다.
“내가 회음에 갔더니 회음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하였다.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하여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한(漢)나라에 대한 공훈이 주(周)나라의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의 공훈과 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세에까지 나라의 제향(祭享)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반역을 꾀하였으니, 일족이 전
첫댓글 이 글을 모두 입력했냐?
끈기와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 ~~
학빈아 긴글보다 짧은 글로 뇌리에 남는 좋은글이 더 자주 쉽게 볼거 같다.생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