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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1/ 비전과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 느1:1-11/ 말씀: 하용조
저는 오늘부터 <느헤미야서>에 관한 얘기를 시작하는데, 큰 제목을 <52일 간의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온누리 교회는 이제 25주년을 맞이하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느헤미야서를 말씀하라>고 합니다.
역사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고, 미래도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요즈음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와 교회가 해야 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면서 찾고 싶은 생각입니다.
<느헤미야서>는 포로에서 귀환한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벽을 재건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정리하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끝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인도에 따라, 어떻게 약속된 땅에서 다시 정착하였으며, 백성들이 어떻게 신앙으로 세워질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장의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첫째로,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의 포로시절을 회상하며,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으나, 그가 먼저 본 것은 현실의 참담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성전이 훼파되고,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은 불에 타서 엉망진창이 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142년 동안 허물어진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었던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집이 무너지고, 그 안에 성물은 모두 다 도둑질을 당하고,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볼 때마다, 느헤미야의 마음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전 건축>을 먼저 결심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입니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내가 수산 성에 있을 때에 내 형제 가운데 <하나니>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유다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포로로 잡혀오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는 유다사람들의 안부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느 1:1-2)
성경에 나타난 느헤미야의 정보는 아주 간단합니다.
① <하가랴>의 아들이라는 것과 ② <하나니>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느헤미야는 유대인으로, 자기 할아버지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으니까, <이민 3세>로 추정됩니다.
<이민 2세>만 되어도 자기나라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느헤미야는 포로로 끌려가서 <술 맡은 관헌>이 되었는데, <술 맡은 관헌>은 어떤 직무를 가진 사람입니까? <술 맡은 관헌>은 왕의 마음에 들어서, 임금님과 말 동무가 되고, 음식을 같이 먹고, 믿음이 가는 사람 중에서 선정합니다.
<실력>이 있으면 대개 [믿음]이 적습니다. <믿음>이 많으면 [실력]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현실을 처리해 나가는 능력이 부족하고,
또 <실력>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해요.
그러나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은 너무나 잘 나가고 일이 바빠서,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지만,
우리가 찾는 사람은 하나님도 잘 믿고, 실력도 특출해서, 국정도 잘 보살피는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2. 둘째로, <느헤미야는 남다른 애국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애국심>과 <정권욕>은 다릅니다. “국가를 위한다”는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애국>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데, 실제로 <애국심>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 조국에 대한 불타는 <애국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수산 궁은 이스라엘부터 1,200km정도 떨어진 장소이지만, 느헤미야의 마음속에는 <조국에 대한 불타는 사랑>의 마음이 강했어요. 성전이 무너지고, 성벽이 훼파된 것을 보고 있는 느헤미야의 마음속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포로로 잡혀오지 않고 그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큰 어려움과 수모를 당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채 그대로 있고, 성문을 불탄 이후로 다시 세우지 못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느 1:3)
성문이 불탄 것을 보면서 온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견딜 수 없이 분노를 느꼈습니다.
얼마 전에 “이스라엘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 미국의 대학에 있는 젊은이들 중에서 이스라엘 출신하고, 아랍계 출신들이, 둘 다 <모두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청년들은 조국에 돌아가서 전쟁에 참여했고, 아랍 청년들은 숨어서 없어졌다“는 기가 막힌 보고가 있었어요.
4절을 보십시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만 주저앉아 울고 말았어요. 나는 몇날, 며칠 동안, 슬픔에 잠긴 채 금식하면서, 하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말했습니다.” (느 1:4)
여러분, 눈물과 통곡은 그냥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아요.
오랫동안 마음에 생각을 하고, 묵상을 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 가슴 찢어지는 애통을 가진 사람만이 눈물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도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까? 아니예요. 없어요.
혹시 눈물이 나와도 잠시 잠깐 울다가 그쳐요.
여기에 나오는 느헤미야도 “몇 날, 며칠 동안 슬픔에 잠겨, 금식하면서, 하나님에게 기도했다“고 했어요.
요즘 우리시대는 감정이 없는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어요. 현실의 일에 얽매여서 순간, 순간, 고통스런 일에 매달려 살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으면 울까? 그것도 며칠만, 형식적으로, 울고 말아요.
이렇게 메마른 감정을 가진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문제에 얽매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아마도 극장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잠깐 우는 정도에 그치겠지요.
3. 셋째로, <느헤미야는 비전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버지 때로부터 귀에 아프게 들었던 얘기를 회상하면서, 그런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벨론으로부터 침공당한 비참한 포로생활을 기억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얘기들을 회상하면서, 그런 감정에 북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거예요.
저는 일본에 잠시 잠깐 살면서도 느끼는 것이 “일본 사람들은 정직하고, 남한테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질서를 아주 정확하게 지켜요.
아마도 제 생각에는 일본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과 같이 느껴져요.
거기다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절대로 사기 치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아요.
느헤미야는 왜 통곡했을까요?
느헤미야는 1차 귀환 시,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반대 세력들이 많아서, 결국은 성전 건축을 중단합니다.
이방인들이 수없이 침공하고, 성전의 기물들을 약탈을 하여, 성전은 피폐한 지가,
벌써 140년 이라는 세월이 지나갔고, 성전은 무너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어요.
이런 것들을 보는 느헤미야의 마음속에는 조국에 대한 생각과 성전 훼파에 대한 북받치는 감정을 누를 길이 없어서 통곡을 한 거예요.
그런 느헤미야는 조국에 대한 생각이 강한 <비전의 사람>인 거예요.
오늘은 8.15 광복절이기 때문에, 더욱 더 <느헤미야의 마음>으로 나라를 생각해야 해요.
이게 바로 <애국> 이예요.
그러나 요즘의 젊은이들은 쉽게 <이념>에 빠져서, 분노하는 사람들만 보이지,
실제로 애국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느헤미야 1장>에서 느헤미야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사람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 갔어요.
느헤미야 기도의 특징은 사람에게 찾아가지 않고, 하나님에게 찾아가서, 기도를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을 즉시 오지 않았어요.
4개월이 지나서야, 그에게 응답이 왔어요.
우리는 나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도와 줄 <사람>을 먼저 찾아 가요.
그러나 느헤미야는 <조급할수록 기도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 방법 저 방법을 다 써 본 후에,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새벽기도에 나와요.
2. 둘째, 느헤미야의 기도의 특징은 <기다리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과 맺은 사랑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느1:5)
느헤미야와 우리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느헤미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을 믿고, 선포했어요.
6절을 보십시오.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의 종이 밤낮으로 주 앞에 기도하니, 주께서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떠서 이 기도를 들으소서. 저와 제 조상의 집을 비롯해 우리 이스라엘 족속이 주님을 거역했던 죄를 고백합니다.” (느1:6)
3. 셋째는,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기도를 했어요.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기도를 했어요.
주의 종이 밤낮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또 주님께서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그 성품에 맞는 기도를 드린 거예요.
4. 넷째는,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급하면 <자기 얘기>만 하지, 하나님 생각은 하지 않아요.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지 않고, 은근 슬쩍 넘어가려고 해요.
그러나 느헤미야는 먼저 <나의 죄>에 대해 솔직히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너무나 급하게 서둘러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우리가 요구하는 사항만 먼저 꺼내고 기도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만을 요구하고, 기다리는 우를 범하고 있어요.
7절을 보세요. “우리는 주께 매우 악하게 굴었습니다.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주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우리가 지키지 않았습니다.” (느1:7)
5. 다섯 째는, “느헤미야는 조상들의 죄도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가 나와요.
첫째는, 우리 조상들이 불순종함으로 [죄]를 지었고,
둘째는, “모세의 율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그 죄인중의 한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너희가 만약 죄를 지으면,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가운데로 흩어 버릴 것이고, 만약 너희가 내게 돌아와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 포로 된 사람들이 하늘 끝에 있더라도 내가 그들을 거기로부터, 불러 모아 내 이름을 위해 선택해 놓은 곳으로 데려올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느 1:8-9)
6. 여섯 째로,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며 기도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불순종하는 우리 민족은 다 흩어져서 포로가 될 것이고, 그러나 지금이라도 내 말을 순종하면 “너희들이 포로가 되더라도 내가 다시 불러다 모을 것이다.”라고 말씀했어요.
오늘의 말씀 중에서 <느헤미야의 기도>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고생이 많았으나 이제라도 하나님의 약점인 <우리를 지켜 주시고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세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점>을 붙들고 기도하세요.
그것은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했으니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다 해결 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께서 주의 큰 능력과 주의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들입니다. 주여, 이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주의 종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오늘 주의 종이 이 사람 앞에서 은총을 입고, 잘 되게 하소서. 그때 나는 왕에게 술을 따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느 1:10-11)
느헤미야는 아주 재미있고, 약은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감싸 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당신의 아들이기에> 우리들이 바라는 기도를 들어 주세요.” 라고 떼를 쓰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느헤미야는 “물론 조상의 죄도 있고, 나도 잘한 것은 없지만, 우리들을 긍휼히 보아서 용서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어요.
여기에서 우리가 응용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부부싸움을 할 때에 남편과 싸우지 마세요.>
사람하고 싸워봤자, 별로 소득이 없고, 그 사람이 별로 변하지도 않아요.
그럴 때에는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남편을 변화시켜서 당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바꿔 주세요. 그러면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것 보다 더 효과가 빠르고, 여러분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오히려 더 정확합니다.
오늘, 느헤미야의 <열정적인 기도>를 통해서 느헤미야는 <비전의 사람>으로 자신의 비전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느2/ 기도의 응답이 시작되다/ 느2;1-8/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오늘 느헤미야 두 번째 시간으로 <기도의 응답>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들으십시오. “기도의 응답은 되었다”는 <완료형>의 말이 아니고,
“기도의 응답은 되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진행형>으로 말씀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기도를 하긴 하는데, “응답이 내 마음대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내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즉, <하나님을 내가 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조정을 받으시는 분입니까?
아니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기도의 응답>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1. 첫째는, 기도하자 마자 <즉시 응답 받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얼마나 신나고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2. 두 번째는, 기도의 응답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응답이 되는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은 25세 때에 “약속의 씨를 주겠다”고 하나님이 직접 약속을 했어요.
그것도 “아브라함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직접 주시겠다‘고 약속한 사항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 날 때까지, 그 때로부터 <25년이 지난 후>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 이 말씀을 듣고 25년을 기다렸다>면 얼마나 지루했겠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홍해를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바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40년간이나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어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25년을 기다리는 훈련을 시키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순종하는 마음>을 만들어 주기위한 시간을 갖은 것입니다.
3. 셋째로, 또 아무리 기도해로 기도의 응답이 없고, 자신이 아닌 그 다음 대에 응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떻습니까?
놀랍게도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기도를 한지, 4개월이 지나서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기도의 응답>은 일시적으로 갑자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움직인 것이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 2장 1-3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 월>에 나는 왕에게 술 따르는 일을 맡았기에 술을 가져다 왕에게 따라 드렸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내가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네가 아프지도 않는데, 네 안색이 왜 그리 슬퍼 보이느냐?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무척 두려웠지만,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만수무강 하옵소. 제 조상들이 묻혀있는 성이 폐허가 됐고, 그 성문들이 불에 타 허물어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느2:1~3)
여기를 자세히 보면, 그냥 대화하는 스토리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마음이 찢어지고 아프지만, 하루 빨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읍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느헤미야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움직이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움직이지 않습니다>.
말이 쉽지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은 일이 안되면, 얼마나 조바심이 나서, 사람을 찾아다니고, 은행을 방문하여 대출부터 상담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자기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진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오지 않으면, "내게 이렇게 응답이 왔다"고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2장 1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술 따르는 관헌이므로 왕에게 술을 따르면서 대화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화중에 국정을 논하고, 정보를 전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 두 번째, 왕이 먼저 슬픈 기색을 발견하고, 그 이유를 왕이 물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기도한 결과 <하나님이 움직여 응답 된>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을 떠난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1장 1절을 보면 <기슬르 월>이라고 했는데, 이 <기슬르 월>은 11월~ 12월에 해당하는데,
2장 1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 월>”이라고 했어요. <니산 월>은 3~4월을 말하니까,
그러니까 느헤미야가 슬픈 표정으로 살아왔던 세월이 <4개월>이 지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다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을 보면 아주 환하고 영성이 높아 보이지만,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얼굴 표정에 모두 다 나타납니다.
사람이 참으면, 하나님이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움직이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왕이 먼저 느헤미야의 슬픈 기색을 느끼고 말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필요한 때에 <하나님>이 움직인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동하고 싶은데 말없이 참고 있으며, 말하고 싶은데도 꾹 참는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똑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에 <기도하는 모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열정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겸손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 입으로 까발리고, 자기의 수준을 넘어서서 <오버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지혜가 없는 사람>이지요.
<여러분의 얼굴>은 어떤 사람입니까?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이 100원짜리 동전과 같고, 술을 묵상하는 사람은 술꾼과 같아서 코가 빨간 사람이 있어요.
사람의 얼굴은 <자기의 마음>과 같아서, 얼굴에 거짓없이 나타나는 거예요.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왕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지만, 침묵하고 기다리고, 하나님이 움직이기 전까지 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왕이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느끼는 것은 느헤미야는 지혜롭고, 용기 있고, <준비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3. 느헤미야는 <지혜롭고, 용기 있고, 준비된 사람>입니다.
느헤미야 2장 4절을 보십시오.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 때 내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느2:4)
이제는 느헤미야가 급한 것이 아니고, 왕이 조급해 졌어요.
왕이 자꾸 물어 봅니다. 느헤미야는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말을 이어 갑니다.
<용기>라는 것은 꼭 필요할 때에, 꼭 필요한 한 말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신하는 왕이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신하는 왕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평소에 기도하면서 느낀 점을 청산유수로 말을 시작했어요.
<준비된 사람>은 언제, 어느 때나, 준비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침묵도 필요하지만, 때가 되면 조리 있게 말을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왕이 대답했습니다. 왕께서 기뻐하시고, 종이 왕께 은총을 입었다면,
왕께서는 저를 조상들이 묻혀있는 유다 당으로 보내, 그 성을 다시 건축하게 하소서”(느2:2:5)
이것은 엄청난 주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닥사스다 왕이 14년 전에 이것을 <캔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과거에 “성을 건축한다“고 사람들이 <모함한 사건>이 있었고, 이것은 <반란이므로> 중지시켰던 일인데, <그 결정을 뒤집어서 다시 건축하게 한다>는 것은 굉장히 곤란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비전과 리더십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깊이하면 비전이 생깁니다.
비전은 “책을 읽었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비전은 “생각한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비전은 오래토록 마음에 생각한 것을 피가 나도록 기도를 한 사람에게 생깁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있을 때에 <리더십>이 생겨요.
느헤미야를 보면 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리더> 입니다.
②느헤미야는 지혜롭고, 용기 있고, 준비된 리더십들 보게 됩니다.
왕은 이런 담대한 리더십을 보면서 느헤미야의 요구를 허락하게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왕 옆에 왕비도 앉아 있었는데,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다녀오려면 얼마나 걸리겠는가? 언제 쯤 돌아오겠느냐? 왕이 나를 보내기를 허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왕에게 기한을 정해 말했습니다. (느2:6)
“왕과 왕비가 있다.”는 것은 <공식석상>이라는 얘기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느냐?”라고 묻는 것은 “왕은 이미 마음에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거침없이 말합니다. 나는 언제 떠나서, 언제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말했어요.
<준비된 사람> 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나는 언제 돌아 와야 좋은지를 잘 모르겠다”라고 말하지요.
여러분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하나님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용기가 있고, 준비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무너진 성전을 <재건축 하는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고, 무너진 성전을 고치려는 마음 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왕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왕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유다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유프라테스 강 건너 총독들에게 보여 줄, 친서를 써 주시겠습니까?(느2:7)
이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는 앞으로 해야 할 프로그램이 꽉 차 있어요.
여러분, 무슨 일이든지, <비전이 있는 사람>은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합니다.
저도 일주일에 3번씩, 하루에 4시간씩 투석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오로지 교회만 생각하고, <교회가 변해야 하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25년이 지나다보니 교인이 많아졌고, 교인이 많아지다 보니 기성 교회처럼 변하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새롭게 변하게 할 수 있을까?
또 교인들의 마음에 열정이 사라지는데, "다시 불을 붙이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골돌히 생각을 하면,
그림이 그려져요.
<준비된 사람>은 기회가 주어질 때 <횡설수설>하지 않습니다.
왕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왕의 산림 감독 아삽에게 친서를 내리셔서, 성전의 옆문과 성벽과 제가 살게 될 집의 대들보 재목을 내 주도록 해 주십시오. 왕은 내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내 하나님의 은헤로운 손길이 내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느2:8)
느헤미야의 요구를 들어 보십시오. 꼭 필요한 사항만 나열하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성전 건축의 공이 자기 자신의 공이거나, 아닥사스다 왕의 공이 아니고, 그 공로는 바로 <하나님> 앞으로 돌립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잘 됐을 때, 그 공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의 공>이라고 우깁니다. 이것을 가리켜 <교만>이라고 합니다.
저는 25년간 온누리 교회 목회를 하면서 제일 먼저 [선교]에 목숨을 걸었어요.
① 복음중심의 교회, ② 성령중심의 교회, ③ 선교중심의 교회로 <교회목표>를 정하고,
지나치게 <선교>에 대해 강조를 했습니다. 이건 분명히 <정상>이 아니예요.
그러다 보니 25년 동안 놀랍게도 1,20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어요. 이건 기적이예요.
그리고 저는 청년들에게 비전을 품고, 하나님에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12가정으로 교회를 시작하는데, 저에게 청년 2,000명만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세계를 당신 앞에 드리겠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청년들이 메뚜기 떼와 같이, 몰려 왔습니다.
누가 보냈을까요? 그 사람들이 내 설교를 들으려 왔겠어요? 아니예요.
그 청년들이 교회 시설을 보러 왔겠어요? 아니예요.
그들은 <비전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거예요.
그들은 <비전 때문에>... 그들은 <비전을 바라보며>....
그들은 목숨 바치려고... 온누리 교회로 오는 거예요.
여기서 저는 2가지를 발견했어요.
1.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보았어요.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 고백> 이예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잘 다니는 거예요? 헌금을 해 준 것입니까?. 아니예요
2. 둘째로, 그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내 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임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믿음은 <끝까지 다 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내 하나님의 <은헤로운 손길>이 내 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이 가능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은혜의 손길이 내 위에 있었다.”는 것은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력한 확신>이요. 분명한 <비전>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미래가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현재처럼 보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울고불고 얼굴이 칠면조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확고한 믿음에 대한 신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내 위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신하지 않고 자꾸 의심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생겨야 하고,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어야 <비전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비전이 있어야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월은 흘러서 세상은 변했지만, 그러나 <비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성전건축의 비전을 가진 것과 같이, 우리의 비전은 더 강렬하게 빛을 발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비전이 살아 움직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느3/ 비전이 시작되다/ 느2:9~20/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느헤미야의 <비전이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자>는 것은 느헤미야의 생각이고, 그 생각은 <느헤미아의 비전>입니다.
여러분, 집을 짓는데 무슨 비전이겠습니까? 그러나 집을 짓는 것이 비전이 아니라,
집을 짓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 동안 수치를 벗어 버리는 자"는 것입니다.
기도는 비전을 낳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의 비전이 잉태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비전이 아니고, 생각에서 나오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나오는 것이 <비전>입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이것 저것을 요구했는데, 왕은 느헤미야가 요구한 것 보다도, 더 많은 것을 응답했어요.
2장 9절을 보십시오. "왕은 군대장교들과 기마병을 나와 함께 보내 주었고, 나는 이렇게 유푸라테스 강 건너 총독들에게 가서, 왕의 친서를 권했습니다."(느2:9)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풍성합니다.
시편 23편 9절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얘기했지, <내 잔이 간신히 찼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언제나<프러스+알파>를 더해 줍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한 것 보다도 더 많이 응답해 주십니다.
왕은 느헤미야를 보낼 때, 군대 장병과 기마병까지 함께 보내 주셨어요.
느헤미야는 그렇게까지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항상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 크리스찬들은 항상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비전은 드디어 시작됐어요.
그러나 하나님도 허락하셨지만, 그렇다고 세상이치가 탄탄대로는 아닙니다.
비전이 이루어지기에는 언제나 <방해세력>과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장애물을 통과 해야만 <비전>이 이루어 집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호론사람, 산 발랏과, 관리인 암몬 사람도 비야가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 족속의 재건을 위해 왔다는 말에 그들은 몹시 불편해졌습니다.(느2:10)
<좋은 일>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다 박수쳐 주지 않습니다.
“위대한 비전을 가졌다“고 해도, ”아무리 좋은 비전을 가졌다“고 해도, 반대 세력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반대하는 세력에게도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1. 첫째, <이해 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에게는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고, 언제나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합니다.
2. 둘째, 경쟁에서 뒤지거나, 수모를 당했을 때에 분노가 생겨서 자존심이 상하므로 반대를 합니다.
3. 셋째, 과거에 원한이 맺혀 있을 때에 반대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옳은 방법이라도 그들은 항상 한국의 야당과 같이 반대를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비전을 수행할 때에 "어떤 단계에서 위기가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예상을 합니다.
그럼, 반대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오랫동안 언제나 <앙숙관계>입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민족적으로, 서로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가 "파괴된 성벽을 재건하겠다"는 말을 듣고, 유대사람들은 <자기가 할일을 대신 빼앗았다>고 생각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를 합니다.
"성벽건축이 옳으냐?"는 원론적인 문제는 따질 필요가 없이, 그냥 반대로 일관합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요?
1. 첫째는, 기도입니다. 역시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에서 3일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던 중 밤에 몇 사람을 데리고 순찰을 나갔습니다. 나는 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예루살렘을 위해 할 일을 정해 두신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내가 타고 있던 말 외에는 탈 것도 없었습니다.(느2:11~12)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3일동안 가만히 있었어요.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예요.
먼저 정보를 얻고,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느헤미야는 금식하고, 기도하고, 가만히 묵상하고 있었을 꺼예요.
2. 둘째로, 그러던 중에 3일후 밤에 순찰을 했어요. 이럴 때에 중요한 것은 <침묵>입니다.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어요.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낮에 순찰한 것도, 아니고 밤에 몇 사람만 데리고, 순찰했어요.
느헤미야는 자신이 타고 갈 말 이외는 아무도 동행하지 않았어요.
"순찰을 나간다"는 말도 일체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은 과장된 말을 하거나, 불필요한 말을 해서 [화]를 부를 때가 많습니다.
3. 셋째로,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느헤미야의 <불굴의 용기>입니다.
성의 길이가 2~4km 정도의 거리이니까, 짧은 거리가 아닙니다.
파괴의 정도가 심각해서 성벽의 돌들은 골짜기로 굴러서 내려갔으므로, 요즘 같으면 크레인 과 같은 장비가 없으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끌어 올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또 한가지는 13년 전에 <성전을 재건을 하자>고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방해꾼들이 나타나서 <반역을 꾀한다>고 방해를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실패에 대한 상처가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의 상처와 좌절감 때문에, 실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시도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비아냥과 조롱이 섞인 참혹한 모습입니다.
그날 밤, 느헤미야가 말한 것은 <비참한 모습>과 <절망감>과 <좌절감>, 그리고 <다시는 할 수 없다 는 무력감>이 공동체 전체의 흐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큰 일을 할 사람은 입을 조심합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을 말하지 않습니다.
4. 넷째로, 이 때에 느헤미야가 발견한 것은 <비전의 선포>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후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고난은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소> 예루살렘은 폐허가 됐고, 그 성문들은 불에 타버렸소. 자 이제 우리가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오."(느 2:18)
느헤미야는 이렇게 비전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현실을 먼저 인정하자>는 것이고, 그런 <우리에게는 좌절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터놓고 솔직히 얘기하니까, 그때부터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의 장점은 <일하기 전에 동기부여를 먼저하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느혜미야는 일을 하기 전에 동기부여를 하고, 사람들을 설득했어요.
특히 <밀어 붙이기 식>으로 몰고 가지 않았어요.
또 <적당한 때>를 맞추어, 사전에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백성들의 [애국심]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심]에 호소를 했기 때문에 효과를 본 거예요.
[애국심]은 누구에게나 다 있고 거룩한 것이고,
"하나님의 수치를 어떻게 그냥보고 있을 것인가?"라는 [믿음]과 [신앙심]에 호소를 하니까, 쉽게 동의를 얻은 거예요.
느헤미야는 "이제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합시다. 우리들은 무력감에 빠져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일어나야 합니다."라고 웅변식으로, 설득력있게, 말했어요.
18절을 보십시오. "나는 또한 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내게 있는 것과 왕이 내게 말한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재건을 시작합시다. 이렇게 해 그들은 이 선한 일을 시작했습니다."(느 2:18)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2가지를 더 얘기했어요.
1. 첫째, “이 일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고, 왕도 허락한 일이니까,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불에 탄 성문을 재건합시다."라고 제안을 한 거예요.
3일동안 기도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밤에 현장에서 조사하고, 적당한 때에 차근차근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하니까, 희망을 갖기 시작했어요.
우리들도 비전에 대해 도전하는 마음이 있으면, 못할게 없어요.
북한은 못 먹어서 망하지 않습니다. 식량이 없어도 북한은 망하지 않아요.
그러나 비전이 없으면 망 합니다.
식량이 없어도 버틸 수 있지만, 비전이 없어지면 그 나라는 금방 망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호론사람 신발랏과, 정부관리가 된 암몬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무슨일을 할 셈인가?" 너희가 왕에게 반역하려고 하느냐?" 하고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였다"(느2:19)
2. 둘째, 비판을 걱정하지 마세요. 비판이나 모함은 언제나 있어도 괜찮아요.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볼 때에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보면, 밥인 거예요.
그러나 세상은 골리앗과 같고, 여리고 성과 같이 느껴지면, 승리할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아무리 강력한 군대를 만나도 승리할 수 있어요.
지금 저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병]인데. 그 [병]이 하나님보다도 더 크나요? 아니예요.
나는 반드시 일어날 꺼예요.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할 꺼예요.
이런 생각은 내가 오랫동안 아프면서 얻은 결론이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그냥 죽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다시 살아난 것은 이런 확고한 비전을 갖고 있기 때문이예요.
이런 반대세력에 대하여 느혜미야의 대답은 20절에 나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요. 우리는 그의 종이므로 이 성벽을 재건할 생각이오. 하지만 당신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주장할 권리나 명분이 아무도 없소"(느2:20)
느헤미야는 반대세력에게 2가지 이유를 들어서 확실히 설명을 했어요.
1. 첫째, 이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종인 우리의 의무와, 우리의 비전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반대를 해도,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너희는 몫도 없고, 권리도 없고, 역사적 명분도 없다"고 설명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 이유는 “너희는 명분도 없고, 권리도 없다"는 말이므로, <이미 게임은 끝난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많은 고난은 있겠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될 것이고,
또 그렇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질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에게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느4/ 성벽 건축이 시작되다/ 느3:1~31/ 말씀:하용조 목사님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서 금식하고, 애통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배웠습니다.
느헤미야와 같이 열정적으로,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비전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는 비전이 잉태되기를 축원합니다.
느헤미야에게 나타난 구체적인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너진 성벽을 다시 바로 세우고,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이 회복되는 비전입니다.
집을 짓는 것이 어찌 비전입니까?
“아무리 좋은 집을 짓는다“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건축을 비전으로 삼은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동안 하나님이 당한 수치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내가 하는 일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허무한 것입니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하여 영광을 받게 한다면, 그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인 느헤미야 3장 1절에서부터 31절까지를 그냥 읽어보면, "사람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럼, 여기에 나오는 <사람 이름>이 왜 중요할까요?
그런데 그 사람의 이름 속에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전을 고치면서 소수의 그룹이나 몇 사람의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았어요.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 즉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사람이나, 공직자이거나 일반시민이거나, 여자나 남자나, 어린이나 어른이나, 모두 다 참여하게 했다" 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손님으로 살면 안 됩니다.
그냥 손님으로 남의 집에 가면, 손님은 편하지요, 그러나 손님은 책임도 없고 아무런 권리도 없어요. 그저 손님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인으로 살지 않고, 평생을 손님처럼 사시는 분이 있어요.
늙고 병들면, 이런 사람들은 외로워집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 주인으로 사십시오.
이 민족과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어, 역사에 기여하며 사십시오.
어떤 분들은 마치 결혼이 목표인 것처럼 행동하고, 어떤 분들은 직장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지요.
성벽 건축을 할 때, 느헤미야의 선택은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 다 중요하므로 모두 다 활용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가 몇 사람만 움직이면 안 됩니다.
교회공동체도 여러 사람이 합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2. 둘째, 느헤미야의 아이디어는 혼자 참여하지 않고 가문이 모두 동참하게 합니다.
어른과 아이들, 남자와 여자가 모두 다, 참여하게 만들었어요.
마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은 그 어린 아이도 들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다 참여하게, 만들고 있어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일을 했지만, 여기서 느헤미야의 탁월한 결정은 [협동]이란 단어예요.
우리 교회가 커지다 보니까, 중요한 단어가 [협동]입니다.
서로가 협력해야 교회가 지탱할 수 있는 거예요.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교인들 각자가 참여하는 [자발성]이 있어야, 거기서 능력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참여해야 합니다.
결혼도 자기가 좋아야 결혼에 성공하지, “억지로 부모가 하라”고 한다고 엮어지지 않아요.
헌신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서 하기 때문에 <밤을 새워 일하고도> 즐거워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은 <자발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누가 “교회를 청소한다“고 그에게 월급을 줍니까? 공로패를 줍니까?
그렇지만 자발적으로 했기 때문에 그에게 능력을 줍니다.
<헌신>을 하면, 그렇게 사람을 변하게 만들어 줍니다.
느헤미야가 추진한 성벽 쌓는 일은 굉장히 큰 공사인데, 단시일 내에 할 수 있었던 것은 [자발성]과 [헌신]과 [협동심]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협동]이 안 되면, 모레성에 불과합니다.
전도서 4장 9~11절을 보십시오.
"하나보다 둘이 더 낫다. 둘이 함께 노력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
넘어지게 되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여서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불쌍한가?
또 둘이 함께 누으면 따뜻지지만 혼자라면 어떻게 따뜻해지겠는가?"(전4:9~11)
여러분 외톨이로 살지 마세요. 모래 알 처럼 따로 놀지 마세요.
어떤 사람이든, 둘이서 같이 [팀]을 이루시고, 협력하며 사세요.
그래서 <큐티 방>에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협력>해야 합니다.
3.셋째, 느헤미야는 수많은 사람들을 은사대로 일을 시켰어요.
느헤미야가 성벽 건축을 빨리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각자의 은사들을 활용하여 일을 시켰다” 고 했어요.
1절을 보면 대 제사장이 먼저 나와요
그 당시 대 제사장들은 어려운 일은 하지 않고, 까운만 입고 있는 사람이지만, 느헤미야는 그런 대 제사장에게도 일을 하도록 만들었어요.
5절을 보면, 귀족들이 나왔어요. 귀족들도 일하지 않는 사람이지요.
8절 이하를 보면, 금세공하는 사람과 향수 업자. 그리고 쇠 다루는 사람들은 물론, 목수도있고, 전문가도 있었겠지만 느헤미야는 “이 모든 사람들의 은사를 두루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 자기 은사를 사용해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동참했어요.
그러니까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성가대를 하지 않고 숨어있으면, 목소리를 버립니다.
사람은 한사람도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심지어는 [존재함]으로 은사가 있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이 <닉 부이 치치>입니다. 이 사람은 목사 아들로 태어나면서 양 팔과 양 다리가없이 태어났어도, 그는 존재합니다.
자살을 몇번이나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런 사람이 성인이 되어 수영도 하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해요.
이 사람을 보면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챙피하게 느낀다"고 해요.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지요.
4. 넷째, 느헤미야는 "일 의 역활을 분담했다"는 거예요.
3장 2절을 보십시오. “그 다음 구획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했고,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했습니다.(느3:2)
느헤미야 3장을 보면, <그 다음>이라는 단어가 29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그 다음>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그 다음 단계>라는 뜻이 아니고, <그 다음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구획은 내(A)가 맡고, 그 다음 구역은 네(B)가 맡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52일 만에 성벽이 건축된 것입니다.
성벽을 차례차례 줄을 서서 길게 건축하면, 사람끼리 부딪치는 일도 있고, 리더십끼리 싸움도 할 것이므로, 느헤미야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지역을 분배하여, 서로 부딪치지 않고 구획을 나누어 지혜롭게 일을 시킨 것입니다.
3장 전체를 보면, 느헤미야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성벽을 구획하고, 일을 나누어서 시켰기 때문에, 빨리 성벽을 쌓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각자 자기 맡은 구역에 있는 일만 열심히 했으니까, 52일 만에 성벽이 완성된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구획을 정해서 투입된 사람이 대 제사장과 제사장들입니다.
이런 높은 사람들은 가운을 입고, 손에 물을 안 묻히는 사람들인데, “놀랍게도 성벽 건축에 제일먼저 앞장을 섰다"는 거예요.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할만 하는 사람들인데, 성벽재건에 제일 먼저 앞장섰어요.
교회가 잘되려면, 목사님과 장로님이 제일 먼저 앞장을 서야 해요.
12절을 보십시오. “그 다음 규칙은 예루살렘 반쪽 구역의 통치자이며, 할도헤스의 아들인 살룽과 그 딸들이 복구했습니다"(느3:12)
여기에 <딸들>이란 말이 나와요.
그것은 "여자들이 참여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백성들이 기쁘게, 즐겁게, 참여했고, 한마디로 줄여서 표현하면, [자발성], [헌신], [협동], [은사], [역활분담]을 했던 요소들입니다.
5. 느헤미야가 잘한 것은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건축하라>고 시켰어요.
성벽은 한꺼번에 재건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그 가문에 따라서 성벽의 위치를 선정해 준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제갑의 아들 말기야는 문을 건축하여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설치하였습니다.(느3:14)
이것은 자기 집 앞마당에 성벽을 건축하라“고 한 말이나 같은 말이니까,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쌓았을까요?
“멀리 가서 일하라”고 하면, 입이 나올 법도 한데, “자기 집 앞에서 일을 하라“고 하니까 모든 은사를 동원하여 일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다시 한번 부탁을 합니다.
손님 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손님으로 살지 말고, <내가 주인공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요.
집안이 더러우면 손님의 마음이 두근거립니까? 아니면, 주인의 마음이 두근거립니까?
그건 주인의 마음이 더 두근거리지요.
우리 몸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 어디일까요?
여러분들은 제일 중요한 부분이 얼굴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것은 몸 안에 숨겨 있어요. 심장이나, 간장이나, 폐등은 너무나 중요하니까 몸 안에 숨겨 놓았고, 또 갈비뼈로 보호 하고 있어요.
이렇게 진짜 중요한 것은 안보이게 속에 숨겨져 있어요.
이와 같이 모든 몸 안의 장기가 협력하여, 유기체가 되었을 때, 건강이 지탱되는 거예요.
그렇게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을 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 영향력을 끼치면서,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지혜롭게 조절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느헤미야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축복을 누리십시오.
느5/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 느4:1~12/ 말씀: 하용조 목사
느헤미야의 기도와 비전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마음에 감동을 주었어요.
"일이 어려운 일이냐? 쉬운 일이냐?" 가 중요하지 않고,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 가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리 쉬워도<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그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일이 <하나님의 듯>인가를 먼저 알아야 하고,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힘을 합하고 마음을 모으면 “죽은 나무에 꽃이 피듯이” 살아나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느헤미야와 더불어 유다 백성들이 <의연한 결의>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느헤미야 4장 1~3절을 보십시오. "산발랏은 우리가 성벽을 쌓는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고 몹시 분개했습니다. 그는 유다 사람들을 조롱하며, 그의 동료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저 유다사람 약골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 그 성벽을 복원하자는 것이냐?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냐? 하루만에 공사를 끝내겠다는 것이냐? 그 곁에 있던 암몬사람 도비야가 맞장구치며 말했습니다.“그들이 무엇을 건축하든, 여우라도 한 마리 올라가면 그 돌 성벽이 허물어질 것이다.”...“(느4:1~3)
여기에 반대하고, 조롱하는 사람이 3그룹이 나옵니다.
1. 첫째는, 사마리아의 통치자였던 산발랏은 “자기의 통치 영역을 침범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반대세력의 주모자 입니다.
2. 둘째는, 무리중에는 꼭 맞장구 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이 암몬사람 도비아 입니다.
3. 셋째는, 함께 무리를 지어서 반대하는 사람이 아라비아 사람과 아스돗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박수치지 않습니다.
“민족을 위한 일을 한다”고 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대세력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요즘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반대 세력의 목소리가 더 커집니다.
그들이 분노하고 조롱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첫째, 그들은 감정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저 약골들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
성벽을 복원하겠다는 것이냐?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냐? 하루 만에 공사를 끝내겠다는 것이냐? 타버린 돌들을 저 흙무더기 속에서 원상복구 하겠다는 것이냐?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은 특징이 있어요.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감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세력은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으로 행동합니다.
2. 둘째, 그들은 조롱하고 비난하는데 교만합니다.
왜 그렇게 반대합니까?
그것이 “내가 저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를 하는 거예요.
3. 세 번째, 반대하는 내용은 그들이 화를 내는 것만큼 분노할 일도 아닌데, “분노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화내는 것만큼 내용이 없어요.
본인은 큰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자세히 보면 화 낼 일도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까?
놀랍게도 느헤미야는 그들과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므로 반대하는 사람과 다투지 않고, 기도를 했어요.
좀 더 솔직히 표현하면, 하나님에게 고자질을 했어요.
반대하는 사람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 <기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럴 때 느헤미야는 오히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느헤미야는 시작할 때도 기도를 했고, 어려울 때도 기도를 했어요.
오히려 그는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찾았어요.
4~5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우리가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욕이 그들에게 되돌아가게 하소서. 그들이 포로가 돼 남의 땅으로 끌려가게 하소서. 그들의 죄악을 덮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주 앞에서 지우지 마소서. 그들은 우리 앞에서 주의 얼굴에 욕설을 퍼부었습니다.(느4:4~5)
느헤미야의 기도는 확실했어요.
조롱받고 비난받은 만큼, 명확하게 기도했어요.
우리는 여기서 약간의 갈등을 느낍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은 좋은데, 기도의 내용 중에서 반대자를 저주하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세력을 저주하는 일이 <옳은 일>입니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저주까지 한다>는 것은 좀 심한 것이 아니냐?“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시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1장에서 ~150장까지 보면서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너무나 비난을 받아서 견딜 수 없는 일을 당했기 때문에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했어요.
예를 들어서 시편 3장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내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주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턱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를 부숴 주소서"라고 심한 표현까지 서슴없이 말했어요.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이렇게 "악인의 턱을 치고 이(치아)를 부숴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정한 특징이 있어요.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는 <고난>이 있고, <모함>이 따릅니다.
믿음을 가지면 고난이 분명히 따릅니다.
온실에서 자라는 나무와 달리, 광야에서 자라는 나무는 거친 비바람을 이겨내야 합니다.
믿음이 이럴 때는 응답을 빨리 받지만, 믿음이 자라서 성인이 되면 하나님도 믿음이 성장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아주 어렸을 때에는 아이가 울 때에 엄마가 즉시 반응을 나타내는 원리와 같은 거예요.
누가 뭐래도 내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으면 되는데,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세상에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많이 있어요.
제 생각에는 상처가 오면 안 받으면 되는데, 자기가 그 상처를 받으니까 상처가 생기는 거지요.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No thank you]라고 말하며 받지 마세요.
시편에 나오는 <탄원 시>나 <저주의 시>에 특별한 것이 있어요.
그 원인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는 괜찮은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수모를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수모를 당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기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느헤미야도 마찬가지 예요.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영광을 가리니까> 그렇게 난리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참을 수 없다>고 했어요.
느헤미야 4장 6~8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한 결과, 우리는 성벽 전체를 절반 높이까지 복구했습니다.
그러나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이 복원돼 허물어진 부분들이 점점 메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음모를 꾸미고, 예루살렘에 와서 싸우고, 훼방을 놓으려고 했습니다(느4:6~8)
느헤미야와 유대 백성들이 기도하고, 마음을 모았을 때, 성벽이 순식간에 50%나 올라갔어요.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놀랍게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어요.
내 마음이 불가능한 것이지, 하나님의 일은 기적같이 일이 진행됩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유다 백성들은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한편으로는 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격이 계속해서 들어오니까 방어했어요.
4장 9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밤낮으로 경비병을 세워
위협에 대비했습니다(느4:9)
그들은 한편으로는 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비병을 세워서 공격하는 사람들을 막는 일 을 했어요. 즉,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했어요.
이것이 크리스찬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만 하면 됩니까?
가정도 돌보고, 제 아이들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기도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세상은 누가 돌봅니까?
기도하지 않고 세상 일만 하면,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생활하는 직장에서 열심히 근무하면서, 이 세상이 깨끗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의가 살아나도록 해야 하는 일이 우리가 할 역할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은 여러분의 <선교지>입니다.
여러분은 예외 없이 그 직장에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파송된 선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군대의 공격을 받았어요. 그 때 모세는 아론과 훈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를 했어요.
모세가 두 손을 높이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졌어요.
그것이 모세의 역할이었어요.
이와 같이 교회의 역할이 바로 <기도해 주는 것>이예요.
온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서 싸울 때에 <악에게 지지 말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전쟁의 운명이 엇갈려 집니다.
기도하면 승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패배합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비경력을 세워서 성벽을 지켰어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세력이 공격하는 것이 무섭지 않고, “오히려 내부의 갈등이 무서운 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일 어려운 공격은 내부에서 반대자가 있을 때에 견디기 어렵습니다.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기면 더 어려워 집니다.
4장10~1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할 일은 아직 산더미 같은데, 일꾼들이 힘이 다 빠져버려 우리가 성벽을 쌓을 수 없다>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또 우리의 원수들은 <그들이 알아채기 전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들어가서 그들을 죽이고, 그 일을 중단시켜야 겠다.>라고 말했습니다.(느4:10~11)
원망과 불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공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3일이 지난 후에 "물이 없다"고 불평을 했어요.
이것은 기적을 보고도 원망과 불평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부에서 불평이 나왔어요.
할일은 많은데, 일꾼이 힘이 빠져서 일을 할 수 없는데, “이를 중단시키겠다”고 협박을 했어요.
믿음있는 사람은 협박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협박소리가 크게 들려요.
여러분! 세상에 근심이 많은 것은 상대적으로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태풍이 불더라고 믿음있는 사람은 "이 집이 날라가도, 하나님은 나에게 더 좋은 집을 주겠지!" 라고 생각을 해요.
12절을 보세요. "그들 가까이 사는 유다 사람들도 우리에게 와서 그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치려고 한다고 열 번씩이나 말했습니다."(느4:12)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유다사람들도 협박소리가 크게 들렸다“는 거예요.
"가졌던 믿음마저도 흔들린다"는 말이예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거예요.
그러므로, 먼저 집안 단속을 잘 하세요. 그래야 이길 수 있어요.
병이 낫는 것도, 믿음으로 고쳐주는 것이고, 큰일을 해내는 것도 무서운 것은 내부의 갈등입니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끼리 결속을 해야 승리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것이 또 있어요.
"선과 악은 교차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드라마처럼 선과 악이 교차하여> 벌어집니다.
모든 드라마의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인공이 죽으면 그 드라마는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죽을 듯, 말듯, 하면서도 또 살아나는 거예요.
선과악은 인생의 드라마처럼 그렇게 교차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그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단역으로 사시겠습니까?
단역은 죽어도 되고, 없어져도, 드라마는 계속되는 거예요.
소문은 크게 퍼져요.
소문은 누가 뭐라고 해도 급속도로 퍼집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사실과는 달라요.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 하세요.
그리고 "항상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세요.
<태양은 안 보인다>고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먹구름 속에 가려져 있는 거예요.
구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구름은 잠시 지나가게 되어있지, 계속 그대로 있지 않아요.
여러분! 터널을 지나가면 항상 어두운 것이 아니고, 잠시 터널 속을 지나는 거예요.
하나님은 세상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역사의 주인공 입니다.
느6/ 두려워 말라/ 느4:13~23/ 말씀:하용조 목사님
느헤미야는 외부세력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굳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열정을 보입니다.
우리들은 어려움이 찾아오면, 먼저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거나 돈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먼저 찾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잘한 것은 아무리 반대세력들이 몰아세워도 먼저 기도하고, 오로지 성벽건축에만 신경을 씁니다. 느헤미야는 비전이 분명하니까, 그 어떤 세력들이 방해를 하여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4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가문별로 칼과 창과 활로 무장시켜 성벽 뒤에 낮고 넓게 펼쳐진 곳에 배치했습니다" (느4:13)
느헤미야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가문별로 사람들을 재배치하여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반대 세력들의 공격에 대비한 대열을 구축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고 나서 느헤미야는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니까, “백성들은 겁을 먹고 두려움에 쌓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귀족들과 관리들과 나머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위대하신 여호와를 기억하고, 여러분의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가정을 위해 싸우시오"(느4:14)
지도자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잘 점검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겉으로만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진짜로 좋아서 따르는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백성들의 문제는<두려움>을 갖고 있었어요.
세상에 제일 두려운 것은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두려움>입니다.
자신감이 없어지면 자기가 하려는 것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 해 지고, 방어적이 되어, 현실에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또 다른 <두려움>의 대상이 있었어요.
그 대상은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또 사람들은 대상이 없는 두려움도 있어요.
그것은 <인생자체>가 두렵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없을 때는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없을 때는 <두려움>을 가집니다.
현대인들은 내가 아무리 “좋은 직장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두려운 것>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혼자>라고 생각하면, 더 두려운 법입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방어적으로 만듭니다.
이렇게 두려운 사람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어요.
그러나 믿음이 약해지면, 그 두려움이 다시 살아나요.
느헤미야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리더십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챘어요.
리더십의 덕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중의 심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알았다"는 의미이므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고, 두려움에서 벗어 나야 합니다.
대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남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두려움에 쌓인 사람은 허공을 쳐다보고, 눈동자가 흐려져 있어요.
그런 사람이 직장을 잃으면 "이제부터 나는 뭐 먹고 살지?"
"이제 직장을 쫓겨났으니 나는 어떻게 살지?"라는 두려움에 쌓인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해요.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경우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새 직장을 주실꺼야!"라고 기대를 갖고 자신감 있게 표현해요.
오히려 "하나님은 나에게 더 좋은 직장을 주실꺼야!"라고 생각하며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문이 닫혀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요.
그러나 하나의 문이 닫혀 있으면, 또 다른 문이 열려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첫째, 반대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기도하며 일하세요.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은 그 걸 카버하려고 큰소리를 치는 법이요.
그러나 언제나 조용, 조용히 얘기하는 사람들은 <속이 꽉 찬 사람>이예요.
준비된 설교를 하는 사람은 조용, 조용히 얘기하고, 준비가 부족한 설교자는 큰소리로 말하는 거예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과시하는 사람은 내용(알맹이)이 없어요.
사람들은 두려움을 계속 묵상하면, <두려움>에 빨려 들어가요.
2. 두 번째로 느끼는 것은, 여러분의 형제들이나 가정을 위해서도 열심히 일하고, <반대 세력이 나타나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모든 문제에 자신이 없으면, <너는 네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가정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선언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그들의 전략을 다 알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적들을 이미 하나님이 꺽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이미 졌어요. 예수님은 이미 승리했어요.
더 이상 마귀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마귀는 그대로 물러 갈수 밖에 없어요.
우리가 강하게 나오면, 마귀는 그대로 물러 갑니다.
마귀를 물리쳐야 우리가 세상을 이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지요.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가 그들의 계략을 알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계획을 꺾으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모두 성으로 돌아와 각자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느4:15)
여기에서 두 가지가 나와요.
1. 첫째,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한다" 는 말은 <이미 하나님이 승리하셨다>는 얘기입니다.
2. 둘째, 네 가정을 위해서라도 네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내가 가족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무엇이냐?라는 얘기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날부터 내 부하들의 절반은 그 일을 계속하고, 나머지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로 무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은 유다의 모든 백성들 뒤에 진을 쳤습니다"(느4:16)
이미 그들의 얼굴은 승리의 기쁨으로 환희에 가득 차 있습니다.
기(氣)가 살면, 모든 일이 잘되고, 기(氣)가 죽으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입니다.
세상에서는 기(氣)라고 얘기하지만, 교회에서는 이것을 <성령>이라고 얘기해요.
그러니까 성령이 충만하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성령이 없으면 모든 일이 메말라서 어렵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중요하고, 그런 <성령>을 받고, <성령충만>하게 지내야 해요.
사람들 중에서 절반은 성벽을 쌓았고, 절반은 경비를 서면서 방어를 하고 있었어요.
17~18절을 보십시오. "건축 자재를 실어 나르는 사람들은 한손으로는 일을 하고, 다른 한손으로는 무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벽을 쌓는 사람들도 각자 칼을 허리에 차고 일했습니다. 다만 나팔을 부는 사람만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느4:17~18)
옛날 포클랜드 전쟁이 있었어요.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싸움에서 영국의 선장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므로, "한 손에는 성경책을 쥐고, 또 다른 손에는 지휘봉을 잡았다"고 해요.
그와 같이 성벽공사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성벽공사와 공격에 대비한 경계를 철저히 대비하였어요. 그러나 딱 한사람만 예외였는데, 그는 느헤미야와 같이 있는 <나팔수> 입니다.
19~20절을 보세요. "그때 내가 귀족들과 관리들과 나머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이 크고 방대하기 때문에 일하는 지역이 넓어, 우리는 성벽을 따라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디에 있든지 나팔소리를 들으면 우리 쪽으로 집결하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새벽 동틀 때부터 별이 뜰 때까지 일을 계속했고, 백성들의 절반은 창을 들고 일을 했습니다(느4:20~2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내가 싸우면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어요.
그러나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싸우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신앙>이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을 해도 그것은 <당신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이 하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그 일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들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근로시간 8시간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아침 동틀 무렵부터 저녁 별이 뜰 때까지 일을 계속했어요. 이 말은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의문이 하나 있어요,
성벽을 쌓는 52일 동안 "그들을 뭘 먹고 살았나요?"라는 질문입니다.
그들의 생계는 누가 책임졌나요?
바로 <하나님>이 책임졌어요,
이 사람들은 성벽을 쌓는 일이 너무나 급하니까, 생계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다 먹여 주셨어요. 성경에 이런 언급은 없지만, 저는 분명히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와 같은 비슷한 예로,
제 누이동생 남편이 치과 의사인데, 중국 조선족으로 선교하러 떠났어요.
떠나려는 동서에게 제가 물었어요?
“어떻게 할려고 그런 결정을 했나요? 그랬더니 그 분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으로 믿고, 저는 그냥 갑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제가 당황하여 "아 ~그렇지요. 하나님이 하실 일은 역시 하나님이 하시겠지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동서가 해야지요?“라고 되물으니까, "나는 그냥 떠날래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떠났어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돌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 사람은 믿음으로 떠나 갔지만, 남아 있는 일은 <모두 다 우리가 책임져야 해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의 대답이 신기해요.
그 후에 아이들도 등록금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을 때마다, “누군가 그에 해당하는 돈을 가져 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부모한테 아예 기대를 안 해요.“
“그러니까 저희들의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세요?”라고 대답했어요.
22~23절을 보십시오."그때 나는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각 사람과 그 부하들은 밖에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지내면서 경계를 서고, 낮에는 일꾼이 되세요. 나도 내 형제도, 내 부하도, 나와 함께 경비하는 사람도 옷을 벗지 않았고, 각자 무기를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 물 마시러 갈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느4:22~23)
여기를 보면 하나님의 리더십에 관한 얘기가 나와요
1. 첫째, <믿음>이란 그렇게 무모한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follow ship 에게 "밤에는 경계를 서고, 낮에는 일꾼이 되세요"라고 말했어요. 이것은 <헌신>을 강요하는 얘기입니다.
마태복음16장 24절은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16:24)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 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예요
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2:20)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나, 죽으나, 주님만을 위해서 사는 [삶]인 거예요.
김사무엘 목사님도 이라크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돌아 가셨어요.
그 분은 떠나가기 전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묵상하며, [꿈]을 꾸었어요.
자기가 죽거든 이 성결구절 (갈2:20절)을 <자기의 묘비에 적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또 지도자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지도자는 팔을 걷어 올리고, 같이 밤을 지세고, 앞장서서 같이 솔선수범하여 고생을 같이 해야 해요.
골리앗과 다윗이 부딪쳤을 때 키가 상대가 됩니까? 몸집이 비교가 됩니까?
그래도 어린 다윗은 <용기를 갖고> 나갔기 때문에 6척 장신을 넘어뜨린 거예요.
이런 리더십이 <솔선수범>입니다.
이와 같이 느헤미야도 "밤새도록 성벽을 쌓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에 이런 리더십이 필요해요.
지금 우리 교회에도 이런 리더십이 필요해요.
목사님도 이런 느헤미야와 같은 마음으로 일하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무슨 일이든지 목숨을 걸고 일하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주는 분이니까, 이렇게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에 도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에 감당할 수 없는 축복과 일들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느7/ 내부의 원망을 조심하라/ 느5:19/ 말씀: 하용조목사님
느헤미야가 유다백성들과 함께 성벽을 쌓아 올릴 때, 그들에게는 <비전>과 <믿음>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믿음과 비전과 희망>이 있었기에, 열심히 성벽을 쌓았습니다.
세상에 [할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나 [할일]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살면서 자기의 목표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는 것이 아니고, “해야 [할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 입니다. 느헤미야에게는 <외부의 공격>이 있었기에 힘들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있으므로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에 별이 뜰 때까지 열심히 일했어요.
느헤미야는 어려울 때마다 기도를 했어요.
우리도 억울하면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외부세력의 공격은 그렇다 치고, 더 심각한 공격은 <내부세력>의 공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을 계속 했으므로>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은 40년을 뺑뺑 돌린 거예요.
왜 하나님은 그들을 뺑뺑 돌렸을까요?
그것은 순종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열심히 일을 했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뺑뺑 돌릴까요?
나에게 즉시 응답을 주어도 되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생각해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내 자신>입니다.
사탄은 믿음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탄은 기도함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원망과 불평은 어쩔 수 없어요.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은 이럴 때는 이해하시겠지?"라는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은근슬쩍 그냥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게 문제예요.
느헤미야 5장 1~5절을 보십시오.
"그때 백성들이 자기 아내와 함께 자기 지도자들에게 불평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자녀가 많다. 우리자신을 비롯해서 많은 식구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곡식을 얻어야 한다"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기근동안 곡식을 얻기 위하여 우리 밭과 우리 포도원과 우리 집을 저당 잡혔다"라고 말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세금 낼 돈을 꾸기 위해 우리 밭과 포도원을 잡혔다. 우리는 우리 친척들과 한 몸이요. 한 핏줄이다. 보라, 우리자식들은 그들의 자식이나 다름없는데, 우리가 우리자녀들을 종으로 내 주게 됐다. 우리 딸 가운데 일부는 이미 종으로 팔렸고, 우리 밭과 포도원이 남의 것이 됐으니, 우리는 그들을 속량할 힘이 없다"(느5:1~5)
이런 [일]들은 있을 수 있는 [일]이예요.
이 [일]은 그 시대만 있는 게 아니고, 지금도 있을 수 있어요.
이 [일]은 한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어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런 말들이 나오는 법이예요.
1절을 보면 "백성들이 아내와 함께 불평하는 소리가 있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부부가 지도자에게 원망했다”는 말이고, 쉽게 말하면, “그 일로 부부가 싸웠다"는 말입니다.
남편은 <비전>으로 살고, 아내는 <현실>에 매어 살아요.
만약에 "집에 쌀이 떨어졌다"고 하면, 남편은 "지금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서 쌀이 문제가 됩니까? 쌀이 없으면 참아야 하지요?" 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에만 중요하게 여기고, 아내는 <현실적>이므로 "쌀이 떨어졌다"고 남편과 다툽니다.
그래서 부부싸움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포도원을 저당 잡혔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성벽을 쌓는 52일 동안 남자들은 돈을 벌어 오지 않았으니까, 쌀이 떨어졌을 테고, 아내들은 "참다 참다 할 수 없이 남편에게 얘기했다."는 거예요.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다 맞는 얘기예요.
그러나 그 당시의 히브리 사람들은 자기네끼리 돈은 빌려주되, 이자를 받지 않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돈을 꾸어줬다고 해도 이자를 받을 수 없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포도원을 저당 잡히고 쌀을 구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이들은 너무나 생활이 어려우니까 자녀들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다보니, 불만이 생기고 화가 난 거예요.
이런 상황은 느헤미야 시대도 그랬지만, 요즈음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이 쌓이고, 그 불만을 폭발하는 거예요.
6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원성과 탄식을 듣고, 나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느5:6)
느헤미야의 반응은 [화]가 났어요.
그 마음속에 <거룩한 분노>가 터졌어요.
<분노>에는 2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의 분노>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사람의 분노>입니다.
정의도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정의가 있고, 또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정의가 있어요.
예수님의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보고 화를 낸 것은 <거룩한 분노>입니다.
하나님이 오죽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했겠어요.
하나님의 분노는 결국 <심판>으로 이어져요.
여기서 <우리들의 분노>를 살펴보면 ① 첫째, 데모를 하며 함께 소리를 질러요.
② 분노를 표출하며 화를 내요. ③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항의해요.
④ 그리고 이들의 요구하는 것은 결국에 <돈>이예요.
이들의 주장이 꼭 옳은 것도 아니고, 전혀 근거 없는 얘기도 아니고, 일부 이해는 가요.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속으로 이것들을 곰곰히 생각하고 나서, 귀족들과 관리들을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각기 자기 형제에게 폭리를 취하고 있소, 나는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큰 집회를 열고, 그들에게 "우리는 이방민족들에게 팔려갔던 우리 유다의 형제들을 도와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했는데, 지금 여러분은 형제를 팔려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할 말이 없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느5:7~8)
여기서 느헤미야가 "곰곰히 생각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기도해 보니, 이것은 유다 백성들의 잘못이 아니고, 어느 사회나 귀족들과 관리들이 있는데, 그들이 백성들을 착취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못은 귀족과 관리들이예요.
귀족들과 관리들이 직책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예요.
느헤미야는 <기도하고 준비한 얘기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분석한 거예요.
여러분! 기도하고 준비한 얘기는 사람들이 거역하지 못해요.
교회에서 싸우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 뒤에 <돈>이 개입되어 있어요.
우리가 왜 싸웁니까? 그것은 <영적권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으니까 <영적권위>가 땅에 떨어져서 존경을 하지 못해요.
결국 이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기에, 엄격히 말해서 <율법에서 금하는 일을 했기에> 귀족들과 관리들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느헤미야는 큰 집회를 열어서 공개적으로 말했어요.
우리가 종살이 할 때에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구원해 주었는데, “당신들이 하는 일은 바벨론이 하는 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자기의 직책과 권력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는 사람들은 <귀족과 관리들> 입니다.
5장 9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내가 계속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일은 옳지 못하오. 이제 여러분이 이방 민족들의 비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소?(느5:9)
여기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와요.
가난한 자에게 눈물을 빼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를 짓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 예요. 내 주변의 억울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세요.
병자를 도와주고, 외로운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일이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이예요.
출애굽기 22장 25절을 보십시오. "네가 네 곁에 있는 가난한 내 백성가운데 누구에게 돈을 꿔 주었다면 너는 그에게 빚쟁이가 되지 말고, 이자도 받지 마라. 네가 만약 담보물로 네 이웃의 외투를 가져왔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 주어라(출22:25~26)
레위기 25장 3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가난해져서 네 가운데서 먹고 살기가 어렵다면, 너는 그를 먹여 살려야 한다.
나그네와 임시 거주자가 네 환대를 받으며 함께 하듯이, 그는 너와 함께 살아야 한다"(레25:35)
이 말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는 말 입니다.
저는 이스라엘 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가난한 어린이들이 옷자락을 붙잡고 "1달라를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들이 유태인인지? 팔레스타인인지가 구별이 잘 안 되요.
그런데 그 가이드는 “확실히 안다"고 해요. 그러면서 구걸하는 아이들 보고, "저 애들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분명히 <아랍사람>입니다"라고 단언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연을 물어보니, "유태인은 거지가 없습니다."
“유태인 사회는 거지를 용납치 않아요. 다 주변에서 먹여 줍니다.”
“거지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주변에서 먹여 살리기 때문에 <거지 노릇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돈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먹여 주기 때문이랍니다.
레위기를 보십시오. 26장 36~37절을 보면 "그에게 어떤 종류의 이자도 받지 말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리하면 네 형제가 너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그에게 돈을 빌려 주더라고 이자를 받지 말며, 식량을 빌려 주더라도 이득을 취하지 말라(레26:36~37)
이 말은 "사채놀이를 하지 말라"는 말 이예요.
돈을 빌려 주더라도, 이자를 받지 않는 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주는 방법입니다.
경주 최 부자가 아랫 사람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경주 최 부자는 "자기가 사는 곳에서 백리 안에는 굶어죽은 사람이 없어야 하라"는 것이 <최 부자의 철학>이예요.
경주 최 부자는 <이런 정신으로 300년 동안 이어져 졌다>고 해요.
이렇게 <가난한 자를 돌봐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예요.
느헤미야는 처음에는 <성벽재건>의 일을 했지만, 이제는 <사회개혁>을 부르짖어요.
공정한 사회가 되도록 사회를 개혁하고, 그 다음에는 <종교개혁>을 시도 해요.
신명기 23장 20절을 보십시오. "이방 사람들에게는 이자를 물려도 되지만, 네 형제에게는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래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다(신23:20)
나는 여러분에게 <복 받을 사람이 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내가 만든 복>은 다 없어지는 거예요.
정치란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권력이란 돈과 명예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지도층이란 권력과 돈과 명예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류층에 계시는 분들은 조심하세요.
이명박 대통령의 요즘 화두는 <공의로운 사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걱정입니다. 자기에게 헌신했던 사람은 모두 다 해당되어 정리해야 하고, 특혜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어야 해요.
느헤미야는 불편하지만, 그런 불편한 진실을 말했는데도 “이스라엘 귀족들이 모두 다 받아들이고 순종했다"는 거예요.
이게 <느헤미야의 영적 권위>이고, <느헤미야의 리더십>입니다.
느헤미야는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어요.
느헤미야는 <겸손의 리더십>입니다.
14절을 보면, "나는 유다 땅 총독으로 임명되던 해, 곧 아닥사시스 왕 20년 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 총독으로 있었지만 나와 내 형제들은 총독의 몫으로 나오는 녹을 먹지 않았습니다."(느5:14)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나 월급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리더가 이렇게 하면, 따르는 자들이 순순히 따라와요.
<Fellow ship> 이 없으면, <리더 ship>도 없어요.
저도 트지니티 신학대학교 총장이 되었을 때, 월급을 받지 않았어요.
“저는 교회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데, 왜 또 이중으로 급여를 받아야 하나요?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게 아니예요.”
15절을 보면, "그러나 내 앞에 있던 총독들은 백성들에게 힘겨운 세금을 물리고, 음식과 포도주 뿐 아니라, 은 40세겔을 갈취했습니다. 심지어 총독들 밑에 있는 사람들도 백성들은 착취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느5:15)
과거의 총독들은 자기 몫을 받았고, 더 많이 벌기 위해 "백성들을 갈취하고, 또 착취했다"는 말 이예요.
<과거의 총독>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과거의 관행>이란 이름으로 착취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위기가 닥쳐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관행을 깨지 않으면 개혁은 없습니다.
그런 관행을 깨는 일은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는 일과 같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게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물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느헤미야 자신을 얼마나 어려운 일 입니까?
그는 <청빈>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범을 보인 분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에 이런 <절제된 청빈>이 공무원 사회에 퍼지기 바랍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제가 이 백성들을 위해 한 <선한 일>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느5:19)
개혁은 강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개혁은 끊임없이 계속될 때 <개혁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마지막으로 한 기도는 "하나님이여!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느8/ 52일 간의 성벽건축/ 느6 :1~19/ 말씀: 하용조 목사님
느헤미야 6장 15절을 먼저 보십시오.
"이렇게 해 성벽건축이 52일 만인 엘룰월 25일에 끝났습니다."(느6:15)
여기에 나오는 <엘룰월>이라는 말은 요즘 8-9월에 해당되는 <건기>입니다.
만약 성벽건축이 <우기>때에 시작되었다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 성벽 건축에 쓰인 돌은 사람이 혼자서 움직일 수 있는 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섭씨 40도 이상의 날씨가 계속되어, 숨쉬기도 어려운 무더운 날씨입니다. 그런데 52일 만에 성벽을 <3km나 되는 먼 거리를 완성했다>는 거예요.
목표가 없는 사람은 어떠한 일도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비전>이 생겨요.
제 생각에 예수를 믿었는데 <비전>이 없다면, 그것은 잘 못 믿은 거예요.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은 <비전>이 아니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이 <비전>입니다.
예수 믿으면 우리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느헤미야는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했어요.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1.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예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없었다면 그 일은 불가능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겠지만, 하나님이 아니면 못하는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나에게 나타났다면> 그 일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저는 건강하지 않지만, 자꾸 생각하면 이제는 병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저도 이제 나이가 60이 넘었지만, 내 인생을 하나님이 다시 흔들어 놓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2. 그것은 느헤미야의 기도가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어떤 일이라도 <비저너리>가 목숨을 걸고 추진해야 <그 일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느헤미야도 목숨을 걸고 일을 했기에 가능했던 거예요.
우리는 내가 살던 동네를 떠나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나 [믿음]은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해요.
[믿음]은 내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믿음이 생겨요.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믿음이 더 좋아요.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왔기> 때문이지요.
3. 셋째는 아무리 좋은 지도자가 있어도 follow ship (따르는 자)가 있어야 가능해요.
<따르는 자>가 없는 사람은 [일]을 할 수 없어요.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헌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은 열정을 바쳐서 헌신했어요.
교회는 <열정 공동체>예요. 교회는 습관적으로 일하는 <조는 공동체>가 아니예요.
졸거나, 습관적으로 일하면, 그건 뭐가 잘 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거예요.
연애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연애할 때에 <그 사람만 보면 흥분이 되고>
<그 사람만 보면 스파크가 튀어 불이 붙어야> 연애를 하는 거예요. 맹맹하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요. 또 연애하면서 불이 붙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아요. 순식간에 불이 붙어야 해요.
4. 네번 째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반대자들이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반대자들의 <박해와 음모>가 있었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더 열심히 성벽을 쌓았다“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자들이 있었으니까 ① 파수꾼을 세우게 되고, 반대자가 있으니까
② 성벽건축에 자극제가 된 거예요.
시편에 보면 <주님께서 내 앞에 원수를 두셨다> 는 거예요.
성도 여러분, 우리 곁에 불편한 사람이 있기에 더 자극을 받아서 더 열심히 일하게 되는 원리이지요.
여러분들도 주위에서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히려 그분에게 밥을 사주고, 감사하게 여기세요.
<하나님의 사건>에는 언제나 반대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하나님의 사건>에는 언제나 반대자와 음모가 있기 마련이에요.
구약에 보면 홍해 바다를 건널 때에도 단번에 통과한 게 아니예요,
10번의 재앙을 거치면서 어렵게 건넜어요.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하고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서 시험을 받았어요.
1) 첫 번째 시험은 예수님도 40일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요? 마귀는 그 배 고픈 것을 이용하여,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조롱하는 마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어요.
2) 두 번째 시험은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 내리라"고 요구하고,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천사가 와서, 깃털처럼 보호해 주실 것이다"라고 유도합니다.
3) 그리고 둘 다 안 통하니까, 마귀가 "이제는 나한테 와서 절을 해라.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이 세상의 명예와 권세, 두 가지를 모두 다 주겠다"고 회유하면, 안 넘어 갈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모두 다 거절했어요.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그런 후에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거예요.
그러니까 소경이 눈을 뜨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이 생긴 거예요.
성벽 재건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시험이 찾아 왔던 거예요.
밖으로는 ①삼발락과 도비야의 공격이 있었고, ②안으로는 귀족들의 부패가 시작되어,
③백성들에게 이자를 받고, ④포도원과 밭을 저당 잡히고, ⑤아들과 딸들은 노예로 팔려가니까, ⑥백성들 사이에 원망과 불평이 쌓인 거예요. 이게 무서운 거예요.
느헤미야의 <영적 리더십>이 이런 <불평과 원망>을 잠재웠어요.
느헤미야는 먼저, 상류층 백성들에게 야단치며 더 이상 이자를 받지 말고, <같은 유다백성들 끼리는 돈 거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적들이 공격해 오는 1차 공격이 <물리적인 공격>이라면, 또 다른 방법으로 공격해 옵니다
<물리적인 공격>이 실패를 하니까, 적들은 그 다음에는 공격의 방법을 바꾸어서, <심리적인 공격>이 시작 됐어요.
2. 두 번째로, <심리적인 공격>이 시작됩니다.
6장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성벽을 다시 건축해 허물어진 부분들을 남김없이 다 메웠다는 것을 신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원수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아직 성문의 문짝을 달지 못했습니다. 그때 신발랏과 게셈이 이런 전갈을 보냈습니다. "오시오 우리가 오노 평지의 한 마을에서 만납시다, 그러나 사실은 나를 헤치려는 수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 ,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큰 공사를 하고 있으므로, 내려갈수 없소, 어떻게 내가 자리를 비우는 일을 중단시키고 당신들에게 내려 가겠소?" 그들은 네 번씩이나 똑같은 전갈을 내게 보냈고, 나 역시 매번 똑같이 대답했습니다.(느6:1~4)
오늘의 이야기는 <심리적인 공격>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를 끌어내어 공사를 중지시키고, 살해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노 평야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합니다.
오노 평야는 해변도시 옆에 있고, “68km나 떨어진 먼 곳에서 만나자“는 제안은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거절했어요.
공격자들은 항상 명분을 만들므로, 이것을 빨리 눈치를 채고, 파악해야 합니다.
그곳은 아주 험한 장소이고,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므로, 4번씩이나 거절했으니, 5 번째는 더 교활한 방법으로 <심리전>으로 나옵니다.
그럼 5 번째의 전갈은 무엇입니까?
상식적으로 서신을 주고, 받을 때는 봉인을 하고, 주는 것이 원칙인데, <5 번째 서신에는 봉인이 없이 전달> 되었어요. 그것은 <소문을 내자>는 방법입니다.
5번째 편지에 <봉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돌아가면서 모두 읽으라“는 뜻이예요.
저도 한동대한교를 도와줄 때 당한 일을 소개할 께요.
처음에는 학교를 흔들다가 안 되니까, 그 다음에는 온누리교회를 흔듭니다.
이름도 좋아요. 온사모(온누리를 사랑하는모임)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우리교회 제직들에게 “하용조 목사가 마약을 한다.” ”교회재정을 갖다 썼다”는 등 편지를 보내고,
그것도 안 먹히니까, 그 다음에는 한국교회 전체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것도 금요일 날 편지를 보내고, 토요일 날 받아보게 만들어서, <주일날 내 설교에 영향을 주기위한> 전략을 구사 했어요.
그러나 나는 사람하고 싸우지 않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주일 설교시간에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기도했어요.
5~7절을 읽으세요. "5 번째도 신발랏은 자기 종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돌려보냈는데, <당신과 유다 사람들이 반역을 꾀하고 있고, 그래서 성벽도 건축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여러 나라에 돌고 있으며, <게셈도 그 말이 맞다>고 했소." 그에 대한 느헤미야의 대답은 8~9절에 나옵니다.
"당신이 한 말은 모두 거짓이요. <당신이 꾸며낸 일>일뿐, 실제 그런 일은 없소! 그들은 우리에게 겁주려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낙심해 공사를 끝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여! 이제 제 손을 강하게 하소서"(느6:8~9)
먼저 “유대에 왕이 있다“고 소문냈어요, 소문은 진짜인 것처럼 믿게 만들었어요.
소문은 왕에게 보고되니까, <우리끼리 만나서 협상하자>는 제안입니다.
이런 협박과 공갈에 느헤미야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그것에 대해 느헤미야는 기도를 했어요
“그것은 하나님이여, 이제 제 손을 강하게 붙잡아 주십시오.
하나님이여! 제가 이 백성들에게 행한 선한 일을 보시고,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나에게 용기를 더하게 하옵소서 저에게 죄가 있으면 덮어주시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워주시고, 연약한 것이 있으면 강하게 만들어 주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느헤미야에게 이런 기도가 없으면, 느헤미야도 무너졌을 거예요.
느헤미야는 <이 길을 계속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목숨을 걸고 기도했어요.
이것이 <순교자의 길>입니다.
3. 세 번째는, <내부 세력을 이용한 전략>을 사용했어요.
스마야가 <두문 불출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부 지도자를 이용해 공격을 다시 시작합니다.
스마야는 제사장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므로, 느헤미야가 찾아가서 하소연을 합니다.
그런데 스마야는 느헤미야에게 은밀히 얘기해 주는데, 느헤미야는 <그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즉시 알아 챕니다.
<스마야가 거짓말로 회유한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눈치를 챘어요.
그것은 제사장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지만, <성전으로 피하라>는 것은 “누명을 씌워서 체포하려고 한다”뜻이므로, 그것을 즉시 알아 챘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 들어가라?>고 권하는 것은 “오명을 씌워서 죄인으로 모는 음모가 스며있다”는 것을 알고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종교적 속임수>가 숨어 있는 거예요.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들에게 달려들고, 밀 까불리듯 까불고 있지만, 여기에 넘어가면 안되요.
우리가 분명하게 서있지 않으면, <뿌리 채> 뽑힐 가능성이 있어요.
12절을 보면, "그 순간에 나는 하나님이 그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비야와 신발랏이 그를 매수해 그가 나에 대해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협박하려고 그를 매수해 내가 두려움에 휩쌓인 나머지, 그렇게 하다가 죄를 짓게 하며, 오명을 삼게 해, 결국 나를 비방하려는 것입니다."(느6:12~13)
여기에 3가지 논리를 발견합니다.
1) 첫째는, 두려움에 빠지면 죄를 짓게 되고,
2) 둘째는, 죄를 짓게 되면, 오명을 쓰게 되어
3) 셋째는, 결국 나를 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절대 두려움에 빠지지 마세요,
그래서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시다. 너희 마음은 근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
사람은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딴 생각을 해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교인들에게 여유를 주지 말고, 들들 볶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뜻만 따라서 일하세요.
세상에는 독버섯처럼 펼치고 있는 마귀의 손길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인 간음>에 조심하세요.
솔로몬의 처가 1.000명이나 되므로, 그들이 시집오기 전에 모두 다른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으므로,
훗날 문제가 되는 거예요.
특히,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지게 되어 있어요.
아내가 밤새도록 울고 있으면, 남자들은 달래게 되고, 결국 여자 말을 들어주게 되지요.
이것은 고도의 <심리작전>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삽시다>.
<좋은 것>이라고, 다 <하지> 마세요.
그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골라서 [일] 하세요.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독버섯을 만나요> 그러니까 그 사탄에게 승리해야 해요.
이게 <느헤미야의 리더십>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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