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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잘하는 방법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된 사람이 저에게 ‘영어 잘하는 방법’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주로 영어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영어로 이메일을 보내는 업무를 한다고 얘기를 하니 상대가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냐?’고 물어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영어를 사용해서 외국인들과 비지니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조언해주었습니다.
1)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하루에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꾸준히 공부할 시간을 정해라.
2) 자신의 수준에 맞는 영어 원서를 선택해라. 담백하게 자신이 영어실력이 초등학교 수준이면 초등학생이 보는 원서를 선택하면 된다. 자신의 현재 수준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3) 원서를 읽을 때는 소리를 내서 읽는다. 눈으로 읽는 능력, 귀로 듣는 능력을 동시에 발달시킨다.
4) 정해진 시간에 원서를 읽으면서 독서메모 노트를 작성해라. 노트에는 자기가 모르던 단어를 기록하고 발음기호로 읽는 방법을 적어놓는다. 모르는 뜻이 단어가 아니라 문구에 있으면 문구를 기록해라. 책 내용과 관련된 메모도 기록한다.
5) 수준을 높여 나가면서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의 원서를 읽는다.
6)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소리내서 읽으면서 받아쓰기도 한다.
두 달 정도 지나서 그 사람과 또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영어가 여전히 안 는다.’면서 조언을 또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말한 것을 실천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 사람 하는 말이 영어 원서를 구입도 하고 읽어보려고 했는데 두세 번 했더니 막막하고 ‘이게 맞는 방법인가?’ 싶어서 진행이 안되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저 사람은 실천 안 한다.’
그래서 그 후로 조언 안 합니다.
저는 사람에게 함부러 짜증 안 냅니다.
그냥 조용히 관계를 끊습니다.
연락처 삭제하고 이메일, 메신저 삭제합니다. 차단합니다.
연역론 협회에서는 연역론 팀 활동을 하는 회원에 한에서만 제가 계속 지도를 해주고 코칭을 하는 것입니다. 연역론 팀 활동 안 하면? 관계가 사라집니다.
여기에 서운한 감정을 느끼고 저에게 뭐라고 하는 연역론 협회 회원님들이 있더군요. 연역론 협회는 군대가 아닙니다. 그냥 시간이 가면 자동으로 계급이 오르고 짬밥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연역론 협회는 오로지 깨우치고 실천할 때만 인정받고 존중받는 모임입니다.
우리가 연역론 협회가 아니라 만약 서로 일반인으로 만났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회생활하다가 만났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회 같은 것은 주지 않습니다. 저의 시간과 정성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실천 안 하면서 그럴듯하게 말만 나불거리는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사람을 차별대우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계획을 만들어서 실천하는 사람과 실천 안 하는 사람을 철저하게 차별합니다.
실천하면 존중합니다. 실천 안 하면? 존중 안 합니다.
잘된 예: 이기환님의 경우
이기환님은 제 동생입니다. 이기환님은 영어를 잘합니다. 영어로 계약서 작성하고, 원어민 만나서 영어로 네고시에이션(협상) 합니다. 영어로 이메일 작성하고, 영어로 전화통화도 합니다. 자기가 하는 업무에서 이게 되면 영어를 잘하는 것이 맞습니다.
영어시험, 예를 들어서 토익, 토플, 텝스 점수는 토익, 토플, 텝스 점수일 뿐입니다. 참고자료일 뿐인 것입니다. 토익, 토플, 텝스 점수가 높은데 위의 업무를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영어 업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직원 채용할 때 영문 계약서 예시를 하나 주고 이게 무슨 내용인지, 여기서 담당자가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 뭔지 말해 보게 합니다. 여기서 논리적인 분석이 가능하면 채용하고 못하면 탈락시킵니다. 이런게 능력입니다.
이기환님은 왜 잘할까요? 제가 위에 말한 영어공부방법을 꾸준히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이기환님은 자신이 하루에 책을 얼마나 읽는지 일지를 써서 구글드라이브로 저에게 공유합니다.
이기환님 일지에서 뽑아낸 스샷을 한 번 볼까요?
(이기환님이 책을 며칠 읽더니 내용에 대해서 독서메모를 썼습니다. 그 내용을 연역론 협회 게시판에도 썼습니다. 부를 보는 관점과 정보구조체의 세대 간 이식)
(빨간색 글씨는 제가 첨삭한 것입니다. 이기환님은 추가로 책을 한 권 더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기환님이 책 받아쓰기도 시작했습니다.)
이기환님과 저는 이런 식으로 자기개발을 하루에 한두 시간씩 15년째 하고 있습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일지만 이렇게 적고 실제로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관리합니다. CCTV를 사용합니다. 집에 CCTV가 있고 회사에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기환님은 저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환님은 저와 함께 생활하지 않고 따로 독립해서 살고 있습니다.
저와 이기환님 모두 ‘자택에서 일하자.’는 삶의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기환님이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처리하기도 하는데 저와 출근하는 날이 달라서 마주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업무회의와 학문적인 토론을 위해 따로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는 CCTV로 자기자신을 체크합니다.
실시간 업무일지 작성으로 현재 작업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를 확인합니다.
미리 일정을 정해놓은 계획표가 있고, 실제로 업무를 실행한 것을 관찰해서 기록한 일지가 있습니다.
(일정계획표입니다. 내용은 업무상 기밀이기 때문에 흐리게 처리했습니다.)
(일정계획표 도식입니다. 내용은 업무상 기밀이기 때문에 흐리게 처리했습니다.)
(실시간 업무일지입니다. 클라우드 서비스인 구글드라이브로 실시간으로 씁니다. 붉은색 내용은 제가 피드백을 한 것입니다. 내용은 업무상 기밀이기 때문에 흐리게 처리했습니다.)
(이기환님 집에 설치한 CCTV 화면)
(이런 식으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CCTV에 녹화된 내용을 보고 작업일지에 적힌 시간에 그 일을 헀는지 안 했는지 체크합니다.
컴퓨터 화면 녹화도 합니다. 컴퓨터 화면에 무엇을 띄워서 사용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사용기록도 확인합니다. 몇 시 몇 분에 어디에 접속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1) 스케줄
2) 작업일지
3) CCTV
4) 컴퓨터 화면기록
5) 인터넷 사용기록
이것들이 일치하는지, 불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기환님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환님이 스스로 자기개발을 하는 자료로 이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기개발의 자료로 사용합니다. 이것들은 ‘나는 하루 종일 주로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입니다. 자기자신을 솔직하게 이해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결과적인 자료를 가지고 자신을 비하하거나 학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었던 일로 덤덤히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지 생각을 할 뿐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운영하는 시스템을 업데이트하는 참고자료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기환님이 바빠서, 다른 일이 있어서 일정을 지키지 못하면 그 내용을 솔직하게 작업일지에 씁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저는 그런 결과를 가지고 이기환님을 문책하지 않습니다.
이 시스템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속임수는 안됩니다.
속임수는 작업일지에는 그럴듯하게 ‘00을 했다.’라고 쓰면서 실제로는 그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입니다. 일을 결과적으로 잘하든 못하든 속임수를 쓰면 문책합니다.
연역론에서는 이것을 이중 속임수라고 부릅니다. 이 자기관찰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 이중 속임수를 찾아내고 개선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얼마만큼 진지합니까?
얼마만큼 솔직하고 얼마만큼 담백합니까?
얼마만큼 자신의 속임수와 거짓말을 찾아내고 관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연역론이랍시고 사람들에게 실천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뜬구름 잡는 것 처럼 보이십니까?
저는 제가 실천하지도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거짓 위선을 부리지 않습니다.
제가 저 자신이 하는 말과 글에 당당한 이유는 제가 그것을 직접 실천하고 검증(피드백)하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 사람과 실천 안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상상만 하고 실천 안 하는 사람은 개선이 안됩니다. 왜? 안 하니까요.
당신은 얼마만큼 실천하는가?
이 세상에는 자신이 계획한 것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이래서 안되느니, 저래서 안되느니’ 헛된 망상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상상으로 짐작한 것, 존재규정한 것들 때문에 이렇게 된다, 저렇게 된다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영어는 이렇게 해야 제대로 공부가 된다느니, 그러면 안된다느니, 새로운 공부방법이 나왔다느니, 이 책만 보면 잘할 수 있다느니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주장이 많이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런 책 안 봅니다. 제 할 일 실천하기에도 바쁩니다.)
연역론은 그런 헛된 망상을 거부합니다.
연역론은 정보구조체를 만들어서 실천하고 피드백으로 개선합니다. 그 뿐입니다.
위에 이기환님의 경우를 봅시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영어원서 2~3페이지를 꾸준히 소리내서 읽고 독서메모를 작성했습니다.
이기환님이 그렇게 하루에 한두 시간씩 읽어서 일년에 책을 한두 권 읽습니다. 지금까지 이기환님이 읽은 영어 원서가 열 몇 권 정도 됩니다.
이런 원서에는 이기환님의 전공인 컴퓨터공학관련 도서가 있고, 경제관련 도서가 있고, 소설도 있습니다.
이기환님은 그저 묵묵히 자기개발을 한 것입니다. 이기환님은 정직합니다.
그리고 이기환님은 영어를 잘 합니다. 이기환님은 자신만의 자기개발 시스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환님은 앞으로 하루에 한두 시간씩 ‘영어로 글쓰기’하는 시간도 가질 것입니다. 이미 이기환님은 영어로 글쓰기를 잘하는 편입니다.
우리는 이제 영어 원어민 수준을 넘어서 영어 프로페셔널(전문가)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손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며칠 전에 연역론 협회 게시판에서 이런 댓글을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말을 곱게 하니까 정중한 것 같아 보이죠? 그러나 이게 대단히 폭력적인 관점입니다.)
위에 저분이 쓴 댓글이 왜 문제일까요?
저분은 자기가 실천을 해보고 피드백을 얻은 것이 아니라 두리뭉실한 경우를 상상해서 ‘그런지 아닌지’ 물어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분이 뭔가 하나라도 자기가 생각한 것을 실천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례를 겪고 고민을 하는 것이라면 저렇게 질문해도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정보구조체를 업데이트할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저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내면 세계관에 만들어진 선입견이 있는데 그 선입견이 옳은 경우가 있지 않냐고 저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망상놀음을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나에게 자기 선입견을 존중해달라고 은근히 돌려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폭력적인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선입견을 저에게 강요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저분이 내면 세계관에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이렇습니다. 댓글 마지막 문장을 보면 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실천하는 선을 행했는데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이나 사회에 악이 되는 많은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이 말은 즉 이런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실천하는 선을 행했는데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이나 사회에 악이 되는 많은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는 것을 선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제가 예를 하나 들어서 받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황당한 사건을 예로 들어서 반박을 하려고 합니다. 아니,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실천하면서 살면되지 왜 저에게 물어보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나요?
이 사람 말하는 모양을 보면 이면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그냥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물어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선입견을 인정받으려고 그 선입견에 부합하는 사례를 조립해서 저에게 반박을 한 것입니다. 의도가 고약합니다.
이분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안 주는 삶’을 살면 됩니다. 자기 생각이 그렇게 맞다고 생각하면 왜 저에게 물어봅니까? 이분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저에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요즘에는 ‘답정너’라고 하더군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어, 너는 그냥 대답만 하면 돼.’의 줄임말이랍니다.
일단 위에 이분이 언급한 임병장 사건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실천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임병장 본인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임병장이 설령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실천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엄연히 임병장의 행위에는 타인에게 폭력을 강제한 것이 있습니다.
임병장이 자신의 생각을 실천헀다고 가정하더라도 한 가지 사건에 ‘내 생각을 실천한 것’과 ‘타인에게 폭력을 강제한 것’이 중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 두가지 중첩된 사실 중에 한 가지만 쏙 빼내서 자기 선입견에 부합하도록 조립한 것입니다. 아마 자기도 모르게 한 생각이겠지만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면 자기 선입견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내 생각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안 주는 상황’을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위에 이기환님이 자기 스스로 계획해서 실천하는 영어공부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나요? 안 주잖아요.
어째서 내 생각을 실천하면 다른 사람에게 당연히 피해를 주게 되나요? 그게 반드시 그런 이유가 뭔가요? 이유 없습니다. 얘기를 하면 할 수록 넌센스, 말장난이 됩니다.
자신은 실천도 안 하면서 나에게 이러니 저러니 물어보는 것 자체가 대단히 무례한 것이다.
위에 제가 이기환님을 예로 든 것처럼 우리는 한 가지 일을 해도 매일 실천하고 피드백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은 그런 경험과 노하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조언을 받자고 온 사람이 실천도 제대로 안 해보았으면서 자기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이러지 않냐, 저러지 않냐라고 반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대단히 무례한 것입니다.
제가 뭐라고 대답을 해주던지 간에 실천 안 하잖아요.
그런 분이 하는 생각은 무슨 생각을 하던 간에 실천 안 하는 공허한 메아리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은 자원의 낭비입니다.
저는 상대가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즉시 조언을 그만둡니다. 관계를 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그래서 연역론 팀 정책을 도입한 것입니다. 연역론 팀 정책으로 자신이 관찰하고 실천한 것에 대해서 글과 댓글을 쓰게 하면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중이떠중이들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연역론 팀 정책 자체가 하나의 실천입니다. 이걸 꾸준히 하는 사람에게는 결과적으로 뭘 잘하든 못하든 조언을 해줍니다. 존중해줄 가치가 생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상대에게 당연히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망상
눈치 안 봐도 되는 것을 눈치보고, 정작 신경써야 하는 것에는 신경을 못 쓰고 그래서 인간의 삶이 힘들고 고달픈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내가 땅을 샀는데 사촌이 배 아파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래 내가 땅 사는 것과 사촌이 느끼는 감정은 충돌 안 하는데, 사촌 인성 됨됨이가 불량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입니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사촌보고 ‘억울하면 너도 땅 사라.’고 하면 강요가 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만약 사촌이 땅을 사고 싶다고, 땅 사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한다면?
그러면 가르쳐주면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강요가 아닙니다.
연역론 협회에서 저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도 이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생각한 것을 실천하면서 글로 쓰고, 회원들은 연역론 방법에 매력을 느끼고 가입을 해서 연역론 팀 활동을 하고, 저는 제가 쌓은 통찰과 노하우로 가르치고 조언을 해줍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만약 내가 계획한 것을 실천했더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러면 계획을 수정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안 주도록 하면 됩니다. 이정도로 쉽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계획해서 실천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계획해서 실천하면 무조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입니다.
지레짐작으로 실제로 피해를 주는지 안 주는지 확인도 안 해보았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봐 하는 상상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계획해서 하지 못한다면 그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망상의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할까봐 땅을 안 산다.
내가 안 놀고 공부하면 친구가 삐질까봐 공부를 안 한다.
사람들이 영어공부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해서 영어공부 안 한다.
이것은 자업자득입니다. 자신의 망상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혼자 정신병자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계획해서 실천하면 인과의 원인, 작용점이 내가 된다.
베푸는 행위를 생각해봅시다.
베푸는 행위는 내가 정해서 실천하는 일방향 행위입니다. 나의 내면에서 시작되어서 밖에서 끝납니다.
내가 뭔가를 받고 나서 상대에게 주는 것은 등가교환이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내가 베풀고 나서 타인에게 받을 기대를 하면 그것도 등가교환이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행위
내가 내면에서 정해서 실천하는 일방향 행위입니다.
내가 계획해서 실천하는 행위
내가 내면에서 정해서 실천하는 일방향 행위입니다.
등가교환
등가교환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드러내서 표현해야만 합니다. 쌍방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장하고 서로가 타협해서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이 개념들이 꼬이면 이런 식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잘해주면 상대도 나에게 잘해주겠지.’
이제 이것은 망상, 착각입니다. 자신이 만든 망상과 착각으로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등가교환을 원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이게 등가교환임을 모릅니다. 등가교환은 반드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거래하고 싶은지 드러내야 합니다.
베푸는 행위, 봉사행위는 일방향입니다. 내가 주고, 주면서 내가 스스로 즐거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베푼다고 생각하고 베풀고 나서 보답을 바라면? 그러면 베푼 것이 아닙니다. 등가교환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등가교환을 원하면서 그것을 베풀었다고 착각하면? 이제 이중 속임수가 됩니다. 자기가 만든 마음의 늪에 자기가 빠져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 개념 하나를 모르기 때문에 인생이 힘듭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선한행위, 베푸는행위, 봉사행위를 하는데 받는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담백하게 거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했는데도 막 해주려고 하면 선을 넘은 간섭이 됩니다. 그게 강요, 강제, 폭력입니다.
정명석님의 경우
만약 연역론 회원이 글을 썼는데 그게 대강 생각을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면 저는 담백하게 ‘이건 아니다.’라고 지적을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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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님이 지난 주 저에게 호된 지적을 받았습니다.
정명석님은 논리적인 이해 없이 ‘이러면 말이 될 것 같다.’하는 느낌으로 단어만 바꿔치기해서 막 갖다붙이려고 하니까 망합니다.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질문을 하면 간파할 수 있습니다.
변화 프로세스? 변화 프로세스 어떻게 하는데요?
변화가 변화 프로세스 때문에 이루어진다고요? 동어반복의 모순이 됩니다. 동어반복이란 결과정보 링크형식이라는 뜻입니다.
정명석님의 글에는 이 ‘어떻게’에 대해서 생각한 바가 없습니다.
이 ‘어떻게’에 대해서 논리관계로 언급한 것이 없으면 무가치한 진술입니다. 그렇게 쉽게 판정합니다.
정명석님은 앞으로 이 헛된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정명석님을 사회생활을 하다가 알게되었거나 연역론 협회 외부에서 알게되었으면 이미 오래전에 관계가 끊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글을 써서 사람을 코치하는 것에는 많은 노력이 듭니다. 이게 정명석님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정명석님이 연역론 팀 활동을 하면서 꾸준히 나아지려고 노력하니까 실수를 해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정명석님이 잘나서 받아주는 것 아닙니다. 정명석님이 이런 기회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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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에 나온 이기환님이 앉아있는 자세가 좋고 모니터 배치가 특이하군요
혹시 책상배치나 앉는 자세에 대해서 특별히 충고해 주실만한 것이 있을까요?
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기위해 엉덩이를 등받이에 붙이고 눈높이와 모니터높이가 일치하도록 의자높이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테크닉을 유튜브 통해서 배우세요
우리는 허리와 가슴을 펴고 목도 1자목, 거북이목이 아니라 머리를 살짝 들어올린 상태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만들려고 모니터 위치를 계산해서 설치했습니다. 의자에 앉을 때 허리, 가슴, 목의 자세를 개선하고 싶으면 본인이 앉은 자세를 옆에서 사진으로 찍어보고 자세교정에 도움이 될 부분을 바꾸어 보십시오.
참고로 우리는 의자 앉는 부분의 3분의 1만 사용해서 앉고 엉덩이를 등받이에 붙이지 않습니다.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찔리네요~ 찔립니다
그리고 기준님의 글은 참 철학적이라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군요
실천을 잘해야......
99%의 사람들 교화시키는 글 쓰시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