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꿰뚫는 문화 뿌리 캐내기
멀치아 엘리아데의 [호모 렐리기오수스]
20세기는 무엇보다도 세계의 문화들이 타문화를 본격적으로 만난 시대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바로 이 숙명적 만남을 서구학자들에게 일깨우고, 동양과 원시문화를 모두 포함하는 현대의 [다원적 세계 문화 읽기]의 새 패턴을 구축하였다. 일상을 탈출해 신나게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래도 집구석이 제일이야." "우리나라가 최고야." 사실, 진리는 먼 발치에 있지 않고, 늘 우리 근처에 있게 마련이다. 다만 감춰져 있어서 모르고 지내기 일쑤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가까이 있는 은밀한 진리를 꼭 먼 낯선 땅엘 가본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는 사실이다. 각개 문화 전통들의 표피적 도그마때문에 가려진 자기 문화의 참 모습을 보자면 다른 문화를 경험해야 한다고 엘리아데는 역설하는 것이다. 물론 근대 이후 수많은 사상가가 인류의 보편적 정신성을 전제로 깔고 세계 문화를 총체적으로 읽어보려는 과감한 도전을 한다. 이들에 비해 엘리아데의 특징은 매우 구체적이고도 원초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본질]의 환상을 추구해온 서구사상의 [경험과 이성] 같은 인위적 틀을 거부한다. 더구나 현상과 분석, 실존과 구조 등 낯설고 닫힌 개념들로 포장된 유행 철학의 논쟁들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이들을 감히 다 [해체]하려는 그런 가상한 전략가도 아니다. 어차피 모두 국지적 서양 문화 유산 속에서만 헤적거리는 부질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엘리아데는 세계 문화의 저변에 깔려있는 더 근본적인 것, 즉 서양-동양 심지어 원시 문화를 모두 존재하게 하는 그 뿌리를 찾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오직 주어질 뿐이다. 그래서 답답한 나머지 여러 문화에서는 신이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그것이 철학 이전, 역사 이전부터 있어왔다는 사실이다. 엘리아데가 세계 문화의 상징체계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상징들은 사상의 형식 속에서 조작되기 이전부터 고유한 암호로 빛을 내온 인류 문화의 유전인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 문화의 모든 상징에 단일한 해독 원리를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은 마치 화엄의 경지나 하이퍼 텍스트 세계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고, 각개 상징들이 지닌 의미는 그 상호 연관 속에서 잘 번득인다. 그러니까 그 상징들의 연결 그물망을 따라가 원형을 밝히고, 의미의 바다를 항해하는 약도를 그린것이 엘리아데가 한 일이다. 왜 우리는 아무데나 묘를 쓰지 않는가? 문지방에 걸터앉지 말고, 또 아무데로나 다리 뻗고 눕지 말라고 하나? 풍수지리의 상징 체계를 알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런데 세계 도처에 있는 성산들과 그들을 본따서 지은 사원과 궁궐들, 그리고 바빌론, 예루살렘, 멕시코시티, 북경 등 세계 주요 도시의 배치도 같은 논리인 것을 엘리아데는 보여준다. 즉 모두 다 중심적인 곳에 공간적 의미를 두고, 다른 곳과 구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은 성(성)스럽고 다른 곳은 속되다. 결국 엘리아데를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사는 게 아니라, 세계 문화의 근저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뿐만 아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와 만다라와 서낭당의 의미 지평도 모두 중심상징에서 비롯한 것으로 서로 갈등없이 만난다. 마치 배꼽과 연관된 상징들이 세계 여러 문화에서 사다리, 무지개, 은하수, 굴뚝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세계 도처의 신화와 제의 속에 반복되는 수많은 상징의 심층적 의미를 엘리아데는 상호연관 속에서 살려낸다. 첨단 과학 시대에 웬 신화와 상징 타령인가? 하지만 현대 문화의 첨병으로 떠오른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에서조차, 여성 일자리가 몇 개 더 생기는가, 일산화탄소량이 얼마인가 하는 것은 피상적 물음들에 불과하다. 여성과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진짜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땅, 물, 달, 농경, 여성 등에 관련된 상징 체계의 의미를 알아야 문제의 핵심에 이를 수 있다. 또 SF 영화의 모티브나 컴퓨터 가상 현실 장면이 진정 그럴 법하게 보이는 것도 생짜 상상이 아니라, 그 원초적 상징의 그물망과 닿아 있을 때다. 엘리아데는 이처럼 보편적 인류 문화의 원초적 의미들을 깨닫게 되었을때, 비로소 인간은 그 참 모습([호모 렐리기오수스])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의미있는 삶은 그렇지 못한 삶과 구별되고, 따라서 성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엘리아데 현상]의 슬로건, 즉 [새로운 휴머니즘]의 신화다.
글쓴이 김종서 / 서울대 교수 · 종교학 ▲1952년생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미국 캘리포니아대 석-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저서 [현대종교다원주의의 이론 연구](1990) [현대 신종교의 이해](1994) [종교와 경제간 상관관계론의 현대적 의미](1998) 등
[엘리아데/지적계보] 뮐러-프레이저 등 영향
엘리아데의 폭넓은 문화와 종교 인식은 동양학자 막스 뮐러(1823∼ 1900)와 인류학자 프레이저(1854∼1951)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뮐러는 동양 종교의 경전들을 서양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며 프레이저는 저서 "황금가지"를 통해 세계의 문화 현상들을 과감하게 한데 묶어 놓은 인물이다. 엘리아데 자신 "뮐러와 프레이저의 저서를 읽으려고 영어 공부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엘리아데는 또 1950년 심리학자 칼 융(1875∼1961)을 만나 그로부터 인간의 상징과 상상을 내용적으로 규정하는 "원형(archetypes)"개념을 받아들인다. 또 그가 종교 자체의 독자성-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성스러운 것"(the sacred)"이란 용어는 기독교의 신 개념을 넘어 타종교의 신앙 대상까지 포함하는 "거룩한 것"(the holy)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종교사학자 루돌프오토(1869∼1937)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엘리아데는 이 선배 학자들의 업적과 그 자신의 연구-체험을 종합, 인류의 삶에 나타나는 종교 현상의 본질을 "성스러움의 나타남(히에로파니·hierophany)"이란 개념으로 밝히려고 했다. 그는 마르크스, 뒤르켐, 프로이트 등도 인간의 삶을 세계의 보편 문화 속에서 파악하려고 했지만 종교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경제-사회-심리현상의 일부로 잘못 보았다고 비판했다. 엘리아데는 유럽에 있을 때에도 서양 문화의 한계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관심을 끌었지만 특히 미국으로 건너간 뒤 "시카고학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면서 전세계의 종교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84년에 착수, 사후인 1987년 출간된 "종교학대사전(The Encyclopedia of Religion)"은 인류 종교 문화의 집대성으로 평가된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말부터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엘리아데의 저서가 교재로 사용됐다. 국내의 종교학 연구자 대부분이 그의 영향을 받아 이기영 장병길 문상희 정진홍 교수 등이 그의 책을 강의하고 번역했으며, 많은 관련 논문이 발표됐다. 또 종교학자뿐 아니라 불문학자-영문학자-동양학자도 엘리아데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며 나아가 국문학-한국고대사-민속학 등에서도 한국의 문화 상징과 고대 사상을 이해하고자 그의 이론에 많이 의존했다. 이같은 폭넓은 관심을 반영하듯 엘리아데의 저서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은 "요가"(정위교 옮김·고려원) "우주와 역사"(정진홍 옮김· 현대사상사) "성과 속"(이동하 옮김·학민사) "신화와 현실"(이은봉 옮김·성대출판부) "종교형태론"(이은봉 옮김·한길사) "종교의 의미" (박규태 옮김·서광사) "만툴리사 거리"(홍숙영 옮김·전망사) 등 10여종에 이른다. (이선민기자)
[엘리아데 누구인가] 중학때부터 철학 소질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1907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 슈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등학교에 재학중일 때 이미 철학-종교사 관련글과 문학평론을 발표하는 조숙성을 보여주었다. 부쿠레슈티대 문학철학과에 입학해 이탈리아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엘리아데는 대학 졸업 후 신부가 될 생각이었지만 면접시험을 보러 갔다가 도서관에서 기다리는 동안에 인도철학사를 읽고는 마음을 바꾸어 인도로 갔다. 1928년 11월 인도에 도착한 엘리아데는 캘커타대학의 다스쿱타 교수 밑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스승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쫓겨났고 이어 히말라야로 가서 요가 수행에 몰두했다. 3년여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엘리아데는 1933년 "요가:인도 신비주의의 기원"이란 논문으로 모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3년뒤 프랑스와 루마니아에서 동시에 발간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또 여러 편의 소설과 기행문 등을 발표,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엘리아데는 1939년부터 종교학 연구 논문집인 "잘목시스"를 발간하면서 연금술, 우파니샤드, 불교 등을 통한 상징 해석 등 동양종교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또 영국과 포르투갈의 루마니아 대사관에서 문화담당관으로 일하는 한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공산치하에 들어가자 엘리아데는 파리에 머물면서 연구를 계속했고 1949년 그의 주저중 하나 로 꼽히는 "종교형태론"를 출간했다. 유럽의 대학들을 두루 돌며 강의와 연구를 하던 엘리아데는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에 자리잡음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는 이곳에서 "이니시에이션의 의례와 상징"(1958) "성과 속"(1961) "신화와 현실"(1963) "종교사상사"(전3권:1978∼1985) 등을 잇따라 내 놓았다. 엘리아데는 필생의 역저인 종교사상사의 수정작업을 하던 1985년 12월 그가 즐기던 시가 때문에 발생한 연구실 화재로 소장 서적과 수정원고를 통째로 잃고 말았으며 이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지내다 1986년 세상을 떠났다.
자료출처 20世紀의 사상을 찾아서 (조선일보 시리즈 1999년 4월 14일 - 9월 15일, 김병길 엮음) http://nongae.gsnu.ac.kr/~bkkim/won/won_101.html - 183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