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로 건너간 야심가
1941년 1월에 히틀러는 물론 독일군 최고지휘부가 아프리카군단에게 요구한 것은 지극히 단순했다. 위기에 빠진 이탈리아군을 도와 트리폴리를 방어한 후, 최대한 전선을 현 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반격은 하되 공세로 나서지 말라는 지시는 리비아에서의 전선 확대가 독일군 전체로 볼 때 부담을 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고 사실 1개 군단 전력만으로 공세가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이후 예정하지 않았던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말미암아 실행이 두 달 늦어지기는 했지만 당시 독일은 소련 공격 준비에 상당히 분주한 상황이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인 400여만명의 침공군을 동원하였는데, 그중 50여만이 동맹국에서 차출된 병력이었을 만큼 독일은 병력 부족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 와중임에도 귀중한 1개 군단을 아프리카에 파견하였기에 수동적인 대응을 요구한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그런데 히틀러가 직접 롬멜을 파견군 지휘관으로 낙점하자 육군 최고사령부는 우려를 금치 못하였다. 평소 가뜩이나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독단적인 행동을 벌이던 그가 총통의 총애를 이용하여 어떤 행동을 벌일지 예측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와 참모총장 할더는 아프리카로 출발하기 전에 롬멜을 따로 불러 브리핑을 가졌지만 그가 지시한 대로 임무를 수행할 것인지 의구심을 가졌을 정도였다.
1941년 1월에 히틀러는 물론 독일군 최고지휘부가 아프리카군단에게 요구한 것은 지극히 단순했다. 위기에 빠진 이탈리아군을 도와 트리폴리를 방어한 후, 최대한 전선을 현 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반격은 하되 공세로 나서지 말라는 지시는 리비아에서의 전선 확대가 독일군 전체로 볼 때 부담을 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고 사실 1개 군단 전력만으로 공세가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이후 예정하지 않았던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말미암아 실행이 두 달 늦어지기는 했지만 당시 독일은 소련 공격 준비에 상당히 분주한 상황이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인 400여만명의 침공군을 동원하였는데, 그중 50여만이 동맹국에서 차출된 병력이었을 만큼 독일은 병력 부족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 와중임에도 귀중한 1개 군단을 아프리카에 파견하였기에 수동적인 대응을 요구한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그런데 히틀러가 직접 롬멜을 파견군 지휘관으로 낙점하자 육군 최고사령부는 우려를 금치 못하였다. 평소 가뜩이나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독단적인 행동을 벌이던 그가 총통의 총애를 이용하여 어떤 행동을 벌일지 예측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와 참모총장 할더는 아프리카로 출발하기 전에 롬멜을 따로 불러 브리핑을 가졌지만 그가 지시한 대로 임무를 수행할 것인지 의구심을 가졌을 정도였다.
- 트리폴리에 도착하여 이탈리아군을 사열하는 롬멜. 이탈리아군을 무능하게 생각한 그는 처음부터 공조하여 작전을 펼칠 생각이 없었다.
이때 롬멜이 동원한, 아니 동원할 수 있었던 부대는 제5경사단의 선발대로 아프리카로 가장 먼저 건너온 제5기갑연대 하나뿐이었다. 롬멜은 이처럼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소규모 선발대만으로 과감히 선제공격을 했는데 참모나 예하부대장들의 우려와 달리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흑색선전을 통해 트리폴리로 이동을 마친 아프리카군단이 수백 대의 전차를 보유한 강력한 기갑부대라고 상대를 속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 1941년 3월 2일 트리폴리 시내에서 행진을 벌이는 아프리카군단 소속 전차들. 단지 선도부대만 도착한 상황인데 계속 시내를 순환하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기만책을 통해 거대한 기갑부대로 착각시키는데 성공했다.
롬멜은 적들이 설마 지금 공격하겠냐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가 바로 공격 시점이라 설파했고 얼마 가지 않아 신화가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사실 롬멜은 적을 속여서 사기를 떨어뜨린 후 전투를 쉽게 끝내버리는데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런데 이후 이런 그의 전술을 상대가 뻔히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고 이로 인해 그는 너무나 유명한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영국군은 지난 1940년 봄 프랑스에서 이미 독일군과 맞붙어 비참한 패배를 당한 경험이 있어서 독일군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이번에 트리폴리에 도착한 독일군이 강력한 기갑부대라는 기만 작전에 철저히 걸려든 상태였다. 그동안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을 추격하여 장장 900킬로미터를 진격하는 바람에 보급로도 길어지고 상당히 지쳐 있었다. 롬멜은 이런 영국군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롬멜은 조그만 틈을 노려 공격을 가했고 영국군은 석 달 전의 이탈리아군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불과 2주 만에 장군 3명이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며 처절히 붕괴된 영국군은 1,000킬로미터를 쫓기며 뒤돌아 후퇴해야 했다. 그것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롬멜이 일으킨 가짜 모래바람에 속아서 제풀에 붕괴되었던 것이었다. 참전 초반에 그가 보여준 이 놀라운 전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 공격을 개시하는 제5기갑연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롬멜의 선공에 영국군은 궤멸되었다.
특유의 튀는 성격 때문에 상관이나 동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롬멜은 사실 부하들과도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을 너무 확신하다보니 참모들이나 예하 부대장의 의견을 무시하기 일쑤였기에 그의 밑에서 계속 함께 싸우려했던 참모나 예하 부대장들이 정작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뛰어난 장군이라 명성을 얻었지만 수족 같은 부하나 참모를 거느린 여타 명장들과 달리 그다지 그의 주변에는 인맥이 없었다.
- 롬멜의 재촉에 곤혹을 치룬 제5경사단장 슈트라이히. 롬멜은 부하들과의 관계도 그리 원만하지 못하였다.
전쟁 영웅 롬멜장군 ⑪처칠, 롬멜에 당하기만 하는 영국군에 개탄하다 |
- 신화의 이면
최초 공세 이후 롬멜의 아프리카군단이 연이어 보여준 전과는 놀라움 그 자체라는 점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정도다. 영국군 지휘관들은 사병들이 롬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사기가 떨어진다고 하소연했고, 처칠 또한 이 인물에게 당하기만 하는 영국군의 현실을 개탄했다. 반면 아프리카에서 연일 날아오는 승전보는 히틀러와 독일 국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고 관영 매체들은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아프리카군단에 대한 관할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국방군 최고사령부나 육군 최고사령부 같은 최고 지휘부는 이런 소식에 웃을 수 없었다. 단지 전선을 안정시키라는 상부의 엄명을 따르지 않고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공격을 개시하여 무려 1,000킬로미터를 진격한 롬멜의 행위는 엄밀히 말해 월권에다 항명이었다. 원래부터 독일군 최고 지휘부 내에서 좋지 않았던 롬멜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더욱 나빠졌다.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공세로 나간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잘못된 행동이다. 설령 대승을 이끌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혹자들은 군부에서 공공연히 터져 나온 롬멜에 대한 비난은 뛰어난 전과를 올린 인물에 대한 시샘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런 반응이 결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전횡은 결국 독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 1941년 6월 공세를 펼치는 독일 아프리카군단. 하지만 이는 명백히 상부의 명령을 위반한 행위였다.
롬멜의 계속적인 돌격으로 전선이 상상 이상으로 확대되자, 어쩔 수 없이 보급량과 파견부대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승리에 도취되어 이것이 그리 큰 문제로 보이지 않았지만, 독·소 전쟁이 격화됨과 동시에 아프리카에서의 지원 요구도 무한정 늘어나자 부담은 곧바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시간이 갈수록 해군력이 약한 추축국은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보급 루트를 안전하게 지키기 힘들었다.
- 보급 수송선을 호위하는 독일의 Bf-110과 이탈리아의 G.50 전투기. 하지만 해군력이 열세인 추축국의 수송선이 안전하게 지중해를 건너기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이것은 결코 전쟁 전체를 보아야 하는 최고위층 입장에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다. 1941년 최초 파견 시 별동대 수준이었던 1개 군단 규모의 파견 부대는 1943년에 이르러 아프리카집단군으로까지 커졌다. 이탈리아군까지 통솔하게 되고 여기에 더해 롬멜이 진급하면서 서류상으로 확대된 형태이기는 했지만 분명히 최초 파견 당시보다 병력 등의 규모가 커졌고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규모가 커진 이상 지원을 중단하거나 축소하기도 곤란하여 독일군 최고지휘부의 고민은 가중되었다. 이탈리아에 생색만 낼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내려는 애초의 계획이 롬멜 때문에 완전히 틀어져버린 것이었다. 독·소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 북아프리카에서의 전쟁도 커져만 갔다. 결과적으로 독일 입장에서 볼 때 아프리카에 파병하지 않았거나 차라리 초전에 패해 철군하였던 것이 좋았다.
- 파견된 지 1년이 지난 1942년 6월의 롬멜. 그의 상징이 되어버린 방풍 고글은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이다.
그러나 롬멜은 거시적으로 전쟁을 이끈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투를 상당히 잘했지만 전선 전체를 조율하는 능력이 부족했는데, 특히 후속 지원에 대해 간과하는 경우가 많아 도가 넘게 판을 키우고는 했다. 이후 작전 실패를 제때 지원을 해주지 못한 후방의 책임으로 돌리고는 했지만 처음부터 이런 문제까지 고려하여 작전을 펼쳐야 했다. 그는 전술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전략적 관점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같은 남부 출신이지만 롬멜을 불신했던 참모총장 할더는 그의 독단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대중적인 인기와 총통의 비호를 받는 점을 이용하여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로지 그의 의지대로만 작전을 펼치는 롬멜에게 분노한 할더는 총참모본부 작전부장인 파울루스를 아프리카로 보내면서 “이 인간이 완전히 미치지 않게 막으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이것은 결코 계속된 승리를 칭찬하기 위한 은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 분노한 참모총장 할더가 전횡을 막으려 하였지만 롬멜은 대중적 인기와 총통의 편애를 발판삼아 계속 자기 뜻대로 부대를 지휘했다.
전쟁 영웅 롬멜장군 ⑫승리에 승리…하지만 전력분산과 보급제한에 발이 묶이고 |
놀라운 진격의 이면
전사에 길이 남은 롬멜의 업적은 북아프리카전선 참전 직후인 1941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 석 달간 거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기세에도 불구하고 전략 요충지인 토브룩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롬멜은 공격을 독려했지만 토브룩에 고립된 영연방군은 1940년 프랑스 해안에서 보았던 그 연합군과 달랐다. 바다를 통해 철수하지 않고 도시를 요새화하며 극렬히 저항하자 독일은 도저히 돌파할 수 없었다.
롬멜은 토브룩을 외곽에서 포위만 한 채 전력을 분산하여 이집트로 진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것은 능력을 벗어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고, 이것으로 그의 신화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해 말 롬멜은 1,000킬로미터를 뒤돌아 처음 진격을 개시했던 엘아게일라로 되돌아 왔다. 보급의 제한과 전력의 분산 때문에 갈수록 강해지는 연합군을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전사에 길이 남은 롬멜의 업적은 북아프리카전선 참전 직후인 1941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 석 달간 거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기세에도 불구하고 전략 요충지인 토브룩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롬멜은 공격을 독려했지만 토브룩에 고립된 영연방군은 1940년 프랑스 해안에서 보았던 그 연합군과 달랐다. 바다를 통해 철수하지 않고 도시를 요새화하며 극렬히 저항하자 독일은 도저히 돌파할 수 없었다.
롬멜은 토브룩을 외곽에서 포위만 한 채 전력을 분산하여 이집트로 진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것은 능력을 벗어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고, 이것으로 그의 신화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해 말 롬멜은 1,000킬로미터를 뒤돌아 처음 진격을 개시했던 엘아게일라로 되돌아 왔다. 보급의 제한과 전력의 분산 때문에 갈수록 강해지는 연합군을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 격파된 독일 4호 전차 옆을 지나는 영국군 크루세이더 전차. 시간이 갈수록 독일군은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국군은 강해졌고 결국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되어 버렸다.
1941년의 전투를 경험삼아 더 이상 전선이 확대되고 소모전으로 흐르지 않도록 전략을 바꿔야 하는데도 그는 전혀 반성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비록 그해 6월, 마침내 지난 1년간 독일의 공격을 버텨온 토브룩을 함락시키기는 했지만 12월이 되었을 때 또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듬해 1월, 트리폴리를 영국군에게 내주며 리비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독일군은 튀니지로 후퇴하여 저항을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정면의 영국군과 알제리에 상륙한 미군이 배후에서 협공을 가하고 히틀러가 철군을 불허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43년 5월 13일에 30만 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처럼 무의미하게 판을 키우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롬멜은 정작 영웅의 몰락을 우려한 총통의 호의로 베를린으로 옮겨갔고 설거지는 그와 사이가 나빴던 후임자 아르님의 몫이 되었다.
- 튀니지에서 항복하며 포로가 된 독일군. 역설적이지만 이제 싸움이 끝나고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표정이 보인다.
동부전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직후에 연이어 찾아 온 이 참배는 독일의 몰락을 가속화하였다. 롬멜은 1942년 6월 토브룩을 함락시켜 최연소 육군 원수에 오르는 개인적 영광을 얻었지만 그 대가는 이처럼 실로 혹독했다. 물론 북아프리카전선에서 벌어진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롬멜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롬멜을 빼놓고 아프리카전선을 논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역할은 너무 컸고 벌린 일도 너무 많았다.
1940년 9월 이탈리아의 선공으로 시작되어 1943년 5월 튀니지에서 추축국의 항복으로 막을 내린 북아프리카전선은 한마디로 선(線)의 전쟁이었다. 해안가 이남은 광활한 사하라 사막이라 연합군이든 독일군이든 이곳까지 흩어져서 면(面)을 놓고 싸우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래서 정면의 방어선만 돌파하면 그 다음 방어선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쉽게 전진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하여 엄청나게 전진하였다고 일종의 착시가 벌어졌다. 기다랗고 좁은 공간에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 대결하던 북아프리카전선에서 지난 2년간 롬멜은 왕복달리기하듯 같은 곳을 무의미하게 왕복하며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북아프리카전선을 결정지은 1942년 말의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결정타를 맞고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을 때 롬멜은 본국의 지원이 너무 적다고 불평했지만 동부전선을 지원하기에도 벅찬 당시의 독일 입장에서 무한정 그를 도울 수는 없었다.
- 천신만고 끝에 함락시킨 토브룩을 시찰하는 롬멜. 그는 이 전과로 최연소 원수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대신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더불어 패배의 이유를 무조건 롬멜에게서 찾았던 연합군의 한심한 변명도 그를 유명하게 만드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처칠이 공개 석상에서 “놈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라고 탄식하였을 정도다보니 그를 키워준 히틀러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이후 롬멜의 최후에서도 다시 한 번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어느덧 그는 실력이나 성과에 비해 너무 많이 알려진 장군이 되었다.
- 원수로 진급한 직후 히틀러를 접견하는 롬멜. 가장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은 총통의 후광 덕분에 그는 독일의 영웅으로 비화되었다.
獨逸行進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