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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는 '땅의 신음에 대해 순전한 기독교에 이렇게 썼다.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얘길 거야.”
우리 내면의 깊숙한 곳에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으로는 채울 수 없는 욕구, 그리움이 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학자 중 하나인 C. S. 루이스는 이 그리움을 영어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어서, 독일어 단어 '제주흐트' (Sehnsucht)를 사용해 표현했다. 루이스는 이 세상
에 있는 것들로 잠재울 수도, 가라앉힐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강렬한 갈망을 '젠
주흐트'로 표현한 것이다. …
그렇다면 이 갈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영원에 대한 그리움',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많이 누려 보았어도 결코 채울 수 없는 욕구, 그리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그리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히브리어 원문대로 번역하면 '영원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셨다' 라는 뜻이다. 인간은 영원의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에 세상의 기쁨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다. 코끼리에게 새우깡 열 봉지를 준다고 해서 성에 차지 않듯이, 사람에게 천하를 다 준다 해도 완전한 만족이란 없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다. 우리가 천하보다도 크게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그러하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이 영원의 공간을 땅의 다른 것으로 채워보려고 하니 땅은 신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F. W. 니체의 경우를 보자.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짜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아직도 살아 있는가?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해? 어디로? 어디에? 어째서?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인생 둘이 있다. 하나는 영원과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는 인생이고, 또 하나는 영원과 진리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옳지 않은 것에서 그 답을 찾으며 헤매는 인생이다. 니체는 영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째서 사는지 모른다면 살아 있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 해답을 인간 내(內)에 있는 초인(超人)의 힘으로 풀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초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다만 초인은 어떤 '가능성' 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초인도 거인도 없다. 사도 바울이 탄식하며 고백한 것처럼 우리 속에는 죄 성 가득한 괴물이 있을 뿐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만한 초인의 가능성이 없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용서 받고 영원의 삶에 다다르게 된다. 어떤 인문학 책을 보다 보면 '무한 희망'을 주는 듯한 구절들이 나온다. 그러나 근거 없는 무한 희망은 부정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인문학은 본질을 찾고 싶어 고민하지만 답을 찾지 못한 신음이다. 영원에 대한 신음과 그리움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
*“하이네(Heinrich Heine)는 절대 신인 기독교의 하나님을 버리고, 희립 신을 그렇게도 좋아했습니다. 그는 희랍의 여러 신을 그토록 믿었는데도, 죽기 직전 루브르 박물관의 비너스가 자신을 처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는 거예요. ‘너는 나에게 매달리는데, 나는 너를 구할 힘이 없어. 나는 팔이 없지 않니? 너를 안아 주고 싶은데. 말이 없어. 너희들과 너무나 차원이 같아. 같이 울어 주고, 같이 슬퍼해 줘도, 너희들을 끌어안아 줄 수는 없어.’
그러니까 그때 하이네가 뭐라고 합니까.
'인간이 못하는 것. 잡신들이 못하는 것, 팔을 뻗어 우리를 끌어안는 것은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다시 한 번 하이네가 들은 비너스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너를 구할 힘이 없어. 나는 팔이 없지 않니? 너를 안아 주고 싶은데 팔이 없어. 같이 울어 주고, 같이 슬퍼해 줘도 너희들을 끌어안아 줄 수는 없어.”
이 고백처럼, 이어령 교수는 문학의 한계점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지성의 거장 고(故)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남을 도울 힘이 없으면서 남의 고충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 아픔에 그치지 않고 무슨 경우에 어긋난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빈손으로 앉아 다만 귀를 크게 갖는다는 것이 과연 비를 함께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일찍이 '공감이란, 비를 함께 맞으며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그를 돕는 길인가 하는 면에서 회의를 느낀 것이다. 도울 능력은 있되 만남이 없는 관계와, 만남이 있되 도울 힘이 없는 관계가 있다. 같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공감과 사랑이 참 좋지만, 비를 피할 우산이 없는 빗속의 만남은 인생을 슬프게 한다. 이렇듯 사람은 공감까지는 할 수 있지만 도울 힘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인문학이 그렇다. 공감까지는 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것을 도울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다. 하나님은 함께 비를 맞으시는, 공감하시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비를 피할 우산까지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같이 울고 웃으셨다. 그리하여 우리를 깊이 공감하시며 이해하셨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주시고 생명을 주셨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당신이 이루어놓으신 모든 것을 주신다.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실 뿐 아니라, 영생을 주신 것이다.
*인공지능까지 나온 이 시대, 이제 우리는 되고 싶은 것은 다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 하나님 없이 '힘'만 강해진 인간의 절규이다.
힘을 가진 자가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모른다면, 힘을 가진 자가 악마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처럼 무서운 존재는 없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올을 칼날 위에 올려놓고 입으로 불면 두 갈래가 난다는 취모지검(吹毛之劍)을 가지고 정신없이 칼춤을 추는 사람과 같다.
우리는 대개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힘이 없는 것이 인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힘을 어디다 쓸지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문제는 힘이 너무 많은 데 있다!"
인류는 인공지능 로봇까지 만들어 내며 유발 하라리 교수의 표현대로 '호모 데우스(神)'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더욱 위험한 존재가 되고 있다.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 시계보다 나침반이 중요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첫 소절이다.
… '꽃'은 어떤 이유로 뭇 시인들의 가슴을 그토록 시리게 문지른 것일까? 몸짓에 불과하던 그 무엇을 시인이 이름을 불러 주었더니 꽃이 되었을까?
부름, 관계의 시작 - 이름을 불러 주면 '관계'가 시작된다. 들판에 널려 있는 수많은 꽃들은 그저 몸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꽃은 수많은 꽃 중의 하나가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를 이어주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 즉 살아 있는 영혼의 존재가 되게 하셨다. 생기를 불어넣기 전까지 사람은 그저 티끌로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었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그에게 호흡을 주는 것과 같다. …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이 말과 형제인 구절이 있다. ‘이름은 존재의 집!' 우리 주변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잡초 취급을 당한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목각인형에 불과하던 피노키오가 숨을 쉬고 춤을 추도록 혼을 불어 넣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누구든지 특별한 무엇이 되고 싶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땅 속의 돌은 그저 돌멩이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가에 의해 발굴된 돌은 수천 년의 혼이 깃들은 유물이 되어,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힘과 자부심을 준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는 순간, 몸짓에 불과하던 우리가 하늘의 꽃으로 피어난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시고, 내가 그 부름에 응답하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에는 여명이 찾아온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아담아!”, “아브라함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삭개오야!”, “사울아!"
하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시다니! 이에 더 이상 의미 없는 몸짓과 눈짓으로 살지 않겠다고 “아멘!" 하며 응답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시인 장정일은 김춘수 님의 〈꽃〉을 패러디해서 재미난 라디오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전파가 되었다.
_〈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또한 모 음악가전 회사 광고 공모전에서 수상한 카피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음악은 세 번 태어납니다.
베토벤이 작곡했을 때 태어나고
번스타인이 지휘했을 때 태어나고
당신이 들을 때 태어납니다.
이름을 불러 줄 때 잡초가 되지 않고 꽃이 된다. 단추를 눌러 줄 때 사각 입면체 라디오는 전파가 된다. 감동으로 들어 줄 때 음악은 다시 태어난다. 누군가를 살리고 싶으면 불러 주고 눌러 주고 들어 주어야 한다. 김춘수 님의 「꽃」 후반부는 이렇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어떤 인생이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린다. 어느 누구도 하나의 몸짓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꽃으로 피고 싶고, 눈짓이 되고, 의미로 남고 싶은 것이다. 키케로는 “명예를 가볍게 여기라고 책에 쓰는 사람도 자기 이름을 그 책에 쓴다" 라고 했다. 그만큼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하늘나라의 꽃으로 피어나도록 하는 거룩한 행위다. 한 영혼의 이름을 불러 주어 그가 하늘 나라의 꽃으로 피어나는데 쓰임받는다면 이처럼 보람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도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다.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긍정 과잉으로 인한 극도의 피로감을 말한다. 한병철 교수는 지난 시대를 부정성의 시대'라고 하면서 그때는 억압, 차별, 금지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긍정성의 시대'라고 한다. 본래 '긍정'이란 좋은 희망의 상징이다. 그러나 현대는 단순한 긍정의 시대가 아니라 '긍정 과잉'의 시대이기에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 결핍, 행동과잉장애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감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한다.”
'지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한 긍정의 사회이고, 너 또한 무한 긍정의 존재이니 이러저러한 성과를 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압박하는 사회, 오늘날의 과잉 긍정은 성과를 요구하고, 그 성과를 내지 못할 때 우리는 무능하고 우울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피로사회' 이다.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또한 무엇이든지 해야 하는 무한 질량의 존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무엇이든 다 하고 무엇이든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발견하고 그 일을 자부심 있게 하며 불꽃같이 타오르는 사람이다.
*켄 블렌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있다. 춤을 출 몸 구조가 아닌 고래도 극진한 칭찬을 받으면 춤을 춘다는 것이다. 고래가 춤추게끔 하는 정성을 사람에게 1/10만 쏟으면 모든 사람이 춤을 추게 될 것이라는 좋은 뜻이다. 그러나 고래는 춤을 추려고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고래는 바다에 있어야 한다. 바둑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이인환은 “고래여, 춤추지 말라" 라고 한다.
“고래는 지구상 최대의 동물이다. (중략) 그런 고래를 춤추게 하고자 하는 세상이 있다. 그 세상 사람들은 고래를 가두고 춤을 추게 한다. 충이란 원래 스스로의 신명이 몸짓으로 발현되는 것인데, 그 춤은 그게 아니다. (중략) 사람이나 고래나 그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할 때 춤을 추는 것이 고래에게 행복한 일은 아니다. (중략) 고래여, 칭찬에 현혹되지 말라. 그 칭찬은 너의 몸을 병들게 하고 너의 자유를 빼앗는다. 너의 몸은 위대하며 너의 자유는 대양의 넓이만큼 가없다.”
고래는 바다에서 훨훨 유영을 하면 된다. 그것이 고래의 춤이다. 그에게는 그의 춤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춤이 있다. 내가 그의 춤을 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이었다. 아직도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십자가에 서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주시는 일이었다. 그것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예수님은 그 일에 집중하셨으며, 마침내 그 일을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 그가 모든 일을 다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할례자, 즉 유대인의 사도의 사명을 주셨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셨다.
* 시인 천상병은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라고 했다. 무한한 창공을 나는 것 같은 비행기에게도 길이 있고,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이렇듯 만물에게 모두 길이 있는데,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무한한 길이 보이는 듯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시는 일이 있다. 비전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다 하고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자부심 있게 하며 타오르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피로사회》 속에서 피로 인생을 살게 된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냐고 한다. 역으로 수박에서 줄을 지운다고 호박이 되지도 않는다. 수박은 수박의 맛이 있고, 호박은 호박의 맛이 있다. 수박이 부럽다고 호박이 제 몸에 줄을 그을 필요가 없다. 태양이 부럽다고 달이 제 몸을 불덩이로 태울 필요도 없다. 돼지가 코끼리 코를 보고 부러워할 것 없다. 그대로 내 멋을 내면 된다.
짜장면은 짜장 맛을 내면 되고, 짬뽕은 짬뽕 맛을 내면 된다. 짜장면이 짬뽕의 국물 맛을 보고 고개 숙일 필요가 없다. 짜장면이 탕수육의 아삭한 맛을 보고 기죽을 필요 없다. 짜장면은 짬뽕과 탕수육이 흉내 낼 수 없는 짜장 맛을 내면 되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이 있고, 그가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일 그 일을 하면 된다.
행복한 짜장면은 짬뽕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노인과 바다〉는 던져진 존재'를 말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보내진 존재’라고 하신다.
노르웨이의 위대한 현대 화가인 에드바르트 뭉크는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미술사의 흐름에 한 전환점을 제기했다. 그가 같은 배경에 다른 모습을 그린 '불안 3부작인 〈절망〉, 〈절규〉, 〈불안)은 현대인의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뭉크의 표현대로 많은 학자들이 현대를 '불안의 시대' 라고 한다.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세계적인 명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현대 사회를 불확실, 불확신성의 시대로 규정했다. 그는 사회의 예측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불안은 커지고 있다고 했다. 인간은 언제나 불안했지만 현대는 더욱 그러하다. 미국 시인 W.H. 오든은 〈불안의 시대〉라는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세계적인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은 오든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피아노와 관현악곡 〈불안의 시대〉를 작곡했다.
이러한 '불안'을 철학적 의미로 해석한 사람이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그는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내던져진 존재'라는 것이 불안의 근본 이유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지도(地圖)도 없는 큰 바다 가운데 가련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텅 빈 무대에 대본 없이 던져진 배우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내진 존재'라고 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계시고, 보내신 분의 뜻, 즉 비전이 있고,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이 지금도 임마누엘로 함께하신다. 우리는 무의미하게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어 이 땅에 보내진 존재'이다. …
〈노인과 바다〉의 저자인 헤밍웨이는 안타깝게도 사냥총으로 자살했다. 자살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우울증, 알코올중독, 가정불화, 더 좋은 작품을 못 쓸 것 같다는 중압감, 외부 압력설…. 그의 자살 앞에서 신앙인이 가지는 고전적인 생각을 해본다.
‘헤밍웨이가 하나님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노인과 바다〉에서 최고의 구절로 회자되는 것이 있다. 노인이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면서 하는 말이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헤밍웨이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 승부를 넘어선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러나 노인과 헤밍웨이의 진짜 실존을 보여 주는 구절은 따로 있다고 본다. 작품 중 노인은 거대한 물고기를 배에 묶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물고기가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물고기를 데리고 가는 것일까?'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넓디넓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상어 떼와 싸우며, 앙상하게 뼈다귀만 남은 고기를 끌고 간다. 물고기가 자신을 데리고 가는 지, 자신이 물고기를 데리고 가는 지도 모르는 채.
*물리학자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야심차게 생명창조의 연구를 시작한다. 수없는 실패 후, 해부실과 도살장에서 사체를 조합해 인간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그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보고 경악한다. 기대했던 사랑스런 모습이 아니라, 차라리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괴물은 외롭다면서 사랑할 여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기막혀 하며 냉정하게 요구를 거절한 후 떠나 버린다. 괴물은 떠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아버지라 부르며 애처롭게 붙잡는다.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괴물에게 폭언까지 하며 떠난다. 괴물은 자신을 버린 이 비정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괴물은 먼저 허름한 축사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관찰하며 인간의 언어를 익히고 사유 능력까지 배운다. 이제 복수 준비를 마친 괴물은 마을로 숨어든다. 그리고는 프랑켄슈타인의 동생과 아내까지 살해하고 북극으로 도망간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프랑켄슈타인은 절규한다. 그리고 괴물을 죽이기 위해 북극으로 떠난다. 그러나 그는 탐험대 배 안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괴물은, 탐험 대원들에게 스스로 몸을 불태우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후, 이 괴물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조 박사와 피조물 사이의 불편한 증오, 복수, 그리고 죽음.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어디부터 어긋났던 것일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사랑에 대한 좌절이 미움이라면, 사랑하는 마음의 죽음이 바로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가장 비인간적인 요소이다. 무관심하면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무감동(無感動)하는 법. 그는 괴물이 어떤 말을 해도 무감동했고, 그에게 한 번도 따뜻한 사랑을 보여 주지 않았다. 이것이 그를 진짜 괴물로 만들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괴물이 된다. 사랑받지 못하고 거부당한다고 느끼면 몸까지 아프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 자의 촉수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의식 속에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다. 그것이 괴물 같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고통들이 있습니다.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 집이 없어서 오는 고통, 모든 질병에서 오는 고통. 그러나 이것은 물리적인 것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외로운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 옆에 아무도 없는 소외감이 아닐까요.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몹쓸 병은 '누구도 자신을 원치 않는다는 것'임을 살아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과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있다. 괴물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꽃으로 피어났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말로 충분히 담을 수가 없다.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많은가.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아가페'라는 단어이다. 신약성경 곳곳에 아가페 사랑이 나온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5장의 사랑 이야기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있을때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무기력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괴물이 되었을 그때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눈물겨운 주님의 사랑이다.
성경의 두 기둥을 이루는 신학은 창조 신학과 구원 신학이다. ‘하나님의 창조' 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나타난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하셨다. 그러나 '구원'은 수많은 세월을 인내하시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시면서 이루셨다. 죄인 되고 괴물된 우리를 버리고 새로운 창조를 하셔도 되는데,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
그 사랑, 그 이름을 불러 주심이 있었기에,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되지 않고, 하늘나라의 꽃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프랑켄슈타인 괴물이 아니다. 아무리 실패하고 넘어져도 여전히 하늘나라의 꽃이다. 그러니 꽃처럼 웃자. 이웃을 향해 황홀하게 눈 맞추며 축복하자.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는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했다. 말이 600만 명이지 사실 생사람을 그렇게 죽인다는 것은 아무리 악마의 탈을 써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에 나치는 고도의 심리적인 전술을 썼다. 수만 명이나 수용되어 있는 수용소에 화장실을 몇 개 짓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숙소에 배설할 수밖에 없었다. 숙소는 짐승의 우리처럼 자신들의 배설물로 가득 찼다. 나치가 이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 자존감의 몰락이다. 나치는 유대인을 죽이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인간이 아니라 돼지를 죽이고 있다."
악한 마귀가 우리에게 노리는 노림수가 이것이다. 마귀는 우리의 자존감을 무너뜨려 삶을 무너지게 한다. 이 가운데 기적적으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그는 반 컵의 물 때문에 살았다고 한다. 매일 새벽이면 커피 한 잔이 배급되었는데, 이름만 커피일 뿐 미지근한 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살아남은 그는 그 물을 반 컵만 마시고 나머지로는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그러자 나치들이 그에게만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 반 컵으로 세수를 하고 그는 눈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나는 돼지가 아니야! 나는 하나님의 최고 작품인 인간이야!"
수용소의 유대인처럼 마귀는 예수님을 상품화 시키려 했다.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 보고 돌로 떡을 만들라고 유혹했다. 그런데 마귀가 던진 말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단지 떡 즉 굶주림의 문제가 아니다.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즉 돌을 떡으로 만들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정해 주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품화이다. 소유와 능력으로 인정받는 상품화 세계와 같이 예수님을 상품 취급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기록되었으되' 라고 선언하신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능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고 계신 것이다. 즉, 돌을 떡으로 만들던 안 만들던 상관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다. 상대화 상품화 될 뻔한 계략 속에서 다시금 절대화, 작품화 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우리의 능력이나 성공 여부, 인기나 평판과는 상관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들을 희생하실 만큼 사랑하시는 가치 있는 존재이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칠환 님의 시, 새해 첫 기적이다. 저마다 서로 다른 하늘, 서로 다른 보폭,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온 이들이 새해의 벅찬 출발을 함께 맞는다. 새해 새날은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황새는 날고 날아서, 말은 뛰고 뛰어서, 거북이는 걷고 걸어서, 달 팽이는 기고 기어서, 굼벵이는 구르고 또 굴러서, 여기 새해 출발점에 온 것이다. 한날한시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 이들의 도착에는 1등, 2등, 3등의 높낮이가 없다. 그런데 마지막 광물계 바위의 참여가 압권이다. 시인은 바위에게 따로 한 연을 뚝 잘라 주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앉은 채로 도착하다니. 다들 날고, 뛰고, 걷고, 기고, 굴러서 왔는데 앉은 채라니. 바위는 남들이 보기에 가만히 앉은 채로 새해를 맞은 것 같다. 거저먹은 것 같다. 자격 미달이다. 그러나 시인은 바위도 열심히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고 한다. 앉은 채로 말이다. 시인의 눈에 바위는 자기 식으로 가만히 앉은 채로 최선을 다해 달려 왔다.
판화가 이철수의 가난한 〈머루송이에게〉를 보면, 가느다란 가지 끝에 열일곱 개의 작은 머루송이가 달려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적혀 있다.
“겨우 요것 달았어?”
"최선이었어요....”
“그랬구나... 몰랐어. 미안해!"
머루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 바위처럼 말이다. 고통에 고개 숙인 바위 같은 존재들도, 새해 새날 출발에 거룩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존재의 선언!
*닉 부이치치 - 그는 희망 강의를 할 때 갑자기 넘어지면서 강연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넘어진 상태에서 핀 마이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우리는 걸어가다가 이렇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넘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나십시오. 나는 백번이라도 다시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마를 땅에 대고 힘들게 힘들게 일어난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애처로워 우는 사람도 있다. 겨우 일어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한 은사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넘어졌다가 일어서기만 해도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요. 저도 일어서는 데 여러분이 못 일어설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사람들은 울먹이던 얼굴에서 감동의 웃음으로 변하며 심령이 치유가 된다. 그리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큰 것을 주어야만 준 것이 아니다. 일어서기만 해도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 웃기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 절망해 타락한 장소에서 타락한 몸짓을 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신실하게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모습만 보여 주어도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
그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닉 부이치치.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다섯 명의 여인이 나온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부적절한 관계를 한 여인이었다. 룻은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했던 이방인 모압 족속의 여인이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기였다. 우리야의 아내는 다윗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여인 밧세바이다. 다섯 명의 여인 중, 마리아 한 명 빼고는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상처 많고, 여린 사람들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이들이 신약성경을 여는 첫 부분을 장식했다. 새해 첫날 도착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보자. 성경에 여러 귀신이 한꺼번에 들어간 경우가 몇 나온다. 거라사의 광인에게 '군대 귀신'이 들어갔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일곱 귀신'이 들어갔다. 군대 귀신이 무어고 일곱 귀신이 무언지 상상이 안 간다. 분명한 것은 한 귀신이 들어간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일곱이나 군대의 숫자만큼이나 들어갔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그랬던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고 치유 받고 변화 받아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부활의 새 아침을 여는 데 첫 주자가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약하고 허물 많은 우리를 택하신 주님,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시는 주님이 참 좋다.
다시 한 번 새해 첫 출발선에 선 미물들을 보자. 황새, 말, 거북이, 달팽이, 굼벵이, 바위는 살아온 환경도 지금 사는 곳도 층도 다르지만, 각자 낱낱의 하늘에서 높고 낮음이 없이 아름답다. 황새가 날고, 말이 뛰고, 달팽이가 기고, 굼벵이가 구르며 저마다의 몸짓을 하듯이, 바위 역시 자신의 몸짓으로 앉은 채로 몸짓을 했다.
"바위 같이 움직일 수 없었던 네! 너도 앉은 채로 새해 출발점에 왔구나.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주님은 시의 한 연을 차지하라고 하면서, 네가 새해 출발점에 선 것이 기적이라고 세워 주신다.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있다. 그러나 “자식은 선택할 수 없지만 사위는 고를 수 있다” 라는 말이 있다. 내가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길이 있다는 뜻이다. 주님이 주신 타고난 얼굴이 있지만, 지금 내 얼굴은 그간 스스로 선택해온 결과로서의 얼굴이다. 어제의 선택은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오늘의 선택은 미래의 나를 만들어간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장 폴 사르트르는 선택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Life is Choice Between Birth And Death” (삶은 출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
B와 D사이에 C가 있듯이,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 선택(Choice)이 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입을 옷을 선택 하고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사소한 선택에서 부터,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는 큰 선택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선택과 선택. 인생은 선택이고 행복도 선택이고 신앙도 선택이다. 밤하늘에서 검은 어둠을 볼 수도 있고, 빛나는 별을 볼 수도 있다. 비 오는 날 짜증을 낼 수도 있고, 비를 맞고 싱그럽게 올라오는 눈록색 잎을 보면서 환희를 느낄 수도 있다. 보름달을 보면 울부짖는 늑대가 될 수도 있고, 시를 읊조리는 이태백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은 지금 두 길을 모두 선택할 수 없어 아쉬웠다고 말한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두 길을 다 가질 수 없다. 탐욕이란, 두 길의 영광을 다 가지려는 것이다. 과식하면서도 건강하고 날씬해지려 하고, 과속하면서도 안전하려 하고, 공부는 안 하면서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 하는 것이 탐욕이다.
*결정적인 선택의 날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상의 선택을 위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말씀하신다. 무엇보다도 예배 때 최상의 선택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 겸손한 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신실한 예배 속에서 주
님의 음성을 듣는다.
프로스트는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시인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선택한 길에 대한 열정과 환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지 못한 길에 마음을 뺏기지 말자.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가지 않은 길'을 자랑스러워하자.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지금 걷고 있는 좁은 길을 즐거워하자.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영광을!
유하의 시, 〈오징어〉의 한 구절이다. 영원의 공간 같은 어둠을 뚫고 바다로 배가 나아간다. 그리고 일제히 배 위에 설치된 모든 집어등을 켠다. 집어등은 물고기를 소집시키는 등불, 오징어에게 이 화려한 불빛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물고 싶은 치명적 유혹을 안고 있다. 오징어들은 죽는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이 불빛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끼를 덥썩 문다. 시인은 곳곳에서 화려하게 빛을 내며 우리를 유혹하는 치명적인 집어등을 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우리는 살면서 온갖 유혹에 시달린다. 더 잘 먹고 싶은 기본적인 유혹에서부터 남보다 더 잘나고 인정받고 싶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유혹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혹의 집어등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특히 이성에 대한 유혹과 재물, 권력에 대한 유혹은 우리의 삶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실패'를 뜻하는 ‘failure’에 '유혹하다'라는 의미의 ‘ilure’가 들어 있다. 유혹을 관리하지 못하면 곧 실패한 인생이 된다.
*카피라이터 정철의 《내 머리 사용법 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바다는 갈매기가 자신에게 하루에도 수백 번씩 키스를 한다고 믿는다. 키스의 황홀함에 취해 물고기를 도둑맞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우리는 거짓 키스의 황홀함에 넘어가는 것이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것일수록 아름답게 보인다. 다시 말한다. 마귀는 마귀스럽지 않게 나타난다. 마귀는 한술 더 떠서 자신을 빛의 천사와 같이 보이게 가장해 황홀한 키스처럼 달콤하게 다가온다. 그 거짓 아름다움에 속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최초의 유혹을 보라. 사탄은 선악과를 먹어도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라고 말한다. 얼마나 희망적인 말인가? 뿐만 아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창 3:5)라고 한다. 그야말로 황홀한 유혹이다. 하와가 그 나무를 보니 정말 먹음직스러웠고 탐스러웠다. 볼수록 멋지게 보였다. 먹기만 하면 하늘에 견주는 지혜가 생길 것 같았다.
삼손에게 나타난 들릴라를 생각해 보라. 다윗에게 나타난 밧세바를 보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삼손과 다윗에게는 그녀들이 보암직하고 사랑스럽고 인생을 멋지게 할 만한 탐스러움이 넘쳐나게 보였을 것이다. 시인 유하의 경고를 다시 읊조려 보자.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 2막 7장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그대는 이 말을 자주 들었으리라. 많은 이들이 나의 외양만을 보고 자신의 생명을 팔았지. 금칠한 무덤엔 구더기만 우글거리니."
빛이 난다고 해서 다 금은 아니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이 세상의 수려한 꽃들은 다 흔들리면서 바람과 비에 젖으면서 꽃을 피워낸다. 천국의 도성을 향해 가는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남아 있는 죄 성(indwelling sins)은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존재한다. 그 죄 성과 싸우며 성화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거룩함은 아예 유혹을 받지 않는 게 아니라, 유혹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죄의 유혹이 아무리 크다 해도, 죄는 거듭난 사람을 다시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죄의 유혹을 이길 능력을 제공한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유혹을 견디는 힘, 유혹에 저항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해답은 주님이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것이다.
무조건 마시멜로의 유혹을 참는 것과 왜 참아야 하는지 알고 참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유혹을 억지로 참으면 언젠가는 또 유혹에 넘어간다. 나를 유혹했던 잔상이 마음에 남아 있는 한 결국 또 유혹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유혹보다 더 좋은 것을 내면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유혹보다 더 좋은 내면 그것은 바로 주님이 주신 사명이다. 이러한 주의 사명으로 유혹을 이긴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세례 요한이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다가와 큼직한 말을 던진다.
“당신이 혹시 메시아가 아닙니까?"
정말 큰 유혹이다. 집어등보다 강렬한 미끼다. 요한은 그때 자신이 돈키호테라고 말 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은유적이고 애매한 말을 함으로써, 신비주의로 자신을 감쌀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5,16)”
요한은 자신이 태어난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돈키호테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 속에 태어난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집어등 불빛의 유혹이 아무리 강렬해도, 미끼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여기서 '허영'을 영어 번역으로 보면 '베인 글로리' (vain-glory)라고 되어 있다. '글로리 (glory)′란 말은 '영광'이라는 의미이고, '베인 (vain)′은 '비어 있다' 라는 뜻이다. 속이 비어 있는 ′영광'이 바로 허영이다. 한자(漢字)를 보아도 같은 의미이다. 허영(虛榮)은 '비어 있다'라는 의미의 허(虛)와 '화려하게 꽃 피어 있다'라는 의미의 '영'(榮)이 결합되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허영을 가리켜 거짓된(vain) 영광(glory)이라고 했다. 내가 이 정도의 사람이라고 남에게 보여 주고 싶은 욕망! 허영은 헛된 것, 바람 같이 없어지는 것의 상징이다.
허영 자기의 본 모습을 넘어서 자기를 크게 포장해 과시하고 싶은 욕구, 이것이 허영이다. 허영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으로, 남들 앞에 크게 높아지
려는 인간의 죄 성이다. 교만이 자리와 권력과 관련이 있다면 허영은 사람의 주목과 인정에 연연하는 죄악이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우리 모두에게 만연되어 있는 허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허영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졸병이나 미장이도, 요리사나 짐꾼도 허풍을 떤다. 그리고 자기에게 감탄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철학자들조차도 그것을 원한다. 비판적인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도 잘 썼다는 명성을 얻고 싶어 하고 그들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읽었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고 더 애쓰는 경우가 많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는 허영심 때문에, 자기 앞에 있는 진짜 행복을 놓치는 수가 많다. 시계가 시간이 아니고, 장식품이 본질이 아니듯 향수는 향기가 아니다. 그리고 허영은 진정한 영광이 아니다. 허영은 자신의 정신적인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허영으로 가득 찬 겉치레를 두르고 나타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이 '와! 멋지다'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마도 '불쌍하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탄이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던 예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한다. 천사의 호위 속에 땅에 사뿐히 내려 앉아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가 되라는 것이다. 허영을 부추긴 시험이었다. 사탄은 예수님이 헛된 영광에 눈이 멀어 십자가를 잊어버리게 현혹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허영의 유혹에 눈 하나 깜박이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십자가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를 겪어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고, 계속 전이되는 암과 투병했던 장영희 교수는, 기적이 아닌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기적과 같은 하루가 주어졌음에 감사하고, 석양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기적처럼 살아 낸 것에 감사하며, 잠자리에 들 때면 “하나님, 내일 아침에도 제게 기적을 주시겠습니까?" 하는 마음으로 소망을 품었다고 한다.
장영희 교수의 자전적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괜찮아!"
난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면 괜히 가슴이 찡해진다.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독일에 졌을 때, 관중들은 선수들을 향해 외쳤다.
"괜찮아! 괜찮아”
혼자 남아 문제를 풀다가, 골든벨을 울리지 못해도 친구들이 얼싸안고 말해 준다.
"괜찮아 괜찮아!”
"그만하면 참 잘했다” 라고 용기를 주는 말, "너라면 뭐든지 다 눈감아 주겠다”라는 용서의 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데 편이니 넌 절대로 외롭지 않다”라는 격려의 말, “지금은 아파도 슬퍼하지 말라"라는 나눔의 말, 그리고 마음으로 일으켜 주는 부축의 말, 괜찮아!
그래서 세상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느낄 때, 죽을 듯이 노력해도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내 따뜻한 추억 속, 골목길 안에서 들은 말, “괜찮아! 조금만 참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평생 병환을 안고 살았던 장영희 교수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용기가 된 말이 “괜찮아” 였다고 회상한다. 어린 시절 몸이 불편해 친구들의 놀이에 끼지 못했을 때, 지나가던 깨엿장수가 미소를 지으며 해 준 말, “괜찮아!"
그 단순한 위로의 말이, 깊은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 못지않게 따뜻한 말,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기다릴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꽃이 늦게 핀다고 미운가? 조금은 느려도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그 일이 대수롭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 힘을 내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을 잃을 수도 있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만나기도 한다. 사업의 실패로 낙심할 때도 있다. 가까운 사람과 관계가 어그러져 상처를 입기도 한다. 배신의 상처로 몸서리 칠 때도 있다. 오해를 받기도 하고, 나 혼자인가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괜찮아, 나도 그랬어. 나도 오해받았고, 배신당했고, 다 떠난 자리에서 홀로 있었고, 십자가에서 온몸이 찢겨져서 몸이 아픈 것이 무엇인지 안단다. 괜찮아, 힘 내거라. 나에게로 오거라.”
히브리서 4장 15,16절의 말씀이 바로 그 의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자기와 늘 함께하며 따라왔던 제자들이 다 떠나가는 현장에서 느꼈던 소외감, 그리고 외로움. 사랑하는 동족들에게 동족의 반역자로 여김을 당했던 오해받으심. 제자의 손에 팔려 버린 그 몸서리치는 배신감. 제자로부터 거짓 키스를 받았을 때 요동쳤던 감정의 괴로움. 더 나아가 한 번도 교제가 끊어진 적이 없던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의 아픔. 우리의 죄를 짊어짐으로 죄인으로 정죄를 당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비명을 외쳐야만 했던 그 비통함, 십자가에서 말 한 마디, 호흡 한 번 할 때마다 피와 물이 쏟아졌던 극심한 육체의 괴로움…. 이 모든 아픔과 좌절을 당하신 우리 주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알아, 나도 알아! 나에게 오면 괜찮아!"
* 우리는 부족함을 통해서 상상력을 배우게 된다. 이어령 교수는 부족함의 역설적인 복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흔히 낙원이라고 해서 '파라다이스'라는 말을 쓰는데, 이 용어는 원래 이집트어로서 에덴동산 같은 낙원이 아니라 황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중략) 황야이기 때문에 거기에 나무를 심을 수 있고, 꽃을 가꿀 수 있고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지 에덴동산처럼 처음부터 완성된 동산이라면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그것은 낙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중략) 거칠고 황량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력 속에서 꽃과 나무들이 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 가지 이상 결핍된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건강이든, 돈이든, 외모이든, 환경이든, 관계이든. 결핍이 없는 사람은 없다. 삶은 이러한 결핍을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있을 때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애틋해 한다.
힘이 있으면 질러 버린다. 그리울 틈도 기다릴 틈도 설레일 틈도 없다. 인생의 큰 아름다움 중 하나인 그리움과 설레임은 부족하고 결핍될 때 나온다. 햇빛만 쏟아지면 사막이 된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황량한 사막 속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아라비안 나이트를 보라. 수많은 꽃과 나무 이야기, 아름다운 녹지와 정원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꽃과 나무가 결핍되어 있는 모래 위에서 상상의 꽃들을 전설처럼 피워왔던 것이다.
*그러나 결핍을 통해서 무조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부족함 때문에 독을 만들어 자신도 찌르고 이웃을 찌를 수도 있고, 부족함 때문에 겸손을 배워 깊은 공명을 울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있는 부족한 점은 우리를 한없는 열등감의 세계로 이끌 수도, 강
한 존재로 거듭나게 할 수도 있다.
나의 부족함이 주님을 만나야 한다. 나의 약함이 주님을 만날 때, 약함은 주님의 능력이 머무는 공간이 된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 최선이 있을 때는 차선은 차선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 성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최선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 예수님을 배신했던 사도 베드로, 집 나갔던 탕자. 모두들 실수와 허물투성이다. 탕자의 경우를 보자. 탕자에게 있어서 최선의 삶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떠났다. 갖은 고난 끝에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부터 차선의 삶인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녀의 자격이 없으니 품꾼의 하나로 여겨 달라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는 최선의 삶을 살지 못한 탕자에게 나가 죽으라고 말하지 않고, 그의 차선의 삶을 축복했다. 그러면서 '너는 품꾼이 아니라, 여전히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며 다시금 새 힘을 주신다. 맑은 물이 없으면 탁한 물을 마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선이 아니면 제로(0)?" 그렇지 않다. 실패가 곧 끝이 아니듯이,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 있다. 평범도 지극하면 비범이 된다. 차선도 지극하면 최상이 된다. 인생을 살아갈수록 '전부가 아니면 전무(全無) (all or nothing)의 흑백논리를 떠나 긴 호흡으로 차선을 바라보자.
*우리가 흔히 '차선' 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기독교 상담학자 래리 크랩은 《깨어진 꿈의 축복》에서 또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하나님, 날 사랑하신다면서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제가 바랐던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하나님 잘 섬기면서 이 한 세상 행복하게 사는 것뿐인데, 왜 제 꿈을 앗아가시나요?"
이루고 싶던 꿈이 깨지고, 인생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쓴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는다. 더군다나 이런 외침 속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고난이 깊어만 간다면 그 황망함도 깊어진다.
래리 크랩은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이야기로 깨진 꿈을 통해 보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축복이라는 낮은 차원의 꿈을 깨뜨리시면서 가장 위대한 꿈, 즉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사귀며 변화되는 꿈을 꾸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다 위대한 것을 향한 열망을 주시기 위해, 선하지만 저차원적인 우리의 꿈을 깨뜨리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행복이 아니라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행복을 주시려고 우리의 작은 꿈을 잠시 접으신다는 것이다.
래리 크랩의 말을 계속 들어 보자.
“이렇게 저 차원적인 꿈이 깨어져 고통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것이 세상적인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의 꿈이 깨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실패의 사건들은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이자, 진정한 기름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는 기나긴 여정 속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중략) 꿈이 깨어질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중략) 이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기회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상의 축복을 주길 원하신다는 것과,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항한 열망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꾸고 있던 꿈이 깨졌다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이제부터는 차선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자여, 지금부터가 최상이다!"
깨진 꿈과 고난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하게 된다면, 깨진 꿈은 위대한 꿈으로 변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이루고 싶던 꿈이 깨지고, 인생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쓴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는다. 더군다나 이런 외침 속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고난이 깊어만 간다면 그 황망함도 깊어진다. 래리 크랩은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이야기로 깨진 꿈을 통해 보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축복이라는 낮은 차원의 꿈을 깨뜨리시면서 가장 위대한 꿈, 즉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사귀며 변화되는 꿈을 꾸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다 위대한 것을 향한 열망을 주시기 위해, 선하지만 저차원적인 우리의 꿈을 깨뜨리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행복이 아니라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행복을 주시려고 우리의 작은 꿈을 잠시 접으신다는 것이다.
래리 크랩의 말을 계속 들어 보자.
“이렇게 저 차원적인 꿈이 깨어져 고통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것이 세상적인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의 꿈이 깨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실패의 사건들은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이자, 진정한 기쁨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는 기나긴 여정 속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중략) 꿈이 깨어질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중략) 이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기회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상의 축복을 주길 원하신다는 것과,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향한 열망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이다.”
*'스펙' 이란 말은 기계의 사양을 뜻하는 'specification'을 뜻한다. 따라서 '스펙이 좋다'는 말은 다른 제품이 가지지 못한 기능들이 있음을 뜻한다. 즉, 기능적인 면을 의미한다. 반면 ′스토리' 즉 ‘이야기’란, 스토리텔링의 전문가 리처드 맥스웰의 표현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에 감성을 입힌 것”이다. 비슷비슷한 기능을 넘어선 독특한 실력을 의미한다.
스펙은 '최초', '최대', '최고'를 지향하지만, 스토리는 '유일한', '독특한', '특별한’ 과 같은 말을 좋아한다.
스펙은 숫자로 표현되지만, 스토리는 가슴으로 표현된다.
스펙은 나의 성공만 내세우지만, 스토리는 나의 약점이 오히려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스펙은 남을 경쟁상대로 보고 나 한 사람만 기쁘게 하지만, 스토리는 모두를 기쁘게 한다. 스토리 속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사도 바울의 몸에는 돌팔매질과 몽둥이로 맞은 흔적이 있다. 그 밖에 수많은 노고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한 흔적이다. 사도 바울은 이 흔적들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한 자신의 스토리라고 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의 깊이만큼 흔적을 가지는 것이다.
행복한 노년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던 스토리에 대한 추억이 많은 사람이 맞는 노년이다. 반면 가장 초라한 노년이 무엇일까?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는 하나 없고 전부 자신의 욕심을 좇아 살아온 사람이 맞이한 노년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나의 역사는(history)는 하나님의 이야기(His Story)가 된다. 스펙이 초라하다고 기죽지 말아야 한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삶. “하나님!" 하고 부르면 깊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는 삶! 하나님과 깊이 동행했던 시간이 있는 삶, 하나님과 동행했던 물질, 하나님과 동행했던 열정의 이야기가 있는 삶. 이런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
* “만약 내 앞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생'과 '나를 실어하는 사람이 있는 인생이 있고, 이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치세, 나라면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택할 걸세.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 즉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거지.”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
아들러에 의하면, 인간의 고민은 거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늘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움받을 용기'를 가질 때 훨씬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해 진다고 권면한다.
사실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인정 중독' 때문에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다. 모든 사람에게 다 사랑받고 싶다? 참 좋은 소망이다. 이 꿈이 나쁜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이 꿈을 좇아야 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사랑받으려면 내가 없어져야 한다. 내 가슴은 까만 숯덩이가 되어야 한다. 그저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맞추려고 내 자신과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둘은 날 싫어하고, 여섯은 관심이 없고, 둘은 나를 좋아한다. 우리 모두는 죄 성이 가득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갈등이 없는 완벽한 관계? 트라우마가 한 조각도 없는 청명한 삶? 모두가 날 좋아하는 삶? 이것은 비현실적인 꿈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예수님과 제자들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에게 미움을 받았다. 죄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았기에 그러하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그러한데,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것은 안개 같은 꿈이자 또 하나의 교만이다.
* 사랑과 친절의 왕이신 예수님도 어떤 사람 어떤 말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신 것이다.
다양성이 곧 정당성은 아니다. 지질한 말을 하면서도 이런 다양성이 있으니 경청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졸도하고 싶다. 그냥 넘어가야 할 말을 마음에 새기고, 깊이 경청해야 할 말을 무시해 버린다면 인생은 황무지가 된다.
'경청(傾聽)′은 핵심이 아니다. '어떤 말을 경청하는가?'가 핵심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더욱 경청하면서 죄가 시작되었다. 어떤 말을 경청하고, 어떤 말을 무시해야 하는가? 이 둘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다. 무시해도 될 말은 예의 있게 무시해야 한다. 사랑도 없고 교만한 사람이라고 질타 당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염려를 하지 말라. 진리 안에 있는가? 그렇다면 비 진리를 무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하나 더 생각해 보자. '무시'와 비슷한 말이 '거절' 이다. 거절해야 할 때는 거절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거절은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가 아니다. 어떤 제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자 관점일 뿐이다. 거절하지 않아야만 좋은 사람인 것도 아니고, 거절한다고 나쁜 사람인 것도 아니다. 거절할 줄 아는 것은 남의 요구를 수락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주변을 돌아보라. 거절을 못해서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탈리아 속담에 “나의 거절은 너의 찬성만큼 좋은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거절은 당장 보기엔 다소 불편하고 껄끄럽다. 그러나 정당한 거절은 자신을 지키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키는 길이다. 그러기에 예의 있는 거절, 현명한 거절을 하는 사람은 야박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고 더군다나 죄 성이 가득한 존재들이기에 내가 올린 글들 속에서 수많은 말실수를 한다. 이때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첫째는 철저하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고, 둘째는 맷집이다. 댓글로 난타를 당하고, 말도 안 되는 언어폭력을 당하면 자아가 위축되고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맷집이다.
거인이나 대가들의 특징 중 하나는 '좋은 의미의 둔감력(純感力)'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많은 눈, 그 독한 입들을 견뎌내는 둔감력이 있어야 남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대로 살 수 있고, 잠도 잘 잔다. 뿐만 아니다. 예민하지 않기에 대인 관계도 좋아진다. 우직하고 둔감한 바보들이 역사를 변화시켜 간다.
보름달이 수만 년 동안 떠올랐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늑대들은 어김없이 짖어댔다. 그러나 늑대들이 아무리 짖어대도 보름달은 그 둥그러움이 한 조각도 이그러진 적이 없다. 거인과 대가란 이와 같은 것이다.
너무 둥글둥글해서 자기가 없는 사람이 있고, 너무 모가 나서 자기만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육각형 같은 사람이 좋다. 원만하지만 자기 세계도 뚜렷한 사람 말이다. 예수님을 보라. 얼마나 둥글둥글하신가. 그는 어떤 부류도 다 포용하셨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는 단호하셨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시며 무시하기도 하셨다.
가능하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해야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진리를 위해, 의를 위해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맷집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나도 살고 이웃도 살게 된다.
"행복해지려면 '미움 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새처럼 날아오르라고 하지 않으신다. 새에게 바다에 들어가 헤엄치라고 하지도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잘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강점을 주셨고, 그 강점 안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이루길 원하신다. 약점을 보완하는 데 집중하면 50점, 강점에 집중하는 삶을 살면 100점이다.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전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살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의 시 구부러진 길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구불구불한 에움길이 있는 넉넉한 풍경이 떠오른다. 시인의 고백처럼 아름다운 것은 곡선이다.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나무가 더 멋스럽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는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새들도 곧은 가지보다 굽은 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고, 함박눈도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비단 나무뿐만이 아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굽이굽이 휘어진 강줄기가 더 정겹다. 길도 그렇다. 미끈하게 일직선으로 뚫린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구불구불 가는 길이 더 눈물 나게 아름답다. 직선으로 나는 새는 총으로 쏘아 떨어뜨리기 쉽지만, 곡선으로 나는 새는 겨누기조차 어렵다.
사람도 그렇다. 둥글둥글한 사람, 넉넉한 사람이 좋다. 어머님의 얼굴을 보면, 그 밑은 주름이 어머님이 살아오신 생의 길 같다. 누군들 직선으로 반듯하게 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리저리 치이다보니 이리 구부러지고 저리 구부러졌다. 그 구불구불한 주름 길이 우리를 살려 왔던 것이다.
*그렇다. 어느 누구나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보면 비틀거리며 흐트러져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휘청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 라고 하셨다. “들키지 말라”라는 제11계명(?)을 잘 지켰을 뿐이지 하나님 보시기에 올곧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 모두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똑바른 척, 자신만은 직선인 척 하며 사는 사람은 왠지 정이 가질 않는다.
사람의 말(言)도 그렇다. 건축에도 직선과 곡선이 있듯이, 말에도 돌직구 같은 직선의 말이 있고, 에둘러 말하는 곡선 같은 말이 있다. 직선으로 말하는 것이 속 시원하지만,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고, 그 은유(隱)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
예수님은 현장에서 잡혀온 간음한 여인에게 첫 대화부터 돌직구를 날리지 않으셨다.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 준 다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예수님은 이렇듯 곡선의 대가셨다.
*담장 너머로 풍겨오는 잘 익은 향기
다니던 길 벗어나 무엇인가 가보았더니
과연 사과나무 한 그루
여름의 짐을 편안히 내려놓고
잎사귀 몇 개만 남겨 놓은 채
이제 여인의 부채처럼 가볍게 숨 쉬고 있었다.
가을 사과는 풍작이었기에
땅에도 빨간 원을 이루었다.
안 거두어들인 무엇이 늘 있기를!
우리의 계획 밖에 있는 게 더 많이 있기를
사과는 무엇이든 잊어버린 채로 남겨두어
그 향내 맡는 일이 죄가 되지 되도록
로버트 프로스트의 14행 소네트 〈안 거두어들인〉의 마지막 4행이다. 다 거두어들인 인생만이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싹쓸이 하는 것이 1등이 아니다. 안 거두어들인 무엇이 있는 인생, 조금씩 남겨둔 인생, 이웃을 위해 조금씩 흘리며 산 인생이 이웃과 더불어 사과의 향내를 맡는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전통 가운데 '까치밥'이라는 것이 있다. 감나무의 감들이 노을처럼 빨갛게 익으면, 사람들은 겨울에 먹으려고 감을 딴다. 하지만 나무 꼭대기에 달린 몇 개는 추위와 배고픔을 겪을 까치들이 먹으라고 남겨둔다. 잎 진 감나무 가지에 남은 까치밥은 마을 최고의 풍광이다. 새빨간 홍시 하나가 까치 부리에 터지면 마을은 노을 빛 잔치가 열리며 사람 사는 향기가 난다. 또한 우리 조상들은 봄에 벌레들이 알을 까고 나오는 시기에는 짚신을 반 정도만 조여 느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혹여 벌레를 밟아도 벌레가 죽지 않게 만든 것이다. 참 아름다운 흘림, 아름다운 배려다. …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
내가 흘려야 이웃이 같이 먹는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보아도 그렇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기도하라고 하셨다. 더불어 같이 살라는 말씀이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라는 광고 카피가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2등이 있어야 1등도 아름답다. 위대한 2등 배경이 있었기에 1등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숲을 이루는 것은 나무들만이 아니라 나무와 나무 사이의 빈 곳'이다. 그 빈 곳의 '배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고 꽃이 핀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꽃이 있어야 하고, 그 꽃은 배경이 있어야 한다. 코스모스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배경에 있다. 코스모스가 서 있는 동산, 그 가을, 그 하늘, 그 바람이 모두 코스모인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밤새 울어댔다. 소쩍새는 덧없이 운 것이 아니다. 국화만 꽃이 아니라 배경이 되어 준 소쩍새의 울음도 꽃이다. 신선한 생각을 위해서는 신선한 배경이, 큰 생각을 위해서는 큰 배경이 필요하다. 말 또한 침묵의 배경이 없으면 깊이가 없다.
사람도 그렇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같이 배경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클 수 있다. …
성경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이인자가 둘 있다. 구약의 갈렙과 신약의 바나바이다. 이들은 별을 빛나게 해 준 밤하늘 같은 존재들이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버금가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
신약에는 바나바가 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꽃이었다. 그러나 그 꽃이 피기까지 수많은 동역자들의 배경이 있었다. 특히 바나바는 바울이라는 꽃의 가장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주었다. …
별이 빛나는 것은 밤하늘이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그대,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가? 별을 빛날 수 있게 배경이 되어준 밤하늘의 소중함을 늘 기억해야 한다.
"나를 딛고 일어서세요! 나를 배경으로 꽃으로 피어나세요!"
하늘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이렇게 배경이 되어 주는 사람이다.
*사람은 분명히 서로가 다르다. 생김새, 체형, 목소리, 생각하는 것, 습관, 말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 똑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복제 인간이다. 그런데 '다르다'라고 하지 않고 ′틀렸다' 라고 하면 마음을 닫고 단절한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게 되면 '다른 관점'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할 때 나오는 새로운 관점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으로 나타난다. 다름과 차이 때문에 독특함과 다양성의 세계가 열린다. 다름은 시너지 창출의 시작점이다. 남녀는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2010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전(戰) 종전 연설에서 전쟁에 찬성한 사람과 반대한 사람을 각각 이라크 전을 찬성한 애국자'와 '이라크 전을 반대한 애국자' 라고 표현했다. 찬성과 반대 의견을 구분해서 옳고 그름의 논리가 아닌 '애국자' 라는 공통분모로 묶어 모두를 승리자로 인정해 준 것이다.
그렇다고 틀림도 다름으로 우기면 더욱 안 된다. 틀린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분명히 틀린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는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인 진리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삼위일체, 십자가의 구원 등은 타협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다. 그러나 본질 외에는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17세기에 마르코 안토니오 도미니스가 선언했고, 어거스틴, 리처드 백스터, 존 스토트 등에 의해 널리 알려진 기독교 격언이 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in necessaris unitas, in unnecessaris libertas, in omnes charitas).”
이 명제는 비단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교회생활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같은 문제를 다른 시각과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음을 인정할 때, 즉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공동체는 놀라운 소통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깊이'를 의미한다. 마술사 시몬은 돈을 더 벌고 싶어서, 사람들의 환심을 더 얻기 위해, 즉 자신의 높이를 위해 하나님의 깊이를 돈으로 사려고 한 것이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된다. 깊이만큼 향기가 난다. 된장찌개의 맛은 깊이 발효된 콩과 땅에서 곰삭은 파의 우러남과 스밈에 있다. 이런 깊이는 없이 급조한 맛을 내려고 조미료만 뿌렸다면 그것이 맛이겠는가.
연못을 가득 채운 연잎을 보라. 위로, 밖으로 향한 그 푸르고 넓은 녹색 잎은 진흙을 뚫고 아래로, 안으로 향하는 뿌리의 노동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위로, 밖으로 향하고 싶은 꿈이 강할수록 아래로, 안으로 깊어져야 한다. 낮춤이 높임이다. 깊이의 내공이 옆으로 뻗을 수 있는 넓이를 결정하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삶의 길이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삶의 깊이와 넓이는 우리가 얼마나 성화(聖化)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도 수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코를 볼 것이다. 그러나 코가 그 사람은 아니다. 그의 높이도 아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깊은 인격',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깊은 사랑', 이 깊이가 그 사람의 진정한 높이이다.
* 예수님보다 바쁜 생애가 있을까? 예수님보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인생이 있을까? 예수님은 이러한 무게 속에서도 여백이 있으셨다.
우리의 신앙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신앙의 여백은 내가 다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4장에는 농부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자라는 씨앗의 이야기가 나온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작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6~28)”
이 구절을 보면 농부의 역할이 거의 없다. 농부가 자고 깨고 하는 사이에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즉 '농부의 손을 떠난 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의미이다.
삶을 살다보면 내 손을 떠난 일, 즉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내 손을 떠난 빈 공간이 바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시는 공간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것이 겸손한 삶이다.
또한 기도했으면 믿고 기다려야 한다. 기도할 때도 며칠까지 빨리 해내라고 하나님의 팔을 비틀며 협박하는 듯한 기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기도이다. 주님이 역사하실 틈을 자신이 꾸역꾸역 메꾸려 하는 교만함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을 인정하고 기다리며 바라보는 '신앙의 여백′이 필요하다. 여백이 클수록 하나님의 도우심과 채우심도 크다. 빈틈없는 나의 완벽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중요하다.
여백이 있는 글이 좋다. 여백이 있는 그림이 좋다. 여백이 있는 이론이 좋다. 여백이 있는 사람이 좋다. 여백이 있는 관계가 좋다. 여백이 있는 신앙이 좋다.
*구상 | 꽃자리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세상에는 두 공간이 있다. 내가 사는 '이곳'과 그가 사는 '그곳', 우리는 착각하기를 '이곳'은 메마른 일상과 현실이고, '그곳'은 풍경이고 동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풍경도 다가가 보면 일상이다. “파리의 낭만은 3일이면 족하다” 라는 말이 있다. 3일 정도 지나면 어느 곳이나 똑같은 '일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곳'이 꽃자리가 아니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주님이 주신 꽃자리이다. 성숙한 성도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한다.
나무가 모여 숲이 되듯이,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된다. 인생은 큰 사건 몇 가지와 수없이 많은 일상으로 이루어진다. 큰 사건도 중요하지만, 일상은 더욱 중요하다. 그렇다. 삶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합이고, 그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
호주의 신학자 마이클 프로스트는 그의 저서 《일상: 하나님의 신비》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초자연적 차원과 그 권능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차원만 추구하다 보면 잃는 것이 너무 많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놀란 듯 활짝 열려 있지 않다.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가? 부서지는 파도 속에 하나님 이 보이지 않는가? 갓 태어난 아기의 해맑은 눈동자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가? 장미 한 송이 혹은 영화나 책에 등장하는 인물, 아름다운 노래, 계절의 변화 가운데서는? 친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또한 맛있는 음식과 감미로운 대화에서 그분을 맛보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도처에서 확장되고 있다. 우리의 눈을 열어, 굉장한 사건을 주목하는 만큼 이른바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자.”
*성숙이란 '특별'에서 '보통'으로, '기적'에서 '일상' 으로 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기적 같은 하나님의 만나를 선물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후, 만나를 그치시고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일상으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역전(逆轉)이 일어난다. 주님이 인도하신 일상을 최상으로 가꾸면 '일상'은 다시금 '특별'이 되고 '기적'이 된다. 특별한 것이 없는 일상의 시간 ′크로노스'를 최상으로 가꾸면 하나님의 결정적인 시간 '카이로스'가 되는 것이다.
일상적인 크로노스를 하나님의 결정적인 시간 카이로스로 삼은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이다. 유진 피터슨은 다윗의 삶에 특별한 기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다윗의 이야기에는 단 한 번의 기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굉장히 놀란 적이 있다. 단 한 번도 기적이 없다."
참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행 13:22)이라는 존칭을 얻으며 이스라엘 역사, 아니 구약의 모든 역사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인물인 다윗의 생애에 기적이 없었다니!
다윗은 매일 땅 냄새, 땀 냄새 물씬 나는 먼지 속에서 양 떼를 지켜왔다. 심지어는 선지자 사무엘이 집에 찾아왔을 때도 막내아들이었던 다윗만은 양을 지키고 있었다. 양을 물어가는 맹수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치열하게 양들을 지켜냈다. 다윗은 일상과 현장을 신실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다윗이 그 유명한 거인 골리앗을 만난 것은 전쟁터에 있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전할 때였다.
시편 78편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부르신 이유가 나온다.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0-72)”
*현대 사회에서 군림하는 리더는 서서히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제는 섬김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몸을 구부리고 섬겨야 보이는 세계가 있다. 백두산과 한라산을 이루고 있는 것은 크고 수려한 나무뿐 아니라, 이름 모를 작은 야초(野草)들이다. 이들은 몸을 구부려야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낮아지고 섬길 때 보인다. 섬김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높은 마음이 아니라 낮은 마음에 담긴다.
우리는 흔히 '기둥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런데 '기둥'이라는 말을 '우뚝 선 최고의 존재'라는 식으로 많이 오해한다. '기둥'의 참 의미는 그렇지 않다. 기둥을 잘 보자. 기둥이 혼자 세워져 있으면 폐허이다. 기둥이 있음으로 벽이 세워지고 지붕이 얹어 질 때, 비로소 기둥에게 존재감이 주어진다. 따라서 기둥 같은 사람이란, 이웃을 버티게 해 주고 세워주는 섬김의 사람을 의미한다. 상큼한 들꽃들의 축제를 보라. 꽃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 배경이 되어주는 파란 하늘과 들판, 그리고 싱그러운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배경으로 마음껏 피어나세요!"
기둥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5-27)”
*우리 시대의 영성 신학자인 리처드 포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적 권위는 지위나 혹은 직함에서 찾는 권위가 아니라 수건에서 찾는 권위이다.”
진정한 왕은 섬김의 왕이다. 수건을 허리에 차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주님이야말로 진정한 만왕의 왕이시다.
기독교가 인류에 끼친 큰 공헌 중의 하나는, 낮은 사람을 발견해 그들을 섬긴 것이다. 기독교는 소외된 여자를 발견했다. 흑인을 발견했고, 노예를 발견하고, 장애인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이들이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영혼으로 살게끔 섬겼다. 기독교가 섬김의 리더십을 온전히 행할 때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자신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욕망'이라고 하고, 이웃도 같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한다. 욕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이 필요하고, 사랑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나의 섬김′이 필요하다.
흔히들 행복은 관계 속에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사람들을 좋아하고, 나 때문에 내가 속한 공동체가 웃고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이다. 이런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섬김의 종이 되는 것이다.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모습이 아니라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을 모두가 좋아한다.
별과 꽃을 보라. 별과 꽃이 자기 자랑만 하려고 할 때, 타락이 시작된다. 별은 비추어 주기에 별이고, 꽃은 웃어 주기에 꽃이다. ‘꽃’이라는 뜻의 영어 ′flower'를 보면 '낮은'이라는 의미의 'low'가 들어 있다. 꽃은 자신을 낮추며 웃어 줄 때 참 꽃이다.
*무디 신학교의 소장이었던 조지 스위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생의 끝을 맞이하게 될 때에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살아생전에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 가 아니라 ′평생에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렸느냐?' 가 될 것입니다. 또한 '얼마나 많은 돈을 저축했느냐?′ 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느냐?′ 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식(寄食)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어야 하며,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십시일반 (十匙一飯)’이라는 말이 있다. 밥 열 숟가락을 모아 한 사람의 끼니를 마련 한다는 의미이다. 옛적 우리 어머니들은 집집마다 부뚜막에 조그만 항아리를 놓아두고 곡식을 한 숟가락씩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수많은 주님의 백성이 배불리 먹은 오병이어의 역사는 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눔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주님은 나눔의 최고봉으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나누어 주셨다.
사랑을 나눔으로 슬픔은 반으로 줄고, 기쁨은 배가 된다. 그래서 나눔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작고 작은 눈과 눈이 모이고 모여서 온 세상을 덮듯이, 작은 친절, 작은 배려, 작은 나눔도 모이고 모이면 온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고 할 때, 꼭 물질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나눔은 꼭 큰 것만도 아니다. 맑은 눈빛, 다정한 얼굴, 축복의 인사, 반기는 미소, 위하는 마음, 위하는 손길, 위하는 기도, 위로의 말과 글, 격려의 박수, 따뜻한 포옹, 함께 있어 주는 것, 겸손과 배려…. 이 모든 것이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니 부하게 가진 자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