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를 통해 본 창의적 연극 컨셉
-걸출한 몸말 언어와 메타 상상의 유장함
선율 퍼포먼스로 승부를 건 연극이 있다. 인간 신체 몸말 언어로 승부를 건 연극이 있다. 푸른연극마을의 <더 파더>(플로리앙 젤레르 작, 이당금 연출, 2025년 1월 17일-2월 3일, 씨어터 연바람)는 치매 아버지의 망상과 무너짐을 걸출한 몸말 언어로 승부를 걸어 메타 사유와 상상의 유장함을 드리워낸다.
간병인을 쫓아내고서도 모른 척하는 자, 치매와 망각 증세 때문일까.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방방 뛰는 자, 간병인을 커튼 봉으로 위협하고서도 시치미 떼는 자, 휘파람 부는 아버지(오성완 분)의 넉살, 어찌해야 할까. 문제를 제기하라.
이 연극에선 치매 아버지의 망상과 실제 현실이 충돌한다. 낯선 자들(오새희, 김도현 분)이 가족 행세를 한다. 내가 잘못된 것인가. 상대가 문제인가. 관객은 치매 코드의 혼돈과 헷갈림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관객은 치매 아버지의 어그러진 의식과 망상을 따라간다. 맘에 드는 간병인(김현경 분)과의 조우는 즐겁다. 행복하다. 탭댄스 시연, 자아도취 춤이 펼쳐진다. 소꿉놀이에 흉내 내기가 가세하자 익살 쾌감이 살아난다. 망상은 착각을, 착각은 집착을 유도한다. 자기 시간과 시계를 향한 집착은 예기치 않는 불상사로 이어진다. 예측 불허의 가학과 린치에 무너지는 자, 어린애 당혹 코드로 반응하여 본다. 공포와 절규의 극점에서 “엄마, 엄마” 부르며 딸 품에 안기는 자, 애절함은 그로테스크 색조로 변조된다. 연민을 뛰어 넘어 섬뜩함과 기이함이 밀려온다.
“아버진 환자야!”, 딸 안느 부부(이당금, 김영균 분)가 말다툼을 벌인다. 문제는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듣고 있음이다. 죽은 둘째 딸을 기다리는 자, 돌아올 수 없는 자를 기다리는 것은 망상이자 집착이다. 언어가 다하는 곳에 선율이 시작된다. 현장 피아노 선율이 하얗게 말라가는 자의 소외 심리를 밀도 높게 건드린다.
연극은 질문의 연속이다. “지금 몇 시죠?” 독자적인 나의 시간 여정은 어디까지 인가. “약 먹을 시간이요”. 나는 약 먹을 시간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쉬이이-, 쉬이이-”, 간호사(오새희 분)의 신호에 종속되어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공연장 문을 열고 나오는 관객의 발걸음은 무겁다.
전반부 넥타이 차림이 공연 후반부에서 남루한 잠옷 차림으로 교체된다. 생존 주도권을 상실한 자, 그의 눈에 폭행한 자의 얼굴이 보인다. 공포, 놀람, 움츠림이 밀려온다. 차가운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오그려 눕는 자, 병실 바깥 풍경이 말을 건다. 옷을 벗으라는 공원 나무들의 메시지가 들리는가. 이제 무거운 삶의 굴레 옷을 벗어 던지는 시간인가. 관객의 철학적 사유 행보는 무겁기만 하다.
피아노 현장 선율은 다채로운 들을 거리와 상상 쾌감을 선사한다. 일차 피지컬 소리 효과는 이차, 삼차의 메타 상상과 사유 효능으로 이어진다. 시설에 남겨진 자의 애절함과 씁쓰레함이 선율을 통해 입체화된다. 혼돈과 차분함, 조화와 불협화, 침잠과 격동을 자유자재로 넘나든 이상록의 피아노 선율 퍼포먼스는 거리두기 유도와 심미성 확장에 기여한 바 크다.
오성완은 넉살과 애절함의 그림을 자유자재로 빚어나간다. 치매 환자로서의 자각, 더 이상 쓸모없어 내팽개쳐진 자라는 인식과 자괴감, 일그러짐은 손마디 떨림에서 오관의 전율로 이어진다. 엄마의 품을 갈구하는 어린애 울부짖음, 사물의 종속 부품으로 반응하는 몸말 언어는 강렬한 충격파와 메타 상상을 유도한다. 비켜 앉기와 외면하기를 향한 게스투스 운용 전략은 무너진 자의 단절 심리를 농밀하게 일깨워 내는 데 기여한다.
연극 <더 파더>는 현장 선율 퍼포먼스와 노련한 몸말 연기로 치매 아버지의 가슴앓이 심리와 단절 음영을 유장하게 펼쳐냈다는 점에서 우리시대 문화가의 값진 공연 자산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