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1. 11. 17:49
■ 24世 시강원보덕 이몽윤 묘갈명(侍講院輔德李夢尹墓碣銘)
[문과]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25/33)
◈ 시대 : 조선
◈ 연대 : 1720년(숙종 46년)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17Cm, 너비 49Cm, 두께 24Cm
◈ 소재지 :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광촌 뒷산 축좌(丑坐 : 南向)
◈ 서체 :해서(楷書)
◈ 찬자 : 풍양 조인규 지음(豊壤 趙仁奎 撰)
◈건립 : 5대손 이복경(李復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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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몽윤(夢尹)이고 자는 응신(應莘). 경주 사람이며,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대대로 현달했다. 증조부 숭수(崇壽)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조부 성무(成茂)는 판관을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친 예신(禮臣)은 진사였는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모친인 정부인 최씨는 현감 경남(慶男)의 딸이다.
공은 동생 몽량(夢亮)과 함께 무자년(1528 중종 23) 명경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 뒤 춘방보덕, 춘추관편수관 지제교를 역임했다. 공은 천성이 청렴강직하여 권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 당시 권력을 쥔 간신 윤원형(尹元衡)이 국정을 마음대로 했었는데 공이 그 가문을 멀리하고 그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비중있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주로 외직에서 맴돌았다.
공은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근면하고 공명정대하게 직무를 수행하니 단박에 백성들이 그 의로움에 감복했다. 마지막 관직은 사옹원정(司饔院正-正三品)이었다.
공은 처음에 문화유씨(文化柳氏) 진사 지(池)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안복(安福)은 요절하였고 차남 광복(光福)은 현감이며, 딸은 만호 이춘수(李春壽)에게 출가했다. 재취는 풍양조씨(豊壤趙氏) 우윤 인규(仁奎)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안복은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은 봉남(鳳男)이고 참봉이다. 광복은 5남을 두었는데 장남 원남(元男)은 사평이고, 차남 형남(亨男)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가 되었고, 삼남 흥남(興男)은 요절했다. 넷째 태남(泰男)은 현감이고 막내 이남도 현감이다.
봉남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지하는 요절(支厦)하였고 차남 경하(擎厦)는 현령이며 막내 대하(大厦)는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가 되었다. 원남은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은 시진(時震)이고 생원이다. 형남은 후사가 없다.
흥남은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은 시웅(時雄)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부정(副正)이 되었다. 태남은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은 시성(時省)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가 되었다. 이남은 1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시창(時昌)이다.
최근의 일만 기록한다. 많은 행장을 한 곳에 다 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의 묘는 포천 추곡 찬성공의 묘 앞에 있으며 부인 유씨[문화]와 조씨[풍양]와 함께 부장했다.
숭정(崇禎) 후 재 경자(1720, 숙종 46) 10월 일
5대손 복경(復慶) 세움.
국역(國譯) : 전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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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夢尹墓碣
公姓李諱夢尹字應莘慶州人新羅佐命功臣謁平之後世有聞人曾祖諱崇壽僉知中樞祖諱成茂判官贈吏判考諱禮臣進士贈左賛成妣貞夫人崔氏縣監慶男之女公與弟夢亮同登戊子明經科選入槐院歷春坊輔德春秋館編修官知製敎公天性淸直不有權勢其時權奸尹元衡當國公遠跡其門忤其意不得淸選棲遑州牧而到處奉職淸謹公明一時人士感服其義卒官司饔院正公初娶文化柳氏進士池之女二子一女長安福早世次光福縣監女李春壽萬戶再娶豊壤趙氏右尹仁奎之女無後安福一子鳳男參奉光福五子長元男司評次亨男武郡守次興男早世次泰男縣監次頤男縣監鳳男三子長支厦早世次擎厦縣令次大厦武郡守元男一子時震生員亨男無後興男一子時雄武副正泰男一子時省文府使頤男一子時昌載錄止於近代行狀萬不掛一公墓即抱川楸谷賛成公墓前與夫人柳氏趙氏祔葬。<끝>
崇禎後再庚子十月 日 五代孫 復慶 奉立。
▲구 묘갈사진 ㅣ ⓒ이재훈
▲신 묘갈사진 ㅣ ⓒ이재훈
▲24世 보덕공 이몽윤선생 묘(輔德公 李夢尹先生 墓) / ⓒ상서공파대종회카페
진사 이예신(進士 李禮臣)의 장남으로, 기묘 1519년(중종 14)에 생원 진사시 3등으로 합격하고, 무자 1528년(중종 23) 동생 몽량(夢亮)과 함께, 문과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로 합격, 승문원에 들어간 후 , 시강원 보덕(侍講院 輔德-從三品)을 지내고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 지제교(知製敎-正三品)를 거친 후, 간신 윤원형(尹元衡)을 멀리하자 그의 방해로 늘 외직인 평안도사(平安都使), 양근군수(陽根郡守-從四品), 평산부사(平山府使), 장단부사(長湍府使-從三品)를 지내다, 사옹원 정(司甕院正-正三品)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묘갈비(墓碣碑)는 1720년(숙종 46년)에 건립하였는데, 비의 크기는 높이 117Cm, 너비 49Cm, 두께 24Cm이다.
묘는 아버지 묘 아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