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한국의 심장 파주 = 세계화 시대를 맞다
한반도 경영의 요처
아닌 게 아니라 파주는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경영의 요처였다.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려는 남북 세력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고, 또 피어린 사투를 벌였다. 392년(혹은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21일간의 처절한 싸움 끝에 차지했던 관미성(탄현면 성동리 통일전망대). 지금도 한국군이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대치 중인 곳이다.
적성면 구읍리 해발 148m에 자리잡은 칠중성은 삼국시대 고구려-신라, 신라-당나라 간 혈투를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신라는 고구려와 당나라를 꺾고 676년 한반도를 통일한다. 한국전쟁이 절정을 이루던 1951년 4월22일. 칠중성은 캐슬고지라는 이름으로 다시 전쟁터로 변한다. 영국 그로스터 부대는 중국군 3개 사단의 총공세에 3일을 버텨준다. 덕분에 서울은 재함락의 위기를 모면한다. 파주가 이렇게 전쟁의 얼굴만 내비쳤을까. 아니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길목인 파주는 두 얼굴을 수시로 바꿔간 고을이었다. 정(正)과 반(反)의 두 얼굴이 그대로 갈등을 이루기도 했고, 때로는 합(合)을 이루기도 했다. 즉, 이곳은 한반도 역사의 ‘멜팅포트(Melting Pot)’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격렬한 화학반응으로 폭발해버린 고을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파주의 두 얼굴
남북 세력 간 시공을 초월한 ‘전쟁의 얼굴’과 함께 다양한 ‘평화의 얼굴’도 내비쳤다. 한국전쟁이 시작됐고, 서울을 목표 삼아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 전쟁을 끝낸 곳도 바로 파주(판문점·진서면 어룡리)였으니 말이다. 155마일 군사분계선이 그어진 기점도 바로 파주(장단면 동장리)였다. 분단이 고착화한 것이다. 이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래도 남북이 머리를 맞대며 파국을 막아낸 곳도 바로 파주다. 끊어진 경의선이 이어져 남북화합과 교류의 시대를 연 곳도 역시 파주이다.
바로 ‘갈등과 화해’, ‘분단과 통일’이라는 상반된 ‘두 얼굴’인 것이다. 지금, 비무장지대 안에 자리 잡은 도라산 전망대에 올라보라. 파주의 두 얼굴이 극명하게 보인다. “앞쪽은 북한 땅, 그리고 경의선 연결도로와 철도 저기 문산 쪽을 보세요. 산 사이로 아파트가 우뚝 솟아올랐네요.”(이우형 국방문화재연구원 조사팀장) 여전히 민간인통제구역과 군사격장·훈련장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비포장 도로 양 옆으로 시뻘건 지뢰 표지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데, 이곳에서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뜻이다. 문산 인근 월롱 산업단지엔 1만 명의 일꾼이 일하는 대규모 LCD단지(171만1000㎡)가 그야말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들어섰다. 거대한 성벽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다. 인근 선유산업단지(문산읍 선유리·131만3000㎡)와 당동산업단지(64만㎡), 월롱산업단지(84만2000㎡)까지를 묶어 이른바 LCD 클러스터라 한다. 임진강 너머 북한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 오두산 통일전망대 인근엔 영어마을과 함께 헤이리 예술인 마을이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들어서 있다. 현재 382명의 예술인 회원 가운데 141명이 집과 작업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를 꾸미고 있다. 심학산 서쪽엔 213개 출판·인쇄업체가 입주한 대규모 출판단지가 조성됐다. 2011년까지 160여 개 업체가 참여하는 2단계 사업이 시행 중이다. ‘통일한국의 수도’로 꼽힌 교하에 대규모 신도시가 건설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통일의 길목, 한국판 공맹의 고향
무시무시한 대남 방송의 메아리 속에서 해만 지면 너무 무서워 얼씬도 못했다는 파주가 이처럼 ‘천지개벽’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논둑길을 따라 두루미의 화려한 비상을 감상하며 끝없이 걸을 수 있는 곳 역시 파주다. 착착 건설되는 첨단도시를 바라보면서 농촌의 구수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두 얼굴의 고을 파주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상황에서 이 기분을 만끽할 날도 머지않았으니….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잊지도, 변하지도 않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역사적으로 남북의 사람과 문화를 ‘통’하게 했던 파주의 몫이다. 여전히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파주는 변치 않는 통일을 염원하는 고을이어야 하지 않을까. 또 하나, 파주는 예로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 즉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고을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이율곡과 성혼 등이 중심이 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율곡은 제왕학의 대표 저술인 <성학집요>와, <격몽요결><학교모범><경연일기> 등을 파주에서 집필하였다. 화석정과 자산서원 등은 모두 이율곡의 유적이다. 이뿐이랴. 고려시대 여진을 정벌한 윤관 장군과 조선시대 ‘대표 재상’인 황희 정승도 파주 출신이며, 조선 초기 예약제도를 정비한 허조, 경국대전 편찬을 총괄 지휘한 노사신, 파산학을 태동시킨 백인걸, 동의보감을 편찬한 의성(醫聖) 허준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인물들이 파주에서 나고 자랐으며 묻혔다. 바로 이 ‘추로지향’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천지개벽의 변화 속에서도 절대 버려서는 안 될 전통이 아닐까.
적성 주월리 육계토성=하북위례성일 가능성
가까이서 보면 성인지, 둑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지만 항공사진으로 보면
그 입지가 풍납토성을 빼닮았다. <권순진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팀장 제공>
출처: (신택리지, 이기환, 경향신문)
2023-04-0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