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 를 쫓으니라. 누가복음 5장 1절~11절
그대, 아직도 ‘만선’을 꿈꾸고 있는가?
과거에 들었던 은혜로운 설교나 명쾌한 해석이 때로는 성경이 전하는 참뜻을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시몬이 만선의 기적을 경험하는 사건은 아주 유명한 일화다. 어린시절 주일학교 선생님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일러주셨다. ‘어린이 여러분, 밤새 헛그물질 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어요.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놀라운 기적이 벌어졌어요.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베드로처럼 만선의 축복을 얻게 된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만선의 주인공들이 됩시다. 할렐루야~아멘~’
많은 신앙인들은 어른이 된 지금도 이 말씀을 거의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순종하면 대박을 맞게 되리라.’ 참으로 명료하고 매력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대박을 위한 순종’은 본문이 전하는 본래 메시지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정반대다. 본문의 핵심은 ‘만선’이 아니라 도리어 ‘만선 이후’에 벌어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은 어부 시몬의 보여 준 삶의 전환에 있기 때문이다.
시몬이 버리고 떠난 ‘모든 것’에는 대박난 물고기는 물론이고 생계수단이었던 어선과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만일 오늘날 한 집에 가장이 이와 같은 일을 벌인다면 뭐라고 말할까? 어느날 갑자기 잘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재산을 포기한채 가족을 뒤로 하고 꿈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특이한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탈선’(脫線, 또는 일탈)이다. 그래서 본문의 주제는 시몬의 ‘만선’이 아니라, ‘탈선’이 맞다. 대체 베드로는 왜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버려두고 탈선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이러한 일탈의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 누가복음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모험 없이 보물섬을 발견할 순 없다
1절~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예수께서 시몬의 배 위에서 설교하셨다. 선주였던 시몬에겐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설교를 마치신 후 예수께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을 듣는 것은 쉽지만 정작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는 일은 어렵다. 희생과 헌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듣는 것은 좋지만 정작 내 자신이 감동적인 삶의 주인공이 되는게 쉽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만큼의 댓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앎이 아니라 삶이다. 말씀은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이다. 그래서 말씀은 본디 삶의 적용을 최종목표로 한다. 많은 신앙인들이 오랜 신앙생활과 폭넓은 신앙지식에도 불구하고 삶의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듣기만 할뿐 적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몬은 갈릴리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어디에 그물을 내려야 하는지 언제 그물을 내려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익숙함 때문에 늘 자신의 어장을 벗어나지 못한채 맴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드로처럼 익숙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간다. 특히 전문직에 오래 종사한 사람이나 신앙의 연조가 오래된 분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실 익숙함과 편안함, 안정과 편리를 추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이 때론 삶의 변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어부 시몬을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의 차원으로 이끄셨다. 그곳은 바로 ‘더 깊은 곳’이었다.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빈그물이었다. 우리도 삶에서 스스로의 그려 놓은 틀에 갇혀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헛그물질 같은 무미건조한 공허를 경험한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신이 그려놓은 한계를 잘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새벽기도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일로 여기거나 주일설교면 충분하지 매일 말씀을 읽거나 성경공부는 아주 특별한 이들만 하는 일이라고 치부한다. 무엇보다 말씀을 듣지만 삶에서 적용하고 실천하는 자리까지 나가려 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만 크리스천이지 삶의 현장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유공간으로 내버려 둔다. 모험이나 도전이 없는 삶에서 변화와 성숙을 기대할 수 없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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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5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얻은 것이 없지마는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해서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말씀을 일상에 적용하고 실천하기 힘든 이유는 뭘까? 그건 말씀이 어렵기 때문만이 아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 내가 처한 상황을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말씀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하는데 있다. 믿음이 있다면 실천은 어렵지 않다. 시몬은 어부였다. 다른 일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환한 대낮보다는 밤에 그물을 내리고, 깊은 곳 보다 얕은 곳에 그물이 바닥까지 닿게 내려야 한다는 기초적인 상식을 모를리가 없었다. 실제로 예수께선 전공이 전혀 다른 나사렛의 목수출신이 아니시던가! 시몬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예수님, 그져 은혜로운 설교나 해주세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물고기 잡는 일에 괜한 참견 마세요. 다른 건 몰라도 낚시는 제 전공입니다. 주님, 제 일은 저에게 맡겨 두세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예수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은혜로운 말씀을 넘어 베드로의 고기 잡는 일 즉,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향해서 말씀하시길 원하셨다. 신앙의 목적은 교회가 아니라 삶의 현장이다.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 삶의 현장을 향해서도 말씀하신다. 일터와 가정, 시시콜콜한 일상생활,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며 살 것을 명하신다. 그 이유는 말씀이 이루어 내는 놀라운 삶의 기적을 체험하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좋은 교인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삶의 변화 곧 신앙의 생활화에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이다.
단 한번이라도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실천해 본 적이 있는가? 일상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문제 앞에서,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잠자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일에서, 직장을 선택하거나 중대한 사업을 결정할 때, 말씀을 적용하고 말씀을 기준으로 선택해 본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이 질문 앞에 내 생각과 내 계획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실천해 본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다.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자기부인 곧 희생과 인내가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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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한즉 잠기게 되었더라
6절 그리한즉 고기를 애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느니라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리한즉’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 때, 말씀의 능력이 시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났다. 삶에서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했을 때 그 능력을 직접 체험하는 일, 이것을 가리켜 ‘간증’이라고 한다.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선택해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고단한 일이지만 그렇게 살아낼 때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나는 지난 십년간 아주 단순한 원리를 붙잡고 목회했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다. 그 때 말씀대로 살아갈 힘과 지혜를 주신다. 그 힘을 입어 말씀대로 실천할 때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다. 그래서 변화된 나의 삶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들을 뿐 적용하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말씀을 읽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말씀읽기’를 잃어버렸다. 가장 좋은 성경공부 교제는 ‘성경’ 그 자체인데, 성경을 두고 좋은 성경공부교재에 메달린다. 온갖 영성훈련프로그램에 빠져있다. 심지어 정기적으로 설교를 행하는 목회자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일명 ‘점핑보트식 설교’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에 본문을 인용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해서 성경이 본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깊이 묵상하고 탐구하는 자리까지 나가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말씀에 대한 깊이가 없다. 적용과 실천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쯤 되니 삶의 기적을 논하기 민망스러울 정도다.
나의 목회 대부분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들이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뜻을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고 삶에서 체험한 것을 교우들과 나눴다. 그 가운데 나 자신이 먼저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했다. “그건 무기다. 약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심장을 정조준하는 강력한 무기.”(The Book Of Eli, 2010) 이런 체험은 타인에겐 간증이 되었고 나에겐 신앙고백이 되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와 금요철야기도를 잃어버렸다. 하향평준화의 대표적인 실례는 일명, ‘특새’라고 불리는 특별새벽기도회다. 일년에 정해진 몇일을 기도하면 마치 새벽기도를 한 것으로 간주한다. 한국교회에만 있다는 새벽기도는 참으로 깊은 영성의 보고다. 하지만 참으로 고단한 수행이다. 기도의 본질은 ‘특별하게(specially)’이 아니라 ‘지속적으로(continually)’에 있다.
얼마전 한국교회에 ‘특새’를 붐을 일으켰던 목회자가 타인의 논문을 무단으로 표절했던 멘탈리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진정한 영성은 무분별하게 남의 것을 흉내내거나, 눈물로 심지 않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려는 얄팍한 잔꾀로 이룰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이천년 기독교영성의 두 기둥은 말씀과 기도다.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말씀과 기도 외에는 없다. 한국교회의 회복의 열쇠는 백년전 일어난 부흥운동을 흉내내거나 모방해서 대규모 행사를 벌이는데 있지 않다. 오직 잃어버린 말씀과 잃어버린 기도의 회복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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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보라(Come and see)
7절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한국교회는 전도의 능력도 잃어버렸다. 내가 목회하는 강릉예향교회에는 종이로 만든 전도지가 없다. 전도를 위한 획기적인 프로그램은 더더욱 없다. 평소 전도를 강조하기는 커녕 전도를 권유하지도 않는다. 성장을 포기하거나 전도의 중요성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전도지는 종이가 아니라 나의 얼굴이며, 전도는 유창한 말솜씨가 아니라 진솔한 삶에서 나온다고 확신하는 까닭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급격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 전도가 잘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다양한 요인을 분석하면서 주로 외부적인 원인을 찾는다. 나는 한국교회 쇠퇴의 원인은 그 무엇보다 목회자와 교인들의 변화되지 못한 삶에 있다고 생각한다. ‘삶으로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어쩌면 뜬구름 잡는 변명처럼 들리거나 현실성 없는 미사어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된 단 한사람이 다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방법을 굳게 믿는다.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성경이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는 전도방법인 까닭이다. ‘저 사람 봐라, 예수 믿더니 저렇게 삶이 변하는구나’, ‘나를 봐라, 우리 가정을 봐라. 예수를 믿고 이토록 복된 인생이 되었노라’ 세상과 이웃을 향한 가장 능력 있는 외침은 ‘와서보라’,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이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회복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함으로 한사람 한사람의 삶 자체가 믿음의 보고서가 되는 일에서 시작되서 마침내 변화된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완성되리라는 것을 나는 여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8절~9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함게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만선에 대한 시몬의 고백은 못내 쌩뚱맞다. 많은 독자들이 눈여겨 보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도 없는 말씀이지만 여기엔 놀라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의 개념은 충층적이다. 살인, 간음, 도적질과 같은 행위의 죄(Sins of Acts)를 넘어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하지 않은 죄(Sins of Omission, 생략의 죄)를 포함한다. 다소 낯설게 들리는 생략의 죄란, 사랑하라 배웠지만 사랑하지 않은 죄, 나누고 섬기라고 배웠지만 나누고 섬기지 않은 죄 등을 일컫는다.
오늘 본문은 죄인에 대해서 한 가지 더 깊은 의미를 전하고 있다. 죄인이란 고백은 삶의 자세 곧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를 뜻한다. 죄인과 대비되는 개념은 의인이다. 의인이란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자신의 노력과 공덕을 앞세우는 태도를 뜻한다. 이와 반대로 죄인이란 아무 것도 내세울게 없다는 겸비한 태도를 일컫는다. 다시말해 죄인이라는 고백은 눈앞에 벌어진 기적 앞에 자신의 노력과 공덕의 결과가 아니라는 정직한 고백이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 왜 이런 삶의 태도가 중요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대박이나 성공, 출세와 명예를 얻게 되면 그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내가 잘나서, 내가 운이 좋아서, 혹은 내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받아 들인다. 자신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데 주저함 없다. 그런데 과연 인생에서의 성공이나 성취가 자신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이처럼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의 태도로 사는 이들에게 은혜와 감사는 사라진다. 해서 자신의 성공이 공동체와 타인을 위한 나눔이나 섬김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 결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해져서 마침내 패망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 목회자들 가운데도 교회의 부흥이나 사업의 성취를 오직 자신의 열정과 재능, 노력과 헌신의 결과물이라고 자랑하는 오만을 저지르는데 서슴치 않는다. 선지자 사무엘의 경고는 사울왕의 불순종의 원인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삼상 15:17-19)
성경과 현실에서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배은망덕과 오만불손을 너무 자주 목격한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 건강을 주신 분, 기회를 주신 분,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시몬의 고백은 참된 신앙 이 싹트는 삶의 자리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신앙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겸손한 자각과 넘치는 은혜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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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목적은 삶의 변화다.
10절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주지의 사실대로 오늘 본문은 우리도 시몬처럼 순종하면 놀라운 축복받으리라는 기복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은 오직 하나다. 만선을 꿈꾸며 먹고 살기에만 급급하던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의 대전환에 있다. 여호와께서 히브리민족을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은 하늘에서 내리는 신비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실컷 먹게 하려는데 있지 않았다. 반석에서 물을 내는 신비한 기적을 베푸신 진짜 목적은 오직 하나다. ‘오직 먹고 살기에 급급하며 살던 애굽의 노예’에서 ‘영원하신 말씀을 쫓아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다시말해, 기적을 통해 삶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기 위함이었다. 믿음은 시선이요 관점이다. 믿음이란 가치관이자 세계관이다. 가치관이란 ‘무엇이 더 소중한가’의 문제이며, 세계관이란 ‘무엇이 세상을 다스리는가’의 문제다. 어부 시몬은 기적을 통해서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썩어질 물질을 추구하는 삶에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래서 갈릴리 어부 시몬은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되는 놀라운 삶의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지난 십년 간 오직 말씀의 적용과 실천만을 강조했다. 실제로 말씀을 쫓아사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적은 참으로 놀라웠다. 내면의 변화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나타났다. 직장이 없던 이들이 좋은 직장을 얻고, 집이 없던 사람들은 좋은 집을 얻었다. 가난하던 이들이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농지가 두배로 확장되고, 보잘 것 없던 사업이 번창하는 소위 대박을 경험한 이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질병에서 치유되어 자유함을 누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 삶의 기적을 만끽할 뿐 그 이후에 근본적인 삶의 전환까지 나가지 못했다. 더러는 축복에 안주하거나, 더러는 신앙을 버리고 더 많은 물질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마치 만선으로 부자된 베드로가 어선을 더 구입하고 본격적으로 어부 일에 나선 격이라고나 할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느냐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신으로 마치려느냐’(갈3:3) 바울의 탄식처럼 신령스런 하나님의 기적을 그져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차원에 멈추고 말았다. 진정한 축복은 예수 믿고 부자된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을 가지고 무엇을 했는가에 달려 있다. 예수 믿고 건강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 건강으로 무엇을 감당했는가 까지 나아가는게 마땅하다. ‘소유’의 진정한 목적은 ‘나눔’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나눔에 이르지 못하고 축적에 머문 채 목적을 상실해 버렸다.
과연 예수께서 오직 시몬에게만 놀라운 만선의 기적을 행하셨을까? 아마도 갈릴리의 수많은 어부들이 시몬과 같은 기적을 체험했으리라. 다만 그후에 이어지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걸려 넘어졌음에 틀림없으리라. 내가 이렇게 멋대로 확신하는 까닭은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고 소위 팔자 고친 인생역전의 주인공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들 대부분 근본적인 삶의 전환까지 이르지 못하고 만선에 머무르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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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지도자들이여 ‘사리사욕’을 버려라.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기적의 목적은 기적 ‘자체’ 보다 기적 ‘이후의 삶’에 있다. 기적을 경험한 시몬은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 그가 실패의 자리가 아니라 최고의 순간에 배에 가득찬 물고기를 뒤로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개 고난과 시련을 시험이라고 하는데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진짜 견디기 힘든 시험은 어려울 때가 아니라 도리어 모든 일 잘풀리고 형통할 때다. 천하의 솔로몬을 타락시킨 것은 바로 지나친 번영과 부요였다. 고난 받을 때 누구나 겸손하다. 하지만 진정한 겸손은 형통할 때 드러난다. 가난할 때는 모두 청빈하다. 하지만 진정한 청빈은 부요할 때 나타난다. 약할 때는 누구나 평등과 공의를 말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지는 권력을 손에 쥐었을 때 비로소 본심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 언제 들어도 부담스런 대목이다. 부모나 형제, 가족을 버리라니 예수를 따르려면 모두 불효자가 되란 말인가, 생업과 일터를 버려야 한다면 광신도가 되란 말처럼 들릴찌도 모른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누가 주님을 따를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도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제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말씀의 실천은 실현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주님의 제자들은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례로 나라의 일을 맡은 지도자가 사리사욕이나 사사로운 관계에 연연해선 안되는 것과 같다. 만일 공직에 나서는자가 사리사욕이나 사사로운 관계를 앞세운다면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탐관오리’라 부른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가족이나 사리사욕에 연연했더라면 그는 결코 민족의 영웅이 되지 못했으리라. 위인전에 기록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부인과 희생을 감내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사리사욕이나 사사로운 관계를 뛰어넘은 결단과 헌신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스스로 주님의 부름받은 제자라고 자부하는 교회지도자들이 실로 깊이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다. 오늘날 널리 유행하는 제자훈련을 마쳤다고 모두 주님의 제자는 아니란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라는 ‘제자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치도 변함없는 ‘지도자들의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기적은 물고기를 넘치도록 채우는 만선이 아니다. 만일 그런 기적이라면 교회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누가복음이 증거하는 기적은 만선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진리를 쫓아 길을 나선 고기잡이 시몬의 결단에 있다. 더 놀라운 기적은 모든 것을 버리는 탈선을 감행했던 평범한 어부 시몬이 마침내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된 사건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만선’과 ‘대박’을 꿈꾸며 살아간다. 오늘날 대대수의 기독교인들과 교회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 가운데는 만선을 위해서 때론 기꺼이 순종을 잠시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허나, ‘전적인 신뢰를 통해 순종했더니 만선을 이루게 된 것’과 ‘오로지 만선하기 위한 방편으로 순종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쉽게 말해서 ‘물질적인 축복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잘 믿었더니 물질적인 축복도 덤으로 받게 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침체 가운데 있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어디서 올까? 그것은 이천년전 ‘만선’을 버려두고 기꺼이 진리의 말씀을 쫓아 ‘탈선’을 선택했던 어부 시몬과 같은 참되 제자들의 출현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지나간 백년동안 ‘만선’을 위해 달려 온 한국교회가 이제 거룩한 ‘탈선’을 향해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선택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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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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