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이 글에서는 각 사화의 여러 측면을 객관적으로 살펴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간략한 내용 때문에 일일이 밝히지는 못했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은 여러 선행 연구의 도움을 받아 이뤄졌다.
조선 왕정의 특징
전근대의 보편적 정치체제는 왕정이었다. 그 까닭은 그 시대의 기본 원리가 신분제도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인 신분(身分)은 말 그대로 ‘몸의 구분’을 기준으로 사회를 구획하고 운영한 제도였다. 물리적으로 바뀌지 않는 몸을 기준으로 삼은 그 구분은 그러므로 지배신분과 피지배신분이 본원적이며 영구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엄중한 선언을 담은 것이었다.
신분제도에서 이런 유일한 외형의 ‘차이’는 현실의 수많은 ‘차별’로 이어졌다. 신분은 그 밖의 거의 모든 가치를 포괄적으로 귀속시켰다. 즉 ‘고귀한’ 신분 집단의 구성원들은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 사회적 지위, 문화적 향유 같은 탐스러운 세속적 가치를 배타적으로 독점한 것이었다.
왕정은 신분제도의 세습성과 배타성과 일원성을 최고 수준에서 집약한 체제였다. 왕정에서 지배자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오직 국왕뿐이었다. 국왕의 혈통적 세습성과 가치의 독점력은 지배신분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었다.
조선에서도 국왕과 신하의 상하관계는 엄정하고 확고했지만, 왕권의 실질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는 중요한 특징을 가졌다. 그런 현상에는 형식적으로는 중국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라는 사실을 포함한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왕권이라는 기본적 성격은 다양한 부수적 현상을 수반했다. 거기서 가장 주목된 것은 삼사(三司)였다. 삼사는 조선시대 정치사를 이해하는 관건의 하나로 평가된다.
삼사의 기능과 제도적 확립
널리 알듯이 삼사는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이다. 이 세 관서는 관원에 대한 감찰과 국왕에 대한 간언, 그리고 여러 사안에 대한 자문을 각각 주요한 임무로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서로의 임무를 넘나들면서 활동했고, 그 결과 ‘삼사’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동질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어떤 변화의 실질적 효과를 가늠하는데 핵심적 사항은 제도의 성립이다. 현실의 변화와 필요가 오랫동안 축적되면 어떤 제도의 성립으로 귀결된다. 즉 제도는 다양하고 가변적인 현실적 요구를 집약한 균일하고 고정된 조문(條文- 규정이나 법령)인 것이다. 제도로 성립되지 않을 때 현실적 변화와 요구는 오래지 않아 사그러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의 제도가 확립된 중요한 계기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하 대전)]의 최종적 완성(1485, 성종 16년)이었다. [대전]의 첫머리인 ‘이전(吏典)’은 주요 관서들의 기능과 그 밖의 사항을 규정한 조문(條文)으로 시작된다. 그 내용은 간략하고 때로는 다소 모호하지만, 각 관서의 고유한 임무와 권한을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대전]의 완성으로 삼사를 포함한 주요 관서의 본원적 기능은 국법에 보장된 불가침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었다.
국왕과 신하(주로 대신)를 비판하고 제어하는 삼사의 기능이 제도로 확립된 것은 조선 정치의 중요한 특징을 형성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왕권을 더욱 제약했고, 대신과 삼사의 긴장과 대립을 일상화했다. 그러나 동시에 활발한 토론을 촉진하고, 권력의 절대화를 방지했다.
이상적으로 운영될 경우 이런 체제는 국왕이 상위에 군림하면서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단 이런 변화는 조선 중앙정치의 중요한 특징이자 긍정적인 발전으로 생각된다.
중앙관직의 운영 원리 1 ― 임무의 규정성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또다른 측면은 중앙관직의 운영 원리다. 그것은 관원 개인의 정치적·사상적 성향보다는 해당 관서의 기본적인 임무가 그 관원의 활동을 일차적으로 규정했고, 신하들의 관직은 늘 순환한다는 두 가지 사실이다.
앞서 말한 대로 각 관서의 임무는 상징적이든 구체적이든 [대전]에 규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관원은 자신의 임무를 선택할 수 있던 것이 아니라 국법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었다.
중앙 정치의 핵심은 국왕과 신하였다. 신하는 대신(주로 2품 이상)과 삼사가 그 중심을 구성했다. 대표적인 대신인 의정부(의정~참찬)와 육조(판서)의 임무는 정부의 상위에서 국정을 포괄적으로 심의하고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능에 충실하려면 지나치게 원칙적인 태도를 고수하기보다는 현실의 다양한 조건에 대응하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그런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여러 관서를 거치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원숙한 나이의 관원이었다. 그들이 대체로 현실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나타낸 데는, 개인의 독자적인 여러 성향보다는 이런 객관적 조건들이 좀 더 우선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삼사의 조건은 사뭇 달랐다. 그들의 기본 임무는 간쟁과 탄핵이었다. 이런 비판적 임무는 현실의 여러 변수를 너그러이 고려하기보다는 원칙과 논리에 입각한 엄격하고 견결한 태도를 요구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적은 그들의 나이와 품계도 그런 태도를 형성하는데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앙관직의 운영 원리 2 ― 긴밀한 인적 연속성
그러나 중요하게 기억해야할 측면은 대신과 삼사가 긴밀한 인적(人的) 연속성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유망한 관원들은 대체로 비슷한 경로를 거쳐 고위직으로 승진했다. 그 핵심적 경로는, 청요직(淸要職)이라는 이름이 알려주듯이, 삼사였다.
조선시대의 주요 인물 중 절대 다수는 삼사를 거쳐 대신이 되었다. 실제로 성종~중종대 의정부·육조의 대신 중 대부분(50~90%)는 삼사를 거친 인물들이었다. 이것은 새롭거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조선의 많은 관원은 젊은 나이에는 삼사에 근무하면서 탄핵과 간쟁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그 뒤 나이를 먹고 품계가 올라 대신이 되면 그 관직에 합당한 현실론적 태도를 나타낼 가능성이 컸다. 이것은 순환론적 견해로 지적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기도 하다. 곧 언급하겠지만, 이런 측면은 ‘훈구-사림’ 문제를 이해할 때도 숙고해야 할 사항이다.
중앙관직의 운영 원리 3 ― 빈번한 인사이동과 재임용
아울러 이 시기의 인사 행정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도 주의 깊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빈번한 인사이동과 재임용의 고착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전체를 조사해보지는 못했지만, 이 글의 주요 대상인 성종·연산군·중종대 의정부 의정~참찬의 임기는 각각 26.4개월-15.2개월-15.4개월로 변화했다. 같은 기간 육조 판서는 14.5개월-16.1개월-6.8개월이었고, 삼사 장관(대사헌·대사간·부제학)은 6.3개월-4.2개월-3.3개월이었다. 그러니까 삼사 장관의 임기는 이미 성종 때부터 반년 밖에 되지 않았으며, 중종 때 와서는 석 달마다 교체된 것이었다.
적지 않은 관원이 한번 파직되었다가 같은 관직에 다시 임명되는 순환적 인사가 점차 고착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주목할 만하다. 중종 때의 삼사 장관은 3분의 1 이상(37.4%)이 그렇게 임용되었다.
재직 기간의 단축과 재임용의 증가라는 독특한 현상의 발생과 고착은 특히 삼사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관서의 빈번한 인사이동이 거의 만성화에 가까울 정도로 일반적인 일이었고, 파직된 상당수의 사람들이 다시 그 관직에 임용되는 구조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
삼사는 기본적으로 파직의 위험성이 큰 관서였다. 그런데 그 관원은 과감한 탄핵과 간쟁을 제기한 것과는 거의 무관하게 그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 예상되었지만, 일단 파직된 뒤에도 다시 그 자리에 임명될 확률이 적지 않았다(또는 다른 관직으로 승진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관원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 삼사의 영향력이 크게 제고되었지만 중앙정치의 갈등도 고조되어 결국 사화의 발발로 귀결된 이 시기의 정치사는 이런 구조적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훈구-사림’ 문제의 이해
앞서 말했듯이 이런 측면은 이 시기의 정치사를 ‘훈구-사림’의 이분적 구도로 설명하는 통설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그 학설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서로 이질적인 두 세력의 갈등과 대립으로 이 시기의 역사상을 설명하면서, 후자가 여러 난관을 이겨내고 전자를 극복함으로써 역사의 발전을 이룩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그 뒤 커다란 지지와 학문적 영향력을 얻어온 이 이론은 지배세력의 교체와 역사의 발전을 정합시켜 설명함으로써 조선시대사의 전개과정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것은 일제시대 이후 번져간 식민사학(특히 당파성론(黨派性論)과 정체성론(停滯性論))을 학문적 차원에서 극복함으로써 발전적이고 체계적인 한국사상(韓國史像)을 수립하는데 중요하게 공헌했다.
이런 학문적 성과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지만, 일정한 논리적·실증적 허점도 있다고 판단된다. 그 학설은 대체로 대신을 ‘훈구’에 연결시키고 삼사를 ‘사림’과 동일시해 이 시기의 여러 양상을 해석해 왔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대신과 삼사는 그 임무가 본원적으로 달랐고, 그런 차이는 해당 관원의 개인적 성향이나 조건보다 일차적인 규정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관직은 매우 신속하고 복잡하게 변동했지만, 긴밀한 인적 연속성 위에서 운영되었다.
실제로 동일한 사람이 삼사일 때와 대신일 때 같은 사안에 상반된 의견을 개진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또한 출신 가문과 지역은 물론 사회경제적 배경도 비슷할 것으로 볼 수 있는 형제끼리도 서로 비판하고 의견의 충돌을 빚는 경우도 보인다. 그때 그들은 각각 대신과 삼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런 구체적 사례들은 ‘훈구’와 ‘사림’이라는 고정된 개념보다는 대신과 삼사라는 관직에 좀더 주의를 기울여 접근해야 할 필요를 알려준다. 요컨대 임무의 고정성과 관직의 가변성, 그리고 인적 연속성 등을 폭넓게 고려해야만 사화를 포함한 조선시대 정치사를 좀더 합리적이며 설득력 있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와 현실은 상호 영향의 관계다. 현실의 변화와 요구는 제도의 성립을 가져오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는 다시 현실을 바꾸어간다. [대전]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제도적 완성부터 조선 최초의 사화(1498, 연산군 4년)까지는 1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제도의 완성과 정치적 파국이라는 상반된 현상이 인접한 이런 국면은 그 본질을 깊이 탐구해야 할 필요와 흥미를 던져준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삼사라는 중요한 제도가 현실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었다. 그 지난한 실험을 통과하면서 조선의 정치제도는 독자적이고 원숙한 면모를 갖추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