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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7 - 진시황(秦始皇) 전란을 끝내고 마침내 중국 천하를 통일하다!
춘추(春秋) 시대는 공자의 책 이름 “춘추(春秋)” 에서 따온 이름으로 주(周)왕조
가 흉노에게 약탈당한후 도읍을 함양(장안)에서 동쪽 낙읍(낙양) 옮긴
BC 770년으로 부터 BC 403년에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한(韓)· 위(魏)
· 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 까지의 시대를 말합니다.
전국(戰國) 시대는 전한시대의 저술인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戰國策)” 에서
따온 이름인데, BC 403년 이후부터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로
봅니다만 진(晉)나라가 제후들에 의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53년 부터 보기도 하는데 진, 한, 위, 조, 연, 제 및 초를 전국 7웅으로 부릅니다.
신의라고 불리는 편작은 BC 407년 ~ BC 310년 때 사람인 데 성은 진(秦) 이고 이름은
완(緩)이니, 전국시대 초기 제(齊)나라 발해(渤海) 막군(鄚郡, 지금의 허베이(河北)성
창저우(滄州)시 런추(任邱)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설에는 노국(盧國, 지금
의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시 창칭(長淸)에서 살아 노의(盧醫) 로 불렸다고도 합니다.
귀족 관리의 객관으로 있을때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은자를 만나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때 사람의
몸을 투시하는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되니 편작은 무술로 병을 고치는 것을 반대하고 고대 부터
전하는 의술과 민간의학을 취합하여 독특한 진단법을 만들었으니 얼굴빛과 소리만 듣고도 병을
진단할 정도로 민간에서 신의(神醫)로 받들어졌으며 이후 각국을 돌아다니며 의술을 행했습니다.
괵국(虢國)의 태자가 시궐(尸厥)이라는 병에 걸려 거의 죽은 것으로 여겨졌는데 편작이 치료
하여 소생시켰다고 하는데, 편작이 볼때 태자는 그저 열기병(熱氣病)에 걸렸을 뿐이어서
태자의 몸이 따뜻한지 귀가 잘 들리는지 코가 잘 열리는지 살펴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았을 뿐이었으니 이 일로 그가 죽은 이도 살려내는 의술을 행한다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비자” 「유로(喻老)」에는 그가 채국(蔡國)에서 제 환공을 만났는데 작은 병을 앓고 있음을 알았고
약을 처방하여 먹으면 곧 괜찮아진다고 하였으나 제 환공은 이를 듣지 않았고, 편작이 두 번째로
권해도 듣지 않았으며 세번째로 만났을 때 환공은 증상이 일어남을 자각했으나 병세가 중했으니
편작에게 치료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편작은 이제는 고칠 방법이 없다고 했으며 얼마후 죽었습니다.
훗날 편작은 진(秦)나라에서 태의령(太醫令) 이혜(李醯)의 흉계로 암살당했다는데 “한서”
예문지(藝文志)에 편작내경(扁鵲內經)과 편작외경(扁鵲外經)이 실려 있으나 모두
없어졌으며 그의 저작으로 알려진 “난경(難經)” 은 후세 사람의 위작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송나라때 편작은 의자지사(醫者之師)로 봉해지니 인종이 아프니 명의 허희(許希)가 침구(針灸)로 인종
을 치료했으니 인종은 의관으로 명하고 상을 내리자 허희는 인종에게 절을 하고 다시 서쪽을 향해
한번 더 절하기로 이유를 물으니 허희는 스승 편작에게 절했다고 대답하면서 편작을 위한 사당을
지어줄걸 청했고, 인종은 사당을 지어 편작의 신의(神醫)에 존경을 표하며 영응후(靈應侯)로 봉했습니다.
내구산(內丘山)은 허베이 성(河北省) 싱타이 시(邢臺市) 부근에 있는 산으로 전국시대
에 조간자(조앙)가 편작에게 준 봉지라고 하며 같은 이름의 내구산(內灸散)은 약용
으로 쓰이는 풀이고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여산(驪山) 아래에 그의 사당
편작묘 (扁鵲廟) 가 있으니...... 송나라 때 인종이 편작을 위해 지은 사당이라고 합니다.
진(秦 기원전 900년~ 기원전 221년) 왕실 성은 영(嬴)이고 수도는 함양인데 주(周)의 효왕(孝王)을 시중
들고 있던 비자(非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공적을 올렸으므로 영(嬴) 이라는 성을 받고 대부가 되어
진(秦) 땅에 영지를 받았으니 간쑤성 리현이며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犬戎)에 쫓겨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양공(襄公)은 주 평왕(周平王) 을 호위한 공으로 주(周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집니다.
진(秦)은 춘추시대에 제후가 되었지만 풍속적으로는 중원 제국(諸國)과 크게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
라고 업신여김을 받았으니.... 역대 진후(秦侯)는 서융(西戎)과 항쟁하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으니 기원전 677년에 수도를 옹성(雍城)에 두었습니다.
9대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등 타국 출신자를 등용 서융을 토벌해 패자가 되었고, 주변의 소국을
합병하고 영토를 넓혀 이웃 진(晋)에 필적할 정도가 되었는데..... 진(晋)이 여희(驪姬)의 난을
겪으면서 혜공(惠公)을 옹립하지만 혜공이 배신하니 목공은 혜공의 군대를 한원에서 격파해
혜공의 형 중이(重耳)를 진공(晋公)으로 즉위시키니, 중이가 진(晋)의 명군 문공(文公)이 되어 강국이
되나 사후 진(秦)은 다시 진(晋)을 격파하고 영토를 강탈하니 목공은 춘추 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목공(穆公) 이 죽었을 때 177명의 가신들은 순장의 풍습을 따라 함께 죽었고,
명군과 인재를 한번에 잃은 진나라는 기세를 잃어 영토는 축소되었으니 나라를
유지할만한 힘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지만 춘추시대 중기 이후 주역은 북쪽의
진(晋)과 남쪽의 초(楚) 였고 진(秦)은 이에 비하여 한 발 밀려나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전국시대에 진은 전국칠웅(戰國七雄) 의 하나로 불리는데 이웃나라 진(晋)은 내부에서의 권력 싸움
끝에 한(韓)·위(魏)·조(趙)의 삼국으로 갈라져 삼진(三晋)이라 부르니, 삼진 중 위나라가 전국
초기에 명군 문후(文侯)에 의해 강하게 성장하였고 진(秦)은 위에게 압박을 받고 영토를 빼앗깁니다.
25대 군주 효공(孝公)은 인재를 구하니 상앙(商鞅)으로 행정 제도의 개혁·십오제(什伍制) 의 채용
을 실시해, 진(秦)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다시 태어나게 했는데, 이러한 상앙의 변법 운동
에 의해 진은 철저한 법치주의 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내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높여 여섯
나라를 압도하니 효공은 기원전 350년 도성을 함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천하 경영을 모색합니다.
효공의 아들이 강해진 국력을 기반으로 기원전 324년에 왕을 칭하니 혜문왕(惠文王)
으로 기원전 316년에 파촉(巴蜀)을 점령하고 이 땅의 개발을 실시하여 한층 더
생산력을 올려 장강(長江) 상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장강을 따라 진격할 수 있게
되어 초를 압박할 수 있었으며 초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습니다.
혜문왕은 모략가인 장의(張儀)를 등용하고 초 회왕(楚 懷王)을 사로잡는데 성공하니 혜문왕은
위(魏)와 한(韓)의 왕들을 각각 마부와 배승으로 삼을 정도로 굴복시켰지만, 혜문왕의 아들
무왕(武王) 시기에 그가 장의를 내쳐버리자 장의는 위(魏)에 망명해 이로 인한 한(韓)과의
격전 끝에 많은 군사를 잃었고 혜문왕은 사고로 죽으니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전력이 떨어집니다.
동쪽에서는 제(齊)나라가 성장하고 있어, 상(商)나라의 후예인 송(宋)나라를 병합하는 등 주변 제국
을 압박하니 기원전 288년에는 제를 동제, 진(秦)을 서제라고 칭했는데... 그러나 제나라는 연(燕)
나라 악의(樂毅)가 지휘하는 5개국 연합군에 의해 수도 임치(臨淄) 가 함락되어 망국 직전까지
몰리는 위기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진(秦)나라는 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할수 있었습니다.
소양왕(昭襄王)깨 재상 위염(魏冄)과 백기(白起) 장군의 활약으로 진(秦)은 승리를 거두지만 소양왕을
즉위시킨 위염의 권력이 커진 것을 우려한 왕은 재상 위염을 숙청하고 범저(范雎)를 등용하니, 범저
가 진언한 것은 원교근공(遠交近攻) 책략으로 "가까이에 있는 한·위를 거느리고, 먼 제나라와의 싸움
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승리해도 얻을수 있는 것은 먼 땅이 되어 지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먼 제나라와 동맹해 가까운 한·위·조를 공격하면 땅이 손에 들어 오게 되고 진(秦)의 영토로 집어 넣는게
용이해진다." 감동한 소양왕은 진언을 채택하고 범저를 재상으로 삼았으니, 기원전 260년에는 백기
가 조나라로 진격해 장평 전투를 통하여 조군을 격파해 조의 포로 40만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꺾어버렸으며 기원전 255년에 주(周)나라를 멸해 그 영지를 접수하여 위세는 한층 더 높아집니다.
장평 대전(長平大戰) 은 기원전 262년에서 기원전 260년에 걸쳐 중국 진(秦) 나라와 조(趙) 나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회전으로.... 전국(戰國) 시대의 판도를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전투이니, 장평의 승리는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패전국 조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기원전 260년 4월 진(秦)나라의 장수 왕흘(王齕)은 군사를 이끌고 상당(上黨)을 접수하기 위하여
이동하였으나 이미 군민들은 조나라로 도망간 상태라 진나라는 왕흘에게 상당 군민들을 추격
하게 하였는데,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조나라는 명장 염파(廉頗)를 파견하여 군민들을
접수하고 진(秦)군을 막게 하였으니 양국 군대는 중원 깊숙한 지역에 위치한 장평에서 부딪힙니다.
초기에 전세는 조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니 진(秦)군은 염파의 심리전에 밀렸고 간헐적인 전투에서
승리는 거두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승리는 얻지 못한 상태였으니 염파는 장평에 강력한 보루를 쌓고
진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는데, 6월과 7월의 맹공은 진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진군은 6국이 합종하여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동요하고 있던 상태였으니 이대로 가면 조군이 승리할 수도 있는 상황 이었습니다.
당시 양국 조정은 나름대로 초조했으니 상황이 조(趙)나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효성왕(孝成王)은 다급했는데, 방어만 하고 있는 염파가 자신의 자존심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 진(秦)은 이 싸움에서 밀리면
6국에 위신이 떨어지게 되며 통일을 향한 길은 험난해질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재상이었던 범수(范睢 또는 범저)는 이미 몇 차례의 실책으로 징계를 받았으니 이번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그의 몰락은 자명한 일이었으니 진은 발빠르게 움직였는데, 범수는
두 가지 승부수를 띄웠으니 우선 당시 지휘관이었던 왕흘을 몰래 백전노장 백기(白起) 로
교체하였고 이를 발설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하였으니 이를 조에서 알면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염파가 전장을 지휘하면 진나라는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이간책을 써서 지휘관을 바꾸기로
하고 조나라 내부에 첩자들을 투입하여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으니, "염파가 진(秦)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뒤에서 진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이 두려워하는 것은 조괄이 장군이 되는 것
이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효성왕은 염파를 지휘관 자리에서 내치고 대신 조괄(趙括)을 임명합니다.
새로운 지휘관인 조괄의 부친은 명장 조사(趙奢)였으니 그는 생전에 진(秦)의 군사들을 상대
로 대승을 거둔 전력이 있었던 장수였는데 그는 병사들을 아꼈고, 욕심이 없어서 전투
에서 이긴 후 왕에게 하사받은 은상은 병사들에게 모조리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조사는 정작 자기 아들을 천거하기는 꺼렸으니 이유는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조괄은 병법에 통달한 수재였지만 그뿐이었으니 외우기만 한 병법을 실전에 응용하는 능력은
없었던 것이고, 게다가 그는 거들먹거리고 뽐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니... 조나라 조정
에서 조괄을 지휘관으로 삼으려 하자 재상 인상여(藺相如)가 반대했으며, 심지어
조괄의 어머니는 조정에 아들을 천거하면 안 된다는 건의까지 올렸으나 결국 무시되었습니다.
반면, 상장군(上將軍)으로 진(秦)군의 새로운 지휘관이 된 백기는 백전노장이었는데 당시 수많은
강대국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백여개가 넘는 성을 빼앗을 정도의 공적을 거둔 장수
였으니..... 이러한 노련한 대 지휘관에게 조(趙)나라의 장군 조괄은 그냥 애송이에 불과했습니다.
조괄은 도착하자 바로 진(秦)나라 군대를 공격하였으니 진나라 군대는 거짓으로 패주하면서 두 곳에
복병을 배치하여 습격 준비를 했는데, 조나라 군대는 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추격하여 진의
보루에 이르자 진의 복병 2만 5,000명이 조나라 군대의 후방을 차단하였고 또 진나라의
기병 5,000명이 진영 사이로 뚫고 들어와 조나라 군대는 양분되었으며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습니다.
아울러 진(秦)나라는 경무장 병사를 출동시켜 공격하였으니 조나라 측에서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보루
를 쌓아 구원병을 기다렸지만..... 진나라 왕은 조나라 왕의 보급로가 끊어졌다는 전황보고를 받고서,
친히 하내(河內)로 행차하여 그곳의 백성들에게 작위(爵位) 1등급씩을 내리면서 15세 이상 되는
남자들을 전원 징발하여 장평(長平)으로 보내어 조나라 측의 구원병과 식량이 오는 것을 막게 합니다.
9월에 이르자 조나라 군사들은 밥을 먹어본 지가 46일째에 접어들어 안으로 은밀히 서로
를 죽여 잡아먹기에 이르렀으니,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탈출하고자 4개의 부대를
만들어 4~ 5차례에 걸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마침내 조괄이 정예 병사들과 친히
싸웠지만 그 자신이 전사하였으니 조괄이 죽자 그의 군대 40만명은 백기에게 투항합니다.
40만이라는 엄청난 포로를 받게 되었지만 먹일 군량이 없었고, 전에 상당(上黨) 의 백성들이
진(秦)의 백성이 되지 않은 것처럼 조의 군사도 난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한 백기는 조나라
군사들이 조를 나누어 구덩이를 파게 한후, 군사들을 묻어버렸으며 전투 후에 조나라 군사
들의 수급을 모아 영루(營壘)에 쌓게 하였으니 백기는 이 산을 두로산(頭顱山)이라 부르고
누각을 백기대(白起臺)라 불렀으니 훗날 한 시인이 이 참담한 장면을 시로 지었다 전합니다.
高臺八尺盡頭顱 何止區區萬骨枯 矢石無情緣鬪勝 可憐降卒有何辜
팔 척 백기대는 모두가 해골이요
들판에 뒹구는 뼈 겨우 수만구 뿐이겠는가?
화살과 돌이 무정히도 날아다닌 건 전투에서 이기려 한 것이었다만은
불쌍한 항복한 군사들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행동으로 얻게 된 효과는 상당했으니 당시 다른 5국에 경고하는 의미인 진(秦)나라에 대항
하는 자는 죽음 뿐이다 이니.... 조나라에게는 항전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었으며,
게다가 농사를 지을 남자들이 거의 남지 않게 된 조나라는...... 이후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말았고 예전의 힘을 회복하지 못한 조나라는 결국 30년 후인 기원전 228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진 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년~ 기원전 210년)는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제1대 세계
최초의 황제로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씨는 진(秦)이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
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1년까지는 여불위가 섭정하였고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문화 탄압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으며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으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 부터는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 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영정은 진나라에서 볼모로 보내진 안국군의 아들 영이인과 조희 사이에서 기원전 259년 조나라
에서 태어났으니..... 조희는 진나라 왕자인 영이인을 만나기 전에 여불위의 첩으로 이미
임신을 하고 있던 탓에, “영정은 여불위의 아이다” 라고 보는 견해와 아니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영정이 진나라 왕이 될 무렵의 나이가 13살이었으니,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황태후 까지
마음대로 주무르던 위치에 있던 여불위가 영정을 제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그러하지 않았고, 또 반역을 꾀하지 않고 자살로 마감하는 그의 처신이 오해를
일으키기도 하며 사마천은 여불위 열전에서 은연중에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듯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사기 본기에는‘진시황은 장양왕의 아들이다’라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고, 사기집해
에 따르면 ‘영자초와 조희가 혼인한지 12개월 뒤에 영정을 낳았다’고 하고 있으니,
혼인후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면...... 생물학적으로 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데 이러한 논란은 어느 것이 사실이든 간에 그 증거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조나라에서 영정이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진나라 소양왕이 조나라를 공격해왔고
조나라에서는 자초 일가를 죽이려 하였으나 여불위의 도움으로 진나라로 탈출하고,
영정과 조희는 조희 집안의 보호로 무사할 수 있었는데 소양왕 즉위 40년에 태자가
죽고 2년후 안국군이 태자로 새로이 책봉되자 조나라는 조희와 영정을 진나라로 보내줍니다.
소양왕이 기원전 251년 75세의 일기로 사망하고 안국군이 태자 책봉후 14년이 지난 52세가 되어
서야 효문왕에 즉위하게 되며 자초는 태자가 되는데, 효문왕은 1년상을 치른지 3일만에
사망하니 태자 자초가 왕위를 이어받아 장양왕이 되었으며 영정은 태자가 되었고,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 마저 사망하니 태자 영정은 13세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국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13살에 왕이 된 영정은 즉위가 조태후와 여불위에 의한 것이었으니국사는 여불위의 손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진나라 내정은 혼란스러워 시황 8년 진왕의 동생인 장안군 성교가 둔류(屯留)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시왕 9년 음력 4월에는 장신후 노애가 진왕 영정의 관례를 틈타 사병과 융적(戎翟)
부족들 그리고 진왕의 옥새와 조태후의 인장을 도용해 진나라 관군 까지 동원해 기년궁을 공격합니다.
상국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이 반격해 함양에서 전투를 벌여 진왕 영정의 군대가 승리
하고 노애와 반란군들은 도망치다 붙잡혀 처형당했는데, 노애가 조태후와 불륜해서
낳은 두 아들도 처형당했으며 노애의 측근 4,000명을 촉지역의 방릉(房陵)으로
추방시키는데, 일설에는 여불위는 조태후와 불륜관계였는데 노애를 소개시켜
주었고 아이까지 생기자 그 아이를 진왕으로 만들기 위해 반란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어머니 조태후와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루된 혐의가 발견되자 진시황은 숙청을 시작해 어머니
조태후는 옹땅에 1년간 유배시켰고 여불위는 면직시키니 2년후 사망하는데, 조용히 묻고는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면직시키는 처벌을 내렸다는데 일설에는 진시황이 편지
로 여불위를 모욕하고 촉으로 추방할 것을 지시하자 분노와 두려움에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전국 통일은 장양왕때 부터 시작되었으니 기원전 250년 주(周)나라 정벌 전쟁에서 승리하여 병합
했으며, 기원전 230년 부터 시황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니 기원전 231년 9월 제일 먼저 전국 7웅중 세력이 약했던 한(韓)부터
공격해 남양을 점령하고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 왕 한안까지 포로로 잡아 한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기원전 229년 조(趙)나라를 공격하니 이목, 사마상 등이 항전하는데 진나라는 조나라의 간신
곽개를 조종해 이목은 처형하고 사마상을 파면시킨 뒤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같은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했으며 228년에는 한단을 점령해 조나라왕 조천을 사로잡는데
공자 조가는 대(代)로 피신해서 대나라를 세워 왕이 된뒤 연나라와 연합해 상곡(上谷) 에서
저항하자 기원전 225년 대나라를 공격해 점령하고 조천을 사로잡아 조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기원전 227년 연(燕)나라에서 사신 형가를 진나라 함양으로 보내 신하되기를 자처하며 그 증표로 진나라
에서 연나라로 망명했던 번오기의 목과 독항 지역의 지도를 바치니 진왕 영정은 함양궁에서 형가
의 사절단을 맞이하였는데, 사실 형가는 연나라 태자 희단의 사주를 받은 자객으로 그자리에서
지도 속에 숨겨둔 칼로 영정을 공격하였으니 진왕 영정은 암살시도에 분노해 즉시 연나라를 공격합니다.
이에 연(燕)나라도 대나라(조나라 부흥세력) 와 연합해서 반격을 시도하지만 진나라 군대는
연나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기원전 226년 10월에는 수도 계를 함락하고 암살을 사주한
연나라 태자 단의 목을 얻었으며...... 연나라왕 희는 요동으로 도망가 저항하지만
기원전 222년 진나라가 요동을 함락하고 연나라왕 희를 사로잡으면서 연나라도 멸망합니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산동
반도의 제(齊)나라 까지 멸망시켜 시황제의 나이 40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습니다.
진시황의 통일 전쟁에서 사상자는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으나 서진(西晋) 때의 학자 황보밀이 자신의
저서 “제왕세기”에서 추정한 내용에 따르면,“인구의 3분의 2가 죽거나 다쳤다”고 나오는데
진나라 대장 백기는 한(韓)과 위(魏)의 연합군과 싸움을 벌여 24만의 수급을 얻었다고 하며, 진시황
의 진나라 전통으로 군공의 높음과 낮음을 따지는 표현이 '잘린 목' 을 일컫는 말인 수급(首級) 입니다.
시황제는 국왕(國王)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했으니 처음에 정은 도교
에서 나오는 신비한 칭호인 태황(太皇)과 천황(天皇)과 지황(地皇) 중에 어느 칭호를 정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이사와 왕관 등은 태황과 천황과 지황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태황의 칭호를
바쳤지만, 고심 끝에 시황제는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 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 라고 칭하기로 합니다.
자신은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으며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는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현대 중국어에서
짐(朕)은 옛 중국어에서 황제의 전용 명사가 아닌 1인칭 대명사였으나 단지 천자의 자칭
으로만 사용할 수 있게 하였고 민가를 뜻하던 '궁(宮)' 역시 황제의 거처인 궁궐의 의미로 한정됩니다.
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으니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행정 장관), 위(사령 장관), 감(감찰관)을 두었으며 또한, 진나라
에 저항하는 지방의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서 천하의 부호 12만호를 함양으로 강제
이주시켜서, 천하 제일의 산업도시가 되어 발전하면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함양궁을 제2궁전, 제3궁전이 회랑으로 이어져
웅대한 궁전으로 바꾸고 전국의 농민을 사역에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폭 50m의
황제 전용 도로를 만들었으며 시황제는 자기를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천재라고 생각하여, 고관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은 시황제가 모두 정하고 결재도 혼자서 했으니, 상소는 함양궁에 산더미처럼 쌓여졌으니
상소는 저울로 달아졌고, 결재량은 하루에 1석(30 kg)으로 정해졌으며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습니다.
황제의 명에 따라 6개국 화폐는 모두 폐지됐고 백성들은 구리로 만든 진나라 반량전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구리가 부족해 반량전 공급과 유통량이 줄어들자 화폐가치가 지나치게
상승했으며, 시황제는 남쪽 광동성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신설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보내어 그들을 정벌해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킵니다.
기원전 213년 함양궁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니 시황제 나이 46세로 절정기였는데 연회중 순우월이 봉건제
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이니 분서(焚書)이며, 진나라가 통일전 전국
시대에 등용한 법가주의 사상가 상앙은 군사적인 공헌으로만 작위를 주고 귀족 신분을 대우한바 있습니다.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학자들은 모두 자기는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460명을
잡아들여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갱유(坑儒)로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 라고 합니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유배되었는데, 진나라의 사상가 상앙은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 서로 감시, 의심
하며 연좌제로 강력히 처벌하는 십오연좌법으로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해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 부터
동쪽으로 요동 까지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으니.... 동원된 인부가
150만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명의 인부를 동원해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는데,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소진되고 말았으니 진나라 전국 남성의 절반 이상이 국가의 토목 공사에 동원된 것입니다.
어느날 시황제의 행차는 낭아산에 도착했으니 시황제는 그 풍경이 맘에 들어 3개월 정도 머물렀는
데 갑자기 그곳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으니, 한 섬이 갑자기 나타나자마자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신기루라고 추정?) 어느 날 제(산둥성)에 살고 있는 서복이라는 방사가 시황제가
보았던 섬은 전설상의 봉래산 이었다고 주장하고는 봉래산에서 불로불사약을 구해오겠다고 합니다.
서복이 갈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이 실렸으니 그리고 서복은 떠났으나 다시는 돌아
오지 않았으며, 서복이 탄 배가 지금의 일본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했다는 설이 있는데....
시황제가 불로불사약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고 있어서 각지에서 수상쩍은 방사들 까지 모여듭니다.
그들은 어디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다던가, 아니면 자기가 불로불사의 기도를 올린다면서 돈을
뜯어가자 시황제는 효험이 없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까지 만들었는데, 시황제는
불로불사 약인 줄 알고 먹고 자신의 생명까지 단축한 것이 있으니... 바로 수은으로 결국
시황제는 불로불사를 꿈꾸다가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 줄어든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진시황은 미신에 심각하게 집착했으니 영원히 살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거나 궁궐 구조
를 전부 바꾸는 등 사기꾼들에 속아 국고를 낭비했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무덤에도
재물과 인력을 낭비하여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으니 지금 남아있는 진시황릉의
유물과 규모를 생각하면 진시황의 미신 집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시황은 태자를 지목하지 않았는데 태자 제도는 전국시대에 정착되어 후계 구도를 안정 시키는데
큰 도움을 준 제도로 진시황의 아버지 영자초도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여 홀대받던 왕족
이었지만, 효문왕이 영자초를 태자로 임명하면서 무난히 왕위를 이어받을수 있었지만 사기꾼들
에게 속아 불로불사를 광신해 자신이 죽음을 전제로하는 후계자 문제를 거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나라에서 왕위 계승 1순위는 장남 영부소였는데 진나라의 근간사상인 법가는 적서차별이 심한 국가
로 따라서 진나라 국민들도 적장자였던 부소가 후임황제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거기에 과거 6국의 주민들에게도 부소는 매우 좋게 평가받아 훗날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와 원수지간
이던 초나라 출신임에도 초나라의 명장 항연과 같이 사칭하던 인물이 진나라의 왕자 영부소 였습니다.
이렇듯 부소는 당시 전 중국에서 지지를 받았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합하는데 매우 좋은 기회가
될수 있었지만 진시황은 자신의 의견에 반기를 든다고 부소를 진나라 변방의 만리장성
공사장으로 추방시켜버렸고, 그런 와중에 진시황이 사구에서 급사하고 부소는 자결을
명령받게 되며 이세황제는 진시황의 후궁들 중 자식을 낳지 않은 자는 모두 따라 죽게 했습니다.
시황제는 재위 기간중 다섯차례나 전국을 순행하였는데 이런 때에 많은 협객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였으니 시황제는 순행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
에 탔는데 시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시황제는 길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도 했으니 한번은 시황제가 금릉
(金陵, 남경)에 왔을 때 왕기(王氣)가 일어나자 분개한 시황제는 근처에 소나무를 빽빽이
세워 왕기의 기운을 막으려 했으니, 금릉은 삼국 시대까지 말릉(枺陵)으로 불리었는데
이렇게 시황제는 거의 온 중국 대륙을 돌아다녀 자신이 성공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하였습니다.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으니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에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뒤따랐는데 사기에 따르면 황제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
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
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으니.....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또는 화가 난 시황제가 그 지역의 주민을 몰살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리고 시황제는 구 지방
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
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고 명하였습니다.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는데....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으니,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
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 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입니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으니,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해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합니다.
하지만 장군 몽염은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자, 조고는 몽염을 감옥에 가두고 시황제
의 26남 호해는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이세황제인데 원래 이세 황제는 몽염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조고의 말을 듣고는 몽염과 몽의를 반역혐의로 몰아 삼족을 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