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거량(法擧量 혹은 法擧揚) >
‘법거량(法擧量)’이란 스승이 제자의 수행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문답을 주고받는 것, 혹은 선객(禪客)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을 말한다.
즉, 선불교 전통에서 사제 간에, 혹은 수행자들이 서로 깨달음의 경지와 견해를
문답으로 점검⋅확인하는 방식으로, ‘법(진리·깨달음)’을 ‘거량(헤아림)’하는 과정을 말한다.
법거량은 단순한 이론적 토론이나 교학적 강설이 아니라,
말과 행동, 침묵과 외침, 심지어는 파격적인 몸짓과 상징을 통해
서로의 견성(見性)을 시험하는 치열한 정신적 격투라 하겠다.
이를 통해 수행자들은 자신의 깨달음이 진정한 체험에서 우러난 것인지,
또는 단지 언어적 이해에 그친 것인지를 검증받는다.
이러한 방식은 특히 선문답(禪問答)이나 공안(公案) 수행과 밀접하게 관련돼있으며,
선가(禪家)에서는 깨달음 이후에도 끊임없이 법거량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연마하고 타인의 견해를 점검해왔다.
따라서 법거량은 단지 말다툼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고
검증하는 선가의 전통이자 수행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 여부를 점검하고,
수행자의 안목(正見⋅正法)을 확인하는 기능이 강조된다.
즉, 말과 행동, 침묵과 외침, 몸짓과 상징을 활용해 사제 간에 혹은 수행자 끼리
견성을 시험하는 수행적 대화라고도 할 수 있다.
대개 법거량은 스승과 제자가 마주 보며 1대 1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드물게 무차법회(無遮法會)라 해서 대중 앞에 법사가 참가자와
문답을 하는 집회형식 법거량도 있다.
또 선원에서 하안거나 동안거가 시작되는 결제 일이나 끝나는 해제 일에는
조실스님(혹은 방장스님)이 많은 대중 앞에서 법문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최근에 화제가 된 법거량으로 2000년, 장성 백양사에서 열린
‘제2차 무차선 법회’에서 서옹 스님의 법거량이다.
한 비구 수좌가 “위산 선사가 법어를 하지 않았다면,
스님께서는 어떻게 사자의 기상을 보이실 것입니까?”라며 가르침을 청하자,
서옹 스님은 주장자를 세 번 내리 친 뒤 “아~악!”하고 일갈(喝)하며,
“그 따위 소리 하지마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비구 수좌가
“오직 깨친 안목으로라야만 무차법회가 아니겠습니까?”하니,
서옹 스님은 “그 망상 피우지 말라”하자,
비구 수좌는 “알겠습니다.”하고 물러났다.
문답으로 진행되는 법거량은 어떤 형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즉문즉답(卽問卽答)을 원칙으로 한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안 된다.
머뭇거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분별의식 또는 분석적 사고(알음알이)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분별의식에서 나온 말은 깨달음의 언어, 선문답이 아니다.
특히 선승과 선승 사이의 법거량은 서로의 깨달음 경지를 가늠하고,
수행 상태를 점검하는 역할을 한다.
문답으로 진행되는 법거량은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진행하며,
선종에서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참구해서 깨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화두를 타파했는지 못했는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못 얻었는지를 판단할 객관적 기준이 없다.
특히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기본 종지로 하기 때문에
더욱 이러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아무나 깨침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종에서는 인가(認可)를 중히 여긴다.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공부, 즉 화두를 타파했는지를 검증 받는 것이다.
혼자서 도(道)를 깨달았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깨침(法)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법거량(法擧量) 혹은 법담(法談)이라 한다.
화두(話頭)를 타파했다는 것은 모든 의심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므로
그 답 또한 정확하고 막힘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법거량은 중국 조사선(祖師禪)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루어지던 선문답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법거량은 선문답(禪問答)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선의 토론 또는 선을 주제로 한 대화로 이루어진다.
법거량을 통해 스승이 제자의 깨침이나 화두 타파를 인정해 주면,
인가를 받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답(答-화두)만 제자에게 남겨진다.
선문답의 유형을 18가지로 구분한 ‘분양십팔문(汾陽十八問)’이 언급되며,
험주문(驗主問) 혹은 탐발문(探拔問)이라고도 하는 질문 형식이 있다.
※분양십팔문(汾陽十八問)----선문답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송고(頌古) 문학을 개척한 분양(汾陽, 947-1024) 선사는
선문답의 유형을 열여덟 가지[汾陽十八問]로 구분했다.
그의 저서 <분양무덕선사어록(汾陽無德禪師語錄)>에 실려 있다.
※탐발문(探拔問) 혹은 험주문(驗主問)----문제를 내어서 남을 시험하는 것이다.
주(主)는 스승을 가리킨다. 선가에서 스승이 학인의 깨달음 정도를 확인하는 질문을 말한다.
또 학인이 스승 또는 조실이나 방장의 근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탐구하기 위해, 선문답을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선문답에서 상대(납자⋅제자⋅방장⋅조실 등)의 근기, 수행 경지와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를 탐구하기 위해 행하는 질문인데,
특히 ‘범부와 성인’처럼 양변에 걸리지 않는 답을 요구하거나, 말로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를
묻는 식으로 제시돼 상대의 지혜를 가늠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이와 같이 상대의 경지(정견⋅정안⋅안목)를 가늠⋅점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질문으로, 선문답의 한 유형이다.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처럼 양변에 걸리지 않는 질문을 던져 답을 유도한다.
질문이 험주문이면, 상대가 ‘할(喝)’처럼 언어로 답을 피하거나,
말로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공식적인 ‘정답’이 없고, 정견⋅정법의 안목을 갖춘 선사에 의해
수행자가 깨닫게 하는 ‘오도(悟道)’ 기능이 핵심으로 제시된다.
험주문과 관련된 선문답 예로,
암두(巖頭) 스님이 덕산(德山) 선사에게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라고 물어,
덕산이 ‘할’을 하며 양변에 걸리지 않는 답을 제시한 사례가 소개돼있다.
또 다른 예로 ‘마음은 안에도 바깥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는 식의 질문이
험주문으로 언급된다.
― 법거량에 대한 사례 한 토막 ―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경험이 있는 신출내기
숭산(崇山, 1927~2004) 스님은 법거량을 위해 임제(臨濟)의 법맥을 이은
당대 최고의 선승인 고봉(古峯, 1890~1961) 스님을 찾아갔다.
누더기 차림의 청년 수행승 숭산은 지난 밤 모든 부처를 죽이고 왔노라고 하면서
걸망에서 오징어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잔을 달라는 숭산의 말에 고봉이 잔 대신 손바닥을 내밀자
고봉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보통내기가 아님을 직감한 고봉 스님은 1700가지 공안(公案) 가운데
어려운 것만을 골라 질문을 던졌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는가 싶더니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상황이 달랐다.
얼굴이 벌개져서 이런저런 대답을 했으나 고봉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두 사람은 성난 고양이와 같이 50여 분간을 서로 노려보기만 했으니,
이것이 바로 응답이었다. 마침내 고봉 스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며
얼싸 안았다고 전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