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와 같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찔리고 맞고 가시관을 쓰시고 피 흘려 죽으신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 말씀대로 실제로 구원을 받고 나음을 받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건 주의 임재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지구가 두 동강이 나도 바꿀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주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주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많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라고 진술합니다. 문제는 그 구원과 치유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 문제의 대답은 주님께서 2,000년 전에 갈보리 언덕에서 피 흘려 죽으신 장면을 묵시적으로 믿고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들이 많은데 있습니다. 피, 십자가 하면 ‘예수께서’ 하고는 갈보리의 추억 속으로 빠지고 맙니다. 아니죠. 임마누엘이신 주님이 그 대속의 희생의 죽음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 하늘에 오르신 다음 성령으로 내게 버젓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채찍에 맞으신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실존하시는 주께서 찔리고 주께서 상하고 주께서 징계를 받고 주께서 채찍에 맞으신 겁니다. 칼빈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계시지 않으면 그 분이 지상에서 이루신 업적의 그 효력도 우리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죄 사함을 받고난 다음에 영생을 얻었습니까? 복음을 듣고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모신 다음에 우리의 죄를 사하신 그 십자가의 형벌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은혜에 통곡과 눈물을 흘렸습니까? 이것이 표적의 신앙인가 영생의 믿음인가 그 사이를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바깥에 역사하는 에피 성령은 엔(in)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임재하신 엔 성령은 바깥으로 나타나는 에피(on)도 됩니다. 만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갈보리 십자가를 연상하여 ‘그가’ 하면 간혹 표적이 일어나긴 하겠지요. 그 표적으로 말씀을 듣고 영생을 얻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영생이 표적을 따라와서 문 밖에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를 놓칩니다. 고린도교회처럼...(고후13: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영생을 얻은 사실을 믿고 아는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타나는 표적을 당연시 합니다. 그래서 내가 모시고 있는 주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내가 나음을 입었음을 분명하게 압니다. 왜냐하면 이젠 내가 그리스도 밖에서 길을 잃은 양이 아니라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주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벧전2:25)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