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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3, 2013
한국 방문기
23일간 한국 방문을 마치고 시카고에 도착하였습니다.
지금까지의 방문중 제일 길었으나 하루 하루를 바쁘게 지나다 보니 나에게는
순식간에 지나간 날 들이었습니다.
의과 대학 45주년 reunion도 겹쳤으나 그 사람들에게는 참석 못 한다는 양해를 구하고 일고 동창들만 만나기로 했었습니다.
10월 12일 일고 전야제와 13일의 일고 한마당에 54명이 참석한 대성황을 이루었고 15일 서울 청탑회에 40명이 모였으니 이중으로 참석한 동창들을 제외하더라도 85명은 공식적으로 얼굴을 본 셈입니다.
양쪽 동창회장 말로는 나를 만나러 많이 나왔다는 말은 인사치레로 듣겠습니다마는 대부분이 53년만에 처음 보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오랫만에 보는 동창들…
그 중에는 세월의 지나감을 숨길 수없는 안타짜움도 있었지만 대개는 얼굴을 알아 볼수 있었고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중 어떤 친구들은 다시 또 만나자고도 하여 스케줄을 잡다보니 내가 개인적으로 쓴 시간은 경주와 여수 방문의 4일이 고작이었습니다. 다행히 나의 친구 좋아함을 아는 마누라님의 이해 덕분에 바가지 긁는 소리는 면할 수있었습니다.
여기에 지난 23일 동안의 행적을 더듬으며 나만의 행복한 시간을 반추하고자 합니다.
10월 10일 서울에 도착하니 나이 적은 손 위 처남이 공항에 나와 저녁을 같이하였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딸의 출산을 보러 미국 오는 날자를 연기하고 그 다음 날 바로 미국으로 출국하였습니다.
11일 오후에 광주에 도착하여 나의 옛 친구 김재욱을 만나 술 한잔 하다 보니 새벽 1시 반. 시간 적응이 안되어 깨어 나 보니 3시. 다시 잠들기는 그른 것같고 사우나에서 몸을 풀고 잠들려 했으나 그 것도 실패하였습니다.
12일, 잠은 자고 싶은데 눈은 말똥 말똥한채로 오후 5시반에 의과대학 파티에 갔으나 아직 시작도 안 되어 다행히 미국에서 온 동창을 만나 내가 파티에 참석 못한다는 말을 전해주도록 부탁하고 전야제가 있는 식당, 영환이네 집으로 직행하니 벌써 30여명의 광주 동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가물 가물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개는 얼굴을 알아 볼 수있었습니다. 이영태 회장과 유충근 총무의 배려로 인사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조금 있으니 서울 동창들이 도착하고…
10시 조금 넘어 모임이 끝났으나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하여 노래 방에 가자고 하여 한 2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하중담의 걸죽한 이야기, 이재일과 김종태의 음정과 박자가 정확한 노래 솜씨에 나의 기분은 최고였습니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즐거운 때도 있구나 하는…1시가 지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가고 그래도 헤어 지기가 찜찜하여 대 여섯명이 해장국집에 들러 또 소주 한잔…
서울 동창들이 묵는 호텔로 들어와 한 방에 2명 자는데 내가 꼽사리로 끼니 침대는 내 차지가 되었습니다. 둘이는 바닥에서 자고… 눈을 떠 보니 3시 10분. 아마 1시간 쯤 잤는가 봅니다. 잠은 오는데 눈은 말뚱거려 남의 잠을 방해할까봐 가만히 일어나 주섬 주섬 옷을입고 나와, 택시타고 사우나에 갔습니다. 나중에 말을 들으니 내가 방을 나간 것을 알았다 합니다. 사우나를 끝내고 나도 잠이 오지 않아 택시 기사한테 해장국집으로 가자고 해도 어디가 문을 연지 모른다하여 호텔로 다시 돌아 오니 모두 “돼지 뼈다구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잘먹고 머루 포도까지 먹고 나니 모든 서비스는 강은수가 지불했다 합니다. 멀리서 온 내가 대접해야 하는데 그렇게 염치없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일고 운동장으로 걸어 갔습니다.
전에 썼다 싶이 학생운동 기념탑 빼고는 생소한 장소였습니다. 옛날 건물 전부 치워 버리고 관사앞에 새워진 벽돌 건물이 나를 이방인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도 80여년의 역사가 있고 학생 독립운동의 발상지인데 옛 것을 지키지 못한 것은 우리 동창에게도 책임은 면치 못할것 같습니다. 그런데다가 무슨 기념식한다고 늙은 동창들 앞에서 일고인이네 뭐네 하며 연단위에 불려 놓고 읽어대는 무수한 표창장도 한국의 현실에 40여년 동떨어진 먼 이국땅에서 살아왔던 나에게는 전부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 두 가지만 빼 놓고는 아주 훌륭한 행사이었습니다. 서울 동창을 빼고 광주 동창만 40여명은 참가 했던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다보니 술이 얼마나 들어 간지 모르게 몇 시간을 평상에 앉아 마셨나 봅니다. 한 가지 흠으로 남는 것은 이정일의 옛 별명을 불러 댔는데 그 가 조금 감정이 상했는가 봅니다. 나는 그가 그 별명을 싫어 한 것도 몰랐으니 그 것도 현장 감각에 둔한 나의 실수로 인정합니다. 약간의 Run–in이 있을뻔 했으나 오래동안 못 만난 사이에 서로가 변한 탓으로 돌리면 되겠습니다. 그 날 오후 강은수의 초대로 은밀한 곳에 안내되어 은수의 표현대로 좋은 냄새를 맡았고…나중에 말 들으니 은수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 합니다. 은수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는 영원한 좋은 비밀로 할렵니다.
4일 연속 음주에 잠이 부족하니 14일은 일부러 하루 종일 쉬었습니다.
15일 새벽 고속 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우여 곡절끝에 간신히 시간에 맞춰 서울 동창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몇 번 만났던 동창을 제외하고는 전부 53년 만에 처음 만났습니다. 공경렬, 정위, 신동식, 박진홍, 조철웅, 고유문, 이정구, 정길홍, 정진영, 임강원, 정기정 등은 하나도 안 변한 얼굴들이었습니다. 김대성이는 좀 변한 것 같았고…
모임이 끝나고 김상연, 장석주, 이충련, 하중담과 저녁 늦게 까지 남아 다시 한잔하고…전춘옥 회장말로는 1 월 모임을 제외하고 40명이 모인 것은 처음이랍니다. 반세기 넘게 못 만났으니 서로 한번 보고 싶어 그랬나 봅니다.
16일은 우리 일고 카페를 위하여 힘써 주신 김영하, 박은표, 김태규, 박건영과 인사동에서 점심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일고 카페의 존속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17일은 김상연의 주선으로 고유문, 노종식, 박학송, 진기섭, 김오곤들과 교대역 근방의 순대공장에서 소주와 박학송이 가져온 고급 와인으로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고유문은 옛 날의 착하디 착한 모습이 그대로 였고 항상 우리를 말로 이끌었던 옛 모습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날의 식사비까지 지불했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종식이는 세월이 비껴간 것 처럼 젊음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종식이를 오랫만에 보았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하니 동창 모임에 참석을 잘 안 했나 봅니다. 박학송이는 그 날 새벽부터 전화하여 18일 미얀마에 출장갔다가 11월에 돌아 오니 18일 아침에 만나 조찬을 꼭 함께 하자는 겁니다. 18일은 10시까지 도봉산에서 빨치산들과 만나기로 했으니 내년에 내가 다시 나올때 만나자고 했더니 17일 그 날 점심에 부랴 부랴 나온 겁니다. 그의 성의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1970년 대 말 전화 교체 사업으로 동료, 부하들과 함께 시카고 근교의 Bell Lab에 연수차 몇 개월 머물 때 만났으니 오래 간만의 재 상봉이었습니다. 연수 후에 우리 나라의 전화 사업에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말을 풍문에 들었습니다. 시카고에 왔을 때 부하들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은 그 때 눈여겨 보았습니다. 박학송은 30일 종로 포럼에서 또 만났습니다. 빨리 귀국하게 되었다 합니다.
18일은 박건영이의 주선으로 빨치산들과 함께 소요산으로 등산하였습니다. 건영에게 미리 약속을 했던 일이었습니다. 오종문, 김완배, 정기남, 전춘옥, 곽창수가 참여하였습니다. 곽창수는 서울 근방 어딘가 등산한다고 광주에서 일부러 올라 온 것입니다. 건강에 자신이 있던 터라 별 스럽게 생각치 않고 따라 간게 나에게는 큰 실수였습니다. 580미터의 가파른 산을 오르느라 숨을 할딱거리고 쉬기를 몇 십번은 했을 겁니다. 종점에 다 왔냐 물어 보면 바로 이것만 넘으면 된다하고…이런 거짓말을 수없이 들으며 올라 갔습니다. 산을 집 안 마당처럼 다닌다는 곽창수가 내 뒤에서, 옆에서 받쳐 주며 격려의 말이 없었다면 등정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내려 올 때는 숨이 가쁜 대신 이제는 다리가 후들 거려 두어번 미끄러지고 행여 무릎 다칠까 봐 별 방정맞은 생각도 했습니다. 하산해서 먹은 맥주와 한우 불고기, 옆 도살장에서 직접 가져 왔다는 한우의 맛은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19일 아침에 일어 나보니 그래도 괜찮은 것같아 90펴센트는 회복하였다고 소문을 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등산 독이 완전히 풀린 것은 일 주일 후였습니다. 하여간 나를 한번 혼내 주겠다는 건영이의 작전은 잘 맞아 떨어진지 몰라도 나 역시 나의 몸을 다시 돌아 보는 기회를, 그리고 건강은 너무 자만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준 것에 대하여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날 밤은 정기정의 주선으로 정기주, 이정기를 만났습니다. 모두가 나라를 염려하고 우려하는 열혈 우국지사였습니다. 자기들의 지나온 삶을 얘기하며 현실을 직시하는데 많은 동감이 갔습니다. 나의 몸이 피곤할 것을 염려하여 용인에서 나 있는 곳까지 찾아 주는 배려도 받았습니다.
매일의 술에다가 힘든 등산까지 하고 거기에다가 잠까지 설치니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20일은 쉬고 21일에는, 미국에서 늦게 도착하는 wife를 마중하러 공항에 나갔더니 그 녀의 첫마디, 서울 물이 좋다나! 얼굴이 좋아 졌다면서…그 동안 얼마나 고생한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22일은 이틀 동안의 예정으로 경주로 향했습니다.
서울에서 신경주역까지 2시간 밖에 안 걸렸습니다. 창밖의 경치는 광주로 가는 것과는 모든 건물이 뗏갈부터 달랐습니다. 아! 이래서 동서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왔구나 속으로 울분하며 서울 출신인 마누라에게 각인 시키며 시간을 보내니 2시간이 금방이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수학여행간 후 처음이었지만 별 감흥은 없었습니다. 죽어라하고 석굴암까지 갔더니 유리로 막아 놓고 옛날에 없던 조그만 집을 그 앞에 지어 놓았는데 그 조그만 틈새로 단 1-2분간 지나간게 끝이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그 좁은 곳에 탁자와 방명록을 놓고 거기에다가 이름을 적고 만원을 시주하면 극락 왕생하게 빌어 준다나? 별 쑥떡같은 소리를 듣는다는 모습으로 그 옆을 지나갔습니다. 거기에 이름을 쓴 사람을 보았으니 그래도 장사는 되는가 봅니다. 또 파킹장 옆에 큰 종 하나 걸어 놓고 한 번 치는데 5000원하면서 돈을 손에 들고 흔들며 호객하는 건장한 사람들을 보았을때 내가 보기에는 절의 하청업자처럼 보였습니다. 옛날 수학여행때 아침 일찍 일어나 석굴암의 해돋이를 본다고 몇 시간씩 걸어 올라갔던 그런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 아니었습니다. 경주에서 또 한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음식 맛이 형편없었습니다.
24일은 무궁화 열차를 타고 수 많은 남해의 마을을 지나 여수에 도착하여 돌산도의 아름다운 팬션에서 묵었습니다. 바다가 바로 앞에 보이는 곳에 젊은 (?) 50대 부부가 예쁘게 꾸며 놓은 곳이었습니다. 오동도도 구경하며 용굴도 올라 가보고, 회도 먹고 갓김치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엑스포는 사람이 드문 드문하고 오 쑈는 문을 달았습니다. 마누라는 옛날 라스베가스에서 봤던 오 쑈로 착각했나 봅니다. 못 본것을 서운해 하여 이 것은 다른 쑈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26일은 강빛 마을 촌장인 고현석의 점심 초대가 있어 여수에서 열차로 곡성역에 도착하니 현석이와 박용택이 나와 있었습니다. 같이 차를 타고 조종훈의 약국에 들렀더니 마누라가 강빛 마을에 사둔 집에 정원수를 심느라 가고 없어 약국을 비울 수없다며 같이 점심 식사 못함을 미안해 하였습니다. 박카스 한병에 무슨 알약 하나를 주어 마시고 나왔습니다. 종훈이는 내가 구례 산동의 보건소에 있을 때 그의 결혼식이 처가집인 순천에서 했는데 김재환과 함께 꼭 둘이서 참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석이, 용택이와 함께 기차 마을도 구경하고 천사 장미원도 구경했습니다. 섬진강변의 매운탕집에 들러 은어 튀김과 섬진강의 특산물인 민물게 매운탕을 먹고 강빛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현석이는 그 사이에도 인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답례하느라 바쁘고…자기 집도 구경시켜주고 강당도 둘러 보고 마누라도 인사시켜 주고 그 사이 걸려 오는 전화받느라 바쁘고…내가 보기에는 늙을 틈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이에 대단한 정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7일에는 동생들이 광주의 예술의 거리를 구경 시켜 준다고 마누라를 데리고 나가고 나는 저녁 7시 조경래와 약속까지는 시간이 남아 점심이나 갈이 할려고 청탑회 사무실에 가니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나중에 한상준하고 통화했더니 오후 3시 반이 되어야 문을 연다 합니다. 혼자서 일고도 가보고 서석 국민학교도 가보고 5학년때까지 살았던 세무서 뒤에 있던 옛날 집을 가보니 식당으로 변해 있었고 김정길이의 집은 광주여고가 들어 서 있었습니다. 7시에 영빈관을 찾아 가니 경래와 윤정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성남이는 그 늦은 시간에도 등산때문에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답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군의학교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정수가 중학교때 전학와서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일, 나와 경래가 군의학교때 항명 사건으로 고생했던 일을 말하다 보니 좋은 음식은 거의 손을 대는 둥 마는 둥했습니다.
28일 아침은 선물사러 다니고 오후 3시에 고속을 타고 올라 왔습니다.
29일에 있는 세 사람과의 약속때문입니다.
조철웅과는 이미 다른 선약이 있어 반포역에서 10시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커피한잔을 놔두고 옛날 이야기 많이 했습니다. 궁동인가 골목길에 있는 정원이 좋은 그의 집을 방문 했던 일, 그가 우리 집에 왔던 일등…그리고 그가 아틀란타 병기집에 왔을 때 나와 통화했던일, 시카고에 들르지 않고 그냥 간다고 한국가는 비행기 떨어져 버리면 좋겠다는 말을 내가 했다고 합니다. 속이 없어도 한참이나 없었나 봅니다. 친구를 꼭 보고 싶어 그런 말을 했다는 나의 뜻을 알아 줘서 다행입니다.
점심은 전춘옥과 부인의 따뜻한 대접을 강남의 아주 좋은 집에서 받았습니다. 지난 번 올때도 대접을 잘 받았는데… 그의 여행기를 적은 “가봐야 아는 인도, 가도 모르는 발칸”이라는 책까지 증정 받고 친필로 쓴 향원 익청이라는 좋은 글귀도 받았습니다.
그의 따뜻한 마음씨를 보여준 글귀였고 나보다는 그에게 오히려 어울리는 글귀 같았습니다. 다음 미국에서 만나기를 기약하고 헤어졌습니다.
저녁에는 임강원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정호와 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정호의 얼굴은 변한 것같지 않은데 키가 많이 커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자리에 잘 못 왔나 싶을 정도로 서먹했으나 얼마 안 있어 마음을 열수 있었습니다. 동창은 반세기의 세월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자리였습니다.
강원이의 Cornell에서 공부했던 이야기며 새로운 학문을 개척했던 어려운 시절, 마침내 자기 분야의 대가가 되었던 일등등.. 그가 기증한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의 끊임없는 도전에 내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30일은 점심 시간에 종로 포럼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더 많은 동창들을 볼 수있다는 마음에 참석하여 극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겨기에다가 생각지 않는 선물도 받았습니다. 범종갑도 보고 백현옥, 조기복도 보았습니다. 옛날 종갑이가 한글 붓글씨를 잘 썼던 일, 방림동의 현옥이 집에 가서 토끼를 봤던 일, 그리고 내가 군의학교 마치고 중위 계급장을 달고 원주에서 유격 훈련을 받을 때 기복이가 우리 중대장이었던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김정길만이 내가 다니던 서석의 우상인줄 알았는데 신동식이 모든 운동의 짱이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들었고 이정구가 서석 6학년 3반이었다는 것도 그 모임에서 알았습니다. 내가 2반인줄 몰랐다고 합니다. 워낙 조그만 해서 5학년 때는 강당을 담당했던 여자 주번이 하급생으로 오인 하여 같은 주번인 나를 쫓아 냈으니 같은 반 아니었으면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양대승이가 같이 밖에 나와 커피한잔을 하며 박원정을 불러 같이 담소하고 다음 약속까지는 시간이 남아 대승이는 나를 하이 마트로 안내하여 전자제품을 구경시켜주고 지하철로 환승역인 사당까지 데려다 주는 친절까지 베풀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는 김석준의 초대로 이충련, 정기주와 다시 만나 저녁과 술을 하고 이차까지 하고 집에 도착하니 1시 반이 넘었습니다. 석준이와는 내가 전주에서 군의관으로 있을때 같이 술 마시고 놀았던 일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번에 귀국해서 많은 동창들을 만나 기쁘다 했더니 정기주 왈, “너 인생 정리할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받았습니다. 아주 의젓한 걸 보니 인생을 잘 살아 왔던 것처럼 보여 기분이 흐뭇했습니다. 그와는 김형주에 관한 이야기도 좀 나누고…충련이가 지하철로 환승역인 사당까지 동행해 주었습니다.
31일은 푹 쉬고 미국 들어 갈 준비해야겠다고 했더니 왠 걸, 나에게는 그런 복도 없었나 봅니다. 예의 김상연이가 며칠을 계속해서 가기전에 꼭 한번 만나자 하고, 하중담도 전화하여 똑 같은 말을 하여 둘을 connection시켜 한꺼번에 같이 만나자 했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하루 전 까지 동창들을 만난 겁니다. 김대성과 함께 4명이서 식사와 막걸리를 조금 했습니다. 상연이의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대한 열변, 김대성이 대사 직을 마친후 동신대에서 7년동안 자기의 경험을 가르쳤던 일도 흐뭇했고, 하중담의 걸쭉한 입담은 나로 하여금 며칠 한국에 더 머물까 하는 호기심을 당기기도 했습니다.
집에 들어와 5시로 알람을 셋 업시켜 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5시도 못돼 웬 전화 벨 소리… 마누라가 받아 나에게 건네 주며 하는 말, 세상에 원! 떠나는 날까지 전화한다고 한 마디 하고…
받고 보니 하중담 왈, 내가 지금도 자고 있을까봐 깨울려고 전화했다나…
마누라가 그 말 듣고 “그 사람 짱이네, 이 다음에 선물하나 사드려야지”
에필로그
많은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어림잡아 거의 100명은 만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일고 한마당과 서울 동창회에 나와 주신 많은 동창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초대해준 여러 동창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지난 세월 동안 잘 살아 준 동창여러분이 그렇게 뿌듯할수 없읍니다.
신광옥이와도 어렸을 적 기억이 나 통화했으나 개인적인 일이 있다 하여 못 만났고 최경주도 미국에 있을 때의 추억이 되 살아나 두번 통화를 했으나 나에게 시간이 없어 연락 못했습니다. 완배를 통하여 어렵사리 연결된 김성수에게도 내가 서울에 다시 올라와 전화해주겠다는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합니다. 또 꼭 보아야 했던 하종대는 자기 시간이 안 난다해서 못 만난 아쉬움은 지금도 있습니다. 김형주는 일부러 연락을 안했습니다. 다음에 더 성숙한 모습으로 만나리라 확신합니다. 김동우는 내가 전주에 내려 갈 틈이 없었고 아마 우리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가 봅니다.
시간이 없어 백방선의 초대를 사양한 것도 미안하나 아마 이 글을 읽으면 나를 이해하여 주리라 믿습니다.
술 많이 마실 기회를 주시고 모처럼 나의 모국어를 활성화 시켜 주신 동창 여러분, Fighting!!!
시카고 특파원 일용이가
첫댓글 오랜만에 바쁜 일정으로 국내 동창 친구들을 거의 다 만났으니 대단한 애주가다 ㅎ ㅎ 시카고 유일용 화이팅 !.
더 늙기전에 만나야지 하는 나의 염원을 이루었으니 대 만족이다. 너희들 빨치산은 내가 아무래도 따라 갈수가 없을 것 같으니 제일 부럽다.
참말로 부지런하시네~
메모를 해두셨나! 기억력 또한 녹슬지 않으신 것 같고!
26일 청산회 등산모임 때 소요산 얘기 하면서 다음날 아침 컨디션은 상황판단 잘못일꺼라고 했는데
방문기에 솔직하게(?) 밝히셨군!
유박사를 통해서 다른 친구들 소식 많이 들었네!
건강하시고 다음에 또 만나세!
미국 친구들 소식은 한국 친구들을 통해서 아는 경우가 있는데 꼭 그 짝이지...소요산의 경험은 나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좋은 경험이 될거야. 카페를 위하여 일하는 너희들 수고에 다시 경배를 하마
일용아, 고국에 왔다가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추억 만들고 가서 좋구나. 가기 전에 한번 더 볼려고 했었는데 자리를 못 만들어서 미안하다. 유박사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내용 중에 이름 중에오자가 두구네 있으니 정정바란다. 정정방법은 글쓰기 옆에 있는 수정을 클릭하고 틀린곳을 수정하면 됩니다. 틀린곳은 권경렬을 공경렬로, 범진갑을 범종갑으로, ㅎㅎㅎ
과연 카페지기감이다. 나의 불찰이다. 네 가르침대로 고쳤다. 그 들에게 미안하게 됐네. 타자 실수로 이해해 주겠지. 한번 더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글을 쓰다가 밖을 보니 마라톤을 하고 있네... 오랫 동안 시카고를 비웠더니 소식이 깜깜이다
청탑회의 2013년 10월의 인물은 누가 뭐래도 "유일룡" 입니다.
이왕이면 2013년의 인물로 해주지...너와 단 둘이 이야기 못 나눈 것이 아쉽다. 다음 만날 날까지 건강에 유념하고...
"시카고 특파원 유박사! 모국방문 일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오늘 아침 '시카고 ㅌㄹ 븐'지의 기사 타이틀.. ㅎㅎ
수고가 많했다. 동창과 만남을 주옥같이 '방문기'에 기록했으니... 특파원의 책무에 충실한 것 갖지않니..
내년엔 만나 봤으면...! ^^*
너의 초대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제 알겠지? 경주에서 바로 대전으로 갈까도 생각했는데 아직도 아버지가 살아 계서 이틀쯤 광주에서 같이 더 자고 싶어 시간을 못 냈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내년에 갈테니 그 때 너와의 만남이 most priority이다 이번에 마누라가 하도 질려서 하는 말이 내년에 갈 때는친구들을 다 만나고 나면 그 뒤에 한국으로 가겠다나..마음이 고와 (팔불출?) 나랑 같이 갈거다.
잘도 기억하고 있었네...ㅎㅎㅎ
자서전 읽는 기분이다야, 좌우간에 무지하게 바쁘게 보냈구나 네 체력이 부럽다 대단하다...ㅎㅎㅎ
27일 서울로 가기 하루전 점심이라도 같이 할려고 청탑회에 갔는데 못 만났다. 3시 넘어서 문을 연 줄 몰랐었지... 네 마누라가 시카고에 하루 머물러 가면 좋겠는데 바로 united airline 애서 아시아나로 갈아 탄다니 못 만나겠구나. 한 번 try 해보라 하렴. 내년에 만나자. 마누라하고 통화했다니 다행이고..
일용아 오전에 네 email 주소로 몇자 보냈는데 아직 안본 모양이구나
내 부탁이 가능한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 연락 바란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너의 백양사 사진을 하나씩 download해서 파일로 보냈다가 다시 이메일로 네 처남댁에게 보냈으니 분명히 받았을 거다. 밭았으면 나에게 이메일로 답장해라 했다. 내 생각에는 네 처남의 콤퓨터 자판에 한글이 첨가 안된 것같다. 한국 가게에 가서 사야 할건데...혹 그사람이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으면 영어와 한글로 번갈아 가며 쓸 수있을 건데 네 처남이 나이가 먹어 잘 알런지 모르겠다. 나는 아이 폰을 갖고 있어 잘 아는데 ...지금 네 처남댁의 이메일을 기다리고 있으니 좀 기다려 보자.
사진 받았다 하더라.
일용아 매우 고맙다.
방금 미국으로 Email을 보냈다. 고맙다.